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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정체성과 해방: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의 차이점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1. 28.

‘일부 정체성 정치는 포스트모던적인 산만함이 있고, 계급 환원주의는 퇴행적인 막다른 골목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방 정치’라고 닐 포크너Neil Faulkner와 로완 포춘Rowan Fortune 이 설명한다. 닐 포크너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민중사, 그리고 <조여오는 파시즘: 그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싸울 것인가>의 저자이며 활동가이다. 현재 영국에서 ‘반자본주의 저항’Anti*Capitalist Resistance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좌파 재결집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의 책이 <좌파 세계사>로 번역돼 있다. 로완 포춘은 사회주의자이고 유토피아 문학과 상상력에 대해 글을 썼다. <추락하는 체제: 혁명을 위한 활동가 가이드>의 공저자이다.(번역: 두견)

출처:https://anticapitalistresistance.org/identity-and-liberation-a-critical-marxist-difference

포스트모더니즘과 좌파

정의하는 방법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은 공허한 잡동사니 통 속으로 사라지거나 이와 관련된 아이디어, 철학자, 예술 스타일 및 경향을 포괄하지 못할 수 있다. 아이디어 자체는 불안정하고 종종 특별히 유용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적절한 형태로 취하더라도 정체성 정치, 퀴어 이론, 상호교차성, 특권 이론과 관련된 개념들은 그 자체로 매우 이질적이다. 이것은 <추락하는 체제>(2021)에서 느슨하게 정의한 방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어떤 지배적인 '거대 담론'도 세계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기본 아이디어에 중점을 둔 관련된 이론들의 집합 혼성어)은 자기 평가, 자기 주장 및 자기 권한 부여를 위한 수단으로 '담론'과 '정체성'의 곱셈 증식을 장려했다.”(닐 포크너, 필 허스PHIL HEARSE, 사이먼 한나SIMON HANNAH, 로완 포춘, 니나 포춘NINA FORTUNE)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뒤틀린 반동적 핵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집단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공통의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과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통합을 촉진하는 대신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찬양한다. 당신과 나는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지만, 억압과 착취에 맞서는 단결된 역사적 투쟁의 가능성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부자들이 계속 통치한다.”(닐 포크너, 필 허스, 사이먼 한나, 로완 포춘, 니나 포춘)

정체성 정치는 좌파에 널리 퍼져 있지만 종종 마르크스주의와 상반되는 정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차이, 억압, 권력에 대한 이론으로 대체하면서 혁명적 행위자의 관점을 결여하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통찰력이 아무리 급진적이라도 역사적 주체의 개념에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통합하지 않고서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문제는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 프로젝트에서 매우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을 중심축으로 하는 점에서 독특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는가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의 실용주의, 페미니즘적 입장 이론, 현상학과 공통점이 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와 일부 포스트모던 경향의 뿌리에도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세계에서 벗어나서 배우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형성함으로써 배우게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알고, 이 과정이 우리도 변화시킨다. 정체성 이론의 예를 들면, ‘입장standpoint 이론은 지식 형성에서 권력, 사회적 지위 및 투쟁의 역할에서 시작한다. , 이러한 요인 외에는 세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지식은 역사화된다. 인식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특정한 상황은 세계가 인식되는 방식을 형성한다.

입장 이론가들이 여성이 '강한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여성(및 기타 억압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특정 투쟁들을 통해 인식적 이점을 얻고 지배적 관념 안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완전하고 다양한 지식을 부여받는지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피억압자의 이러한 위치는 린다 구룽Linda Gurung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녀의 입장 이론 요약에서 '이중 시각'을 가진 '내부-외부자'로 묘사했다. 즉 여성은 지배적 이데올로기 속에 앉아 있지만 외부자로서 투쟁의 과정을 통해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그로부터 배제된 이들의 가려진 시선을 인지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투쟁에서 노동자의 역할에 대해 비슷한 것을 주장한다.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주체성을 표출하는 노동자의 혁명적 관점은 자본가의 관점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경제적 지배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계급적 차별에서 해방된 보편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정체성 정치의 이해

물신화는 뭔가 추상적인 것을 실제로 오인할 때 발생한다. 은유나 다른 인간의 창조물을 자연의 고정된 사실로 취급하는 소외의 한 형태이다.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통속적인 입장 이론은 투쟁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여성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설명할 수 없는 특성 덕분에 여성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인식적 이점에 대한 물신화된 관념을 만들 것이다.

정체성 정치가 주류 부르주아 기관들에 의해 전유되고 제도화되고 상품화될 때 이것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명백한 사례는 사이먼 한나의 <왜 반자본주의 저항이 필요한가>(2021)에서 제공된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을 때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리먼시스터즈'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환상이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시스템으로 끌어들이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고 퍼트리는 환상이 많이 있다.”(사이먼 한나)

, 기득권층의 일부는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뒤엎을 수 없다고 믿는 겉치레적 성평등 정책tokenism, 유행어 및 선택적 통합의 정치에 의존한다. 그러한 정치는 자본에 필요한 사회적 재생산과 생산이 방해받지 않고 계속될 수 있는 권리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애혐오증, 장애인차별주의 등이 현재 일부 자본의 대표자들로부터도 공식적인 반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정치적 전진을 구성한다. 그러나 모든 개량주의적 전진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포용에 대한 엄격한 제한과 탈급진화 과정이 포함된다.

자본주의 내에서 일부 여성, BAME(흑인, 아시아 및 소수민족), 퀴어, 장애인 등이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따라서 억압과 착취 그 자체에 반대하는 연합된 대중 투쟁과 동일하지는 않다. 더욱이, 항상 일부는 제외된다. 아무리 환영할만해도 그 전진은 고르지가 않다.

예를 들어, 일부 동성애자들은 한때 이성애자들만 독점하던 결혼에서 환영할만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가 이성애 규범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국가가 승인하는 제도의 이점에서 배제된 채로 남아 있다.

요컨대 그러한 한계를 수용하는 정체성 정치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한 형태가 된다. 아사드 하이더Asad Haider<오인된 정체성: 트럼프 시대의 인종과 계급>(2018)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있는 그대로 사회 구조에의 포함을 요구한다는 것은 구조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상실을 의미한다… 혁명적 정치 실천의 이론화로서 초기적 형태라기보다는 당대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로서 정체성 정치는 개인주의적 방식이다. 그것은 개인의 인정 요구를 바탕으로 그 개인의 정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정체성을 당연하게 여기고 모든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삭제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집단적 자기 조직화의 가능성을 약화시킨다. 정체성의 틀은 정치를 집단의 구성원이 벌이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집단적 투쟁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정체성과 개인으로서 인정을 얻는 것으로 축소한다. 결과적으로 정체성 정치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비판하기 시작한 바로 그 규범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아사드 하이더)

최근 사회 재생산 이론에 관한 에세이 모음집에서 데이비드 맥낼리Dave McNally는 철학적 용어로 저속한 정체성 정치의 허약함을 드러냈다. 그의 핵심은 부르주아 정치의 모든 형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변증법적 개념보다는 기계적 개념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 그것은 각각의 사회적 현상이 다른 모든 사회적 현상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고, 모든 것이 운동과 과정 속에 있고, 끝없이 적절한 상태가 되는 통합된 전체로서 사회적 현실을 보지 않고 분리되고 본질적으로 정적인 범주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총체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차이를 통해 구체성('명확성')을 얻는다. 동시에 이 서로 다른 부분들 각각은 그 안에 전체를 담고 있다. 살아있는 전체 밖에서는 생명의 요소로서 그들의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바로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많은 결정들의 집중, 따라서 다양성의 통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이다.'
총체성 또는 보편성은 헤겔과 마르크스에게 사물의 구체적인 다양성과 다중성으로부터의 추상이 아니다. 반대로 총체성은 실생활 과정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통해 그리고 이를 통해 구성된다. 이것이 형식논리학의 추상적 보편성과 변증법적 사유를 활성화시키는 '전체적인 구체적 총체성'을 구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총체성의 변증법적 개념은 기존의 '특정한 복합체(즉, 부분적 총체성)가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는 역동적인 전체적 복합체에서 서로 연결되면서 이러한 다방면의 매개들을 통해' (억제하지 않고) 통합하는 총체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데이비드 맥낼리)

이것은 예외적으로 밀도가 높은 구절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것이기 때문에 인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관련성있는 지점은 간단하다. 모든 억압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억압이 내재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 전체의 복합적 맥락에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억압의 경험에 기반을 둔 모든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 경험은 사회적 질서 전체의 일반적 성격을 참조해야만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조야한 계급 이론

레닌은 '똑똑한 관념론은 멍청한 유물론보다도 더 똑똑한 유물론에 가깝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는 행위주체를 강조하는 똑똑한 정체성 이론이 계급을 물신화하는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고 쓸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그리고 더 넓은 좌파적 흐름)에는 계급에 수사학적 무게를 부여하면서도 그 행위성과 주체성(말하자면 그 관점)을 모호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그러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언어를 간직하지만 그의 혁명적 급진성은 간직하지 않는다.

종종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정통했던 여성들인 최초의 입장 이론가들 중 많은 이들이 그들의 살아있는 경험을 포괄하지 못한 환원적 마르크스주의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억압을 착취에 비해 무시하거나 또는 종속시키며, 두 과정을 단절된 것으로 취급한다. 사회적 소외자의 정치와 계급의 정치 사이의 치명적 분열은 역사적 오류와 패배의 유산이다.

그것은 억압받는 이들이 종종 착취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종종 억압당하고, 억압이 다른 사회 계층에서 발생하더라도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무시한다. 계급 정치는 항상 이러한 투쟁과 긴장에 시달렸다. '순수한' 계급 정치는 없다.

브렉시트의 반동적 민족주의를 수용한 렉시트 좌파(Lexit Left: 유럽연합을 지지할 수 없다면서 브렉시트를 지지한 초좌파들)가 어떻게든 영국 노동계급(흔히 노동자의 작은 일부를 희화화)을 국가 보호무역주의의 순수 경제 프로그램으로 통합시킬 때 이러한 유형의 환원적 정치가 전면에 드러난다.

계급은 부끄럽게도 민족주의, 인종주의, 현상 유지에 뿌리를 둔 고정된 정체성으로 축소된다. 그러한 타협적 정치로 인해, 혁명적 야망은 원자화된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편견에 호소하는 (그리고 심지어 보수당 정치인처럼 예상하고 조장하는) 것을 찬성하며 빠르게 사라진다. 좌파가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계급투쟁으로부터의 방향 전환이라고 무시할 때, 나아가 억압 자체를 노동자들을 계급으로 통합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로 취급할 때, 그것들은 원인에 대한 혼란스러운 증상이다.

물신화의 병증 아래서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사상,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서 나오는 사상에 대한 투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그 투쟁 대신 자본주의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지배 방식을 온전하게 남겨두는 쪽을 선택한다. 우리는 이제 (부르주아-자유주의) 정체성/교차성 정치와 천박한 사회주의(계급환원주의) 정치를 (혁명적 사회주의) 해방 정치와 대조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해방 정치

억압받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 인종주의적 프로파일링 및 유색인종에 대한 경찰의 괴롭힘, 장애인에 대한 배제 및 소외 등 억압을 경험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집단의 구성원들도 자신의 억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장 이론과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이해할 수 있게 하듯이, 여성은 단순히 남성이 본성적으로 성차별적이고 약탈적이기 때문에 억압이 발생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유색인종은 인종차별이 단순히 대중적 편견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등등. 억압의 경험에 대한 어떤 것도 자동적으로 그 근본 원인을 이해하도록 이끌 이유는 없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좌파의 많은 사람들은 억압의 문제에 대해 엉망으로 혼란스러우며 경험과 이해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하는데 실패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외양''본질'을 구분한다. 그는 돈, 상품, 계약, 부채 등 사물의 '물신화'가 그 밑에 깔려 있는 (착취와 억압의) 사회적 관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사회 전체가 부분적, 파편적, 피상적, 왜곡된 방식으로 경험되고 이해되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위 의식'이 발생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는 주로 착취 경험과 관련하여 이것을 논의하지만 모든 사회적 경험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이 논의에서 세 가지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첫째, 조야한 정체성 정치는 억압을 전체로서 자본주의 사회 관계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변증법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오해하고, 따라서 체제에 대한 단결된 집단적 투쟁에서 체제 내의 경쟁적 개인주의로 정치적 활동을 빗나가게 한다.

둘째, 계급 환원주의 정치도 비슷하다. 그것은 억압 자체를 진지한 의미가 없는 분산 요소(본질이 없는 외관)로 취급한다. 이것이 적나라하게 행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계급적 단결에 대한 사회주의적 호소의 수사적 힘을 사용하여 노동계급의 다양한 성격을 교묘하게 지워버린다.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의 한 형태로서 그 '보편성'은 인간의 삶을 그것의 다양성 속에서 해방시키려는 세계의 대체물로서 기존의 억압적인 인간 삶의 이상을 떠받친다.

셋째, 이 두 정치의 초점이 협소하기에 체제 전체에 대한 집단적 이해에서 불가피하게 멀어지면서 억압과 착취의 진정한 뿌리에 대한 이해가 차단된다. 즉 조야한 정체성 정치와 계급환원주의 정치는 모두 사회적 관계의 총체적 이해('본질')에 기반한 참된 의식보다는 직접적 경험에 기반한 허위의식('외관')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정치를 혁명적/해방적 정치와 분리시키는 넓은 격차를 주장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후자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적 아나키스트 전통으로 대표된다.(이론은 실천으로 검증되며 혁명 투쟁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나란히 투쟁한 역사적 사례는 많다. 예컨대 아나키즘의 혁명적 심장을 인식하지 않고는 누구도 스페인 혁명의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해방 정치는 두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급진적 변화를 위한 투쟁에서 피억압자들의 자기 조직화와 자기 동원이다. 여성, 유색인종, 퀴어, 장애인 등의 운동은 체제에 반대하는 어느 떠오르는 대중투쟁에도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자기 주도성의 개념은 장애 운동의 슬로건인 '그 무엇에도 우리를 빼놓지 마라'에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자기 조직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해방 정치의 두 번째 필수요소는 전체로서 피억압자와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연대와 단결이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자기 조직화를 통해 달성된 자신감과 역량강화는 단결되고 대중적이며 투쟁적인 노동계급 운동의 구성블록을 만들어낸다. 어떤 억압받는 집단도 [독자적으로는] 스스로를 완전히 해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억압은 전체로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b) 어떤 피억압 집단도 홀로 자본과 국가의 권력을 물리치고 체제를 전복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 자기 조직화는 계급투쟁을 위한 구성블록을 만든다. 그러나 자기해방은 노동계급 전체의 승리를 통해서만 달성되는 정점이다.

(기사 등록 202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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