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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한국에서 좌파에게 미래가 있을까?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8. 7.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며칠 후에 서울을 떠날 것입니다. 아직 펜데믹 시절인지라 언제 돌아올 수 있을는지도 현재로서 기약이 없습니다. 거의 5개월동안 서울에서 살아온 셈입니다. 이제 이 5개월 동안의 소감들을 하나로 조합해보려고 하는데, 대단히 아쉽게도 제가 요즘의 대한민국을 보고 느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비관적입니다.

 

인권 감수성의 제고 등 여러 측면에서 개선들이 많지만, 지금대로 가면 아마도 이 땅에서는 (저를 포함한) '계급 좌파'는 거의 발을 붙이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단순히 극우 정권이 가할지도 모를 탄압, 극우 언론들의 악선전, 그런 문제만은 전혀 아닙니다. 23년간의 신자유주의 체험은, 이미 한국인을, 한국 사회를 못 알아볼 정도로 바꾸어 놓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좌파의 대중 심성적 기반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연대력, 또 하나는 (사회나 그 사회의 상당부분이 공인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한 '불편함' 같은 것입니다. 연대력이란, '나'에게 당장 도움되지 않을 일이라 해도 '타자'/'모두'/'미래'/'이상' 등을 위해서 '나'의 자원 (시간, 돈, 상징 자원 등)을 쓴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 해도 의무감으로 시위에 같이 나가고, 삶살이가 어려워도 당비, 조합비를 내고, 바빠 죽을 지경인데도 당이나 조합 모임에 참석하고...이런 건 전통적인 좌파적 '연대력'의 '표본'입니다.

 

그리고 보통 '좌파 지식인'이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어릴 때부터 '평등'이나 '인간 존엄' 같은 게 '인류 공동의 이상'이라고 배운, 감수성이 강한 사람이 노동자가 '공돌이' 취급 받고 임금 체불 당하고 다치고 죽어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을 보고 심한 괴리감을 느껴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고 느끼는 게 대개 '좌파 지식인'의 인생 여정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좌파의 심성적 기둥', 즉 연대력과 '인류 보편'의 이상에 대한 인식을, 23년간의 신자유주의적 실험이 대단히 약화시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존 본능'에의 호소를 통해서 연대력을 죽여 나갔습니다. "친구를 사귈 시간에 차라리 공부하라"는 식의 교실 현수막들은, 한국형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본 정신'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이 '기본 정신' 차원에서는 '친구' 따위 필요 없죠. 서로의 이용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끼리 나중에 '네트워킹'하면 되고, 거기에 앞서서 '시험'이라는 기득권 사회의 여과 장치를, '나'라는 원자화된 개체부터 '통과'해야 합니다.

 

개체의 모든 에너지는, 수평적인 '관계 맺기' 아닌 수직적인 신분 이동에 집중됩니다. 그 이동에 필요할 수 있는 인간관계'만'을 살려두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 '삭제'입니다. '나만이 어떻게든 기어오르면 된다'는 사고의 시각에서는, 신분 이동에 약간이라도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그냥 '무시'나 모욕의 대상입니다. 그러니 예컨대 연대 신촌 캠퍼스, 고대 안암 캠퍼스의 학생들이 각각 원주, 세종 캠퍼스 학생들을 심하게 차별하고 모욕하는 게 작금 대한민국의 현실이죠.

 

어떤 사회적 '개혁' 차원에서 약자들의 신분이 혹시라도 개선되면 맨 먼저 반대할 사람들은 바로 그 약자들 약간 위에 서 있는 '작은 기득권자'들입니다. 인천공항 등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실살 경쟁적 계열사 채용)가 이루어졌을 때에 같은 공기업 정규직들의 반응을 한 번 보시죠. 이 정도로 연대력이 죽어버린 사회에서는 '좌파 운동'으 그렇다 치고 극단적 극우화를 방지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좌파의 의식세계를 묵시적으로 뒷받침해온 이상은 보편적인 평등, 인류의 공동의 행복 같은 겁니다. 신자유주의는 반대로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적극적으로 긍정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이상'의 차원에서는 돼지우리 같은 '주거'에서 살고 월 120만원을 받고 한달 한-두번만 쉬고 하루 11시간 일하는 캄보디아 여성의 노동으로 인해서 한국 소비자들이 싼 깻잎을 먹을 수 있게 되고 한국의 부가 축적되면 이런 초과 착취는 그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효율적인 활용'일 뿐입니다.

 

무한한 개인 이기주의는 동시에 무한한 국가 단위 이기주의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세대의 다수에게는 동남아에서 한국 자본의 현지 노동자 착취 같은 것은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배 선진국들이 하던 대로 할 뿐이고, 그게 우리에게 도움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식이죠.

 

먼 캄보디아나 방글라데시에서의 착취 행각은 뿐만 아니고 가까운 북한에서 다시 기아 사태가 일어나도 신자유주의에 중독된 상당수 한국인들에게는 그게 "상관 없는 일"로 비추어질 수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한국에서 자라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북한 동포'는 그저 '거지떼'입니다. 물론 '독재'로서는 그런 게 아니죠. 부유한 독재 국가 (싱가포르 등)라면 얼마든지 '선망'의 대상에 오를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지난 5개월 동안 본 것은, 최근의 가파른 세계적 '위치 상승'만큼이나 특히 젊은 세대들의 정체성의 중간축이 꽤나 빠르게 우측으로 이동하는 사회입니다. 동시에 원자화가 심한 만큼, 연대력이 약화되고 가족이 해체되는 만큼 개개인이 대단히 외롭고 불행한 사회이기도 하죠. 사실 이런 사회일 수록 좌파가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사회에서는 좌파의 대중화, 착근이란 전혀 쉽지 않을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공산당처럼 장기적으로 게토화될 확률도 높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이상의 우경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좌파적 사상과 활동은 한국에서 매우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런 활동이 있어야 이 사회의 다양한 약자 계층들, 마이너리티 계층들이 그래도 고립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죠.

 

(기사 등록 202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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