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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고시 권력, 그대로 좋은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7. 11.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국내에서 인식되는지 모르지만, 한국의 행정 국가는 많은 나라에서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이번 K방역에서 보여진 것처럼 촘촘하고 철저한 부분도 있지만, 이와 함께 그 선발의 방식은 여러 나라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죠. 예컨대 구소련의 후계 국가들을 보면, 가장 '맛이 있는' 자리들을 대체로 최고 권력자들의 친인척과 그 가신, 그 가방모찌들이 나누어 먹는 것은 보통입니다.

 

"최고 존엄"의 절친이 장관이 되고, 그 아들이 국영 기업 지배인으로 가고, 그들과 친한 사람은 검찰청의 실세로 통하고... 이걸 가리켜 '족벌 지배', 학술 용어로서는 '신가산국가' (neo-patrimonialism)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지만, '신가산국가'가 아님은 확실합니다.

 

유신 시대와 같은, 전체주의를 치닫고 있었던 시절에도 박정희는 그 자녀나 그 가신의 친인척들을 직권으로 고시 합격시킬 수 없었던 겁니다. 무자비한 독재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그 유형은 '신가산국가'와 달랐습니다. 관료주의적 권위주의 (bureaucratic authoritarianism)이었죠.

 

권위주의는 대체로 갔지만, 관료주의는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재벌은 no. 1 권력집단이라면 no.2는 검찰청, no. 3는 기재부일 것입니다. 사실 한국의 실질적인 권력 사다리에서는 다들 그렇게까지 그 선발에 신경 쓰는 5년짜리 대통령은 no.5-6밖에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대통령 선발, 즉 대선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이유도 분명 있습니다. no. 1,2,3 등의 선발은, 우리, 즉 일반 시민들과 아무런 관계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no.1인 삼성 회장은 세습직이고, 검찰총장이나 기재부 장관을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1-2년짜리 장관은 그 부서 관료들의 집단 권력을 절대 제압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괜찮은" 장관이 와도, 결국 고시 출신 관료들이 장관을 순치시키는 경우들이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들의 권력의 출처는 바로 고시, 외국에서 이렇게도 많이들 부러워하는 '합리적인 선발 방식'입니다.

 

그런데 고시 출신들이 일단 '행정/사법/외무 관료로서 필요한 학식을 구비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성'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합리성'의 계급적 함의부터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한국 고시의 '원조'는 일제 시대의 고등문관시험입니다. 그 시험에도 100여명의 조선인들이 합격하여 '제국의 관료'가 된 적은 있었죠. 예컨대 홍석현의 아버지이며 이재용의 외할아버지인 홍진기 (일제 시절의 판사, 이승만 시절의 내무부 장관)라든가 백병원 설립자의 동생인 백붕제 (총독부 공출 책임자 중의 한 사람, 백낙청 교수는 그 조카입니다) 등등입니다.

 

그 명단을 보면 그들의 자손들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오늘날 한국 지배층의 '코어'를 이루는 격이죠. 그런데 그들 중에는 '서민' 출신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대한제국 관료나 대지주 내지 부유한 상인 출신들이었죠. 그러니까 이미 그 당시 식민지 사회 '코어'를 이루는 사람들에게는 자녀들의 고등시험 합격은 그 위치를 공고화하여 격상시키는 방편이었습니다. 많이 배운 엘리트 출신들이 시험을 잘 쳐서 관료가 되는 것은 관료 조직의 '효율성' 차원에서 잇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는 세습화된 불평등을 더 공고화시키는 쪽으로 작동되기도 했죠.

 

지금은 어떤가요? 물론 일제 시절보다 사회 전체가 부유해지고, 그 만큼은 특권층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 종종 필사적이고 절망적인 - 고시 공부의 기회는 훨씬 더 많이 부여됩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한 번 2005-9년 사법 고시 합격자들의 출신 고교를 분석한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합격자가 1429명이 났는데, 그 중에서는 1286명은 강남에 있는 학교들의 출신이었습니다.

 

아참, 서울대 출신은 38.1%이었던 반면, 예컨대 같은 국공립 대학인 경북대 출신들은 2,4%이었습니다.... 물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예외는' 늘 있습니다. 파다 보면 가난한 지방 출신이 죽어라 공부해서 지균 등으로 서울대 가고, 나아가서 또 죽어라 공부해서 사시에 붙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 '예외'입니다.

 

'전형'은 SKY교수나 강남 거주의 건물주, 아니면 사법 관료의 자녀가 SKY에 가고, 고시에 붙고, 그 다음 판검사가 돼 재벌 등과 사돈을 맺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이너 셔클'이 형성됩니다. 크게 봐서 이 '이너 셔클'은 돈 (재벌) 권력과 고시 권력의 '연합'이죠. 물론 '고시'보다 '돈'은 우위에 있지만요.

 

고시 권력의 민주화는...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 초기 소련의 경험을 살린다면 예를 들어서 그런 방법은 있죠. 국가가 '사회 격차 극복을 위한 특별 공립 고시 학원'을 세워 그 학원에 저소득층,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녀, 다문화 가정의 자녀 등을 입학시켜 무료로, 고품질의 '고시 과외'를 시켜 그들에게 보다 높은 합격의 '기회'를 부여해주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할 경우에는 고시 출신의 관료 중에서 빈민층 출신들이 빈민충의 전국적 비율 (16.7%), 비정규직 노동자 출신들이 전체 피고용 근로 인구 중에서의 비정규직 비율 (36%)만큼 되는 게 '정책 실행의 목표'가 돼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고시 출신 중에서는 '비특권층파'라도 어느 정도 형성될 수 있겠지만... 그런 정책을 취하면 아마도 조중동은 이구동성으로 "공산주의!"라고 외칠 것이고 군부 쪽에서 군사 쿠데타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고시'는 그 정도로 한국 지배층으로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메커니즘이죠.

 

(기사 등록 202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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