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소련 초등학교에 처음 갔을 때엔, 그 교실의 벽에 고리키의 유명한 명언이 걸려 있는 걸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말은 자랑스럽게 들린다!“는 명언이었습니다. 고리키는 실제로 먼저 니체의 '초인론'을 접했다가 나중에 맑시즘으로 온 문호이었는데, 아마도 '자랑스럽게 들린다'는 게 '초인'같이 '인간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쯤이었겠죠? 전 고리키를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인간이라는 말이 전혀 자랑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제 마음 속에서는 굳어져 갑니다.
인간이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는지 모르지만, 여태까지는 인간은 '서열화'와 '타자 배제'를 주된 특징으로 한,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원숭이의 한 종류로 살아 왔습니다. 계급 분화 이전의 사회라면 '권위' (연령순 등)의 서열이었지만, 계급 분화 시작 이후로는 '권위'가 '권력'으로 이어지고, 그 후로는 인간이 '평등 사회'를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서열 질서'의 종류가 달라질 뿐이지, '최상'과 '최하' 사이에서의 사회적 '거리'는 그리 쉽게 좁혀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재용과 비닐하우스에서 잠자야 하는 캄보디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거리'란, 구한말 권문세가/대지주와 시골 노비 사이의 '거리'보다 과연 더 좁은 건가요? 그리고 기원전 58-50년 사이에, 가이 율리우스 가이저르의 로마 군대가 갈리아를 정복하면서 거의 1백만 명에 가까운 현지인들을 도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을 때의 '타자'에 대한 로마인들의 태도나, 거의 1백만 명의 부자연스러운 사망을 가져다준 이라크 침략 (2003-9년) 시기의 수많은 '주류' 미국인들의 무관심하거나 '우리 군을 지지하는' 태도는 서로 그렇게까지 다른 것인가요? 차이라면 물론 가이저르와 달리 부시와 그 주변의 신자유주의 정치꾼들이 이라크 식민화에 실패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인간에게 스스로 누군가를 죽이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변의 살인이나 배제 당한 자에게 가해지는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 있게끔 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통상 '타자의 탈인간화'라고 부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미국의 폭탄 밑에서 작은 살점으로 몸이 찢겨져 죽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와 동류가 아니다, 고로 내가 신경 쓸 게 없다'라고 의식하게끔 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심리적인 자기 합리화 장치입니다. 아유슈비츠에서 가스실을 운영했던 사람들도, 똑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을 사용했죠. 거기에서 질식사 당하는 유대인이나 '빨갱이' 등이 '인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와 같은 인류가 아닌, 해충과 같은 이질적 종류'라고 본인들이 본인들에게 주술을 걸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가스실을 운영했던 전범들 중에서는 실제로 모차르트 음악쯤 좋아하는 따뜻한 남편이자 아버지와 같은, 겉으로 보면 아주 멀쩡한 교양인 (?)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인격 파탄자'나 '연쇄 살인마'와 같은 존재라기보다는, 타자를 너무나 잘 탈인간화시킬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는 파시즘의 진정한 위험성이 있습니다. 파시즘은 '인격 파탄자'나 일부 '타고난 살인범'이 아닌, 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살인 기계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는데, 그 관건은 바로 타자 탈인간화 메커니즘이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한국 사회의 존재론적인 기반은 바로 타자에 대한 배제입니다. 단, 역사적으로 이 배제의 대상에 오르는, 즉 '타자/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교체되고, 또 배제의 방법이 달라집니다. 애당초엔 당연히 '빨갱이'들이 일차적인 공식적 배제의 대상이었고 그 분위기도 사뭇 광기어린 분위기이었지만 ("죽이자, 김일성!"과 같은 행군가를 부르는 1970년대의 군을 생각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세대가 교체되고 북한도 점차 '약체화'됨에 따라서 점차 없어진 광기의 자리를 메운 것은 일종의 '무관심', 그리고 인간적 공감 능력의 부재 내지 부족이었습니다.
23년 전, 강릉 부근에서 북조선 잠수정의 9명의 승조원들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고 '생포'를 피하기 위해 집단 자살을 택했을 때에, 한국에서 살고 있었던 저는 그들의 비극적 죽음을 통곡해서 애도하고 싶었던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분단 당한 조국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동족을 상대로 '전투 준비'를 하고, 남한에 의한 생포보다 죽음을 택해야 했던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이 분들의 비운이면 비운이고, 저는 그런 비운을 타고 난 인간에게는 - 그 인간이 북한인이든 혹은 화성인이든 - 무엇보다 인간적인 '공감'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비록 '우리'와 정치적인 '대결 관계'에 있다 해도 인간적 공감은 정치적 대결보다 더 일차적일 수가 있는데... 1998년 그 당시 저는 제 주위에서는 그들에 대한 '공감'보다는 '이게 광신도냐'와 같은 희화화나 주로 무관심을 더 많이 목격했습니다. 광기는 이북에 대한 냉소나 무시로 교체됐지만, 이미 탈인간화된 '북한인'에 대해 한국에서 어떤 '공감'을 보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한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는 자유주의 사회입니다.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기에 지금 한국 농업의 고용 인구의 절반이 '외국인'이라는 사실, 그들이 평균 하루 10-11시간동안 일하고 한달에 1-2번 쉰다는 사실, 상당수가 컨테이너나 비닐하우스에서 지내야 하고 각종의 성추행 등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습니다. 2014년에 국제사면기구가 한국 농업에서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현대판 노예'로 정의하고, 한국을 '인신 매매 국가'라고 정의했다는 사실도, 자판에서 몇 번 클릭하면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인권, 노동 활동가들은 활발히 '운동'을 하지만, 다수의 한국인들이 노예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밥상을 먹는 데에 대해 그다지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타자를 '우리'와 일단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보고 그에 대한 '공감'을 차단 내지 하향 조절할 수 있는 메커니즘은 이미 다수의 뇌 속에 '내장'돼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광주를 방불케 하는 금일 버마 신군부의 살인 만행을 문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인 '진보주의자' 다수가 - 옳게도 - 가열차게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는 데에 멀지 않은 곳에서 '농장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당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그리 쉽게 가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데에 지장 없는 '시민'들로서는 가난한 사람을 '동류'로 보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인가요?
자본주의가 극복이 되면 어쩌면 가능하겠지만, 저는 배제와 탈인간화가 없는 사회란 자본주의적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도, 이 사회-경제적 '제도'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당연히 (?) 타자에 대한 배제와 탈인간화를 주된 사회-심리적 메커니즘으로 계속 활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 해도, 손을 놓으면 안되죠. 배제, 탈인간화 메커니즘과 싸우지 않으면 이 암 세포들이 이 사회를 더더욱더 파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참치를 먹을 때마다 한국 어선에서 인니 선원들이 어떻게 맞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삼성 휴대폰을 만질 때마다 이 휴대폰들을 만든 인도, 인니, 월남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과 3개월, 6개월짜리 계약, 직업병에 노출되는 환경 등을 생각하도록 하는 게 맞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이란 배제와 탈인간화 없이는 잘 창출되지 않습니다. 한국 자본이 얻어간 이윤, 한국 사회가 얻는 '선진화'의 대가를 누가, 어떻게 치르는 것인지를 잘 기억해야 이 살인적 시스템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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