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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대통령은 마술사도 절대 군주도 아니지 않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7. 27.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한국인의 "정치열"은 아마도 세계 최고에 가까울 것입니다. 예컨대 노르웨이에서는 지하철, 길거리, 버스, 직장의 휴게실에서 정치를 논하는 광경은 극히 드뭅니다. 한국에서는 정치 이야기는 도처에서 단골메뉴고,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스트레스 풀이를 위한 민간요법 정도입니다. 신경 진정제의 대체물 같은 것이죠. 이웃 나라, 예컨대 일본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현상이죠.

 

그 만큼 한국에서 민주주의 쟁취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또 그 만큼은 사회적 갈등 등 "정치"를 필요로 하는 부분들이 많고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고도의 정치 관심은 사실 사회적으로 건전하고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정치 담론"의 중심이 무엇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물론 총선 후보나 검찰 개혁 등 정치 의제도 이 담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진짜 중심은 딱 하나입니다. 결국 "대선에서 누가 이걸 것이냐", 즉 다음 대통령이 누구냐와, "대통령이 잘 하느냐", 즉 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 같은 거죠.

 

물론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선은 당연히 정치의 중심적 부분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죠. 그리고 실제로 다음 대통령이 "누구일 것이냐"에 큰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의 일군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로 그 대통령에 의해 "발탁"될 수도 - 그러나 어쩌면 발탁이 안 될 수도 - 있는 직업군들입니다.

 

예컨대 대사직 등이 걸려 있는 외교관을 비롯한 직업 공무원, 아니면 장차관 내지 각종 수석, 청와대 직속 위원회 위원장 내지 위원 등으로 늘 발탁되는 교수 등은, "직업적으로" 다음 대통령이 누구일 것인가에 대해 합리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합니다.

 

예컨대 "윤 대통령"이나 "홍 대통령", "최 대통령" 밑에서는 뉴라이트가 국편 위원장이 될 위험성이 있는가 하면, "이 대통령"이라면 아마도 과거에 민중사 내지 내발론의 발전에 기여하신 분이 그 직에 오를 것입니다. 아무래도 사학계에선 절로 관심이 갈 만도 합니다.

 

또한, 물론, "누구 밑에서 누가 어느 직을 해먹게 될 것이냐"는 문제 이외에도 대통령이 누구인가에 따라 국정 운영에 있어서는 바뀌는 부분들은 적지 않습니다. 현재 GDP대비 복지 지출 비율인 12% (서구 복지 국가들의 약 3분의 1)는 예컨대 "세금이 필요 없다"는 "윤 대통령" 밑에서는 그 자리에 동결될 가능성이 큰 반면, 기본소득논자인 "이 대통령" 밑에서는 잘 되면 2-3%나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현재에는 국민건강보혐 보장률은 64%밖에 안되는데, "윤 대통령" 밑에서는 그대로일 것이고, "이 대통령"이라면 어쩌면 70%나 될까 말까 할 겁니다. 이게 다 "숫자 놀이"로 보이지만, 사실 그 숫자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 행복이 있는 거고, 그 만큼은 아주 중요한 숫자들이죠.

 

"윤 대통령"이 정원 미달에 존폐의 위기에 선 지방 대학들을 "그냥 망하게 방기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면 "이 대통령"은 국토 균형 발전의 차원에서라도 통폐합 등 각종의 구제책을 강구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 역시 그 학교 식구들의 경제적 생존의 문제, 그 학교 주변 상인들의 경제적 생사 문제이니 결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그 만큼은 대선에 쏠리는 관심은 합리적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아무리 "괜찮은" 주류 후보가 대통령직에 올라도 과연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들은 치유될 수 있을까요? 현직 대통령이 노동 변호사 출신의 자유주의자임에도, 예컨대는 2020년 산재 사망자 숫자는 882명, 전년 대비 27명이나 늘어난 것입니다. 한편 사고사뿐만 아니라 직장과 관련된 질병으로 죽은 노동자까지 감안하면 1년에 여전히 2000명 이상 이렇게 비명에 가는 것이고, 자유주의자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크게 좋아지는 일도 없는 겁니다.

 

대통령은 마술사도 절대 군주도 아니지 않습니까? 중대재해처벌법을 누더기로 만든 의회, 살인 기업 지배인들을 솜방망이 "처벌"하는 사법부, 근로 감독, 안전 감독을 제대로 안하는 고용노동부,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사회적 타살하게 하는 이 지배 구조를, 소년공 출신이라 해도 대통령은 과연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 것인가요?

 

아니면 고된 노동과 감독의 "영어 시험" 갑질을 당했다가 이 세상을 등지게 된 서울대 청소 노동자의 최근의 비보를 생각해보시죠. 노동자들을 "개, 돼지"로 생각하는 관리자들의 사회적 의식, 갑질을 저질러도 책임을 쉽게 회피할 수 있는 "느슨한" 법망, 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인신매매하는 인력 업체들... 아무리 "괜찮은" 대통령이 돼도 이 살인적인 구조를 도대체 어디까지 뜯어고칠 수 있을 것인가요?

 

대선에서 자유주의자가 이기는 것은 극우가 이기는 것보다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돼도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내부 식민지로 만들어 그 착취로 이윤을 뽑아 내는 이 기형적인 신자유주의적 구조를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대선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지만, 보다 나은 미래로 가는 길은 주류 후보 중의 한 명을 "응원"하는 것보다는 노동자 정치, 약자 정치, 소외당한 사람들의 직접적인 정치 진출을 꾀하는 것이 아닐까요?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들을 위한 "당사자"들의 직접적 정치,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정치 세력화, 노동자 정당들의 힘 키우기 이외에는, 이 나라를 사람이 살 만한 것으로, 노동하기 좋은 곳으로 만들 길은 궁극적으로 없을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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