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윤석열 - 기득권 우파와 특권카르텔의 위험한 지도자
윤석열 출마 기자회견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기득권 우파와 특권카르텔, 그들의 지지자들의 세계관과 지향점이 얼마나 퇴행적이면서도 한심한 것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함께 지지하고 밀어주고 있는 지도자가 공개 무대에서 드러낸 엉성한 논리와 천박한 인식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초라했다.
본격 등판을 앞두고 윤석열 캠프에 조선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법조팀장. 중앙일보 정치부기자 등이 집중투입된 결과물이었기에, 이것은 단지 개인이 아니라 한 세력의 정치적 수준을 대표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정치검사와 족벌언론 기자와 부패한 기업인들이 룸살롱에서 같이 폭탄주를 먹으며 ‘시국을 걱정’하는 대화의 수준 같아 보였다.
윤석열의 방향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과 질서’라는 한국사회 전통적 지배자들의 3대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반세기 넘게 이 나라 지배자들의 뇌리 속에 각인된 일종의 코드명이다. 누군가 이 3대 기조를 선창하면, 너도 나도 따라 외치며 서로 같은 편임을 확인하고, 그 깃발 뒤로 줄을 서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식이다.
물론 윤석열과 이준석 등은 외연 확장과 권력 탈환을 위해서 3대 기조에 덧붙여 ‘공정’이라는 새로운 구호를 그 깃발에 새겨넣었다. ‘공정’은 누구도 그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고, 무엇도 구체적인지 않으면서, 언제 어디든 자기들 편의대로 그럴듯하게 적용 가능하기에 우파의 효과적 무기가 됐다. 예컨대 국힘당은 최근 ‘나는 국대다’에서 65세 이상 지하철 무임승차가 과연 ‘공정’한 것인지 ‘토론배틀’을 벌였다.
윤석열이 기득권 우파와 특권카르텔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과정은 여러모로 극적이었다. 사실 10년 전만해도 윤석열은 검찰 특수통의 리더였을 뿐이다. <뉴스타파>가 추적해 온 윤우진 게이트를 보면 윤석열은 그저그런 부패한 정치검사였다.
이명박 때는 특수통이 잘 나갔지만, 박근혜 때는 김기춘 주도 아래 공안통이 다시 부활했고, 특수통은 밀려났다. 마초적 조폭보스 스타일의 윤석열은 이 과정에서 특수통 패거리의 불만을 대변하며 박근혜와 맞섰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6년 촛불항쟁 속에서 기득권 우파와 특권 카르텔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박근혜와 ‘손절’했다. 보수언론과 검찰과 사법부 모두가 이 과정에 함께했지만, 친이명박 계열의 우파와 윤석열 패거리가 특히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화려하게 부활해 승승장구하던 윤석열이 중앙지검장일 때 조선, 중앙 사주들을 몰래 따로 만나면서도 확고한 결심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조국 장관과 그 가족을 향해 칼질을 시작할 때도 그랬을 것이다. ‘사모펀드’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채, 검찰개혁을 늦추고 자신의 이미지와 몸값을 띄울 기회 정도로 봤을 것이다.
그러나 사모펀드에서 나오는 게 없자, 또 버릇대로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 피를 튀기며 표적의 오장육부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그것이 낳은 정치적 후폭풍과 반작용 속에서 문제는 단지 검찰개혁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기득권 우파와 특권 카르텔이 총결집해 촛불이 낳은 변화에 대대적 반격을 시작하는 분기점이 돼 버렸다.
그래서 윤석열은 주도권 상실에 맞서는 특수통의 리더에서, 검찰개혁에 맞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모든 검사들의 리더로, 이제 촛불이 낳은 변화를 뒤집으려는 모든 주류 세력과 지배자들의 리더로 변신과 성장을 거듭하게 됐다.
족벌언론-정치우파-재벌-정치검사로 이어지는 특권 카르텔 모두가 이 과정에서 힘을 모아서 그를 지도자로 옹립했다. 그래서 그는 엊그제 ‘소득주도성장, 반시장적 주택정책, 탈핵정책에 맞서며 이념편향에 맞서서 국가정체성을 지키려는 지도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만약 윤석열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우파가 다시 권력을 탈환한다면 한국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격과 공포통치로의 경향은 매우 강화될 것이다. 왜냐면 정치검사 집단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쌍칼을 이용해 특권카르텔의 사냥개 구실을 하던 것을 넘어서, 직접 특권카르텔의 지휘부를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과 사찰, 마녀사냥과 낙인찍기, 표적수사와 기소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서고 확대될 것이다.
윤석열이 대선 도전을 선언한 바로 그날, 매우 상징적인 세 가지 소식이 동시에 전해졌다. 하나는 윤석열 대변인에서 갑자기 물러난 조선일보 논설의원과 종편 앵커, 부장검사, 부패 기업인들이 줄줄이 엮인 뇌물 비리사건이 터져나온 것이다. 이것은 특권 카르텔의 연결고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유지되고 있는지 보여 줬다.
둘째는, 이준석이 용산참사의 학살 주범인 경찰청장 출신 김석기를 국힘당의 사무부총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보름 전에 이준석이,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던 군장성 출신 한기호를 사무총장에 임명한 것에 이어진 인선이다.
셋째는, 2014년 검언 카르텔의 표적, 조작수사의 피해자였고 그 후 억울함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김재윤 전 의원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당시 고인을 수사했던 게 윤석열 사단의 임관혁이었고, 유죄 판결을 내린 게 얼마전 사퇴한 최재형이다. 윤석열이나 최재형이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르는 현실은 고인에게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검찰대란 과정에서 나타난 윤석열 사단의 ‘표범이 먹이를 낚아채듯’이 하는 수법은 섬뜩한 것이었다. 개인의 컴퓨터와 자녀의 일기장이 압수됐고, 부부의 카톡 대화가 언론에 공개됐고, 가족의 사적 대화 녹음이 법정에서 틀어졌다.
티모시 스나이더는 <폭정>에서 정치적 반동으로 향하는 특징 중 하나가 사생활의 침해라고 지적한다. “개인적인 통신 내용을 탈취하고, 공론화하고, 공표하는 것은... 인권의 기본적인 토대를 파괴한다... 누구든 우리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는 마음대로 우리를 욕보이고 우리의 인간관계를 망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양극화와 위기, 펜데믹과 다가오는 기후위기 속에 권위주의적 우파가 성장하거나, 권력을 잡은 우파가 국가기구를 이용해 반동을 추진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따라서 윤석열의 등장과 우파의 권력 탈환 가능성에 많은 사람들이 반감과 우려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윤석열 X파일과 ‘검증’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로는 권력 탈환이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지기 전까지 주류사회와 족벌언론들은 지금까지처럼 윤석열 포장과 쉴드에 바쁠 것이다. ‘공인에 대한 철저한 검증’은 언제나 그렇듯이 특권 카르텔에게 밉보인 정치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준석의 부모찬스와 각종 비리 의혹들이 하나도 이슈가 안 되는 현실을 보자. 오물범벅의 이명박도, 박근혜의 어색한 토론 실력도 그들의 청와대 접수에 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한편, 이런 기막힌 부조리에 대한 울분 때문에 윤석열과 그 가족들의 비리에 대한 폭로와 검증, 공적인 책임 묻기를 넘어서 외모나 개인적 습관, 사적인 과거에 대한 소수자 차별적 편견에 의존한 조롱과 인신공격, 가십성 소문 등에 의존하는 잘못된 반응도 보인다.
그것은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효과도 없을 것이고, 윤석열 사단과 기득권 우파가 반격할 수 있는 빌미만 제공할 것이다. 국가기관과 대형언론이 주도한 인신공격, 낙인찍기, 괴롭힘과 조롱, 사생활 캐기에 분노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작은 규모로 따라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누구에 대한 차별, 혐오, 낙인, 편견도 반대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2016촛불이 5년 만에 다다른 한계 속에서, 반동으로 후퇴하는 게 아니라 급진적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인데, 민주당뿐 아니라 진보좌파 쪽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갑갑한 일이다. 분열, 불신, 갈등을 넘어서서 새로운 바람과 흐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과 가능성이 왜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세력들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가.
● 이번에는 반드시 이석기 의원을 석방 사면하라
장모가 국민에게 10원 한장은커녕 무려 22억의 손실을 입힌 것이 드러난 윤석열은 출마선언에서 문재인 정부가 “이념편향적”이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내려”하면서 “독재와 전제를” 추구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식의 논리는 지난 5년 동안 조중동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인데, 특히 윤석열과 ‘조국몰이’ 지지자들에게서 많이 나왔다. 예컨대 최성해는 “우파좌파를 떠나서 중국을 더 생각하고 북한 국민을 더 생각하는 대통령이 어디있냐”고 했다.
진중권, 김경율, 서민, 권경애 등은 문정부가 386운동권들의 주도 아래 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나 ‘인민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심지어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경향까지 보인다고 비난해 왔다. 이들은 민주주의는 곧 서방 선진국에서 시작된 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또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보는 것 같은데, 이처럼 큰 착각도 없다.
원래 자본주의/부르주아/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큰 상관이 없었다. 신흥자본가들은 봉건귀족에 맞서서 자유를 말할 때만 민주주의를 이용했다. 이들의 ‘자유와 민주’에는 노동자, 농민, 여성, 식민지 민중이 빠져 있었다. 원래 교육받은 엘리트와 자산가에게만 주어져 있던 투표권과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는 데는 지난한 오랜 아래로부터 투쟁이 필요했다.
특히 서방 ‘자유진영’이 원주민과 식민지 민중에게 저지른 짓은 끔찍한 것이었다. 캐나다에서 과거 ‘백인 동화 교육’이 진행된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최근 수백구의 어린이 시신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 일면을 보여 준다. 앞으로도 수천구가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자본주의/부르주아/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시 분명해졌다. 신자유주의의 출발점은 칠레 피노체트의 피의 쿠데타였고, 레이건과 대처 시대에 본격화됐는데 이들 모두는 민주주의적 기본권을 축소하려 했다.
최근 이재명, 김원웅 등이 ‘해방 이후 미점령군이 친일 세력과 식민지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고, 맥아더는 한국인을 개무시했다’고 한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미국/자본가/자유주의자들이 선물한 것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오로지 4.19, 광주항쟁, 6월항쟁, 촛불항쟁 등 아래로부터 민중 스스로의 투쟁으로 확대돼 온 것이다.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를 떠드는 조중동, 국힘당, 윤석열같은 세력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은 이들이 바로 국가보안법,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등을 가장 적극 지지해 온 세력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지금 이재명에 대한 색깔론 공격에 나서고 있고, 그동안 이석기 의원 사면과 석방에도 앞장서 반대해 왔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도 이 문제에서는 별 관심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언론, 표현, 집회, 결사, 사상, 양심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이 걸린 문제인데 말이다. 진중권 등은 오히려 종북몰이 마녀사냥에 동참해 왔다.(그것이 조국몰이 동참과 그 과정에서 사생활과 인권의 전면적 침해에 대한 침묵으로도 이어졌다.)
따라서 이번에 8.15를 앞두고 각계각층에서 총 1700여 명의 인사들이 이석기 의원 석방 탄원에 동참했다는 것은 정말 반갑다. 나도 여기에 이름을 올려서 작게나마 힘을 보탰다. 특히 여기에 이름을 올린 민주당 의원들과 정의당과 진보정당의 정치인들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재근, 전재수, 민형배, 조오섭, 최종윤, 신정훈, 김승남, 송재호, 이성만, 안호영(이상 민주당 국회의원), 여영국(정의당 대표), 배진교(정의당 원내대표), 강민진(청년정의당 대표), 강은미(정의당 국회의원), 신지혜(기본소득당 상임대표), 용혜인(기본소득당 원내대표), 윤미향(무소속 국회의원), 김예원/이재혁(녹색당 공동대표), 현린(노동당 대표), 이종회(사회변혁노동자당 대표), 신지예(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 김재연(진보당 상임대표)
청와대는 다가오는 8.15 때 이재용을 사면 가석방하라는 황당한 요구에 흔들리지 말고 반드시 이석기 의원 석방과 사면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역사적 평가와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 <죽은 백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와 <17일>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문예출판사'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책 2권을 선물 받았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뒤로 미루고 띄엄띄엄 보다가 최근에야 다 보게됐다.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간단한 소감과 소개를 적어보고자 한다.
먼저 도나 저커버그가 쓴 <죽은 백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 소셜미디어 시대의 고전과 여성혐오>는 한국사회의 ‘일베’나 각종 남초 사이트들, ‘신남성연대’ 등의 행태와 연결해서 보면 여러모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 여성혐오적인 청년남성들의 온라인 ‘레드필 커뮤니티’에서 고전과 역사를 차용해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궤변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의 주장 등을 근거로 자신들의 삐뚤어진 편견들을 정당화하는 것은 보면,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와 여성혐오적 편견은 그 역사와 뿌리가 아주 길고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이미 기원전에 ‘여자들은 상처받고 빼앗기고 정복당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글을 써놓았고, 또 그리스 히폴리투스와 페드라의 신화에 이미 ‘가짜 미투로 억울한 남성을 무고하는 악녀’에 대한 시나리오가 제시돼 있었다. 이런 논리는 그 후 천년 동안 반복돼 왔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레드필의 주요 논객이자 ‘픽업 아티스트’(여성을 유혹해 섹스하는 것을 노리고 직업삼는 남성)인 발리자데는 ‘여성의 노는 예스다. 여성에게 사회적 신뢰를 줘선 안 된다. 모든 강간 고발은 거짓이고, 특히 미디어를 통한 공개 고발은 가짜다...’ 따위의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다.
이처럼 고전과 역사까지 차용해 교양있고 박식한 척하면서 황당한 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비대한 자의식과 자아도취적 태도에 놀라게 된다. 물론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와 좌파적 논리까지 동원해 여성의 성폭력 피해호소를 불신하고 거짓으로 몰고, 불순한 의도를 상상하고, 심지어 소송까지 제기한 사람들도 있으니 크게 놀랄 일은 아닐지 모른다.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와 여성혐오적 편견에 찌든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뒤틀린 피해의식과 엄청나게 과장된 위기의식이다. 이 책에 소개된 레드필 커뮤니티에서 나타나는 그런 내용도 한국의 반페미니즘적 청년남성들의 논리와 매우 유사하다.
‘남성은 교도소 재소자의 90%이고, 자살율도 여성보다 3배나 높고, 살해당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남성의 비율이 더 높고, 학교 수업과 시험 성적에서도 여성에게 밀리고 있고, 성폭력 무고를 당하는 일도 많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분노는 부조리한 체제가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며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전체주의적 페미니즘, 진보주의’로 돌려진다.
그리고 이 속에서 ‘여성들이 성적으로 자유롭고 문란해지면서 서구 문명이 몰락하고 있다’는 비약으로 나아간다.(이것의 좌파적 버전을 상기해보자면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며 계급투쟁과 혁명을 가로막고 있다’ 정도가 되겠다) 나아가 레드필의 발리자데같은 논객은 ‘여성 참정권을 박탈하고, 조기 결혼과 임신 출산을 강제하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논리나 주장들을 보다보면 ‘고전을 무시하거나 낭만화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문제적인 유산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은 매우 점잖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그보다는 저자가 중간에 인용한 벨 훅스의 말이 훨씬 더 와 닿는다. “우리의 분노는 병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의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또 다른 책은 프랑스 작가 롤라 라퐁의 소설인 <17일>이다. 1974년에 미국 언론재벌의 딸 퍼트리샤 허스트가 좌파 무장단체 SLA에 납치됐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실화소설이다. SLA는 퍼트리샤를 인질삼아 허스트가에 빈민 지원을 요구했고, 퍼트리샤는 나중에 SLA의 일원이 되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며 은행 무장강도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미국 사회에 충격을 줬다.
결국 SLA는 FBI에 살인진압됐고, 퍼트리샤는 체포돼서 재판을 받게 되는 데, 소설은 퍼트리샤가 SLA에 세뇌됐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변호인단의 의뢰로 퍼트리샤가 납치된 동안 보낸 글과 녹음 테이프를 조사하는 두 여성의 눈을 통해 이 사건의 이면을 짚어보는 형식을 취한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 사건이 당시에 미국의 지배계급과 기성세대에게 얼마나 충격이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자신들의 교육제도와 사회구조 속에서 자라난 재벌가 자녀가 갑자기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무장투쟁하는 “도시게릴라”라고 선언했으니 말이다. 1960~70년대의 민권운동과 급진화 물결이 이런 격변과 사회적 분위기를 낳았던 것이다.
또 당시에 미국 지배계급과 국가기구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게 이러한 변화를 막으려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예컨대 FBI는 퍼트리샤를 구출하고 SLA를 검거하겠다면서 모텔을 습격해서 6명을 사살하면서 6백명 병력, 300대 경찰차, 3대 헬기, 9000발 총알을 사용했다.
다양한 소설적 장치를 통해 이것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솜씨도 나쁘지 않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당시에 퍼트리샤 허스트가 실제로 남긴 말과 글들이다. 여기서 퍼트리샤는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을 ‘정직하고 대의를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내가 납치당한 것은 우리 가족이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FBI는 살인기구이고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구역질나는 나라’라고 분노한다.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싸운 투사의 이름을 본떠서 ‘타니아 허스트’라고 이름도 바꾼다. FBI에 체포되고 나서도 “저의 남은 삶을 허스트가 사람들 같은 쓰레기들과 자진해서 함께 살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사회와 주류언론들은 이것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했다. ‘체포 당시에 퍼트리샤는 노브라였다’, ‘퍼트리샤는 SLA 남성 대원들과 잤다’는 것들이 주류언론들이 더 주목한 것이었다.(매우 조중동스럽다) 심리학자와 성의학자까지 동원해 ‘약혼자에게 성적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서’, ‘남근 선망이 총을 잡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등의 해석이 이어졌다.
기성사회와 주류언론은 퍼트리샤가 스스로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허스트가는 거액의 변호인단을 꾸려 퍼트리샤가 SLA의 협박과 세뇌의 피해자라고 변호했다. 퍼트리샤는 7년으로 감형받았고, 2년만에 가석방됐고, 나중에 카터와 클린턴에게 사면과 복권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날 퍼트리샤 허스트는 세뇌당한 인질이 인질범에 동조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의 대표 사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소설과, 소설 속에서 퍼트리샤가 글과 녹음 테이프를 조사하는 두 여성의 판단은 다르다. 퍼트리샤는 스스로 자유의지로 판단했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독립적 주체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겪으며 자신이 배운 것을 말한 당시 퍼트리샤의 진술에는 진실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조건없는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 모두가 자유롭지 않은 한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또 지배계급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면 자기들 중 하나가 희생되더라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납치, 세뇌, 구출...’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 퍼트리샤에게 부모와 약혼자와 사회가 요구하던 가치관과 여성상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게 ‘세뇌’였고, 그것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구출’됐던 것이고, 다시 기존질서로 돌아가 재벌가의 자녀로서 숙명을 받아들이게 된 상태가 ‘납치’였던 것 아닌가.
(기사 등록 20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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