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트럼프에게 표를 주는 미국의 백인 소도시 노동자들, '국민 전선' 같은 극우들에게 표를 주는 프랑스의 백인 남성 노동자들, 아니면 푸틴을 열렬 지지하는 현재 많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봤을 때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를 매장시킬 세력', 나아가서 계급 사회의 5천년이나 된 그 한계를 넘어 인류 전체를 '필연성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이끌어나갈 계급으로 본 마르크스 선생이 정말 오류를 범했나, 이런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합니다.
노동자들은 정말 내재적으로, 본질적으로 어떤 특별한 '혁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요? 한 번 이 문제를 같이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 예비적인 답변은, "상황에 따라, 광의의 노동계급 속의 일부 계층들이 혁명적일 수 있다" 정도입니다. 즉 노동자라고 해서 꼭 특별히 진보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황과 입장, 위치에 따라서 잠재적으로 '혁명성'을 지닐 수 있는 일부 계층들이 노동계급 안에 있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노동자'라는 말은 하도 광범위해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이 본질적으로 달라진다는 점부터 기억해야 합니다. 구글사에서 예컨대 L9 레벨의 '고급 엔지니어'는 비롯 일 년에 약 170만불 정도 받긴 하지만, 그가 생산한 잉여가치의 일부가 주주들의 배당금으로 지불된 이상 <자본론>의 논리로는 일정한 '노동자성'을 보유하긴 합니다. 단, 구글과 같은 사실상 독점 업체에서는 '노동자성'을 보유한다 해도 노동자들도 그 과독점에서 발생되는 초과이윤의 일부를 받아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구글사 엔지니어들이 거의 전부 다 그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니까 '노동자성'과 '자본가성'을 겸비한다고도 볼 수 있죠.
좌우간 구글사 엔지니어들처럼 체제 안에 깊이 편입된 '최고급' 노동자들도 있는가 하면 마르크스 시대의 대부분의 노동자처럼 그야말로 '무산자'로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1850년대에, <자본론>을 쓰면서 맨체스터에 가서 직접 볼 수 있었던 방직공들은 그 당시 화폐로 1년에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약 58~66파운드이었습니다. 1851년 경제 통계에 의하면 말씀입니다. 같은 통계에 의하면 엔지니어의 연봉은 479파운드이었습니다. 엔지니어 연봉으로는 아파트나 집을 빌리거나 사고,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아프면 의사에게 가고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글쎄, 그 월급의 약 75%를 그냥 입에 풀질하는 데에 써야 했습니다. 나머지는 집세로 나가고, 간단한 옷 하나 장만하는 것도 사채를 쓰거나 오래 저축해야 하는 '큰 일'이었습니다. 이런, 고통밖에 보이지 않는 삶을 목격한 마르크스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이들 무산자야말로 계급 사회의 족쇄를 분쇄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투표권이 없어 '시민'도 아니었는데, 이 체제의 존속을 원할 만한 근거라도 별로 없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약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마르크스의 제자를 자임한 레닌은 1890년대 중반부터 상트-페테르부르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자, 그 중에서도 주로 고숙련 남성 노동자들과 조직 사업, 지하 서클 사업하면서 나중에 그 경험을 바탕 삼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쓰는데, 거기에서 좀 충격적인 말 하나 있습니다. 노동자들을 그냥 놓아두면 그들이 조직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집단 의식이란 노조의 경제투쟁과 같은, 생활의 향상에 대한 의식이지, 사회주의적 의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레닌에 의하면 사회주의적 의식을 지식인 활동가들이 노동자들 사이로 '가져다주어야' 했다는 것이죠. 이걸 가지고 아나키스트 등이 레닌의 '엘리티즘' 등을 막 비판했지만, 책이 아닌 현장 지하 사업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경험적으로 잘 알았던 레닌이 쓴 것은 엄격히 사실일 뿐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레닌 같은 학출 운동가들의 무계급 사회, 사회주의 이야기에 비교적 쉽게 호응하긴 했지만, 학출 운동가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노동자들이 스스로 원했던 것은? 맞습니다. 임금 인상, 노조 합법화, 공제회 조직과 병가의 제도화, 산재 보험의 제도화, 그리고 무엇보다는 아이들을 교육시켜 '사람', 즉 중산층 고학력자로 만들어주고 이 저주스런 공장을 떠나게끔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 스스로의 꿈은 '사회주의'라기 보다는 생활 향상, 복지 사회의 건설, 그리고 다음 세대의 고학력화, 중산계층화이었습니다. 그들이 자본주의의 족쇄를 분쇄하는 것보다는 그 족쇄를 채운 채라 하더라도 '나은 삶'을 원했던 거죠.
그 꿈은 1945년부터 약 30년 동안 이어진 자본주의 전후 호황기에 동서유럽과 북미, 그리고 일본에서 어느 정도 실현됐습니다. 자본주의 - 내지 동구식 적색 개발주의, 당 관료들이 관리하는 중앙집권적 경제 - 의 족쇄는 그대로이었지만, 노동자들에게 잉여가치의 일부분이 '복지'를 통해서 사회임금 형태로 돌아오고, 생산성의 제고 등으로 절대적 임금액도 많이 올랐습니다. 레닌이 만난 노동자들의 숙망대로 사회적 보험들이 제도화되고 노조들이 나름의 힘을 갖게 되고 노동자들이 중산계급처럼 집과 차를 소유하게 되고 그 자녀들이 무상화된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게 됐습니다.
이 호황 속에서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핵심부나 동구 같은 지역의 많은 노동자들은... 점점 보수화돼 간 것입니다. 예컨대 1968년에, 학생들의 치열한 데모에 힘입어 프랑스의 천만 명 노동자들이 그 역사상 최고 규모의 총파업을 벌였지만, 이미 보수화된 공산당이 지도한 그들이 원했던 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임금인상과 일터에서의 권리들의 강화 정도이었습니다.
쏘련 노동자들이 1962년의 노보제르카스크에서 임금인상, 생산량 노르마의 인하 등을 위해 데모하다가 학살을 당했고, 1970~80년대의 폴란드 노동자들이 민주화와 임금 인상, 보다 나은 소비품 공급, 그리고 폴란드의 실질적인 주권의 회복을 위해 운동했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 달성 같은 건, 지식인 운동가들의 중요한 고민이었지만 노동운동의 과정에서는...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부 (고숙련, 고임금, 특히 남성) 노동자들의 보수화를, 한국에서도 최근 20여년 동안 일부 대기업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호황은 결국 끝났습니다.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장기적 불경기에 들어간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노동자들의 '절대적, 상대적 빈곤화'가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모든' 노동자들이 똑같이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공무원 노동자들은 여전히 나름의 보호를 받고 있고, IT같은 분야의 노동자들이 어쩌면 IT붐에 힘 입어 세계화의 수혜자가 되었지만, 금속 공장의 노동자이었던 아버지가 거기에서 잘리고 그 자녀가 기껏해야 아버지 때보다 조건도 안 좋고 불안하기만 하는 맥도널드스나 아마존에서의 저숙련, 저임금 노동만 하게 되는 사회적 신분 저하의 경우들도 수두룩합니다.
노동계급은 파편화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찢겨지고 말았습니다. 세계화의 영향을 덜 받거나 (공무원 노동자) 세계화의 덕을 본 (IT부문 노동자) 노동자나 유색 인종의 노동자,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에서는 자유주의자 바이든을 지지할 확률이 높지만, 불경기 속 신분 강등을 겪은 소도시 백인 남성 노동자라면 거의 확실하게 극우 트럼프의 지지층일 것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여전히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고, 노동계급의 고유 의제도 이렇게 일부분 (사회적 보험 강화, 고등교육의 무상화 문제 등)은 자유주의 진영에, 일부분 (실업 대책, 재공업화)은 극우 진영에 각각 '위탁' (?)된 것이죠.
그러면 자본주의를 매장시키고 자본주의 '다음'에 올 사회를 건설하는 노동자상을 그린 건 마르크스의 오류이었는가요? 꼭 그렇지 않습니다. 파편화되고 그 입장과 신분이 대단히 다양화된 노동계급 안에서는, 자본주의 극복을 열렬히 원할 만한 이유가 있는 여러 계층들이 분명 있죠. 예컨대 기후 변화로 인해서 이 지구별에서 생존하기가 어려울 오늘날의 젊은 노동자들, 특히 기후 변화로 인해 살인적 폭염이 여름에 일상화될 지역 (남유럽, 인도 내지 한국)이나 침몰 당할 것으로 보이는 지역 (방글라데시 등)의 젊은 (즉, 지구에서 인간의 생존이 극히 어려워질 21세기말까지 살아 있을) 노동자들, 특히 한국처럼 (북구로 이동할 수 있는 유럽연합의 남부와 달리) 노동시장이 폐쇄돼 있어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들을 '이민'을 통해 해결하기 어려울 지역의 젊은 노동자들은 반자본주의 투쟁에 나설 '이유'는 아주 충분합니다.
이윤을 위한 경제 운영이 멈추지 않는 이상, 즉 자본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이상 그들의 물리적 생존 자체가 극도로 위협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산층이나 전문가층, 부유층은 그나마 아직도 인간이 생존하기가 더 쉬운 다른 지역으로 이민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국경' 안에 갇힌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재앙의 희생자가 될 확률이 큽니다. 이외에는 예컨대 20~30대 고학력 비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상대적으로 더 많은 불이익을 당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더 쉽게 급진화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즉, 한 마디로는, 마르크스가 꼭 틀린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닌데, 이 결론을 현재의 문제들, 즉 기후 위기와 젠더 이슈, 노동 불안화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구체화'시키는 건, 즉 '어떤' 노동자들의 급진화가 가장 쉬울 것인가를 고찰해보는 것은 중요할 것 같습니다.
(기사 등록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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