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세상읽기 - 차별금지법/ 국가보안법/ 혐오/ 국제

전지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며칠 전 이정훈 4.27시대연구원 위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소환 한번 없더니 갑자기 집으로 들어친 30여명의 국정원, 보안수사대에 의해 연행됐고 자택은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정훈 위원이 쓴 책들이 북한을 찬양 고무했고, 심지어 김정은의 지령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라는 혐의다. 이것은, 시작된지 일주일만에 10만명을 거의 채워가는 국가보안법 폐지 10만 입법청원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의도인 것이 명백하다. 국가보안법 폐지법안 발의를 준비중이던 민주당, 정의당 의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개혁정부 정권말기에 꼭 국정원이 주도한 국가보안법 조직 사건이 터지던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특히 이런 사건은 항상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북한 정권과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들을 겨냥했다. ‘북한은 괴물같은 사회인데 그런 사회를 좋게 보는 사람들도 괴물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하다’는 프레임으로 진보진영을 위축, 분열시키려는 것이다. 이제 ‘4.27시대연구원’과 이정훈 위원이 얼마나 ‘친북적’이고 ‘지지하기 어려운’ 주장을 해왔는지 보여주는 온갖 과장, 왜곡 기사들이 쏟아질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어느정도 먹혀든다는 것이다. 사상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말하던 사람들도 북한 문제나 종북몰이 앞에서는 멈칫하는 것이다. 이석기 의원이 8년이나 감옥에 있지만, 진보정당 정치인들도 그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다. 이정훈 위원의 연행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명백한데 관심은 물론 규탄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이것을 얼마 전 ‘문재인은 북한의 개이고 빨갱이’라는 전단을 뿌렸다가 고소당한 ‘청년’(그는 사실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극우유튜버이자 국힘당 정치 활동가였다)의 문제와 비교해 보자. 전 사회와 대부분의 언론이 비분강개했고 진보적 정치인과 지식인들까지 그의 ‘표현의 자유’를 방어했다. 여기서 그 ‘청년’의 주장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를 ‘종북주사파’라고 공격한 변희재도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한국사회에서 종북몰이와 종북 혐오표현으로 누군가를 공격할 자유와 권리는 존재하지만 종북몰이와 종북 혐오표현을 거부할 자유와 권리는 별로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지지하지 않는 잘못된 생각이라도 그것을 표현할 자유를 가로막거나 법적으로 공격받는 것에서는 방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고 큰 틀에서 동의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조적이고 이중적인 반응이 나타나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더구나 종북몰이는 표현의 자유보다는 실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혐오표현의 성격이 더 크다. 이념대립으로 전쟁과 학살까지 겪은 한국 역사, 아직도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에 기반한 구조와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한국사회에서 특히 그 위험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미 ‘종북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드러난 종북몰이의 잡종적 확대 가능성은 최근에 페미니즘 백래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초등교사들로 구성된 급진 좌경 페미니스트 지하조직이 조직적으로 페미니즘 세뇌 활동을 해 왔다’는 국민청원이 수십만 명의 청원을 받아서 경찰 수사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차별과 혐오는 그 토대, 구조, 세력에서 연결돼 있지만 우리는 흔히 그것을 놓치고, 지배자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분리시키려 한다. 예컨대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발의나 논의조차 돼지 못한 ‘단절의 10년’을 이야기할 때 보통 2013년 민주당 김한길의 발의와 자진 철회가 등장한다. 우파와 혐오세력의 공격에 굴복했던 김한길은 요즘도 차별금지법을 다루는 방송에 출현해 그 시절을 돌아보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2012년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의 발의였다. 통합진보당과 김재연 의원은 결코 이 법안을 철회한 적도 내용을 타협한 적도 없다. 그러나 2012년부터 시작돼 2013년에 그 절정에 달하고 2014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으로 이어진 종북몰이 속에서 차별금지법 논의도 함께 사라졌고 그 법안은 2016년 자동폐기됐다. 이것은 차별금지법 단절의 10년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지점이지만, 오늘날 그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고 흔히 삭제, 망각되고 있는 지점이다. 김재연 의원을 찾아가 그 경험을 들을 필요가 있을텐데 말이다. 그 점에서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와 차별금지법 제정을 서로 연결시키고 함께 힘을 모으려는 움직임은 너무나 반갑고 고무적이다.
차별과 혐오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없어져야 할 것이 국가보안법이고 가장 필요한 것은 차별금지법이다. 당장 중요한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 10만 청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25일부터 시작될 차별금지법 제정 10만 청원으로 그 성공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끝까지 함께 손을 잡고 이뤄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차별금지법 제정 국민동의청원 바로가기
https://bit.ly/equality100000

📌 [안내]국민동의청원 참여방법, 어렵지 않아요!
https://equalityact.kr/100000-guide

📌 [기고] '차별금지법은 어떻게 사회를 바꾸는가'
https://bit.ly/3fyw6B8

 

● 억압적 국가기구들의 대대적인 반동 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힘은 보통 선출되지 않는 자들에게 있다. 재벌총수, 언론사주, 국가 고위 관료 등이 그들이다. 요즘 삼성, 조중동, 검찰, 기재부, 감사원이 휘두르는 권력과 그들이 청와대나 집권당도 무시하며 공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더구나 이들은 긴밀하게 유착돼 있고, 회전문처럼 서로를 넘나든다.

검사장은 나중에 삼성이나 대형로펌으로 가고, 기재부 고위 관료는 나중에 재벌과 금융회사로 가고, 이런 자리들은 다시 거대정당의 공천으로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지배/권력 블록이 구성된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융합되고 조직되는 방식, 권력을 분배하는 방식,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방식, 강제와 폭력뿐만 아니라 설득과 동의를 통해서 대중을 통치하는 방식에 따라서 국가의 성격과 유형이 형성된다.

 

원래 한국 자본주의와 국가는 매우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일체화돼 있고, 강제와 폭력이 우선하는 지배방식과 국가형태였다. 그러나 87년과 이후 몇 차례의 대중저항에 직면하면서 그 성격과 유형이 변화해 왔고 권력기반도 확대돼 왔다. 국가와 자본의 상대적 자율성과 탄력성도 높아져 왔다. 그러나 선출되지 않는 진정한 권력자들의 여전한 힘, 그들이 자신들의 질서를 복원하는 회복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2016년 촛불과 같은 거대한 파도에 밀려서 그들은 일단 후퇴하고, 심지어 그 파도에 몸을 싣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은 일시적 후퇴였을 뿐이고 언제든 다시 기존의 질서를 재확립할 기회를 노리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언제나 억압적 국가기구가 있다. 국가의 본질은 결국 ‘폭력의 합법적인 독점’, ‘무장한 인간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임기말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보여 준다. 진작부터 문재인 정부의 온건한 수준의 검찰개혁마저 거부하며 반대편에 서 있던 검찰은 ‘김학의 역사 바로잡기’(?)에 한참이고, 검찰 내부에서 검찰개혁에 동조하던 인사들에 대한 응징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검찰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주류언론은 거의 없었는데, 그나마 외로이 목소리를 내던 <뉴스타파>는 지금 총 9번, 모두 6억 5천만원이라는 대대적 손배소송의 보복에 직면해 있다.

“소송이라는 것이 언론을 괴롭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법 전문가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기업에서 노조와 활동가들에게 제기하는 천문학적 손해배상 소송, 가압류와 일맥상통한다. 그들의 작전대로 됐다. 일단 귀찮고. 이단 돈이 많이 들고. 삼단 그래서 괴롭다.”(<뉴스타파> 김경래 기자) https://newstapa.org/article/Klk29 (5천만원 손배소송 보복을 당하고 있는 나로서도 전적으로 공감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검찰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한국 국가의 핵심적인 폭력기구, 비밀경찰기구였던 국가정보원이 최근에 벌이고 있는 일이다. 이들은 온건한 수준의 검찰개혁마저 거대한 역풍과 저항 때문에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사실상 무풍지대에서 편하게 반동을 준비해 욌던 것 같다.

최근 2주일 사이에만 국정원이 주도해 자행한 탄압을 보자. 4.27시대연구원 이정훈 연구위원에 대한 압수수색과 구속, <세기와 더불어>를 출판한 김승균 대표에 대한 압수수색, 청주지역 활동가 4명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압수수색, 범민련 원진욱 사무처장 등 2명에 대한 기소.... 이 정도면 ‘공안정국’으로 들어가는 초입처럼 보일 정도다.

 

이 과정에서 사상, 표현, 출판, 결사의 자유 등 민주주의적인 기본권이나 인권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특히 원진욱 사무처장이 국가정보원과 공안 경찰들은 당한 인권유린을 보면 참담한 수준이다. 그의 휴대전화, 사무실 전화·팩스, 이메일 등 모든 통신수단에 대해 감청, 통화내역 조회, 대화내용 녹음, 사진 채증, 영상녹화와 녹음, CCTV 영상 확보, 실시간 위치추적, 미행, 은행계좌 압수수색, 금융거래내역 조회가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더구나 국정원은 최근 ‘탈북자 간첩 조작 사건에 규정 위반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정원 내부 인물로만 구성된 TF에서 피해자도 불러서 조사하지 않은 ‘셀프 조사'를 하더니 ‘면죄부 주기'로 마무리한 것이다. 장경욱 변호사가 비판하듯이 “이것은 향후에도 계속... 간첩조작을 하겠다는 선전포고”(https://newstapa.org/article/K1hoV)에 다름 아니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던 박지원이 국정원장이 됐어도, 당연하게도 국정원의 성격과 본질은 바뀌지 않았고, 국정원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들은 기존 체제와 질서를 유지하고 복원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청원이 열흘만에 10만이 동참한 것은 이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고, 오히려 반동을 서두를 자극만 된 것 같다.

저들은 ‘문재인은 북한의 개’라고 주장한 청년극우의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벌떼같이 나섰던 정치권, 주류언론, 지식인들이 ‘김일성 자서전도 표현과 출판의 자유아니냐’는 사람들 곁에는 잘 다가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안보위협 세력을 감시하고 잡아내기 위해서 역시 우리같은 비밀경찰이 필요하다’고 자부할 것이다. 최근에 본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메시아>에서 미국 FBI와 에드가 후버도 바로 그런 논리로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사회 진보와 민주화를 가는 흐름을 막아섰듯이.

 

 

● 혐오의 시대 - ‘보편적 공감’과 ‘성찰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영광이게도 ‘전국사회교사모임’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민주사회와 교육> 2021년 봄호에 글을 싣게 됐다. 미얀마 민중과 국제연대를 표현한 표지도 너무 멋지다. 소중한 지면을 제안하고 제공해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차별금지법 제정 등 차별과 혐오에 맞선 투쟁을 위한 고민과도 연결돼 있는 기고 글 내용의 일부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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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적 소식들을 통해 거듭 확인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변희수 하사 등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사회적인 배척을 당하고 차별과 혐오에 시달리던 이들이 연달아 죽음을 선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을 느껴야 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3월 16일 애틀랜타에서 아시안 혐오를 바탕으로 한 연쇄총격으로 아시아계 미국인 7명이 사망하는 인종혐오 범죄가 벌어졌다. 코로나 이후에 급증한 아시안 혐오가 폭력과 범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소수자와 소수인종 등 사회적 소수자 집단을 겨냥해 혐오 감정을 부추기면서 폭력과 배제로 내모는 것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명백하다. 그런데 ‘혐오의 시대’는 단지 이것만으로 특징지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표적을 정하고 좌표를 찍어서,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괴롭히고 끝없이 증오하는 일이 하나의 문화가 돼버린 시대이다. 이것은 ‘왕따’나 ‘직장내 괴롭힘’, ‘사이버 불링’이라는 형식으로 학교나 직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벌어지지만, 전사회적으로도 벌어지는 일이다. 일종의 현대판 ‘마녀사냥’이다. 특정 개인에 대한 낙인찍기와 공격이 전사회적으로 벌어질 때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대개 주류언론이다. ‘공인’으로 분류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과 그 가족들이 그것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복합적인 측면을 같이 보긴 해야겠지만 조국 전 장관과 가족, 그리고 근래에는 윤미향 의원과 그 가족들이 당하고 있는 일도 상당 부분 이렇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당장 ‘조국이나 윤미향같은 사람들이 무슨 마녀사냥의 피해자라는 것이냐’라며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을 마녀사냥의 피해자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반발을 예상하는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돼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보여 준다. 이들은 언론과 여론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이고 가혹한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런 취급을 당해도 싸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사냥개처럼 추적하면서 낙인을 찍고 집단적 분노를 부추기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매장을 당한다. 물론 좌표를 찍고, 왜곡과 과장된 선동을 통해서 편견을 부추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정치사회적 이익을 얻게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에 동조해서 뒤틀린 감정과 충동을 표출하거나 그것을 묵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의 동료 시민들이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는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이거나 상대방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해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강력한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공감능력과 상상력이 제한적으로 특정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대상과 조건 속에서 부담없이 공감능력과 상상력을 작동시킨다. 어려운 이웃에 대한 드라마나 공익광고를 보면서 그 아픔을 상상하고 공감하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반면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대상과 허용되지 않는 조건 속에서는, 그 대상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이 얼마나 비난과 공격을 당해 마땅한 인간 이하의 존재인지에 대한 ‘혐오적이고 적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핵심에는 표적이 된 사람에 대한 ‘비인간화’가 있다. 같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받아야할 관심과 인간적 대우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존엄성을 짓밟히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관심과 공감도 작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진영으로 편 가르기를 하며 선택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편에는 무한한 사랑과 결속을, ‘저들’ 편에는 극단적 증오와 배척을 표출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를 비극적으로 잃고서 외로이 지내며 나라를 위해 고생하다가 지금은 감옥에 있는 박근혜’에 대해서 엄청난 공감을 보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조국, 윤미향과 그 가족들’에게 보이는 살기어린 적개심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정치적 극우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적 표적이 돼서 비인간적 취급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정치적 견해이고 진영에 속해있는지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혐오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과 공감 능력’이라는 말은 일면적이고 부족하다. ‘선택적 공감’과 ‘적대적 상상력’은 혐오의 시대를 더욱 끔찍하게 만드는 무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움과 괴롭힘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 공감’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인간적 결함과 잘못이 있더라도, 나와 견해와 진영이 다르더라도 결코 그것이 달라질 수는 없다.

 

상대방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 사람의 처지와 느낌을 생각해보면서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고자 하는 ‘성찰적 상상력’도 필요하다. 누군가를 동정받을 가치도 없는 혐오스러운 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의 모든 언행을 악마적 의도로 해석하는 적대적 상상력이 아니라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적 공감과 성찰적 상상력은 특별한 사람만이 타고나는 감각이나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노력하고 학습하고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택적 공감과 적대적 상상력’에 동조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수의 침묵과 묵인이 혐오의 시대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저항하고 불복종하며 연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존재한다. 혐오의 시대를 극복할 희망은 여기에 있다.

 

● 조선일보는 폐간하라

 

<조선일보>를 참 싫어한다. 단지 개인적으로 과거에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을 때 ‘조선일보는 폐간하라’는 글을 쓴 것마저 ‘이적표현물’이라고 판정받은 것 때문에 악감정이 남은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야말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언론이 사회적 흉기가 되어버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 사면을 앞장서 외치고, 암호화폐 투기 광풍을 부추기고, 이스라엘의 폭격을 편들고, 종북몰이와 혐중여론에 부채질을 하고, 윤미향 의원 등에 대한 마녀사냥에 앞장서고.... 코로나 방역을 방해하며 백신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백신거지”라는 차별과 혐오에 찌든 용어를 계속 쓰고, ‘영국에서 백신맞고 다리를 절단했다’는 가짜뉴스도 퍼트렸다. 광주항쟁에 대한 북한군 개입설을 초기부터 유포한 것도 조선일보와 TV조선이었다.(물론, 그 뒤에는 이명박근혜 정부와 국정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 자들이 반성과 사과도 없이 광주와 화해를 말하는 요즘 상황은 참 보기 괴롭다.)

 

문제는 <조선일보>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돈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즐겨보는 것이 <조선일보>다. 지난 재보선 때 <아내의 맛>(제목부터 불쾌하다)에 출연한 방송에서 나경원 씨와 판사 남편이 아침마다 커피를 갈면서 보는 게 <조선일보>였다.

여전히 이들이 이슈를 만들고 의제를 설정한다. 진보적 정치인들마저 조선, 동아와 인터뷰하고 그들의 종편에 출연한다. 뉴스공장에 직접 출연해서 ‘김어준은 그만 물러나라’고 말하는 ‘용기’(?)있는 우파 정치인은 있어도, 티비조선이나 채널에이에 출연해서 그런 용기를 보이는 진보정치인은 본 적이 없다.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이 줄어드는 요즘 <조선일보>는 갓 나온 신문을 재활용 폐지로 해외로 팔아먹는 동시에, 무엇보다 포털 알고리즘 맞춤형으로 어뷰징 기사들을 쏟아내며 클릭수 경쟁에서도 가장 앞서가고 있다. 그래서 최근 만들어낸 최악의 사례가 고 손정민 씨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것을 낱낱이 기사거리로 만들어 기사팔이에 이용하던 모습이다.

 

같은 시기에 사망한 고 이선호 씨의 죽음은 철저히 외면하는 조선일보를 보면서 참 ‘계급의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조선일보가 왠 일로 오늘 “평택항 일터에서 숨진 20대 대학생을 추모하며”라는 칼럼을 실었길래, 내가 너무 색안경만 끼고 봤던가 싶었다. 이제 '한강 대학생 사망 기사팔이'와 탐정놀이도 시들해져서, 이 문제에 늦게나마 관심을 가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서 칼럼을 읽고는 기가 막히고 울분만 남았다. 이선호 씨의 비극에 같이 아파하는 게 아니라 중대재해처벌법을 공격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그 자체로 과잉 입법 금지라는 법치주의 원칙을 훼손했을 뿐 아니라, 바라는 효과(사망자 감소)는 거두지 못한 채 애먼 범법자만 양산할 공산이 충분하다... 산업 안전은... 개인이 자기 안전을 책임지고, 나아가 팀원들이 서로 안전을 지켜주는 단계에 이를 때 완성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횡단보도나 육교는 만들어 주지 않고 무단 횡단하면 처벌하겠다는 핍박이다.”

끔찍한 중대재해로 사망한 사람을 추모하는 척 하면서, 되려 중대재해를 막아보자는 법을 “핍박”이라고 비난하는 언론, 이것이 사회적 흉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조선일보>가 나같은 사람을 인터뷰하거나 취재 요청할 리도 없으니 다시 혼자서라도 말한다. 조선일보는 폐간하라.

 

●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팔레스타인 국제연대 행동

 

어제 오후에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는 한국 거주 중동 이주민, 이주노동자, 난민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행동이 있었다. 자발적으로 제안되고 모여든 분들이어서 체계적인 발언이나 순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했고, 말없이 손팻말을 들고 있거나, 분노의 발언을 쏟아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이 함께 온 분들도 있었다. 나중에는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분들이 오셔서 항의 행동을 계속 이어가셨다. 어제 이집트 난민인 친구와 그녀의 딸을 오랜만에 만나서 더욱 뜻깊은 자리였다. 그 친구는 이집트 혁명 과정에 함께하다가 반혁명을 피해서 한국으로 왔고,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생계도 어려운 조건에서도 꿋꿋이 살아가고 있고, 이처럼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행동에도 용기있게 앞장서는 너무 멋진 친구이다. 어제도 나는 이 친구의 제안으로 소식을 듣고 의미있는 연대 행동에 함께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10일째 폭격과 학살을 이어가고 있다. 집과 학교와 병원이 파괴되고 있다. 서로 사랑하던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네타냐후나 바이든이 말하듯이 ‘방어권’이 아니다. 학살과 인종청소는 ‘권리’가 아니라 ‘범죄’이고, 그것도 극악한 전쟁범죄이다. 이것은 ‘충돌’이나 ‘분쟁’도 아니다. 30년전 광주에서 전두환의 공수부대와 시민군의 대립이 충돌이나 분쟁이 아니었듯이 말이다. 네타냐후는 이것이 ‘하마스와 터널을 겨냥한 공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점령과 억압에 맞서는 모든 사람을 하마스로 보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감옥같은 가자지구에서 유일한 외부와 연결통로인 터널을 파괴하는 것은 생명줄을 끊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대와 강제퇴거가 지금의 비극을 낳은 직접적 원인이지만, 더 나아가 원주민에 대한 인종청소를 통한 유대 테러국가 건설이라는 전략 자체가 근본적 문제이다. 최근 네타냐후는 바이든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내 친구’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바이든이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며 평화를 바라는 세계 모든 민중의 적이라는 뜻이다. 반면 지금 미국, 유럽,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의 학살 중단을 요구하는 거대한 시위와 집회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이들이 팔레스타인 민중의 친구이고, 여기에는 유대인들도 함께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서안과 가자지구,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인들까지 역사적인 자생적 총파업('통합 인티파다')을 시작했다. 과거에 팔레스타인 민중의 인티파다가 2011년 이집트 혁명과 ‘아랍의 봄’의 씨앗이 됐듯이, 지금의 저항과 연대도 국경, 종교, 인종, 모든 장벽을 넘어서는 새로운 국제적 저항과 연대의 물결을 낳을 것이다.

 

뱀발) 이스라엘의 학살로 벌써 2백명이 넘은 팔레스타인 민중이 학살당한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이스라엘과 아이언돔’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스라엘 국민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아이언돔 덕분에 이스라엘측 사망자는 팔레스타인측보다 압도적으로 적고, 전쟁 공포에도 시달리지 않고 있다. 아이언돔은 가성비도 좋다.’ 이 따위 보도를 하는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취재에 협조하는 진보 정치인들은 앞으로 제발 한번 더 생각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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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은 학살을 중단하라

 

이스라엘이 80대가 넘는 전투기로 폭격을 가해 벌써 팔레스타인 민중 100명 이상을 학살했다. 최첨단 전투기들의 폭격은 13층이 넘는 건물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영상을 통해서 그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구나 그 건물은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살고 있는 주거 건물이었다. 폭격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탱크와 지상군도 투입되기 시작했다. 2014년에 팔레스타인 민중 2천명을 학살했던 것 이상의 비극이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거리에서 유대극우단체들이 아랍계 주민들을 집단 린치하는 현상과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랍계 주민들이 유대인 이웃에게 보복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미국 정부와 서방 주류언론들은 이스라엘의 이런 일방적 학살을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라고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방어권은 강자에게 부당한 공격을 당한 약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번에도 부당하고 일방적인 공격은 이스라엘이 먼저 시작했다. 동예루살렘에서 정착촌을 확대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강제퇴거한 것이다. 특히 아랍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라마단 기간에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알 아크사 사원으로 강제진입한 것은 명백히 의도적 도발이었다. 당연히 팔레스타인 민중은 항의 시위를 벌였고, 그러자 이스라엘 군경은 최루가스, 총격, 섬광 수류탄 등으로 대응했다. 희생자가 발생하고, 그것에 대응해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가 로켓포를 쏘자, 곧바로 전투기로 폭격과 학살에 나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오히려 하마스의 로켓 공격일 것이다.

 

가내수공업적으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하마스의 로켓포는 대부분 이스라엘까지 날아가지도 못하고 있고, 날아가도 ‘아이언돔’을 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군, 전쟁무기 장사꾼, 서방언론들이 찬양하듯이 아이언돔이 짱이라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경제력, 기술력, 군사력에서 게임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패스캔들과 총선 패배로 궁지에 몰린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가 돌파구로서 이번 학살극을 시작했다는 관측이 많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해주고 미대사관까지 거기로 옮겼던 트럼프가 이런 난동을 뒷받침해 줬다. 새로 들어선 바이든 정부에게 이런 방향을 흔들지 말라고 쐐기를 박고싶은 네타냐후의 의도도 있을 것이다.

 

노엄 촘스키가 지적하듯이 이 사태의 근본 배경에는 이스라엘이 추진하고 미국이 도와 온 ‘테러와 추방 전략’이 있다. 이것은 서방 정부와 주류언론들이 말하듯이 양쪽 모두가 문제인 ‘충돌’, ‘분쟁’이 아니다. 가자지구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서 일방적으로 인종청소와 학살을 당해 온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다시 생지옥으로 빠져들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백신도 나눠주길 거부하던 이스라엘은 지금 총알과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이것이 최근 <조선일보> 등이 ‘백신일등’ 국가라며 칭찬하고 부러워하던 나라의 실체다. 미얀마 군부의 학살에 반대하고 규탄했던 한국 정치권은 당연히 이스라엘도 규탄하고 반대하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 정부는 지금 이스라엘과 FTA를 체결했다고 자랑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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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이후에 대한 국제적 반동

 

우리가 사는 세계는 서로 연결돼 있다.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구상과 세력들의 쟁투에서 오른쪽에서, 위로부터 반동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런 조짐과 시도는 전세계적으로도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확대와 강제퇴거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를 폭력 진압한 데 이어서 전투기 80대를 동원해 가자지구를 폭격해서 수십 명을 살상하고 있다.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안보리에서 다루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중국은 미국에게 배웠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최근 마크롱 정부가 무슬림 억압 법안과 경찰력 강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4월말에는 퇴역 장성 23명이 정부가 ‘이슬람주의자 등 폭도를 확실하게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가 나서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1000명이 넘는 퇴역 장교들이 여기에 연명했다.

 

영국에서는 얼마 전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 보리스 존슨의 보수당이 압승했다. 이 결과가 특히 쓰라린 것은 영국판 트럼프인 존슨이 미국 다음으로 서방 지역 최다의 코로나 사망자(10만명)와 심각한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는데 있다. “시체더미가 아무리 쌓여도 빌어먹을 봉쇄는 안돼”라는 존슨의 망언이 유출되는 상황에서도 노동당은 수십년 동안 지켜오던 자신들의 텃밭 지역구마저 빼앗겼다. 보수당은 브렉시트 인종주의(영국인이 먼저다), 백신 제국주의(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백신을 맞는다), 경제 살리기(노인들이 좀 죽어도 봉쇄는 안 된다)를 내세워서 지지층을 결집시켰고, 코빈 좌파를 제거하는데 몰두해온 노동당 스티머 지도부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제 존슨 정부는 이미 추진해온 경찰력 강화 법안을 더욱 강력하게 강행하고자 할 것이다.

 

5월초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주지사 선거에서도 우파의 ‘코로나 봉쇄 반대와 경제 살리기’ 선동이 먹혀들었고, 우파 국민당과 극우파 ‘복스’의 연합세력이 압승했다. 이것은 지난해 총선 이후에 사회당과 급진좌파 포데모스가 함께 구성한 좌파 연립정부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다. 기대를 모았던 좌파 연립정부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악조건과 유럽연합과 국내 기득권 세력의 협공 속에서 별다른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고, 부동산 정책 등에서 계속 타협하고 후퇴했다. 무엇보다 우파와 주류언론은 연립정부에서 좌파적 기둥인 포데모스에 공격을 집중했다.

 

그 방법들은 한국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포데모스 지도부에게서 불법 비자금과 성추문 등을 찾아내기 위한 언론과 경찰의 집요한 표적 수사, 취재가 시작됐다. 결국 이들은 포데모스의 지도자인 이글레시아스의 휴대폰과 사적대화를 불법사찰해서 포데모스 간부들이 ‘쌍욕을 하고 저질 발언을 하는 내용’을 억지로 찾아낼 수 있었다. 이글레시아스를 위선자로 몰아가며 증오를 부추기는 주류언론과 억압적 국가기구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어졌고, 4월초에는 극우단체가 포데모스의 지역 사무실에 사제폭탄을 던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번 선거 결과는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고, 거리에서 풀뿌리 신나치들의 성장은 스페인의 앞날을 우려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 상황도 별로 나은 것 같지는 않다. 중도개혁 정부의 한계와 실패들이 드러나면서, 어떠한 개혁도 가로막고자 했던 기득권 우파-검찰-주류언론의 카르텔은 힘을 회복하고 있다. 검찰의 망나니 칼춤은 계속되고 있고, 검찰을 견제한다던 공수처는 조희연 교육감을 기소했다. ‘공정을 말하더니 뒤로 반칙을 저지른 위선자’라는 공격의 다음 표적이 된 것이다.

2019년 ‘검찰개혁 촛불’은 그 기억과 의미가 삭제되고 부정된 지 이미 오래고, 이제는 2016년 촛불의 기억과 의미도 공공연히 삭제되고 부정되고 있다. 최근에 이 대열에 합류한 것은 최장집 교수이다. 그는 “촛불시위의 결과가 그동안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지탱했던 진보와 보수의 균형을 붕괴시켰다”면서 2016년 촛불을 “민주주의를 위기라고 진단하는 시작점”으로 규정했다. 촛불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까지 검토했던 세력이 아니라, 그 세력에 맞서서 촛불을 들었던 기층 민중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낳았다는 기막힌 본말전도이다.

 

보수 카르텔과 이런 ‘진보지식인’들의 공통점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위로부터 엘리트들의 전문적 판단과 제도화된 타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갈등을 제도화된 틀 속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타협하는 게 민주주의”라고 했다.

아래로부터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무대에 진입해 주체로 나서는 것은 ‘정상상태’를 가로막는 혼란이고 중단돼야 할 ‘예외상태’인 것이다. 그들이 무시하는 ‘어리석고, 감정적이고,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촛불 대중’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다시 정치, 경제, 사법 엘리트들이 무대를 장악해 기득권 구조와 제도화된 타협을 복원시킨 것이 지난 수년 동안과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져 온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사회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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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 20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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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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