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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논쟁

‘우리’를 위해서는 ‘우리’를 의심해야 한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8. 21.

- 강호석 기자의 <아프간, 미군과 탈레반에 대한 착시현상>에 대한 반론

윤미래

 

 

8월 19일자 <아프간, 미군과 탈레반에 대한 착시현상>이라는 기사가 기자 칼럼에 올라왔을 때(http://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55) 나를 모종의 탈레반 동조자로 취급하는 사람들과의 지난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장장 3일째 하고 있었다. 내가 했던 주장은 미군과 탈레반 정도의 힘의 격차를 민심의 소극적인 지지라도 받지 않고서 메울 수는 없다는 것, 전쟁이 독재보다 더 나쁜 상태라는 것,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이 미국과 함께 아프간에 저지른 짓이 바로 20년 동안이나 그 ‘더 나쁜 상태’를 유지하고 강제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탈레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미국과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이며, 나나 다른 반전주의자 동지들의 글에서 전자를 읽어내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선이 아니면 악, 내 편이 아니면 적의 편’이라는 이분법에 빠져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모든 말들이 무색하게도 진짜로 탈레반을 모종의 민족해방 세력으로 묘사하는 글이 <민플러스> 정도 되는 언론의 정식 기사로 버젓이 올라와 버리니 허탈하고 당혹스럽기 이를데없다.

 

“탈레반을 쿠데타 세력으로 묘사하는 것과, 마치 미국이 국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철군한 것처럼 보도하는 대목”에 대한 비판은 동의할 수 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여성과 소수자들을 비롯해 민중들이 겪게 될 고통과 수난을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도 탈레반이 본래 집권세력이었다는 사실이나, 미국이 아프간에서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기사가 여기서 더 나아가 탈레반의 종교 근본주의나 성차별마저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사람은 누구일까?” 기사는 묻는다. 그리고 어떠한 증거도 뒷받침하지 않은 채 추측만으로 “그들은 지난 20년 동안 친미 괴뢰정권에 기생해 권력을 유지하던 자들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패망한 일본 군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이 땅에 남은 친일파들이 쥐구멍을 찾아 도망가거나 신분을 세탁하던 광복 당시와 흡사하다”라고 단정하기까지 한다. 이는 어떤 구체적 사실로도 뒷받침되지 않는 추측성 발언으로, 그 추측은 이미 수백 년간을 유지해온 민족 공동체로부터 전면적 증오를 받았던 일제 강점과 여러 부족과 지역으로 찢어져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에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의 이름을 걸고 해방군이라고 자처하며 들어왔던 미제 강점을 무리하게 유비하고 있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딱히 민족을 배반하고 착취하려는 의도가 없는, 오히려 이상과 선의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과도 정부의 사업에 참여하고 협력했다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선택을 진영논리적으로 단죄하기 때문이다. 이미 완성되고 상당 부분 결집되어 있는, 민족이라고까지 부르지 않더라도 전민족 정도로는 무리없이 부를 수 있는 정치 공동체가 존재했으며 그 총의가 식민 지배를 철저하고 전투적으로 거부하였던 한국의 식민지 경험은 이 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특수하다.

 

그 특수한 경험을 미루어 아무 곳에나 대입하고서 사태를 이해했다고 믿는 것은 ‘현장 언론’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무성의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사실 유럽과 미국이 세계 나머지 지역에 저질러온 인식론적 폭력을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기도 하다. 세계의 이웃들과 대등하게 마주보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의 경험을 섣불리 보편적인 것으로 확정해선 안 된다는 것이 기초 중의 기초다.

 

더구나 이런 유비는 탈레반 역시 파키스탄의 후원을 받는 세력으로,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입장에서는 또다른 점령군으로서의 성격 또한 가진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파키스탄과 분쟁 중인 인도가 북부 동맹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면서 사태는 이제 북부동맹과 탈레반을 경유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리전 양상으로 기울고 있다. 민중의 일부는 양쪽 중 어느 하나의 편을 들 것이고, 많은 수는 그 사이에서 동요할 것이고, 더 많은 수는 그저 싸움이 그치고 일상을 되찾기만을 바랄 것이다. 동일한 상황이라고 유비할 수는 없어도, 해방 정국과 625를 기억함으로써 상상의 단초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국면에서 탈레반 쪽을 민족해방세력으로 쉽게 판단내려 버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반으로 쪼개는 대리 전쟁의 역동에 보탬이 될 뿐,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자신의 심정과는 괴리되기 쉽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다른 나라의 상황에 대한 어떤 판단도 비판도 삼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 다음에 이어지는 “탈레반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이슬람 전통의상인 ‘부르카’를 입게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행이다.”처럼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인가? 이런 논리대로라면 나치즘도 인종우월주의 이념이니 원래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유럽중심주의도 유럽 문명 중심의 관점이므로 다른 문화를 차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상대주의 관점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면 ‘근본주의’를 가치중립적이고 존중받을 만한 대상처럼 쓸 수 있는지 당혹을 금할 수 없을 따름이다.

 

“더구나 미국의 20년 침략 기간, 수도 카불은 저급한 양키 문화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전통문화를 다시 살려내는 것은 시급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라는 배외주의적인 발언은 자세히 논평하고 싶지조차 않다. 문화가 국경을 넘어 흘러다니고 섞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오염’으로 인식하고 무비판적으로 전통을 추종하는 것을 응당 해야 할 과제처럼 제시하는 이 보수적인 것을 넘어 반동적인 인식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이다.

 

물론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와 생활 양식이 인류 전체의 ‘표준’이자 ‘정상’처럼 제시되고 그와 다른 나머지는 모두 특이하고 이상한 것처럼 인식되는 지금의 유럽중심주의는 극복해야 할 선입견이고 편향이다. 많은 사람들이 탈레반을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이념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 무슨 악마나 괴물처럼 느끼는 기저에 이슬람 혐오가 깔려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그것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이슬람을 위해 행해지는 모든 실천에 존중하고 동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독교에 존중을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퀴어 퍼레이드에서 난동을 부리는 혐오 세력을 비판할 수 없는 것이 아니잖은가.

 

사실 이슬람은, 다른 어느 종교나 그렇듯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를 가지는 단일한 교리로 이루어진 체계가 아니다. 많은 무슬림 페미니스트들은 이슬람 교리를 보다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에게 힘을 싣는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그 해석을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탈레반을 지지한다는 것은 사실 탈레반이 하고 있는 이슬람 교리의 특정한 해석의 편을 들어주고, 무슬림 여성들의 해석을 기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는 다를지언정 더 많은 이들의 평등과 존엄, 공존을 추구하는 사람들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선택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누려야 할 존중과 권리를 위해 용기 있게 일어서는 여성들을 “친미 정권에 기생하는 자들”이라고 분별 없이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광복 후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 기모노 대신 한복을 입으라 강제한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인권을 탄압한다고 누군가 떠들어 댄다면 우리 눈에 그들이 어떻게 보였겠나”라는 기사의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여성과 남성, 한국인과 아프가니스탄인 모두는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을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어떤 식으로든 폭력으로 침해하는 것은 인권 탄압이 맞다. 만약 광복 후에 한국 여성들이 기모노 대신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결정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무기와 법제도로 여성들에게 강요했다면, 그 누군가는 필경 여성들을 멸시하고 억압하려는 누군가일 것이다.

 

나는 인간이 민족, 성별, 계급, 장애 여부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거나 억압받지 않기를 바라므로, 만약에 거기에서 ‘우리 민족’을 말한다면 그런 누군가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자유를 요구하는 여성들을 ‘우리’라고 묶어 생각하고 동일시할 것이며, 그 ‘우리’가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킬 주체라고 믿을 것이다. 민플러스 기자들과 편집자분들과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일 수 있기를 바란다.

 

(기사 등록 202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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