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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동물원에서의 죽음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6. 3.

최태규

 

 

[민음사에서 연간 3회 발간하는 인문잡지 <한편> 4호 ‘동물’책에 한 꼭지로 실린 글을 옮겨 싣는다.(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0585647) 동물의 삶과 죽음, 동물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책임 문제를 사려깊고 먹먹하게 살펴보는 이 글을 옮겨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민음사와 필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2018년 초가을 ‘동물원’이라는 낱말을 언론에 오르내리게 한 퓨마가 있었다. 대전오월드에서 탈출했다가 사살당한 뽀롱이였다. 뽀롱이는 열려 있는 문으로 걸어 나왔다. 아메리카대륙에 조상을 둔 퓨마 뽀롱이는 사육사가 깜빡 잠그지 않은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가 총을 맞고 죽었다.

 

현생 인류가 동물과 맺은 관계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먹고 먹히는 생태계 안에서 대등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만 년 전, 농경사회의 시작으로 인간-동물관계는 일방적 종속의 관계로 바뀌었다. 세계 2차대전 후에는 모든 산업이 전문화, 집단화되면서 산업화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 대다수는 동물을 착취는 하되, 착취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대다수 인류는 동물을 다루고 죽이고 음식으로 먹기 위해 피를 보며 사체를 장만하는 일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산다. 살아 있는 동물만 귀여운 이미지로 ‘존재해도 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동물은 죽는다. 동물원에서 수명을 다하지 못한 동물들은 탈출해서 언론에 나는 죽음보다 철창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 일이 훨씬 많다. 동물이 조용하게 죽을 때 동물원은 편안하다. 동물원뿐 아니라 농장이든 실험 동물실이든 살아 있는 동물을 모아 기르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동물이 죽어 나간다. 죽어야 밖으로 나간다.

 

동물의 고통을 고려하는 동물복지학

 

낯설게 찾아오는 동물의 죽음 하나하나는 현대인들에게 견디기 힘든 사건으로 다가온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은 물론이고 차에 치어 죽는 길고양이나 상관없이 살던 소, 돼지, 닭, 심지어 야생동물까지 관심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죽지 않는 동물은 없지만 죽음은 불편하다.

 

인간이 동물을 해하거나 죽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동물 권리론을 톰 리건이 정리해서 책으로 낸 것이 불과 1983년이고, 한국 사회에서 ‘동물권’이라는 말이 회자된 것은 2016년을 기점으로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 관계의 수만 년 역사에 비춰보면 동물의 죽음에 대한 현대인의 거리두기는 낯선 사건이다. 죽음의 불가피성, 비가역성, 비기능성, 인과성이 주는 두려움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다만 죽어도 되는 사람이 존재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동물에 대해서도 감정적인 거부감이 들기 시작하는 것 같다.

 

모두가 합의한 동물복지의 정의는 아직 없다. 동물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나 동물이 사회적으로 갖는 맥락에 따라, 혹은 사회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물을 왜 도덕적 주체로 보아야 하는지를 두고 18세기 제러미 벤담과 같은 철학자부터 설명하려고 애썼다면, 현대적 의미의 동물복지는 동물의 통증과 고통, 의식과 인지를 밝혀내면서 비로소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동물복지학자 도널드 브룸이 ‘동물복지는 특정 시간 동안 잠재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동물의 삶의 질을 설명하는 용어”라고 설명했듯, 많은 부분이 과학적 증거에 기반을 두고 동물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증명하는 데에 집중한다. 신체적 지표 뿐 아니라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는 동물의 감정까지 지표화하고, 동물에 대한 처우의 기준을 사회 규범으로 만드는 것까지가 동물복지학의 역할이고 목표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동물의 ‘고통’을 주요하게 고려하는 주류 동물복지학에서는, 동물이 살아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고통 없이 재워 주는 것이 인도적이라고 판단한다. 동물복지는 살아 있는 동안 동물이 겪는 좋은 경험과 좋지 않은 경험의 축적이고, 동물의 삶이 고통으로만 가득 찰 때 살 만한 삶, 존엄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판단할 책임이 있다는 관점이다.

 

최선은 동물원에서 ‘잉여동물’(너무 많이 번식하거나 전시용으로는 더 이상 가치가 없어 매각 대상이 된 동물)이 생기지 않도록 번식 제한을 하는 것이고, 차선은 할 수 없이 태어난 동물들을 안락사하는 것이다. 유럽동물원수족관협회(이하 EAZA)와 미국동물원수족관협회(이하 AZA)는 적절한 기관에서 동물을 보호할 수 없을 때 안락사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동물원 중 이러한 책임감으로 안락사 규정을 갖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동물원뿐 아니라 동물복지를 고려한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한국 사회에서 척박하고 편협하다. 한 동물보호단체에서 안락사를 하지 않는다고 홍보하다가 안락사를 한 사실이 들통난 적이 있다. 안락사를 하지 않는다고 홍보해야 하는 상황과 안락사를 숨겨야 하는 상황 모두 우리 사회가 동물복지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말해 준다.

 

고통 받는 동물이 많으면 안락사는 그만큼 필요하다. 감당할 수 없는 동물은 고통을 끝내 주고 다시 그런 동물이 생기지 않게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동물이 불쌍해서 쌓아 두는 것은 호딩(hoarding)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동물학대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살 만한 삶으로 볼 것인지, 얼마나 나빠야 죽이는 것이 나은 삶인지 판단하기란 매번 어렵다.

 

서울대공원은 2019년 에버랜드와 경쟁적으로 AZA의 인증을 받으려고 애썼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공원은 알락꼬리여우원숭이 사육공간과 사양 관리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곧 개선했음을 보고하고 인증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대공원의 알락꼬리여우원숭이는 전부 동물 거래상에게 넘겨져 전국의 실내 체험 동물원으로 팔려 갔다.

 

AZA의 규정에 따르면 협회 회원사는 동물을 관리하기 위한 적정한 전문성과 시설이 부족한 개인 혹은 기관으로 동물이 양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경우 안락사하거나 재도입(재방사)하도록 되어있다. 결과적으로 서울대공원은 보고용으로만 사육 환경을 잠시 개선하고 그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 동물을 사지로 내몬 것이다.

 

동물보호단체가 이의를 제기하고 AZA에도 이 사실을 알렸으나 1년이 지나도록 서울대공원과 AZA, 어느 쪽에서도 어떤 조치도 없었다. 결국 그중 한 마리가 열악한 시설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나뭇잎을 먹고 사는 동물에게 바나나만 먹이고, 일광욕이 중요한 동물을 지하에서 일 년 내내 햇볕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 했다면, 차라리 안락사를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다는 AZA의 기준은 안락사를 낯설어하는 한국의 지형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동물복지학에 따르면 고통이 지속될 것을 알면서 계속 나쁜 상황에 밀어 넣는 것이 비윤리적이다. 동물을 동물원에 가두지 않는 것이 원론적인 동물권리의 입장이라면, 이미 동물원에 들어와 있는 동물은 야생으로 돌려보낼 수 없기에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다. 동물원의 동물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동물복지 관점에서의 차선이다. 경제적으로 상황을 개선할 여지가 없다면, 동물을 죽이는 것은 동물의 복지를 위한 차차선이다. 그리고 그 ‘죽임’이 부담스러워 다른 곳으로 동물을 떠넘기거나 방치하는 것은 어떤 동물윤리로 보든 ‘최악’이다.

 

안락사 싫어하는 사회, 죽음 앞에서 눈 가리는 사람들

 

한국의 동물원은 법만 어기지 않으면 되는 체계 안에서 법이 없을 때 약자들이 어떻게 대우받는지 잘 보여 준다. 동물원에 관한 법률은 한국에 동물원이 생긴지 100년 이상 지나 2016년에 제정되었다. 제정 전까지 동물원이 준용할 법이란 공원 시설을 관리하는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과 ‘자연공원법’이었다. 동물에 관한 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물원 동물들은 그저 공원이나 박물관의 시설 일부로 다뤄졌다.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동물원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도 동물원 업계의 반발로 동물복지에 관한 내용은 모두 삭제되어 사실상 기능을 할 수 없는 법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지금 동물원들은 전시하고 있는 동물을 다룰 때 윤리를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동물보호단체나 언론에 낯 뜨거운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정도면 다행이다.

 

이러니 동물의 입장에서 고민한 결과로 안락사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의 동물원 사람들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안락사라는 단어가 사회 전반에 부정적으로 인식되면서 동물원 수의사를 비롯한 직원들도 안락사는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동물을 직접 안락사 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큰 정신적 고통이 뒤따른다. 결국 직접 편안한 죽음을 선물할 자신이 없어서 동물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적어도 동물이 살아 있는 내내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동물원에는 동물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전문가가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야 하는데, 동물원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동물원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이 아직 더 많다.

 

야생의 동물에게는 언제나 잡아먹히거나 사고를 당한 위험이 있고 나이를 먹어 쇠약해지면 경쟁에서 밀려나 죽게 된다. 그에 비해 동물원 동물은 가늘고 길게 산다. 예컨대 야생 수달의 수명은 4년 정도인데 사육 상태에서는 대개 10년 이상을 산다. 그래서 종종 자연스럽게 죽을 때를 놓치고 너무 늙어 버리곤 한다.

 

케이티 버틀러는 『죽음을 원할 자유』에서 심박조율기가 어떻게 가족의 삶을 망가뜨렸는지 폭로한다. 현대 의학이 만들어 낸 심박조율기가 심장을 계속 뛰게 만드는 동안 아버지의 다른 부분과 그의 가족을 상처 입혔던 것처럼, 보드라운 먹이를 넣어주고 아플 때마다 치료해 살려 두면서, 동물원의 야생동물은 존엄하게 죽을 시기를 놓친다.

 

동물의 죽음을 수의학의 패배로 보는 경향도 수명을 지나치게 연장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이는 수의학이 인의학을 조급하게 따라가는 탓이기도 하다. 수의사들은 나이든 동물도 치료 받다 수술대 위에서 죽어야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동물 환자는 말할 수 없는 환자다. 환자가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은 환자를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그래서 EAZA의 안락사 기준에는 자연 수명을 넘긴 동물도 대상으로 규정되어 있다. 삶의 질이 떨어질 정도로 나이든 동물을 억지로 살려 두는 것이 비인도적일 수 있다는 합의다.

 

삶을 경시하는 체제를 거부하며 동물의 이름을 부르기

 

글 앞에서 든 퓨마 뽀롱이의 사례처럼, 2013년 사육사를 물어 숨지게 한 호랑이도 열려 있는 문으로 걸어 나왔다. 사육사가 문 잠그는 일을 깜빡하는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다. 그래서 동물원에서는 2인1조 근무제가 기본이다. 사람에게 위험하지 않은 동물이라도 동물이 우리 밖으로 나왔을 때 동물이 위험해질 수 있어서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이 계속 죽는 사건이 벌어져도 2인1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물원을 관리하는 사업주가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함이고 지자체의 태만과 인력을 쥐어짜야 직성이 풀리는 신자유주의 습성 때문이다.

 

여유 있게 안전을 점검하고 위험한 일을 할 때 주변을 살펴줄 사람을 ‘없어도 되는 사람’으로 여긴다. 문제는 현장의 일부 사육사들조차 혼자 일하는 것이 편해서 2인1조 근무제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동물을 관리하는 일은 종일 동물과 붙어서 동물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파악하는 성질이어야 하는데, 많은 동물원에서는 사육사가 동물관리 업무를 빨리 끝내고 쉬거나 동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들을 하곤 한다.

 

길에 자갈을 깔고 배수로를 파고 나무를 옮겨 심는 일을 모두 사육사가 하고 있다. 동물을 기르는 직업을 전통적으로 천대했듯이 사육사라는 직업 또한 적당히 동물을 죽지 않게 길러내고 동물원 안에서 필요한 육체노동 전반을 아무거나 시켜도 되는 직업으로, 적어도 한국 동물원 업계 관리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2010년 이후 동물과 함께 지내고 싶어 사육사가 된 사람들의 이전 세대, 즉 특별히 동물에 대해 배운 것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사육사 자리가 나서 사육사가 된 사람들은 본인의 직업을 부끄러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짐승 똥을 치우고 밥을 주며 동물에 대해서 깊이 알려고 한 적도 없고 그래야 한다는 요구도 멀게 느끼곤 한다. 육체 노동자에 대한 천대를 달게 받는다.

 

안전을 위한 2인1조도, 동물을 세심하게 기르기 위한 2인1조도 그들에게는 외부로부터의 번거로운 변화일 뿐이다. ‘외부’에서 이따금 쏟아 붓는 변화의 필요성은 중앙정부가 나설 정도로 강하게 요청되지 않으면 ‘내부’에서는 ‘잘 모르고 하는 소리’ 정도로 흘려 듣는다. 가진 것도 없는데 생기는 조직보위논리다. 동물에게는 더 비극으로 결말이 날 동료 의식이다. 돌보는 동물에 대한 자연과학 정보도 구전과 경험에 의존하는 마당에 직업 윤리는 한참 멀다.

 

동물원 동물들에게도 이름이 있다. 종 이름 말고 부르는 이름 말이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동물을 종으로 대하지 않고 개체로 대한다는 뜻이다. 동물을 개체로 대하면 개체별 특성을 바탕으로 사적인 인간-동물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모든 동물에게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일하는 동물원에는 이름이 없는 동물이 훨씬 많다. 불러 주지 않아서 이름이 없다. 매일 만나는 사육사와도 사적인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동물원에 취직 후 동물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려 애를 썼다.

 

사육사가 동물원 동물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지 않으면 동물에게 주어지는 복지에도 뚜렷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시절에 동물을 배운 사람들은 동물에게 이름 붙이기를 결국 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 마리 밖에 없는 얼룩말 ‘하니’를 하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얼룩말이라고 지칭한다. 수많은 개에게 이름이 부여된 현대 사회에서 이름이 없는 개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들여다보면, 이름이 없는 동물원 동물의 삶도 보인다.

 

이름의 문제는 죽은 뒤에도 남는다. 청주동물원에서는 최근 새롭게 추모관을 시도하고 있다. 외국의 동물원에서는 공동묘지와 같은 형태로 죽은 동물을 추모하는 공간을 꽤 찾아볼 수 있다. 마침 원내에 잘 쓰지 않는 남는 공간이 있어 위패를 거는 식으로 도입하고자 했다. 죽은 동물의 종,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위패를 만드는 데 대해, 동물원 안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름이 없는 동물은 어떻게 할 것이냐, 동물이 죽을 때마다 위패를 하나씩 붙이면 수가 너무 많고 동물원이 마치 동물을 죽이는 곳처럼 느껴진다, 지금 죽고 있는 동물들을 다 알지도 못하는데 죽은 줄도 모르는 동물을 어떻게 확인할 것이냐 등의 반발이었다.

 

실제로 개체수가 많은 작은 새들은 동물원에서 몇 마리를 보유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각자 하나씩의 삶을 살고 있는 동물들이지만 개체를 구분해서 대우하기에 품도 많이 들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동물원 직원의 다수를 차지한다. 호랑이나 곰이 죽으면 대단한 사건이지만 작은 앵무새 한 마리가 죽는 것은 기록도 남지 않는 것이다.

 

동물원에서는 보통 동물이 죽으면 부검을 하고, 사체는 의료폐기물로 처리되거나 렌더링(사체를 열처리 후 잔존물을 갈아서 퇴비나 사료의 원료로 사용하는 기술) 업체로 보낸다. 기준은 크기다. 사막여우처럼 작은 동물은 의료폐기물용 용기에 넣어 처리하고, 낙타처럼 덩치가 크면 용기에 넣을 수 없으니 렌더링을 한다.

 

동물원 동물이 죽었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래서 동물원끼리 이따금 서로 어떻게 처리하는지 물어보며 불안감을 던다. 가축 사체의 처리방안을 규정해 놓은 가축전염병예방법에 어긋나지만 않는 수준이다. 세계 곳곳에서 온 동물원 동물의 사체 처리 방법은 방역 차원에서 가축과 달라야 하고, 사람들에게 ‘친구’로 여겨졌던 측면에서도 달라야 한다.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커다란 동물이 평생 갇혀 사는 것을 가엾게 여기는 사람보다 총을 맞고 죽은 것을 더 큰 비극으로 여기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나는 동물이 죽었을 때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이제야 끝이 보이지 않던 고통이 끝났구나 하는 한숨이다. 동물원에서 동물의 삶이 그렇게 지옥 같으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다.

 

동물복지 관점에서 본다면 아주 나쁘지 않은 동물원 혹은 동물사도 있다. 야생에서 대단히 다채로운 경험을 요구하지 않거나 인간의 관리에 익숙해지기 쉬운 동물은 동물원에 갇혀서도 그럭저럭 살아간다. 동물원에서 태어나 평생을 좁은 철창에서 지낸 동물은 야생에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나 희망 따위를 하지 않는다. 그저 수십만 수백만 년 환경에 맞춰 진화했더니 그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삶은 때로 영문 모를 고통으로 점철된다.

 

어느 정도의 삶의 질이 주어져야 갇혀 있어도 살만한 삶일까? 굶어 죽지 않으면 늘 배고픈 상태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얼어 죽지 않으면 고향의 야생에서 겪을 일이 없어 당황스러운 추위에는 떨어도 되는 걸까? 새끼를 낳으면 훌륭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다 아니기 때문에 나는 동물의 죽음에 안도한다. 약물로, 수술로 낫게 하려 애쓰다가도 죽어 버리고 난 사체 앞에서면 이제 됐다는 마음이 든다. 죽음의 의미는 두려움에 떨고 좁은 철창 안에서 도망쳐야 하는 매일이 끝났다는 뜻이다.

 

코로나 시대는 인수공통감염병이 야생동물로부터 올 수 있고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주지시켰다. 동물의 존엄성이 무너지면 사람의 생존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교훈을 큰 비용을 치르며 배우는 중이다. 그 여파로 동물의 삶이나 죽음에 쓸모가 없었던 동물원법도 곧 개정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동물원 산업이 동물을 수입하고 번식시키며 발생했던 부수적 피해, 즉 숱한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은 조금 덜해질 것 같다. 그래도 동물원에서는 동물들이 계속 죽어 나갈 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 동물들만 해도 다 죽으려면 장사를 수만 번 치러야 한다.

 

철학자 클로에 타일러는 『동물의 죽음에 대한 존중((Animal Death)』에서 “우리가 죽은 동물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살아 있는 것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비인간동물의 죽음에 애도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에서 비인간동물의 삶은 삶으로서 가치가 없다.”라고 말한다. 사람의 사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물의 죽음이 사람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면 살아 있을 때에 온전한 복지가 주어질 가능성은 낮다. 그래서 죽은 동물에게도 존엄성을 부여하는 일은 살아 있는 동물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준다. 그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따라 살아있는 것들의 삶의 질은 바뀔 것이다. 

 

(기사 등록 20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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