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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한국의 양심수가 말한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1. 15.

한국의 양심수가 말한다: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이제야 이 책을 받아 봤습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한국에서 노르웨이까지의 항공편이 매우 드물어, 옛날에 1주일만에 가던 소포들은 이제 한 달 이상 갑니다. 이 책의 우송에도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석기 전 의원이 낸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입니다. 이석기 전 의원이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저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에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양심수를 가둘 리가 없으니까요.

 

양심수를 극우 정권이 가두고 자유주의 정권이 사면해주지도 못했다면, 이거야말로 한국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한국 자유주의 세력의 한계라고 봐야겠죠. 그래도 옥에 갇힌 양심수가 책이라도 낼 수 있으니 위안이 되긴 합니다. 1970년대 김지하, 1980년대 김남주가 감옥에 있었을 때에 그 시들이 혹은 국외에서 번역, 출간되고 (저는 양심수 김지하 시의 그 당시 스웨덴어 번역도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혹은 국내에서 지하에서 유통되었는데, 이젠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민중의 소리' 방송국에서 이처럼 정식으로 양심수의 옥중 수상록을 내니... 그래도 역사가 천천히나마 진보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한국 진보 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석기 전 의원 같은 분들은 이 운동의 흐름 속에서 소위 'NL' 계열, 즉 좌파 민족주의 계열에 속했습니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고전적인 민족주의적 사고의 일부 편린들을, 이 책의 텍스트에서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석기 전 의원은 - 1930년대 이후 대부분의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그래 왔듯이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낭가 사상' 내지 어떤 자주적 입장의 표현으로 해석한 신채호의 유명한 글을 비중 있게 인용하기도 합니다 (118~119).

 

그런데 이와 같은 극히 일부의 부분을 제외하면 이 전 의원의 수상록에서 보통 진보 운동 진영에서 '보편적 진보 가치'라고 생각하는 주요 좌표와 다른 그 어떤 내용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이 현재 'NL'계열의 정치 사상의 표현이라면 그들과 'PD', 즉 계급론적 진보 사이의 차이란 어디까지나 '늬앙스'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표현의 방법, 강조하는 점 등에는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양쪽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는 동일하다고 볼 여지 역시 큽니다.

 

예컨대 북핵 문제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는 이석기 전 의원은 고난 속에서도 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북조선 사회의 '', 즉 저력 등을 보다 강조하고, 핵에 의해서 나름대로 강화된 북조선의 국제적 입장을 지적합니다 (89~96). 저와 같은, 고전적 'PD'에 더 가까운 입장에서는, 핵 무장은 당연히 북조선으로서는 '자위', 즉 스스로 방어 차원의 정책이었으며 불가피한 면이 강했지만, '' 자체의 문제성을 차치하더라도 북핵 문제로 인한 북조선 경제 성장의 상대적 둔화, 그리고 그 속에서 추가적 고통을 받게 되는 북조선 민중의 아픔부터 먼저,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인식될 것입니다.

 

물론 북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만큼 여태까지 국가 주도의 개발 속에서 군수 공업, 그리고 기초 과학이 북에서 착실히 발전돼온 것도 사실이고 이를 '저력'이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닐 터인데... 'PD'의 입장이라면 아마도 일단 북조선 민중이 이 개발을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들부터 먼저 인지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강조', 내지 '해석'의 늬앙스적 차이가 있더라도, 이석기 전 의원이나 저나 북핵 문제가 원만한 북미, 북일 수교로 완결되어 북조선이 남한과의 경협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돼 그 민중의 삶이 하루 빨리 여러 면에서 개선되길 원하는 것입니다. , '강조'를 좀 다르게 하더라도 정책적으로는 결론은 어차피 같을 것입니다.

 

좌파 민족주의 계열의 출신이지만, 계급 문제에 대한 이석기 전 의원의 입장은 계급론적 진보의 보편적 관점과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예컨대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가 특권 세습의 합리화 메커니즘으로 전락된 점을 지적해 이 타파책으로 대학 평준화를 언급하고 (174), 최상위 부유층에 대한 90% 세율의 상속세를 부과함으로서 부 세습의 사슬을 끊는 걸 주장하고 (186~187),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야말로 진보 정당의 튼튼한 태도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64). 제가 봐도 이 부분들이야말로 계급론적 진보의 핵심 의제로 선정돼야 합니다.

 

한미 동맹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탈동맹', 즉 미-러 사이에서 나름대로 자국 중심의, 등거리적 외교를 펼치는 나토 국가 터키와 같은 실리 위주의 등거리 행보를 벤치마킹해서 한국형 등거리 외교의 모색을 제안합니다 (109~115).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는 터키보다 아마도 핀란드나 오스트리아 같은 영세 중립국들이 더 적절한 사례가 되겠지만,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의 평화, 탈군사화가 중립화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수 많은 진보 사상가들이 동의하는 점입니다. , 이석기 전 의원의 '탈동맹'은 어떤 '민족주의' 발로라기보다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매우 절실한 급진적 정책 제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이 책을 읽는 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을 딱 둘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책을 통해 저와 대화를 나누는 이 분은 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하고, 왜 한국의 진보계가 양심수 석방의 운동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컨대 국회 의원 6명이나 가진 정의당이 이 전 의원의 석방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과연 '정의'인가요?

 

위에서 언급된 중요한 정책적 제안을 하신 분은, 감옥이 아닌 국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부의 재분배를 위해 활약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반도 평화와 보다 평등한 사회 만들기에 대한 토론을, 그가 왜 감방으로부터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를 사면해주지 못한 현 정권에 대해 과연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역사가 과연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정신에 대한 이 배반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요?  


(기사 등록 20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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