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이준석 현상의 오해와 이해
이준석 현상에 대해서 몇 가지 오해들이 있는 것 같다. 먼저 이준석의 반페미니즘 선동을 두고 ‘한국사회에서 새롭게 나타난 혐오의 정치’라는 분석은 합리적 핵심을 이해하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 이런 분석은 빨갱이라고, 전라도라고, 종북이라고 혐오를 당해온 수많은 피해자들을 삭제하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을 거치며 형성된 한국사회의 기득권 우파와 특권카르텔은 ‘혐오의 정치’를 핵심무기로 삼았고 그것은 수많은 인권유린과 인명 학살까지 낳을 정도로 지독했다. 지금도 이석기 의원은 감옥에 있다. 이준석으로 상징되는 신혐오주의자들에 비해 구혐오주의자들은 약화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구혐오의 물적기반이 되는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법적 조건과 제도들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준석(또는 하태경) 본인도 구혐오(반공주의, 종북몰이)를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게 아니며, 심지어 더 강경한 측면도 있다. 다만 그런 구혐오는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고,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게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이준석은 우파 포퓰리스트라기 보다는 엘리트주의자’라는 평가도 그렇다. 이것은 이준석의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려는 의도겠지만, 우파 포퓰리즘의 성격을 오해한 것이다.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은 양면거울처럼 비슷한 문제가 있는 대안들이 아니다.
좌파 포퓰리즘이 광범한 민중의 이익과 연대를 추구하는 합리적 핵심이 있다면, 우파 포퓰리즘은 거짓표적을 향해 분노를 돌리도록 민중을 선동하는 기득권 엘리트들의 시도이다. 그래서 우파 포퓰리즘의 선동가가 꼭 기층민중 출신일 이유가 없다.
트럼프는 억만장자였고, 보리스 존슨은 영국 최고 '명문'인 이튼스쿨과 옥스퍼드 출신이다. 이준석의 우파적 포퓰리즘의 핵심은 기층민중의 좌절과 분노를 페미니스트나 ‘운동권 출신의 586엘리트’들, 그들이 추진한 정책과 정치적 방향으로 향하도록 선동하는데 있다. 그 점에서 그는 반엘리트주의를 이용하고 있다.
이준석 현상의 이러한 실체를 주류언론을 통해서는 잘 포착하기 어렵다. 어느 사회나 그렇지만, 한국사회의 언론지형은 특히 더 돈과 권력과 많거나, 소위 ‘능력과 실력’이 좋거나, 학벌이 좋은 사람들에게, 주류적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더 우호적으로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암호화폐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이준석에 대해 주류언론은 비판은커녕 그의 ‘젊은 감각과 디지털 능력’을 평가하는 식이다. 암호화폐는 주식이나 펀드보다 훨씬 더 투기적이고, 제도권 밖에 있으며, 따라서 소수의 이익은 수많은 개미들의 피눈물일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이익도 못본 펀드 투자만으로 ‘희대의 위선자’로 낙인찍힌 누군가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러니 이준석이 취임사에서 말한 ‘비빔밥같은 공존’도, ‘나경원과 주호영과 이준석의 공존’, 구우파와 신우파의 공존, 구혐오주의와 신혐오주의의 공존이라는 점이 가려지고 뭔가 새로운 열린 태도처럼 보도됐고, 이것이 이준석이 차별금지법에서 뭔가 다를 것이라는 잠깐의 기대도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준석이 국힘당의 낡은 기득권에 소신있게 맞서려 한다’는 가장 당황스럽고 중대한 오해를 낳고 있다. 그러나 이준석은 한국사회 기득권 우파와 특권 카르텔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의 대표이다. 이 당은 재벌, 족벌언론, 고위관료, 특권전문직들과 긴밀히 연결돼 있고 100명의 의원 중 절반 이상이 다주택자이거나 강남과 투기지역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정당이다.
이준석이 수술실 CCTV설치법, 차별금지법 등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이 당의 계급적 기반의 이익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준석에게 부여된 과제는 이 당의 본질을 희석하고 이미지를 잘 포장해서, 축소된 지지기반을 확대하며 결국 다시 권력을 되찾아오게 하는 데 있다. 그래서 이준석은 계급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라 마치 세대간, 젠더간 대립이 더 본질인 것처럼 문제를 몰아간다.
물론 계급은 젠더화되고, 인종화되고, 세대화된 관계 속에서 사회적으로 재생산된다. 따라서 계급, 젠더, 인종에 대한 교차적 관점과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정체성의 정치’는 트럼프의 백인남성 ‘정체성의 정치’, 이준석의 이대남 ‘정체성의 정치’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버니 샌더스처럼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고 그것을 ‘계급정치’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샌더스는 나이 80에도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와 접속할 수 있었다. 민주당 주류에 실망한 사람들과 제3세력을 기대하던 분노한 사람들에게도 다가가며 누구보다 '힙'하고 혁신적인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시도와 성공을 보고 싶다.
● 차별금지법 10만 청원의 성공
얼마전 국가보안법 폐지 청원에 이어서 얼마전 차별금지법 국민청원도 10만을 조기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특히 막판의 급속한 증가 속도는 너무 반갑고 가슴벅찬 일이었다. 한국사회에는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고 보기 힘든 수많은 과제들이 있는데, 근래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갖는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왜냐면 차별, 혐오, 편견, 낙인찍기, 마녀사냥, 집단적 괴롭힘 등이 너무나 지긋지긋하고 제발 사라졌으면 하기 때문이고 국가보안법 폐지와 차별금지법 제정이 이런 문제들을 줄여나가는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소수자나 피해자일수록 더욱 이런 일을 많이 겪게 된다. 공군 부사관 성추행 사건에서 나타난 문제들 -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 낙인찍기, 평판과 행실 문제삼기, 신상공개, 진상조사한다면서 더 괴롭히기, 조직보위주의 등도 보면 볼수록 너무나 익숙했다. 피해자가 오히려 더 비난과 공격을 당하고, 주변의 지인과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받고,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더욱 더 만신창이가 된다.
내 주변에 성폭력 피해자들이 지겹도록 겪어 온 일이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이고, 그 피해자를 지지하고 돕다가 손배소송까지 당한 나도 옆에서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당하면 피해자들은 내가 왜 침묵하지 않고 피해를 입밖으로 꺼냈는지 후회할 수밖에 없고, 하루하루가 지옥이 되고, 결국은 삶의 희망과 의지마저도 포기하게 된다.
살아서는 도저히 이 억울함과 울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외면하고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좌절하기 때문이다. 비극이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회는, 뒤늦게야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마련하려는 사회는 끔찍한 것이다. 그것은 폭력의, 편견의, 혐오의, 낙인의, 마녀사냥의, 집단적 괴롭힘의 피해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사회이다.
그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던 누구도 이런 취급과 괴롭힘을 당해선 안 된다. 그래서 최근에 배우 한예슬 씨의 당당하고 용기있는 대응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장 유튜버와 황색 주류언론들의 새로운 타겟이 돼서 낙인이 찍히고, 집단적 괴롭힘을 당하던 한예슬 씨는 정면대결하면서 반박하는 영상을 올렸고, 거기서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의 커리어를 짓밟는 행위들이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학교폭력, 살인미수와 뭐가 다르냐. 이것은 학교폭력보다 더 심한 ‘사회폭력’이다. 무차별 공격과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로 그동안 열심히 쌓아올린 모든 이미지가 무너질 때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떻게 될까. 멘탈이 무너지고 큰 트라우마가 남는다. 마음깊게 자리잡아서 곪고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너무너무너무 잔인하다.”
맞다. 한예슬 씨가 과거에 무슨 일을 하던 어떤 사람과 만나던 헤어지던, 어떤 선물을 주고받았던, 무엇을 하면 시간을 보냈든 그런 사생활과 개인적 프라이버시가 왜 낱낱이 공개되고, 과장되고 왜곡되고, 품평과 가치판단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이 영상에 달린 한예슬 씨를 믿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수많은 댓글들을 보면 ‘또다시 설리와 구하라처럼 떠나보낼 수 없다’는 공통된 정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딸의 일기장과 가족의 카톡대화, 작고한 아버지와 동생의 이혼한 전처까지 전부 털어버린 검언카르텔의 전무후무한 대대적인 ‘조국몰이’에 분노했던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이들은 <조국의 시간>에서 ‘여러분 덕분에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을 보고 위로받았을 것이다.
반면에 조국 교수의 가족 등에 대한 온갖 가짜뉴스와 저질 기사를 쏟아낸 바 있고, 지금은 한예슬 씨등을 괴롭히면서 클릭수 장사로 엄청난 돈을 벌고 있는 저 악명높은 가세연 김용호는 ‘요즘 주요언론들이 가세연의 기사를 받아쓰는 게 주요 콘텐츠가 됐고, 네이버의 가장 많이 본 뉴스 대부분이 가세연 출처’라고 아주 신나했다. 막장 유튜버, 주류언론, 포탈의 이 악무한적 삼각고리를 끊어내고, 더 이상 누구도 이런 차별, 혐오, 낙인, 편견, 집단적 괴롭힘의 타겟이 되지 않는 사회를 간절히 기다린다.
● 윤미향 의원의 끝없는 가시밭길
윤미향 의원이 결국 민주당에서 출당 제명을 당했다. 사회운동에서 키워 온 꿈을 국회에서 이어가고 싶었을 윤미향 의원에게, 지난 1년간 국회의원 자리는 결코 영광도 특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끔찍한 가시밭길이고, 단 한순간도 마음 편하지 못했을 무간지옥이었을 것이다.
기득권 우파와 특권 카르텔, 언론, 검찰에게 타겟이 돼서 온갖 마녀사냥, 혐오, 낙인찍기를 당했고 SNS 메시지, 댓글, 저주의 후원금(18원, 66원, 44원)을 통해 계속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기자들의 펜과 카메라, 우익논객들의 혀는 칼날과 총알처럼 윤미향 의원의 온 몸 구석구석을 찔러댓고, 극우 유튜버들은 윤의원의 집에까지 무대차량을 끌고와 동네방네 떠들며 악질적 괴롭힘을 가했다.
남편까지 비난, 조롱을 당해야 했고, 따님은 사이버 성폭력들에까지 시달렸다고 한다. 딸과 며느리를 자랑스러워하고 믿고 응원하던 연로한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들까지 막대한 고통을 겪으면서 대인기피증에 걸리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윤미향 의원은 이미 수많은 낙인이 찍혀진 그 좁은 이마에 ‘부동산 투기 의원’이라는 또다른 주홍글씨가 새겨져, 민주당에서 쫓겨났다. 이번에 낙인찍기를 자행한 것은 윤의원이 인생에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별로 방패가 돼주지도 않던 민주당 지도부이다. 어리석고 비겁하기까지 한 민주당 지도부는 종부세를 깎아주고, 윤의원 등을 희생제물로 바치면 특권카르텔이 자신들을 어여삐 봐주며 권력 연장을 허용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당 지도부가 ‘투기 의혹의 증거’로 삼은 것은, 윤의원 부부가 사회운동에 대한 헌신과 국가보안법 옥살이 등으로 챙기지 못하던 시절에 시댁 식구들이 시부모님에게 구해주고 나중에 불가피하게 윤의원 남편의 명의만 빌린 저 함양 시골의 8500에 10평 짜리 빌라, 흔한 엘리베이터도 없고, 집값은 계속 떨어져 증여할 때 과세미달로 세금도 낼 게 없던 집이다.
이토록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부당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역사는 윤미향 의원에게 자행된 지난 1년간의 이 마녀사냥과 야만을 분명히 기록할 것이다. 이를 주도한 주류 보수언론, 기득권 우파, 검찰과 그것에 동조하며 따라간 개혁언론과 지식인들과 일부 진보좌파들, 이것을 외면하고 침묵한 수많은 이들도 거기에 같이 기록될 것이다.
이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분노, 울분과 함께 이런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평등법 발의에 함께하는 등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한 입법과 각종 연대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윤미향 의원의 놀라운 용기를 기억할 것이다. 부디 몸과 마음 너무 다치시지 않으시고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같은 터널을 잘 벗어나시길....
● 국제적 투쟁 물결과 칠레의 계급투쟁
투쟁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가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상승작용하던 동아시아의 계급투쟁 상황은 요즘 좀 갑갑해지고 있다. 홍콩, 태국, 미얀마 등지에서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에 나섰던 사람들은 장벽에 직면했고 쉽게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가장 상황이 나은 한국의 2016년 촛불 이후의 상황도 그닥 밝지 않다. 촛불의 성과로 등장했던 중도개혁 정부가 실패했다는 평가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급성장하는 우파야당이 정권 탈환을 노리고 있다. 무소불위로 칼을 휘두르며 우파 반동의 돌격대 구실을 하던 윤석열이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이다.
반면, 계급투쟁의 불균등 결합 발전은 한때 갑갑하던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운 투쟁의 물결과 좌파의 부활을 낳고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두케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거대한 투쟁이 지속되고 있고, 볼리비아에서는 친미우파의 쿠데타가 2년만에 실패하고 좌파 정부가 돌아왔다. 멕시코에서는 좌파인 오브라도르 정부가 우파카르텔의 폭력적이고 대대적인 반격에 직면해 있지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다.)
브라질에서는 극우 보우소나르의 탄핵을 요구하는 투쟁이 성장하고 있고, 다음 대선에서 노동자당이 부활할 가능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페루에서는 최근에 원주민 빈농 가정 출신이자 노동운동가였던 사회주의자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칠레에서 계급투쟁의 전진이다. 칠레는 2019년에 벌어진 거대한 대중투쟁이 올해 얼마전 있었던 개헌 국민투표에서 우파의 참패와 좌파의 대승이라는 열매를 낳았다.
우파는 비토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반면, 공산당과 좌파연합, 원주민과 무소속 풀뿌리 후보들이 제헌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제 피노체트 쿠데타를 통해서 만들어진 권위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88년 헌정체제’가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됐다.
2000년대 초반에 중남미를 뒤흔들다가 10여년 만에 사라지던 ‘핑크타이드’가 부활을 넘어서, 더 강력한 붉은 색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이 상황은 우리에게도 영감과 교훈을 주는데 특히 칠레가 그렇다. 칠레의 계급투쟁은 먼저 오랫동안 꾸준히 누적하면서 발전해 온 것이다.
2011~2012년에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맞서는 대규모 학생투쟁 속에서 좌파가 성장했고, 2017년에는 젠더폭력에 맞서는 여성 총파업이 칠레를 뒤덮었다. 이런 투쟁의 경험들은 2019년 지하철요금 인상이 폭발시킨 거대한 반신자유주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둘째, 칠레의 좌파는 이 투쟁들 속에서 정치적 차이와 노선을 넘어서 힘을 모아 연대했고, 선거에서도 전통적 좌파인 공산당과 신좌파인 ‘광역전선’, 소수 좌파정당들이 폭넓은 선거연합을 구성해 의미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셋째, 칠레 민중은 대중투쟁과 제도개혁을 기계적으로 대립시키지 않았다. 사실 2019년의 거대한 투쟁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는 중요한 논쟁지점이었다. 우파정권이 퇴진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이 존재했고, 제헌의회 투표에 대한 합의는 투쟁을 중단시키려는 배신적 타협이라는 비난도 존재했다.
사실, 모든 전술에 대한 고민과 논쟁이 그렇듯이 여기서 미리 정해진 정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번 제헌의회 투표 결과와 지금이 상황 전개는 그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현실에서 계급투쟁은 우리가 책에서 배운 정답과 머릿속 도식에 따라 전개되지 않는다. 무조건 비타협적 투쟁과 전투성만이 최고, 최선이라는 생각은 섣부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준비된 소수 선각자들의 선도적 투쟁이 아니라, 다수 대중의 의지와 행동이다.
우리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은 버려야 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대화하고 배우려고 하고 때때로 양보해야 한다. 준비된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설득하고 조직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하고, 전투적 행동은 다수의 지지와 동참 속에서만 의미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최근 제인 맥클래비(JANE MCALEVEY)의 인터뷰는 인상적이었다. 미국 노동운동의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 활동가인 맥클래비는 얼마 전 아마존 노조 결성 찬반 투표의 실패에 대해서도 뻔한 ‘정신승리’식 덕담이 아니라 무엇이 문제였는지 뼈아픈 쓴소리를 한 바 있다.
최근 인터뷰에서도 ‘조직화와 승리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투성을 위한 전투성은 의미가 없다. 소수의 전투성은 지름길이 아니고, 전투적 행동은 대다수가 함께할 수 있는 타이밍에 시작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운동을 건설하려면 아직 설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이런 조언은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하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제대로 먹여 살리고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묻는 - 중에서 대다수가 ‘우리는 이러한 행동과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고 나서야 전투성은 상식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조직화와 다음 세대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조직할 때는 이미 당신의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박노자와 ‘식민지 조선 맑시스트들의 국제반제연대론’
지난 주말에 박노자 선생님의 줌강연과 토론을 들었다. 정성진 선생님과 경상대 SSK 연구팀이 주관하는 ‘포스트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에 대한 시리즈 강연의 일부였고 주제는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 맑시스트들의 국제반제연대론’이었다.
박노자 교수는 일제시대 조선의 중요한 이론가였던 이여성(李如星)의 저술과 주장들을 주로 분석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당시에 한국사회와 언론, 지식인들의 국제주의적 관점과 관심들이 오늘날보다도 더 풍부했고, 특히 제국주의에 의한 피해국가들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과 깊이있는 분석을 제시했다는 지적들이 매우 흥미로웠다. 중도적 민족주의자들도 국제적 관점과 반제국주의적 의식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탈식민주의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기계적인 계급환원주의보다는 계급, 민족, 젠더 등을 상호교차적으로 보고 분석하는 최근의 시도에서 볼 때도 흥미있고 의미가 있다고 보였다. 유익한 강연과 토론의 막바지에 나도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역시나 박노자 교수의 명확하고 핵심을 담은 답변이 있었다. 기록 차원에서 그 요지들을 정리해서 남겨둔다.
1. 레닌의 제국주의론이나 식민지수탈론이 과연 당시의 제국주의와 식민지에 대한 타당한 분석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특히 그후 신흥개도국들의 경제 발전은 설명하기 어렵지 않나? 연관해서 식민지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논쟁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가?:
수탈과 개발 사이에 명확한 벽은 없다. 투자와 수탈은 연결돼 있다. 그 과정에서 매판적 기업에서 자주적 기업으로 발전하는 자본가들을 발견할 수 있다. 부가가치 사슬에서 위치가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탈과 개발 사이의 변증법적 연관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일제가 30년대 조선에서 추진한 공업화는 중국 진출을 위한 군사적 필요가 컸지만, 동시에 그것이 낳은 개발의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2. 구소련과 지금의 중국이 주변 약소국과 소수민족, 미얀마 등에 대해서 보이는 태도를 제국주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들도 억압적이기는 했지만 근대적 발전을 위한 바탕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복지식민지라고 분석한다. 투자가 상당히 많고 생활 수준도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 대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군사기지이자 중국의 자산이 되는 것이며 민족정체성에 대한 억압이다. 물질적 근대화라는 측면과 주변부적 제국주의 억압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과거에는 소수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살리는 방식을 취하는 듯했지만, 오늘날 신장위구르에서 민족 언어와 문화를 위협하는 방식의 국가 통합, 동화주의로 나가고 있다. 이것이 제국주의가 다르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3. 근래, 에릭 블랑(Eric Blanc)같은 이론가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소수민족의 억압과 민족해방의 문제에서 효과적 전략을 발전시킨 선구자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러시아 변경지대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구실을 했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초기에 그것에 대치되는 입장을 취했었다는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진실은 중간에 있다. 레닌은 오늘날 우리 생각만큼 소수자에게 열린 사람은 아니었다. 예컨대 유대인 분트에 대해서 레닌은 왜 유대인들의 별도의 조직이 있어야 하냐고 했고, 유대인을 민족으로 보지 않았다. 분트를 해체하고 입당하라는 동화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문제는 10월혁명에서 비러시아 소수민족들의 구실이 컸다는 것이다. 변방에서는 중국인과 조선인들의 구실도 중요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도 이러한 현실을 부득불 인정해야 했다. 혁명 과정에서 입당해서 볼셰비키의 정책을 변화시킨 소수자들이 중요했던 것이다.
(기사 등록 202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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