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촘스키 선생이 한 말씀 중에서 저로서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발언은 바로 이것입니다. "국가 자본주의 아닌 자본주의란 현재로서 없다. 국가가 그 역할을 하루라도 다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다음 날 망한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미국 전문가들이 라이벌 중국의 혼합 경제를 가리켜 '국가 자본주의'라고 비난조로 이야기하지만 미국 본국의 예컨대 바이든 정권의 최근 2100조원 규모의 부양책이란 뭘까요? 한국 정부 예산의 4배(!)나 되는 규모의 국가 개입인데, 이걸 지척에 두고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어떻게 거론할 수 있겠어요? 의회, 백악관, 국가 금융 관리 기관들의 손은 너무나 가시적인데요.
소련형의 완전히 국가화된 경제가 아니라면 국가는 자본 축적의 유일한 주체로 나서지는 않습니다. 즉 엘리트들의 개인 축적을 허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어떤 완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도 국가는 자본 축적의 거의 모든 '조건'들을 결정하고 조성합니다. 관세율, 금리, 환율부터 도로망, 전기 공급과 전기료 수준, 그리고 과학 연구 개발 분야 등등을, 보통 국가가 결정 내지 담당하거나, 상당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잡스나 게이트스는 사기업인이지만, 그들의 존재를 가능케 한 인터넷은 본래 1969년에 시작된 미 국방부의 프로젝트(ARPAnet)이었죠. 말은 좀 그렇지만, 사실 한반도의 분단과 마찬가지로 인터넷도 냉전의 여러 산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냉전의 주도 세력은 바로 양쪽 '국가'들이었죠. 물론 국가 개입의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그 개입이 자본 축적에 결정적이다는 것은 전세계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에 문제는, 이 '국가'를 어떤 세력들이, 어떤 룰에 따라 어떻게 운영하느냐죠.
우리는 통상적으로 '민주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를 구별합니다. 그런데 사실 명색상의 '민주 국가'들도 '권위주의 국가'들도 다들 약간씩 다른 만큼 이렇게 양분하는 것은 너무나 거친 분류법이죠. 한-일은 다 '민주'쪽이지만, 한국은 양당제인 반면 일본은 '사실상 준1당제'에 가깝습니다. 미얀마와 중국은 '권위주의 국가'지만 미얀마의 군-국가의 살벌한 '학살에 의한 통치'와 중국 당-국가의 교육이나 사회 정책 등을 동반한 치밀한 관료 통치는 사실 많이 다르죠. 제 생각에는 현존하는 국가들을 그 지배 방식의 유형에 따라서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1. 민주적 조합주의 국가: 총노동이 정치세력화되어 있고 총자본과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룹니다. 신자유주의로 넘어가도 기초적 복지제도 등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구조의 나라들입니다. 대개 내각책임제 국가들이고 보통 5-10개 의회 정당들이 연정을 하는 식입니다. 대륙 유럽의 대부분은 이 모델이지만, 이 모델 안에서도 여러 가지 종류들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스페인 등 일부 남유럽 국가들의 경우 실제로 권위주의적 요소들이 상당히 강합니다.
2. 대외 종속적인 형식적 민주주의 모델: 서구에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는 대부분의 구 동구권 국가나 발틱 공화국 등은 전형적인데, 제도적으로 의회 민주주의지만, 어떤 정부가 되어도 국내 자본보다 해외 자본 (주로 서구, 북구 자본) 축적의 종속적 대리인 정도의 역할밖에 못합니다. 일종의 현대형 '준식민지'죠.
3. 선거제 권위주의 국가: 선거제는 있지만 거의 형식에 가깝고 실제로 비교적으로 외부로부터 자율적인 관료 엘리트들이 국내 자본의 축적 과정을 지원하거나 (헝가리, 터키) 아예 지휘감독하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형태입니다. 비교적 리버럴한 버전은 헝가리나 일본, 싱카포르, 매우 강경한 버전은 러시아, 아마도 가장 강경한 버전은 우즈베키스탄입니다.
4. 신자유주의 양당제 국가: 보수 양당이 사실상 대자본의 '지휘'를 받는 형태의 시스템입니다. 미국이나 한국은 전형적인데, 영국도 노동당의 사민주의적 성격이 거의 희석화된 1990년대 이후로는 이 시스템에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5. 표피적 민주제를 가진 약탈 국가: 금품 선거 등의 비판을 받지만 형식적 선거는 있는 한편, 어느 당파가 집권해도 주로 잉여 수취와 외국 은행에의 빼돌리기에 급급하고, 극단적 종속의 상황에서 내부적 축적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키르기스스탄이나 몰도바, 나이지리아, 잠비아, 보트스와나 등은 전형적일 것입니다.
6. 비제도적 세력 경합의 가능성이 큰 혼합 모델. 인도나 브라질 같은 경우가 전형적인데, 노동계 등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잘 조직돼 있지만 표피적으로 민주주의적 국가를 장악한 경제 엘리트들이 비제도적 폭력이나 '사법'을 가장한 폭력을 비교적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불안정한 체제를 일컫는 것입니다.
7. 군-국가: 요즘 많이 없어졌지만, 제도화가 덜 된 상황에서 군이 축적 과정을 지휘하거나 스스로 축적의 일차적인 주체가 되는 경우들입니다. 현재는 미얀마 이외에는 수단과 말리는 대표적입니다.
8. 당-국가: 당 관료들이 자본 위에 군림하면서 축적 과정을 통제, 지휘하는 경우인데, 물론 중-북-월-라오스는 전형적입니다.
9. 가산 국가: 국가 통치 엘리트들이 국부 전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스스로 자본가 역할을 맡거나 그 역할을 본인들의 종속인들에게 맡기는 경우입니다. 단, 당과 같은 대중적 동원 조직을 가동시키지 않으며 군부보다 민간 통치를 선호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현재로서는 투르크메니스탄은 가장 전형적입니다.
10. 신자유주의적 가산 국가: 카타르나 바흐레인, 아랍연합추장국, 사우디 등은 전형적인데, 국가는 비록 절대 왕권이지만 축적 과정에서는 권력의 주체 이외에는 자본주의 핵심부 자본들도 같이 참여하는 식입니다. 이런 국가들은 사실상의 노예노동에 가까운 외국 이민자 노동에 많이 의존하는 걸로 악명 높습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도 권위주의도 다 똑같은 건 절대 아닙니다. 당-국가들은 보통 추격형 경제 발전을 매우 빠르게 하는 걸로 유명하지만, 만의 하나에 북조선에는 외자와 외국 기술, 외국 시장 개방 등 '조건'이 주어졌다면 아마도 몇년 사이에 '대동강 기적' 같은 이야기들은 외국 경제지 지면을 장식했을 것입니다. 군-국가들은 내부적으로 늘 불안하며 보통 어느 정도의 제도화를 이루면 다른 형태로 진화합니다.
한국과 같은 보수 양당제의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기본 문제 (노동 불안화, 인구 물리적 재생산의 불가능성, 극도로 볼행하고 우울한 사회 분위기 등)들을 그 틀 안에서 해결할 수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한국이 민주적 조합주의 국가로 진화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노동계를 기반으로 하는 '진짜 진보' (정의당 그리고 그것보다 왼쪽에 있는 세력들)는 현재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2차 민주화'를 해낼 수 있을까요?
(기사 등록 20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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