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진짜 남자'란 무엇인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며칠 전에 제가 2월23일에 몇 분의 러시아/구소련 출신의 여성 동료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 날에 '축하'가 오나 싶어서 생각해 봤는데, 아참, 러시아에서 그 날이 '조국 방위자의 날'이라는 걸 그 때 깨달은 것입니다. 소련 시절에는 2월23일은 소련 군대의 명절이었는데, 지금 '조국 방위자의 날'이 된 거죠.

 

그러면 병역 면제자인 저를 이 '국군의 날'을 기해 '축하'하는 이유는? 소련도 그렇고 러시아도 그렇지만, 묵시적으로 '남성'을 잠재적인 '군인'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니까 '군'의 명절은 바로 '남자의 날'이기도 하죠. 이 '군'이란 소련군인지 러시아군인지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실제 복무 경력의 유무 여부, 심지어 평화주의적 신념의 유무 여부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젊은 세대라면 모를까, 기성 세대에겐 '군의 날'은 바로 '남자의 날'입니다.

 

한국 독자 분들은 이 대목을 보고 아마도 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한국도 초강경 징병제 사회인데, 그래도 한국에서는 국군의 날인 10월1일에는 '모든' 남자들을 묵시적으로 '군인'으로 간주해 축하 메시지를 나누어 주는 문화가 없는데.."라는 반응은 나오겠죠. 네, 사실 초강경 징병제로 치면 한국은 러시아보다 훨씬 더 초강경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현역 복무율은 러시아보다 5배나 높은 편이죠. 문제는 그거라기보다는 아마도 '국민 통합의 기제'가 되는 '집단 기억'의 문제일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그 기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조국 대전쟁', 즉 독-소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푸친이 정적 나발니를 '인격 살인'하려 할 때에는 나발니가 '서방 세력의 간첩'이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우는 동시에는 무엇보다는 나발니가 '조국 대전쟁 참전 용사를 모독한 파렴치한'이라는 포인트를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들의 뇌 속에서는 '조국 대전쟁 참전 용사에게의 막말'이란 '친미 간첩죄'만큼이나 그것보다 더 무거운 '패륜'으로 각인돼 있다는 것을, 당국이 너무나 잘 알고 그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는 거죠.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동족상잔인 6.25도 그저 나라의 국제적인 치부에 불과한 월남 파병도 당연히 '국민 통합의 기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의 사회 통합 기제란 일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집단적 '식민지 이후의 트라우마'일 겁니다. 지금 뉴라이트들이 이를 바꾸어 식민지를 미화시키는 동시에 고속 성장 등을 새로운 통합 기제로 만들려는 '사상 공작'을 펴고 있는 중인데, 집단 정체성이란 그렇게 녹녹한 건 아닙니다.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죠.

 

그렇다면 구소련이나 지금 러시아에서는 병역 미필자 내지 면제자를 '남자'로 보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존재했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 않았습니다. '조국 대전쟁'을 현대사의 기축이자 사회 통합의 기반으로 보는 시각과 별도로, 특히 면제자가 많았던 고학력자 사회에서는 예컨대 잠재적인 결혼/친밀한 교제 대상에게는 꼭 '병역필'이냐고 따지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는 한국과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단, 예컨대 맨손으로 길거리 불량배를 제압할 수 있는 '담력'과 '힘'을 보여주었다면 이건 '남자로서의 매력'에 큰 '보너스'가 됐을 것입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구소련 말기나 1990년대 초반의 시절에 그랬단 말입니다. 오늘날엔 과연 어떤가요? 치안이 비교적 괜찮은 모스크바의 동네에서 사는 중산층 고학력자들에게는 '담력'이나 '완력'은 더 이상 '남성성'을 가늠하는 주요 '기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안'이란 자기 손으로 보장해야 하는 소도시나 시골이라면? 아무래도 '남성성'의 기준도 거기에 따라 바뀔 것입니다.

 

이처럼 '남자'를 정의하는 방식은 역사적 '상황'의 전개에 따라 계속 바뀌어 나갑니다. 지금 한국적 '남성성'의 아이콘이 된 BTS 멤버들은, 아마도 1950~60년대 같았으면 '지나치게 여성적으로 보인다'는 지적을 받지 않았을까요? '남성성'을 가늠하는 기준의 변화에 있어서는, 저는 세 가지 요소가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군사적 남성성은 조금씩 그 영향력을 잃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초강경 징병제는 계속 유지되지만, 적어도 사회적인 '당위성' 담론의 차원에서는 군대와 연관돼 있는 상명하복 의식이나 '마초 문화' 등은 더 이상 다수의 젊은이들에게 '바람직하다'고 인식되지 않습니다.

 

둘째, 이성애의 패권이 이제 조금씩 상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25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시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동성애자들이 돋보이게 됐고, 적어도 학계나 일부 고학력자 사이에서는 동성애란 '또 하나의 정상'으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혐오주의적 반발이 크지만요). 셋째, '배려하는 남성'의 이미지가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즉, 아이들을 봐주고 집 청소하고 요리하는 남자에 대해 '바람직하다', '멋지다'는 의식이 점차 확산되어 그 과정에서는 '표준적 남성성' 모델이 조금씩 바뀐단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과정들은 꼭 순조롭게만 진행되는 건 아닙니다. 예컨대 일부 20~30대 남성 사이에서의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의 유포 등은, 이 과정이 부딪치는 저항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성성의 재정의란 일부 기존의 '남자로서의 특권' (돌봄 노동으로부터의 면제 등)을 위협하는 점이 적지 않아 위기감을 느끼는 일걱의 남성으로부터 반발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세 가지 과정들은 조금씩 이루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단, 남성성 재정의의 이 과정에 있어서 저로서 걱정스러운 부분이란... '진짜 남자'를 일차적으로 '생계 부양자', 즉 '벌이'하는 존재로 보는 눈은, 약화되긴커녕 오히려 더 강화돼 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부유해지고 격차가 심회되는 사회-경제적 상황에서는, '남자'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의 폭력성이 너무나 크게 개입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중화된 노동 시장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비정규직/중소기업/저임금 부문으로 흡수되면 빠져 나오기가 대단히 힘든데, 남성성을 '재력' 위주로 파악하는 시선은 격차 사회의 피해자들에 대한 엄청난 '폭력'으로 작용되는 것입니다.

 

재력/소득 창출 능력과 학력이 직결돼 있는 사회에서는, 남자를 일차적으로 '재력'으로 보는 시선은 또 어린 남성들을 학습 노동의 지옥으로 집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경제력 차별의 폭력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사람을 아프게 때리지만, '통념상' 생계 부양자로 상정되는 남성에게 가해지는 압박이란 일단 아주 크다고는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의 세계 최악에 가까운 자살률도 이 부분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사 등록 20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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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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