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박노자] 음모론, 그 불멸의 비결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요즘 참 재미있는 한 가지 변화를 보게 됩니다. 1990년대만 해도, (전문가 등을 제외한) 한국인 대다수는 미국의 정치에 다소 무관심했습니다. 클린턴의 '백악관에서의 섹스'와 같은 '희귀 사건'들을 다소 관음증적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크게 봐서는 그 때에는 '정치'란 다수에게는 국내 정치, 즉 'TK/PK세력'과 호남 세력, 충청권을 대변했던 전설적 '3김'의 복잡다단한 '삼각 관계'이었습니다.

 

동시에는 1990년대말~2000년대초 만 해도 남북 화해/협력은 상당히 광범위한 계층 사이에서는 진정한 관심사이었던 것이죠.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좋아할 일 없는 많은 민중 활동가들은, 남북 정상 회담의 사진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그 장면 하나로 다른 모든 것을 다 용서해 김대중 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도 이미 좀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통일 열기'를 거론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는 아마도 그 때이었을 듯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랄까, 이 두 관심사의 자리가 뒤바뀐 듯합니다. DMZ만 아니면 서울에서 약 1시간반 운전하면 개성까지 갈 수 있는데, 이처럼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북에 대한 관심은 아예 식는 것도 아니고 사라져 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대다수 한국인들은 당장엔 한반도 평화를 원하고 '먼 미래'에 통일되기를 바라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당위론적 '통일' 넘어서는, 현실에 있어서의 남북 사이의 '가까워짐'에 대해서는 기대도 이제 없는 것 같고 관심도 많이 증발된 듯합니다.

 

대놓고 그렇게 말을 안하지만, 상당수의 '진보 지식인'까지도 최장집 선생의 '한반도 2국가론'을 하나의 현실론으로 이미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반대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13시간 이상 공중에 떠야 하는 미국의 내부 정치에 대한 관심은 엄청나게 증폭됐습니다. 이제 전문가층만도 아니고 국제정치 연구와 무관한 수백만 명의 한국 네티즌들이 '트럼프와 바이든의 대결'을 열정적으로 논하는 시대가 온 것이죠. 그런데 거기까지 좋은데, 미국 정치를 음모론적으로 파악하는 기류가 한국 인터넷에서 꽤나 강한 것 같아 다소 경악스럽기도 합니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멀고도 먼 곳이지만, 미국발 가짜뉴스와 극우적 음모론들은 이번에는 아마도 거의 처음으로 한국의 가상 공간을 강타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해진 만큼 신자유주의 한국의 (미국을 향한) '개방'도 이제 아주 높은 수위에 오른 거죠. 민주당과 '심층 국가'가 소아성애자들에게 장악됐다, 민주당은 악마숭배자 집단이다, 바이든이 중국으로부터 뇌물을 엄청나게 받아먹어 미국 (과 한국)을 중국 공산당에 팔아넘긴다... 이런 류의 한국어 동영상들은 수십만 개의 조회 회수를 기록합니다.

 

개화기나 일제시대에 미국발 개신교는 아무리 조선에서 유통된다 해도 일제말까지 개종자의 비율은 조선 총인구의 2%도 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에 로스토우 류의 근대화론이 한국 지식계를 강타했지만, 그 땐 말 그대로 '인테리 사회'의 토론거리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사상 상품'인 음모론은, 한국에서도 실시간으로 유통돼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소셜미디어의 시대는 'K문화'의 세계적 범람을 가능케 하는 반면 한국의 대중적 의식, 대중적 지성의 문도 활짝 열어놓은 거죠. 그 문에 바로 들어온 것은 미국발 극우적인 정치적 팬타지의 세계입니다.

 

이제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대중 지성'은, 왜 이토록 음모론에 약할까요? 전체 미국인 성인 중에서는 약 25%나 코로나를 "어떤 국가 (대개는 중국)가 고의적으로 계획해 퍼뜨렸다"라고 믿고, 고졸 이하 학력의 공화당 지지자 중에서는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48% 정도나 됩니다. 22% 정도는 기후 변화의 문제를 '사기극/음모'로 보고, 21%는 '일루미나티'가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는 중소 도시에서 사는 고졸 이하 학력의 백인 남성이라면, 적어도 한 가지 음모론을 믿을 가능성은, 믿지 않을 가능성보다 높습니다.

 

사실 상당수의 미국 대중들의 심상지리는 각종 음모론에 의해서 형성되는데, 그 만큼은 가장 대중적인 음모론들을 일종의 '신흥 대중 종교'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세계 인식에는, 음모론들이 전통 종교에 비해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도 할 수 있죠. 참, 한국 같으면 전형적인 음모론 수용자는 아마도 근본주의적 성향의 기독교 교회에 다니는 중년의 고-대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통 종교와 음모론이 일부 겹쳐지는 셈이죠.

 

음모론은, 아주 복잡한 문제를 아주 단순화시키는 인식론적 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컨대 구글 등 하이텍 기업들은 대체로 공화당보다 민주당에 더 호의적이라 할 수 있긴 있습니다. 트럼프류의 공화당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신고립주의가 그들의 글러벌 장사에 방해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공화당에 정치 자금을 대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현실적 힘을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이텍과 공화당 관계'라는, 사실 복잡하고 다차원적 문제를, 음모론이 '구글 검색 결과가 트럼프에 불리한 방향으로 조작돼 있다'는 식으로 단순화시킵니다. 이런 음모론이 쉽게 퍼질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학교에서 '과학적인' 사회 과학 교육이 부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대로라면 민주주의란 '국민이 뽑인 사람들이 국민들의 뜻대로 정치한다'는 것인데, 이게 실질적인 의회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의 각종의 이해 집단 사이의 역학 관계, 대자본과 주류 정치의 복잡한 유착 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라기보단 현실과 무관한 '당위론'입니다.

 

이 당위론만 알고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현실 정치의 그 기막히는 각종 금권 지배, 정경 유착 현상들을 보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인지 부조화가 심하게 나타나죠. 그 인지 부조화를 해결해주는 것은 '모든 문제'를 유대인의 음모/중국 공산당 뇌물/일루미나티 지배로 단수하고 쉽게 설명해주는 각종 만능 음모론들입니다. 그런데 또 동시에 음모론들을 강화시키는 것은 대중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국가 폭력 기구들의 불투명성이기도 하죠.

 

쿠바의 카스트로를 600번 이상(!) 암살하려 시도한 게 미국의 CIA인데, 이런 조직이 9.11의 배후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 기막히는 전세계 암살, 전복, 파괴 활동을 알게 되는 사람의 자연스로운 '의심'의 발로죠. 그 '의심'을 불식시키자면 CIA가 훨씬 더 투명해야 하는데, 지금은 대중은 그렇다 치고 미국 의회도 CIA 활약의 전모를 다 파악하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불투명성은 음모론들을 키우고 있죠.

 

실제로 너무나 비민주적이고, 관료 기구들이 유권자들의 견제를 너무나 받지 못하는 우리 현재 세계는 음모론들의 당연한 온상입니다. 그런데 음모론이라는 인식의 틀은 사실 대중적인 '운동'을 심하게 위축시키는 쪽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소어성애자들이 CIA와 민주당을 장악해 각종 악행을 저지른다'고 철석처럼 믿는 사람은, 자본주의 극복은 물론이거니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마저도 키우기가 힘들 수도 있는 거죠.

 

음모론의 횡행은 대중이 '민중'으로 발전하는 걸 가로막고 있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좌파가 음모론 장사꾼이 만드는 영상 그 이상으로 더 쉽고 재미있고 간편하게 맑스주의적인 자본주의 위기의 분석을 영상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하고 그걸 유통시킬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니죠. 

 

(기사 등록 20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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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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