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리델(John Riddell)
번역: 두견
<교차로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의 총회, 1922~1923>, 2018, 마이크 태버(Mike Taber). 코민테른 사료 출판 프로젝트의 최신작인 <교차로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이하 ‘교차로’)에 대한 서평이다. 특히 공동전선 정책에 초점을 두고 평가하고 있고, 나아가 코민테른 변질의 초기 과정도 보여 준다. 이것은 곳곳에서 극우익 세력과 반동 시도가 성장하고, 그것에 맞서는 기층 민중의 연대 필요성이 제기되는 오늘날에도 영감과 교훈을 주는 측면이 있다고 보여서 번역했다. 이 글의 필자인 존 리델(John Riddell)은 캐나다의 사회주의자이고 코민테른 역사에 대한 탐구와 재해석으로 국제적 좌파에 큰 기여를 해 왔다.
출처:
코민테른 회의가 열리는 장면. 1920
1922~23년 세계적 주요 회의와 함께 확대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ECCI)의 세 개의 주요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는 세계적 운동의 활력과 치열한 토론 문화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 책은 25일 동안의 숙의 내용을 담은 녹취록에서 번역된 세 차례의 ECCI 모임 토론의 전문을 담고 있다. 마이크 태버의 상세한 주석이 1세기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풍부한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코민테른 사료 출판 프로젝트의 제 8권
전체 코민테른 출판 프로젝트에는 현재 8권의 주요 출판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2권의 출판물이 더 있다. 태버는 마르크스주의적 통찰력과 학문적 정확성의 모범적인 기준을 유지하며 그들 모두에 도움을 주었다. 포괄적인 해설 주석을 광범위한 전기, 참고문헌, 연대표로 보충한다.
코민테른의 의장인 그리고리 지노비예프(Grigorii Zinoviev)는 나중에 이 확대된 ECCI 모임을 "작은 세계 회의"라고 칭했는데, 이는 이 행사의 넓은 범위에 대한 찬사였다. 수십 개국에서 100명까지 대표단이 참석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유럽 출신으로 식민지와 종속 지역 출신 참여자가 적었고, 이들의 해방 투쟁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었다. 반식민지 투쟁은 1920년 제2차(1920년)와 제4차(1922년) 세계회의뿐 아니라 동양 인민 바쿠회의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초기 코민테른 회의의 체크리스트
제1차 세계대회, 1919년 3월 2일~6일.
제2차 세계대회, 1920년 7월 19일~8월 7일.
제1차 동방 인민 대회. 1920년 9월 1일~7일
제3차 세계대회, 1921년 6월 22일~7월 12일
제1차 집행위원회 확대회의, 1922년 2월 21일 ~ 3월 4일.
제2차 집행위원회 확대회의. 1922년 6월 7~11일
제1차 극동지역 노력자 대회. 1922년 1월 21일
제4차 세계대회, 1922년 11월 5일~12월 5일
제3차 집행위원회 확대회의, 1923년 6월 12일~23일
공동전선에 집중하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코민테른이 오늘날 우리와 관련성이 풍부한 주제인 공동전선 정책을 어떻게 정교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1922년에 처음 두 번의 확대된 ECCI 회의가 열리기 전의 주요 쟁점은 1921년 12월 코민테른이 자본주의적 반동에 맞서 노동자들의 가장 즉각적이고 긴급한 요구를 방어하기 위해 -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사람들까지 포함한 - 노동자 단체들의 "공동 전선"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이 테마는 파시즘의 위협에 공동전선 정책을 적용한, 다음해 개최된 제3차 확대 총회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그러나 코민테른 정책의 일관성 있는 그림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1921년과 1922년에 개최된 두 개의 세계 대회와 함께 ECCI 총회를 평가해야 한다(초기 코민테른 회의 표 참조). 두 번의 세계 대회는 노동자들의 통일된 행동의 필요성에 초점을 맞췄지만, 그러한 공동전선 정책에 대한 토론은 포함하지 않았다. 이 토론은 ECCI 총회에서 이루어졌다. 위의 책에서 태버의 머리말은 이러한 의견교환을 그 기간 동안 코민테른의 전체 역사의 맥락 속으로 밀어넣는다.
공동전선의 기원
1921년 12월 공동전선 정책이 채택되었을 때 이데올로기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계급 경향들의 공동 행동은 이미 긴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역사는 코민테른의 토론에서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레닌은 1917년 코르닐로프의 우익적 전복 시도를 패배시키는 데 함께하는 등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경쟁자인 멘셰비키와 행동으로 단결하려 노력한 볼셰비키의 오랜 역사가 공동전선을 미리 보여줬다고 봤다. 이 기록이 12월에 ECCI가 채택한 공동전선에 관한 테제 중 19번에 요약된 것은 레닌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제1차 확대 ECCI 총회에서는 공동전선의 기원에 관한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제시되었다. 그레고리 지노비예프 코민테른 의장은 1920년 영국 공산주의자들이 영국 노동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도록 한 레닌의 요구와 1920년 바르샤바 진격에서 소비에트 적군이 패배한 후 러시아를 포함한 전체 노동운동이 후퇴한 것에 대한 코민테른의 대응에서 공동전선 정책을 역추적했다.(‘교차로’, 104~7)
지노비예프가 연설한 지 이틀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August Thalheimer) 독일 공산당 지도자는 독일의 기층 노동계급에 의한 주도력에서 공동전선의 기원을 추적하며 또 다른 혈통을 제시하였다. 특히 1920년 3월 우익들의 쿠데타 시도를 무찌른 독일 노동계급의 성공적인 대규모 총파업을 예로 들었다.(‘교차로’, 140~42)
지노비예프는 공동전선 정책을 국면적이고, 전술적이고, 단기적인 것으로 제시했고, 레닌과 탈하이머는 다른 방식으로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것으로 봤다. 지노비예프의 접근법은 제1차 ECCI 확대 총회의 논의를 지배했고, 이후 보다 전략적인 접근이 우세해졌다. ECCI가 공동전선 정책을 채택한 지 두 달 후인 제1차 확대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 새로운 노선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노르웨이에서 다수 코민테른 분파를 포함한 소비에트 공화국 밖의 대부분의 최대정당들과 독일의 큰 소수정당에서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다.
태버의 머리말은 이들 좌파의 여러 대의원들이 '위로부터의 공동전선'이라는 제안 대신에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을 요구했는데, 이는 노동운동에서 다른 경향의 지도자들과 거래할 이유가 없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한다. 태버는 "코민테른 지도부는 그러한 이분법을 거부했다"고 설명하면서 이 두 개념은 분리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아래로부터 공동전선'이라는 생각은 바로 그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기존 노동계급 조직의 수장들을 넘어서 프롤레타리아의 통일된 행동이 가능했다면 공동전선이 전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통일된 행동을 요구할 수 있어야 했다. (‘교차로’, p15)
많은 지역이 기근으로 큰 타격을 입은 소비에트에 대한 국제적 노동자들의 연대 지원에 대한 빌리 뮌젠버그(Willi Münzenberg)의 보고서는 코민테른이 국제적으로 조율에 성공한 첫 번째 공동전선 캠페인이 무엇인지를 묘사했다. 그 노력은 산하 공산주의 여성운동과의 연계에 의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오래 끈 논쟁 끝에, 총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대표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동 행동 속에서 우파적 노동자들의 지도부에 도전한다는 개념을 승인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1921년 4월 2~5일 코민테른과 제2인터내셔널("노동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및 제2.5 인터내셔널("비엔나 연합")의 지도부 대표단들의 역사적인 만남에서 적용되었다. 두 달 후, 제2차 확대 ECCI 총회는 프랑스, 노르웨이, 체코슬로바키아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이 회의의 결과와 새로운 정책 적용 과정을 평가했다.
제4차 세계 대회
제3차 ECCI 확대 총회 이전 1년간의 기간은 거대하고 권위 있는 세계 회의인 제4차 세계대회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 중심 테마 중 하나는 공동전선 정책을 단순한 단기 전술적 술책이 아니라 전략적 관점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 지도자인 칼 라데크가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여기에는 관점의 변화가 수반되었다.
“오늘날 공동전선 전술의 적용은 내가 보기에 초기와는 성격이 다소 다른 것 같다. 처음에 공동전선 전술은 프롤레타리아의 광범한 후퇴를 덮는 방법이었다. 이제 내가 보기에 공동전선 전술은 아군의 집결과 배치, 새로운 전진을 준비하는 보호책인 것 같다.”
대회는 또한 "노동자 정부를 위해"라는 슬로건을 소비에트 러시아 모델의 노동계급 국가 건설을 향한 과도기적 요구로 채택했다. 대회는 또한 식민지와 반식민지 세계에서 "반제국주의적인 공동전선"을 포괄하기 위해 공동전선의 시각을 확장했다. 이는 이후의 식민지 해방 투쟁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접근 방식이었다.
왜 교차로인가?
폭넓은 합의와 이데올로기적 통합으로 뒤덮인 제4차 대회는 18개월 후, 1921년에 코민테른의 극좌파 세력이 주창했던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 접근 방식으로 되돌아가면서 날카로운 전략적인 전환을 단행한 세계회의가 뒤를 따랐다. 그 후, 노동계급의 단결에 대한 코민테른 정책은 20여년 동안 반복된 급진적인 전환을 거쳤다.
따라서 제4차 세계대회와 제5차 세계대회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1923년 중반에 개최된 제3차 ECCI 확대 총회를 전환점 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서로 갈라지는 다른 경로가 가능했던 결절점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3차 확대 총회는 이 책의 제목을 따온 개념인 '교차로'였다.
제3차 확대 총회는 레닌의 참여나 안내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한 최초의 주요 코민테른 모임이었다. 그는 1923년 3월부터 병으로 무력화되었다. 이전의 모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러시아 공산당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러시아 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증가하는 불화로 인해 도전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태버에 따르면, 세 번째 총회는 "몇 가지 면에서 모순된 만남이었다. 즉, 그것이 한 일보다 논의하지 않은 일에서 더 그렇다."(18 쪽) 제3차 대회(1921년)와 제1차 ECCI 확대 총회(1922년)에서 다뤄졌던 러시아 내부적 문제는 1923년 모임에서 거론되지 않았다. 또 몇 달 뒤 절정에 이른 독일의 사회정치적 위기는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를 통해 극히 제한적으로만 다루어졌다.
제외된 또 다른 큰 쟁점은 중국에 대한 코민테른의 정책이었는데, 1월에 새로 결성된 소비에트 연합은 쑨원(Sun Yatsen)이 이끄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부와 동맹에 서명했다. 1923년 1월, ECCI는 공산주의자들이 쑨원의 당인 국민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확언했었다. 코민테른의 중국 정책은 곧 처참하게 빗나갈 것이었다.(이 블로그의 "블록 내부의 열매와 위험"을 보라)
태버는 논평하면서, 일부 약점에도 불구하고 제3차 ECCI 확대 총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 초기의 4번 대회와 2번의 확대 총회와 대체로 연속성이 있었으며, 몇 가지 주요 분야에서 코민테른의 정치적 유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총회는 라데크가 다음과 같이 표현한 공동전선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종합을 달성했다.
“제2, 제2.5 인터내셔널의 리더들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협상할 것이 아니라, 이 분야에서 확실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경우에 협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하는 곳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앞쪽으로 침투할 것이다. 이 정책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정면공격을 감행해야 하지만, 우리는 민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최소요구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항상 공동전선의 방법을 통해야 한다.”('교차로', 285쪽)
제3차 확대 총회는 또한 노동자 '그리고 농민'의 정부를 향한 슬로건을 채택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필요한 계급 동맹을 가리켰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공동전선
총회의 가장 큰 단일 업적은 이전의 코민테른 논의에서 범위가 제한적이었던 영역인 파시즘에 저항하는 실행 가능한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성과는 존 리델과 마이크 태버의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과 파시즘과의 투쟁"과 헤이마켓 출판사가 펴낸 제트킨의 단편선집 "파시즘과 싸우다"에 실려 있다.
그러나 총회의 날카로운 분석은 취약한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독일에서 가장 노골적이었던 인종주의, 식민주의, 반유대주의적 극단주의에 대한 파시즘의 전념을 과소평가했다. 파시즘에 대한 총회의 결정이 부분적으로는 파시즘에 매료된 노동자들과의 토론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도 적용되었다.
이 쟁점은 카를 라데크(Karl Radek)의 "슐라게터 연설"에서 독일 루르 지역을 점령한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으로 처형된 "반혁명의 용기 있는 군인"인 확신에 찬 파시스트 레오 슐라게터(Leo Schlageter)를 추모하면서 제기되었다. 태버의 머리말은 라데크의 "어느 정도 서정적인 시도"를 "공상적 비행"이 아니라 민족주의 성향의 대중과 그들의 반동적 자본주의 지도자들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는 이유 있는 시도로 간주하며 날카롭고 균형 잡힌 평가를 제공한다.(‘교차로’, 24~27쪽)
공산주의 여성으로부터 보고
압도적으로 남성들인 이들 모임은 "여성 문제"에 대한 두 개의 극히 간단한 보고를 들었다. 첫째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제1차 확대 총회에서 준 것으로, 공산주의 여성 운동의 주요 분야를 항목별로 구분하여, 특히 "모든 나라에서 국제 여성의 날 행사"의 조직과 여성들의 "기근 구호 운동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인 역할"에 주목했다.(‘교차로’, 101쪽)
제트킨이 총회의 여성 위원회를 대신하여 제3차 총회에게 제출한 두 번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여성 문제에 대한 국제여성회의와 제3차 세계대회의 결정이 모두 충분히 진행된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고 말씀드려야겠다.(‘교차로’, 689쪽)
관료주의의 전조?
제3차 확대 ECCI 총회 이후 불과 1년 만에 코민테른은 국가적 지도부가 자주 뒤집히거나 위로부터의 강권에 의해 결정이 취소되는 관료주의적 중앙집권주의의 병폐에 감염되었다. 1923년 모임에서 이 병폐의 초기 징후가 보였는가?
'교차로'의 목차를 뒤져 보면, 1923년 제3회 총회에서 니콜라이 부하린의 <코민테른에서 중앙집권주의의 한계>에 관한 보고에 눈길이 쏠린다. 이틀간의 토론이 진행된 이 의제의 초점은 코민테른이 노르웨이 부문과 맺은 관계였는데, 그들은 아직도 전체 포괄적인[다양한 정치 경향의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노동당의 기원이 뚜렷이 드러나 있는 대중조직이었다. 제3차 총회에서 ECCI는 처음에는 노르웨이의 정당이 코민테른 규약과 가입 조건이라는 조직적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토론 과정에서 일부 연설자들은 국가적 지도부와 ECCI의 관계는 단순히 지휘자 중에 하나라고 주장했다. 국가적 지도부의 자율성을 중요하게 강조하면서 '코민테른 규약 및 가입 조건'의 구절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태버는 토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토론의 일부는 당사자들의 지역 활동과 전술에 대한 ECCI의 개입을 증가시키고,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어떠한 제약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갔지만, 궁극적으로 채택된 결의안은 노르웨이 당 지도부의 지역적 문제에 대한 권위를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었다. NLP(노르웨이 노동당) 정책 및 구조 변경에 대한 제안은 권고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교차로’, 36~37쪽)
자율성의 존중
이탈리아와 불가리아 등 다른 두 나라의 발전은 개별 국가적 부문의 자율성에 대한 ECCI의 존중과 관련해 추가적 증거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1922년 제4차 세계대회는 오랫동안 코민테른 지지자였지만 전통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이었던 이탈리아 사회당과의 공산당의 융합을 승인했다. 대회가 끝난 후, 두 기관 모두 이탈리아의 새로 수립된 파시스트 정부의 맹공격으로 휘청거리자, 사회당은 융합 제안을 거부하기로 투표했다. 몇 달 후, ECCI는 제3차 확대 총회에서 처음부터 융합에 반대해 온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가 협정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총회는 국가 지도부를 재구성하는 데 투표하여 이탈리아 당의 융합에 호의적인 소수파에게 일상적인 당 지도력에서 소수파 대표권을 부여했지만, 여전히 융합에 회의적인 다수파 당선자들이 책임을 맡고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 부문 지도부의 구성에 ECCI의 개입은 코민테른에게는 선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부문의 선출된 다수당 지도부를 그 자리에 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불가리아: 제3차 ECCI 확대 총회의 전야에 불가리아의 우파 쿠데타가 급진적 농민당 정부를 전복시키며 지지자들의 무력 저항을 촉발시켰다. 불가리아 공산당은 대규모 지지자와 코민테른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던 인상적인 기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우파 군대의 살인적인 공격에 저항하는 농민 운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며 투쟁에서 '중립'을 선언했다.
총회의 마지막 날, 칼 라데크(Karl Radek)는 불가리아 당의 기권을 문제 삼아 몇 년 동안 명백하게 드러나 왔다고 본 "투쟁할 의지가 없음"에 초점을 맞추며 기를 죽이는 비판을 했다. 이 보고는 불가리아 당 지도부의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ECCI는 이들의 교체를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리더십의 부족
그러나 1923년 확대된 ECCI 총회 논의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이탈리아와 불가리아 양국에 패배의 문을 열어준 근본적인 전략적 오류였다. 두 경우 모두 패배하기 이전 시기에 공산당이 노동자들의 저항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으로 공동전선 정책을 적용하지 못했다. 보통 노동자들의 끈질긴 분열이 해소되지 않으면서 우파적 반동의 승리에 문을 열어주었다. 이탈리아에서 공산당 지도부는 평당원들 밖의 반파시즘 세력과 행동으로 단결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파시즘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ECCI는 이 오류에 얽혀서 제3차 확대 ECCI 총회를 불과 몇 달 앞둔 제4차 대회에서 이 문제를 명확히 풀어내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가 불가리아에서 제기되었는데, 불가리아 공산당은 처음에는 우파 음모가들에 맞서 급진적인 농민에 기반을 둔 정권을 옹호했으나 나중에는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으로 옮겨갔다. 이 문제는 불가리아에서 ‘노동자와 농민’ 정부의 가능성을 주장하던 제4차 대회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ECCI의 보고서에는 불가리아 농민당에 대한 공동전선적 접근의 필요성 - 그러한 혁명 정부를 향한 분명한 첫걸음이 될 - 을 불가리아 당에 설명한 적이 있다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
두 경우 모두, ECCI의 행위는 해당 부문의 리더십에 대한 선택권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형식적으로는 옳았다. 그러나 ECCI는 이러한 두 국가 부문의 오류에 대한 ECCI의 공동의 책임이 불거질 수 있었던 공동전선 정책의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자기보존적 방식으로 행동했다. 그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ECCI 대표자들이 재앙적 리더십의 실패에 연루된 독일에서의 1921년 "3월 행동"의 후퇴 이후, ECCI는 자신들의 개입에 대한 객관적 대차대조표를 차단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판결하는 ECCI는 자신의 실패들을 용서하고 은폐했다.
제3차 확대 ECCI 총회 당시 ECCI의 자기보존적 행태는 비판과 민주적 통제를 넘어서 모스크바에 기반을 둔 일상적 리더십을 배치하는 경향이 있는 패턴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24년, 코민테른의 이러한 특권주의적 경향은 당시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지노비예프가 이끌던 러시아 공산주의의 지배적 분파의 정책을 비판하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모스크바 ECCI 지도자들의 시도들에서 표현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는 자기 잇속만 챙기는 관료 계층이 세계 운동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1924년 제5차 세계대회에서 명백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레닌의 생전에 추진된 정책에서 코민테른이 후퇴하는 시작을 알렸다.
이러한 진화를 1923년 총회에서 예견할 수는 없었지만, 모스크바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재확인할 필요가 분명히 제기되었다. 1923년 ECCI의 제3차 확대 총회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교차로에 서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점에서 볼 수 있다. 마이크 태버의 설득력 있는 자료 모음집인 <교차로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초기 세계 운동의 많은 장점과 업적을 효과적으로 묘사할 뿐만 아니라, 레닌의 사후 몇 년 동안 세계 운동이 왜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했는지에 대한 많은 단서를 제공하는 기록을 제시한다.
(기사 등록 202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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