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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정치'에 계속 의미를 두는 이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5. 1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기가 참 쉽습니다. 한국의 20대들이 정치에 피로감을 느끼고 탈정치화됐다면, 그럴 만한 이유 역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이후 30여년 동안 한국 자유주의/개혁주의 운동의 정치적 결산이 '강남좌파' 기득권층으로서의 그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평화 문제도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문재인 정권이라면 이런 자유주의/개혁주의 흐름에, 특히 아직 노동/주택 시장 진입도 못하고 있는 젊은 사람으로서 충분히 의심을 품어 볼만도 합니다.

 

문 정권의 그 어떤 정책도 젊은 사람의 노동 내지 주택 시장에의 진입에 유의미하게 도움을 주지 않고 있는데 말이죠. 개혁주의보다 왼쪽에 있는 혁신/사민주의/진보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2001-2년 그 당시, 제 기억으로는 인천 같은 공업 대도시에선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20%에 육박했습니다. 민중들이 그만큼 진보 내지 사민주의 등에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로는 최초로 어느 정도 '희망'을 걸어본 것이죠.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진행된 진보 정치 '과정'의 결산은 뭘까요? 존재감이 거의 없어진 5-6개의 영세 정당, 지난 서울 시장 선거에서의 허경영보다 더 적은 진보 후보들의 득표율, 평화 문제나 불안 노동 문제 등에 있어서 급진성을 다 잃고 성추행 등 내부 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는 정의당 같은 사민주의 정당의 지속적인 보수화? 개혁주의/자유주의도 내놓고 자랑할 게 전혀 없지만, 그 왼쪽 비판자들도 지난 20여년 간 이룬 게 과연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만합니다.

 

용두사미로 끝난 '촛불항쟁'과 문재인 정권의 궤적, 그리고 지리멸렬하게 된 진보 정당의 세계... 젊은이들로서는 한심하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만약 그들이 '정치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저 역시 그 말에 그렇게까지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상'이란 역사, 전통, 지정학, 그리고 경제적 상황의 무게는 그리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단 말입니다.

 

예컨대, 미국 '눈치보기'로 일관돼온 문재인 정권의 소심하기 짝이 없는 대북 접근은 '필요 이상'으로 대미 의존적이지만, 설령 진보 정당 - 예컨대 정의당이나 심지어 노동당 - 이 집권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지정학적 입장, 즉 미국의 군사보호령으로서의 입장을 바꾼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미군의 '보조 병력'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한국군부터 그런 지정학적 전환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2017년 계엄령 문서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처벌이 사실상 없었던 걸로 봐서는 이 군의 정치 개입의 궁극적 가능성을 언제나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시가 되면 미군의 지휘를 받도록 돼 있는 한국의 주권이 없는 군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신냉전 가동 이후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의 흐름과 풀뿌리 '혐중' 정서의 일부 언론에 의한 자극 등으로 미국의 군사 보호령이라는 현상 유지는 지금 '대중적 지지'를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군이나 대중적 여론의 동향도 그렇지만, 무역의존도가 63%인 한국의 대외지향적 경제가 - 예컨대 중국 등보다 - '제재'에 훨씬 더 민감해 그 어떤 강대국과의 관계 악화도 바로 '민생'에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러니 한국의 '국가 주권의 제한성'은 세계적 '문제' 치고 그렇게 큰 것도 아닌데, 그것마저도 의회, 정당 정치로 풀 것이 아마도 지난하리라고 예상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한국에서 '기적'이 일어나 신념이 강한 사민주의자/진보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중립국이 된다든가 등의 한반도 남반부의 지정학적 위치가 바뀌는 것은 아마도 대단히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 대한 과거나 경제적 상황, 역학 관계의 규정력은 지대합니다. 이 판에서 '정치'가 할 수 있는 건 사실 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중국에서 혁명이 승리하고 1966-76년간의 문화 대혁명 등 온갖 '소용돌이'들이 쳤지만, 현재 중국의 정치-경제 모델, 즉 1인이 집권하는 당-국가와 그 당-국가에 종속돼 있는 자본이라는 관료 자본주의 모델은 사실 1930년대 후반 국민당 정부의 모델과 대동소이합니다.

 

80여년이 지나고 수백만 명이 내부적 정치 갈등에서 죽어났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위해서 자신들과 남의 목숨들을 바쳤지만, '사회주의'와의 거리는 1930년대 중국이나 오늘날의, 프랑스 (10%)보다 '최고 부자 1%'의 총소득에서의 비율이 더 높은 (14%) 중국은 아마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주의'에 전혀 접근조차 하지 못한 거죠.

 

환멸을 느낄 만도 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진보 정치에 여전히 '희망'을 걸어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 사회주의 등 인류의 궁극적인 이상을 설령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지 못한다 해도, 설령 '세상을 바꾸는 일'까지 못해도 정치로 풀 수 있는 게 그래도 많고, 정치를 통해서 적어도 구체적인 집단과 구체적인 인간들의 구체적인 고통을 덜어주고 기후 위기의 해결 등에 그래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30여년 동안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성취 중의 하나로 학교 체벌의 폐지를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매를 맞지 않은 아이, 맞아가면서 '힘의 논리'에 주눅이 드는 그 끔찍한 체험을 하지 않은 아이들이 성장하게 되는 것은 한국사상 기록적인 변화죠. 체벌이란 근대의 산물만도 아니고 계급 질서가 잡힌 이래 있어온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보의 배경에는 바로 - 사회 운동과 함께 - 진보 정치의 성장도 있었던 겁니다.

 

또 하나의 커다란 성취는 고문의 폐지죠. 유가려,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 수사 때에 고문 등이 자행된 것으로 보이는 등 '완전한' 폐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때리고 모욕하는 수사가 '일상'이었던 과거에 비해 한국의 수사 기관들은 1990년대말 이후로는 상대적으로 '얌전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역시 김대중의 집권 등 정권 교체와 같은 '정치'가 있었던 거죠. 정치적 변화의 와중에서 새로이 채택된 법률의 영향으로 직장 성희롱이나 갑질이 약간 줄어든 것도 사실인데, 만의 하나에 지난 수십년의 정치적 변화가 없었다면 그것마저도 힘들었을 겁니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일'까지 담당하지 못해도, 그래도 누군가가 매 맞지 않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지 않게, 일터에서 성희롱을 당하지 않게끔 해주는 데에 일조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야만적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그리고 노동자로부터 빼앗긴 잉여가치의 일부라도 복지체계를 통해 노동자에게 다시 돌아오게끔 하려 하는 진보 정당 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참여할 겁니다.

 

누가 무슨 운동을 해도, 아마도 제가 죽을 때쯤 돼도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군사보호령으로 묶여 있는 자본주의 사회일 것입니다. 그래도 만의 하나에 진보 정당 운동이 한 사람의 자본주의 피해자의 고통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몇 사람의 고통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탄소 배출량 감소에 미력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저는 할 만한 운동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게 될 겁니다. 결국 그런 운동들이 이어져나가면서 언젠가 때가 되면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법이니까요.

 

(기사 등록 202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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