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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것, '국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2. 17.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요즘 모스크바의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 (KUTV)에서의 조선인 관련 자료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1921~1938년 사이에 존재했던 그 대학에서는, 조선 내지 출신만 해도 200여 명 이상 공부를 한 것이죠. 나중에 진보당을 만든 조봉암, 조선 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인 김재봉, 여성 혁명자로 유명한 주세죽과 고명자, 나중에 <숫짜 조선>으로 이름을 날린, 차후 여운형계의 핵심이 된 의사 김세용... 한국사 교과서에 그 이름이 들어갈 만한, 너무나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그 곳에서 교육을 받고 혁명의 길로 계속 나아간 것입니다.

 

가르친 사람들 중에서도, 혹은 거기에서 연구에 종사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조선 내지와 만주, 연해주에서 이런저런 업적을 남기고, 중요한 일들을 해낸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1929년 이후 경성에서 공산당 재건 사업을 하면서 일제 경찰의 검거를 아주 용케 피해간 김정하, 일련의 중요한 논문을 남긴 이론가 양명, 1934년 조선 공산당 재건의 강령을 기초한 최성우, 전설적인 혁명가이며 1926년의 6.10 만세 운동을 조직한 김단야, 내지와 만주에서 공청 운동을 해온 황하원 (카펠로비치), 빨치산 출신의 젊은 학도 콘스탄틴 황동육... 기라성 같은 혁명자들이었지만, 이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 한인'들 사이엔 공통점 또 하나 있습니다. 그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공통점이죠.

 

아주 드문 경우지만, 극소수는 시베리아로 끌려가 '교화노동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갔습니다. 총살당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애당초 조직자 중의 한 명인 김만겸의 아들 발렌틴 김은 동방 노력자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는데, 고문 '수사'를 당한 뒤에는 20년 동안의 북부 시베리아 '교화 노동' 현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국내에 잘 알려진 주세죽은 카자흐스탄으로 '교화 노동형'을 받아 갔다가 결국 유배를 거기에서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나마 '행운아'이었습니다. 나머지의 공산 대학 한인 교원들은, 거의 빠짐 없이 총살형에 처한 것입니다. 공산 대학뿐만 아닙니다. 코민테른 계열에 속했던 '모스크바의 한인'들 중에서는 생존자가 극히 적습니다. 전설적 빨치산인 최호림이나 이인섭, 이르쿠츠크 공산당의 중요한 조직책이었던 최고려 등은 총살형 대신에 수용소로 끌려갔지만, 대부분의 '고려인 1세대 혁명가'들은 거의 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1945년 이후 소련에서 이북으로 파북된 고려인 약 400여명의 명단을 보면 40대 이상의 간부들은 거기에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 '좌장' 노릇을 한 알렉세이 허가이는 1908년생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그보다 더 젊었습니다. 그만큼은 1917년 혁명과 내전, 고려 공산당 창당과 코민테른 계열의 공산 운동에 참여했던 베테랑들은 소련에서 이미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의 전부 다 1937~38년에 총살된 것이죠.

 

​1937~년의 대숙청에 총살당한 사람들의 총수는 681,692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 소련 총인구의 약 0,4%가 비밀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뒤에 온갖 '중범죄'를 다 '자백'해 죽임을 당한 것이죠. 그들이 주로 누구인가요? 가장 호되게 당한 것은 그 당시 소련의 '주적'으로 지목됐던 인접 국가들과 민족 성분이 같은 민족적 소수자들입니다. 예컨대 대숙청에 총살당한 소련의 폴란드인만 해도 111,091명이나 돼, 전체 피해자의 15% 정도 차지합니다.

 

일부 특적 소수자 그룹 (독일인, 폴란드인, 핀란드인 등)과 부농 출신 이외에는 가장 큰 위험에 처해진 것은 바로 소비에트 국가와 당의 간부, 특히는 그 어떤 혁명적 과거를 가진 간부들이었습니다. 코민테른도 황폐화됐지만, 예컨대는 외무부에서는 전체 직원의 3분의 1이나 총살당했습니다. 외무부에서는 특히나 외국어 구사력이 높은 과거 혁명 운동의 참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피해자의 구성으로 봐서는, 대숙청의 정치적 함의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최성우나 김단야, 김정하 등처럼 실질적으로 국내외에서 혁명적 실천 경력이 있고 이론적 분석 능력과 주관이 있는, 즉 독립적인 '정치인'이 될 수 있는 간부들을, 스탈린의 체제가 더 이상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도륙한 뒤에는 알렉세이 허가이처럼 그 나이상으로는 혁명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고등교육 과정에서는 오로지 스탈린주의적 맑스 이론의 해석만을 접한 젊은 간부들을 기용해, 그들의 '완벽한 충성'을 받아 내는 게 스탈린의 속셈이었을 것입니다. 스탈린의 보수적인, 국가주의적인 새나라 건설 방안과 맞지 않은 '혁명의 세대'는 도륙돼야 됐습니다. ​

 

최성우 같은 사람들이 왜 스탈린에게 '불편'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1923년 트로츠키의 테제 관련 논쟁에서 연해주에서 참여하기도 하고, 그 뒤에 부하린 밑에서 코민테른에서 일하고, 국제주의자이며 일종의 초기 세계체제론자인 포크롭스키 밑에서 학습했습니다. 스탈린 체제로서는 그가 '이물', '이질적 분자'이었죠. 차라리 트로츠키나 부하린과 어떤 인연도 가질 수 없었던, 1912년생의 유격대장/군인 출신인 김일성을 믿고 북한 행정을 맡기는 게 스탈린으로서는 훨씬 마음 편했을 것입니다. 그것까지 다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왜 하필이면 죽여야만 했을까요?

 

각자의 직장 배정을 '중앙'이 결정하는 체제에서는 설령 최성우를 유배 보내 시골 학교 교사로 그 직장을 정했다면 과연 그 효과는 뭐가 달랐을까요? 교사들이 실제 태부족했던 사회이었는데요... '공산주의 체제로서 그렇게 잔혹했다'는 말은, 제가 보기엔 성립되지 않습니다. 연안/태항산에서 중국 공산당 속에서 1930년대말~1940년대초를 보낸 조선 혁명자들 중에서는 장지락/김산처럼 모함을 당해 희생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살아남았죠. 같은 유형의 체제지만, 쿠바에는 아예 '간부 숙청'은 거의 없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로서 그랬다'는 것도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일제 전시 총동원 체제 역시 최악의 권위주의이었는데, 경성의 서대문 형무서에서는 비록 엄청난 고통 속에서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확률은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반대로 코민테른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로서는 1937~38년을 모스크바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아마도 (피해자 비율로 봐서는) 4~5% 정도이었을 겁니다. '러시아/소련이 잔혹한 국가'라고 말하는 것도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1937~38년 대숙청과 같은 규모의 '피의 향연'은, 소련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했으며, 러시아 역사에서도 16세기로 올라가야 어느 정도 유사한 사건을 찾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숙청의 정치적 함의를 다 이해한다 해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질문에는 쉬운 답이란 없습니다.

 

정적뿐만 아니라 '잠재적 정적', 비판자가 될 확률이 약간이라도 있는 사람까지 하방이나 유배도 아닌 극형으로 다스린 것은 결국 '정권 안보'를 최우선시했던 스탈린의 개인적 성향은 크게 반영됐을 것입니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600여회의 CIA의 암살 시도를 당하고도 용케 살아 남고 숙청 없는 정치 노선을 견지했지만, 스탈린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암살 시도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령님'을 암살한다는 걸 암시할 수 있는 단어 하나 내뱉은 사람, 아예 그런 생각을 가질 만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짐없이 황천의 객이 다 됐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잠재적 적'을 제거하기 위해 수천, 수만 명을 '예방적으로' 도륙한 걸 보면... 이게 근대사인지 아니면 진시황제나 명나라 태조 홍무제의 관료 대숙청 시대인지 분간이 불가능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도륙을 포함해서 어떤 특정 집단을 겨냥한 대규모의 폭력을 행사하려는 '국가'를, 제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권위주의 국가만은 아니고 의회 민주주의 국가도 그 폭력을 말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죠. 예컨대 제2차 세계 대전 시절의 미국의 일본계 주민들에 대한 강제 수용은 (미국 시민권자의 권리를 짓밟은 차원에선) 미국 법체계로서도 말이 안 되었지만, 행정부의 이 폭거를 말릴 수 있는 '힘'이란 미국 사회에 없었습니다.

 

2011년에 노르웨이 공군을 포함한 나토 여러 나라 공군이 리비아를 폭격해 결국 통일 국가로서의 리비아를 '망국'에 이르게끔 했을 때에는 그 잘난 '유럽 시민 사회'는 그 폭거를 말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리려 하지도 않았고요... 정말로 국가란 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시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란 결국 국가가 행사하는, 내지 행사하려는 폭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것일 겁니다. 권위주의든 민주주의든 무비판적으로 믿고 따라도 되는 '좋은 국가'라는 건 결코 존재할 리가 없는 거죠.

 

(기사 등록 20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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