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리(Lars T Lih)
번역: 두견
이 글에서 라스 리는 다시 한번 역사적 기록을 치밀하게 살펴보면서 신화와 정설에 도전한다. 그것은 볼셰비키가 1912년에 '새로운 유형의 정당'을 만들려고 했고 이것이 ‘레닌주의 정당’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수많은 책과 논문을 쓴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1990), <레닌 재발견: 맥락에서 본 ‘ 무엇을 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출처: https://weeklyworker.co.uk/worker/912/a-faction-is-not-a-party/
최근 온라인 토론에서는 볼셰비즘과 전체로서 당의 관계에 대한 레닌의 생각이 자주 이슈로 떠올랐다. 1912년, 1917년, 1920년의 세 가지 다른 시점에서 그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조명하고 싶다. 이 첫 회분에서 나는 1912년의 자료를 본다.
제1차 세계 대전 전 해에 이 주제에 대한 레닌의 견해는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다: 볼셰비즘은 하나의 분파(fraktsiia)였고, 이는 더 큰 전체의 일부였다: 즉,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이 이었고 볼셰비키는 당내의 당이었다: RSDLP가 사회 전체에서 특정 강령을 지지하는 것처럼, 볼셰비즘은 더 큰 사회민주당 전체 내에서 특정한 전술적 관점의 묶음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정당 대 사회'처럼 볼셰비키 분파는 당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 특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러한 견해를 전파하고 중앙당 기관들이 그들에게서 영감을 얻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중앙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당이 되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여전히 당의 일원이 될 수 있지만 볼셰비키가 당이 될 수는 없었다 - 사실, 이것은 정상적 상황으로 보여졌다. Fraktsiia ne est' partiia: 분파는 정당이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레닌과 다른 볼셰비키들의 견해였다면, 볼셰비키들이 중앙 위원회에서 압도 다수를 차지했던 1912년 1월의 프라하 대회는 어땠을까? 우리는 오늘날 많은 저술가들에 의해서 이 회의가 이전의 분파가 정당 자체가 된 새로운 볼셰비키 당의 창당을 대변한다고 확신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의 정보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는 압도적으로 분명해진다. 레닌과 볼셰비키 전체는 볼셰비키 정당을 만들려고 나서지도 않았고, 볼셰비키 정당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이런 목적으로 회의를 조직했다는 것을 완강히 부인했다. 이 결과는 목표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거의 말이 되지 않았다.
최근 폴 르블랑(Paul Le Blanc)은 프라하 대회에 대해 길고 교훈적인 에세이를 썼는데, 이 에세이는 "1912년 프라하 전체 러시아 RSDLP 당대회에서 만들어진 당은, 모든 실천적 취지에서 볼셰비키 정당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모든 실천적 취지에서"이다. 폴은 볼셰비키와 당을 동일시하는 많은 이유를 지적한다:
‘새로운 중앙 위원회는 압도적으로 볼셰비키로 구성되었다. "당[을 지키려는] 멘셰비키"와 연합을 구축하려는 볼셰비키의 노력은 결코 충분히 달성되지 못했다. 다른 분파들은 프라하 대회에서 투표한 중앙 기관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경쟁 기관들을 설립하려고 노력했다(매우 성공적이지 못했다), 1912년의 중앙위원회와 1918년에 공식 명칭에 '볼셰비키'를 추가한 공산당 사이에는 직접적인 조직적 연속성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지만, 1912년 레닌과 볼셰비키의 전망과 목표에 대한 나의 앞서의 진술과는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폴의 반대 주장은 부분적으로 출처에 문제가 있다. 그는 전쟁 이전 당 생활의 직접적인 참여자들로부터 나온 자료를 의미하는 "일차적 자료들"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 이후,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작성된 자료에 압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회고록 등 사건 이후의 자료들을 이용하는 것은 항상 까다롭지만 프라하 대회의 경우 특히 신빙성이 떨어지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다. 1920년대에는, 실제로 두 개의 정당이 존재했는데, 그 시점의 관점을 이전 상황으로까지 되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1920년대에는 당에 분파를 둔다는 모든 생각이 부정당했다.
나중의 자료들을 신뢰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1912년 내부 정당 상황이 유별나게 복잡했기 때문이다. 내 역사학자 친구는 나에게 "1912년경의 앞으로는 머리를 잘 돌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 주제에 너무 매료되기 전의 나 자신의 태도였고, 나는 단지 그 시기의 문서를 읽는 데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흡수하기 위해 두어 달이 걸렸다.
나중에 나온 많은 자료들은 1910~14년의 당내 갈등에 대해 문장이나 한 단락만을 쓴다(가장 유용한 회고록은 이 기간 동안의 정당생활에 대해 상세히 기술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것들이다). 우리는 갈등을 '볼셰비키 대 멘셰비키'로 축소하는 어떤 자료도 급진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 역시 요점을 끄집어내기 위해 상황을 크게 단순화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폴 르블랑은 전쟁 이전 기간에서 직접 가져 온 한 가지 자료를 사용한다. 레닌 자신의 글이다. 나는 폴이 언급한 모든 것을 레닌의 글에서 직접 취한다면, 그의 주요 결론에 제시된 것과 상당히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는 1912년에 레닌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기회주의적 세력이 있는 것의 정당성에 아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한다. 이것은 레닌이, 기회주의가 허용되는 볼셰비키 정당을 만든다는 이상한 그림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폴이 1912년에 볼셰비키의 전망을 "모든 실천적인 취지에서" 실제 결과인 것으로 판명된 것에서 직접 추론할 수 없을 가능성을 충분히 허용하지 않는다고 본다. 나 자신의 에세이에서 나는 레닌의 글과 폴이 꺼내지 않았거나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던 다른 글들에서 몇 가지 주제를 끄집어낼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폴 자신의 훌륭한 레닌 저작선집 <혁명, 민주주의, 사회주의>(London 2008)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된 레닌의 자료를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시작하기 전에 기초자료에 대한 또 다른 한 가지 요점을 말하겠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련 공산당은 당내 분파를 급격하게 부정했다. 따라서 정권은 이 기간 동안 레닌과 다른 이들이 분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에 당황했다. 당혹감을 줄이기 위해, 그들은 적어도 번역에서는 프락치아(fraktsiia)를 '분파'(faction)로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그룹'(group)이나 '부문'(section)과 같은 완곡한 표현에 의존했다. 나는 레닌, 스탈린, 크룹스카야에 대한 번역에서 이런 관습의 예를 발견했다. 아래 논의에서 나는 이러한 위장된 번역들을 수정했다.
분파는 정당이 아니다(Fraktsiia ne est’ partiia)
레닌이 당과 분파의 차이에 대해 모호하지 않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에, 우리 주제에 관한 한 가지 문서는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이 장면은 1909년 볼셰비키 분파의 모임이다. 레닌은 "특정한 전술적 인상을 가진" 그룹으로 정의되는 분파는 당에는 부적합한 기준에 따라서 회원을 배척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텍스트는 <혁명, 민주주의, 사회주의> 202~03쪽에서, 필요에 따라 재번역했다).
“우리 당에서 볼셰비즘은 볼셰비키 분파로 대표된다. 그러나 분파는 정당이 아니다. 정당은 의견과 의견의 그늘을 전체적인 범위에서 포괄할 수 있는데, 그 양극단은 극명하게 모순될 수 있다. 독일당에서는, 카우츠키의 뚜렷한 혁명적 날개와 나란히, 베른슈타인의 초수정주의적 날개가 보인다. 그것은 분파의 경우에는 그럴 수가 없다.
당내의 분파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당 내에서 그들의 원칙에 대한 수용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확실한 방향에서 당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결성된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의 집단이다.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의견의 만장일치가 필요하다. 볼셰비키 분파의 내부 불협화음에 대한 질문이 정말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의 통일과 분파의 통일을 위해 우리가 정한 서로 다른 기준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서 레닌은 "멘셰비키의 소수파"도 반청산주의적이기 때문에 멘셰비즘과 '청산주의(liquidationism)'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진전시킨다. 그는 그의 볼셰비키 청중들에게 그가 멘셰비즘을 부드럽게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우리의 멘셰비키와의 전술적 차이점을 가라앉힐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 노선에서 멘셰비키의 일탈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볼셰비키 분파가 당내에서 그 정체성을 해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볼셰비키들은 당적 입장을 지배적으로 만드는 데 상당한 노력을 했지만, 같은 방향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위해 당내에서 확실한 이데올로기적 흐름으로 볼셰비키 분파가 존재해야 한다.”
레닌은 볼셰비키들이 당을 "보존하고 통합"하는데 가장 헌신적인 분파 즉, 기본적인 강령과 제도에 대한 도전을 물리치는 분파라고 칭찬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정확히 이 역할 때문에, "이 역경의 시간에, 청산주의에 대항하여 마르크스주의와 당파성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분파의 당파주의자(partyist)들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쪽의 범죄일 것이다."
레닌의 입장은 명확했다 : 분파는 당과 다른 종류의 실체인데, 당원에 대한 매우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당에 대한 위험은 멘셰비키 분파를 규정하는 전술적 시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전술적 견해에 대한 싸움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청산주의와의 싸움과는 전혀 다른 정신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볼셰비키들은 당을 이끌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확실히 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레닌이 1912년에 의식적으로 볼셰비키 정당을 창설하기 위해 출발했다면, 1909년에서 1912년 사이에 이러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그는 그랬는가? 나데즈다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는 회고록에서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카프리 정치학교의 경험은 노동자들의 분파주의가 얼마나 자주 상대적이고 특이한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모든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 대중들이 모일 수 있는 통합 정당 센터를 갖는 것이었다. 1910년 투쟁은 당의 존립을 위한 투쟁이었고, 당의 매개체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당내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될 것이고, 결국 당이 볼셰비키 노선을 따를 것이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분파가 아닌 정당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일리치는 1911년 파리 근교에서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브페로드 지지자들과 당-멘셰비키들도 입학할 수 있는 당 정치학교가 조직되고 있을 때도 같은 노선을 취하였다. 1912년 프라하 당 대회에서도 같은 노선이 추진되었다. 분파가 아니라 볼셰비키 노선을 수행하는 정당이었다.”
폴 르블랑은 (소비에트 시대의 호도하는 번역에서) 일부 구절과 문구를 가져온다. "'그룹이 아니다'라며 크룹스카야는 단순히 분파의 조각이 아니라 RSDLP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 폴의 언급은 그대로 맞지만, 크룹스카야가 볼셰비키 분파가 "RSDLP 전체"가 되기를 원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로 그 반대다. 그녀는 볼셰비키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위해 싸우는 것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을 당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수파를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방금 인용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생각해 보라: "1910년 투쟁은 당의 존립을 위한 투쟁이었고, 당의 매개체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여기서 크룹스카야가 논의한 투쟁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중 어느 관점이 당에 의해 선전돼야 하는지로 끝나지 않았다.
그와 다르게 좀 더 평범하고 덜 실존적인 투쟁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지하 정당이라는 바로 그 제도적 존재에 대한 인식된 위협과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양쪽에 의해 공유된 기본적인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전파하는 그들의 임무에 관한 것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볼셰비키들은 우파적인 멘셰비키들에게 그들의 투쟁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할 수 있었다. 1909년의 레닌의 선언과 나란히 놓았을 때, 우리는 크룹스카야가 1909년과 1912년 사이에 레닌이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았고, 분파와 당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계속 보였다는 것을 유달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개의 정당들
그루지야 멘셰비키인 그레고리 우라타제(Gregory Uratadze)의 회고록에서 우리는 이 시기의 당의 사건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확한 묘사를 발견한다.
“볼셰비즘과 멘셰비즘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청산주의'를 중심으로 더욱 맹렬한 투쟁이 불붙었다. 당의 용어 목록은 새로운 개념들로 풍부해졌다. '청산주의자(liquidator)', '반청산주의자', '당파주의자'[지하활동의 보존을 원하는 사람], '레닌주의적 당파주의자', '볼셰비키적 당파주의자', '멘세비키적 당파주의자', '청산주의적 지하활동가', 트로츠키적 당파주의자, '트로츠키적 청산주의자', '플레하노프적 청산주의자' 등.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 당 안에서 존재했다!”
'청산주의'와 '청산주의자'라는 용어는 '당파주의(partyism)'와 '당파주의자'로 번역할 수 있는 'partiinost'와 'partiets'라는 상대방에 상응하는 용어들을 만들어낼 만큼 중요한 용어였다. 당파주의자들은 당의 존립 자체를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산주의-당파주의의 분열이 이처럼 격정적이었던 이유와 우라타제(Uratadze)가 보여주듯 그것이 통상적인 분파 노선을 가로지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산주의에 대한 볼셰비키 공격은 이러한 경향이 당에 실존적 위협을 가했고 따라서 다른 분파적 차이가 이에 대한 공동 투쟁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청산주의에 맞서는 주장들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a) 불법 지하 활동의 필요성을 부인함으로써 청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반짜르 혁명 - 스톨리핀(Stolypin)의 러시아에서는 합법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견해들(스톨리핀은 이 기간 대부분 동안 러시아의 총리였다) - 을 설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b) 청산주의자들은 중앙 지도부를 회생시키기 위한 노력을 방해한 죄가 있었고 중앙위원회의 부활이나 전당대회의 소집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이러한 고발의 정당성에 대해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 볼셰비키는 당 정책을 통제하기 위한 정상적인 분파 투쟁과 달리 청산주의자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위해 '매개체'로서 당의 존재 자체를 위협(크룹스카야의 주장에 따르면)했다는 게 요점이다.
청산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은 레프 카메네프(Lev Kamenev)가 1911년에 쓴 '두 개의 당들'에 상당히 광범위하게(200페이지 이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에 프라하 대회가 조직되고 있었다. 카메네프가 이야기했듯이 그의 책은 레닌과 긴밀히 협의하여 쓰여졌다. 따라서 그것은 볼셰비키들이 프라하 회의로 달성하려고 했던 것을 설명한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24년, 이 책이 재출판되었을 때(그 책이 담고 있는 반트로츠키적 논법이 카메네프의 관점에서 가장 필요할 때) 그는 재인쇄 서문에 이렇게 썼다: "전체적 제목 - 두 개의 당들 - 은 당의 형식적인 통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를 하나의 같은 당에 있는 두 분파가 아니라 서로 싸우는 적대적인 두 정당처럼 바라봤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은 소급 적용된 재정립의 좋은 사례이다. 1911년 초판 서문에서 카메네프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썼다.
“반혁명적 분위기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는 집단들에 대항하는 가장 무자비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확고한 지지자로서, 우리는 또한 모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 - 분파나 경향에 관계없이 그리고 현실 정치의 구체적인 쟁점들에 대한 이런 저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 당의 기치 아래 통일에 대한 한결같은 확고한 지지자들이다...
RSDLP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부활과 강화를 위해, 분파와 성향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 집단, 단체, 협회, 합법적이나 불법적 활동을 포괄적인 방식으로 돕고 제공하는 데 에너지와 모든 힘을 사용해야 한다[나의 강조점].“
대조가 두드러진다. 1924년에 카메네프는 멘셰비키를 별개의 적대적 정당으로 간주해 주장했다고 말한다. 1911년에 그가 실제로 쓴 글을 읽었을 때, 우리는 그가 "분파의 관계없이"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청산주의와의 싸움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발견한다. 실제로 카메네프는 1909년 이후 줄곧 당-멘셰비키에게 손을 내밀려는 생각이 "볼셰비키의 전체적 당 내부 노선을 결정해 왔다"고 주장했다.
카메네프는 가능한 끈질기게 말하고 있다: 청산주의를 배제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지지하기 위해 당신이 볼셰비키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동기는 당에 특정한 볼셰비키적 견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당을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두 개의 당"이라는 구호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자는 요구가 아니었으며, 특히 볼셰비키적 견해를 전파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사실 이 구호는 (카메네프의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당을 창당하려는 사람들로부터 기존의 당을 옹호하려는 시도를 상징했다. 카메네프는 청산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가서 당신의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라 -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을 지지할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RSDLP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하지는 말아라.
아마도 '당-멘셰비키'(partyist Mensheviks)가 실제로 매우 소수였고, "모든 실천적 목적에서" 볼셰비키가 그들과 연합을 놓고 벌인 내기에서 실패했다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이러한 반론은 (적어도 망명자들의 정치에 국한한다면)현실에 기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볼셰비키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내 설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의 바로 그 기능에 대한 특정한 실존적 위협에 대항하여 분파를 뛰어넘는 블록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1910년에 레닌은 편지에서 러시아의 멘셰비키 노동자들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당파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1915년, 플레하노프(멘셰비키 당파주의와 연관된 당 지도자)에 대한 많은 실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최고의 멘셰비키"였고 청산주의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썼다.
레닌은 정말로 그런 분파를 뛰어넘는 블록의 가능성을 믿었다. 당시와 그 후에 적대적인 관찰자들은 이 '당-멘셰비즘'에 대한 레닌의 이야기가 볼셰비키 일색의 정당으로 가기 위한 계략이자 핑계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 밑에서 그가 청산주의를 멘셰비즘과 동일시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내가 보기에는 레닌이 의식적으로 볼셰비키 당을 만들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레닌의 ‘표리부동’에 대해서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유형의 당
정당의 분열은 매우 다른 두 가지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다. 하나는: 너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너는 나가야만 한다. 다른 하나는: 나의 견해만이 받아들여질 수 있고, 나의 그룹만이 남을 수 있다. 첫 번째 보기는 특정 그룹을 배제한다. 두 번째 보기는 특정 그룹을 빼고 모두를 배제한다. 프라하 대회에서 어떤 종류의 명분이 사용되었는가? 분명히, 첫 번째이다. 내가 방금 검토한 모든 주장들 외에도, 우리는 몇 개의 신문을 중심으로 묶인 아주 특정한 작가 집단만이 "당 밖에 있다"고 선언하는 회의의 결의안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배제는 '기존의 유형의 정당'의 관행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는데, 만약 그것이 우리가 제2인터내셔널 기간 동안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이 정당들은 어떤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그들은 이 메시지의 핵심을 부인하는 단체들을 기꺼이 쫓아내려고 했다 - 1890년대 무정부주의자들의 경우가 가장 유명하다. 프라하 대회를 옹호하면서 레닌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 의해 행해진 규율과 배제의 다른 행동들과 함께 이 에피소드를 꺼냈다.
레닌은 더 나아가 기회주의자들을 일반적으로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그는 멘셰비키 분파 전체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그가 하려는 일에 대한 이런 식의 어떤 설명도 비열한 비방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유럽의 정당도 청산주의자들의 방해와 기강 해이를 잠시라도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래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곳에 갔더라면, 보았더라면, 당신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프라하 대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오래된 해석이 있는데, 즉 동질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로 기존의 형태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강하게 대조되는 '새로운 유형의 정당'을 출범시켰다는 것이다. 이제 배제의 논리는 한 분파가 당 전체가 되는 두 번째 유형이라고 말한다. 앞서 레닌이 분파에 제한했던 논리 - "마음이 같은 개인들"에 의한 전망의 의견일치- 는 이제(이 주장에 따르면) 당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제부터는 볼셰비즘에 동의한 사람들만이 당에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30년대 후반 스탈린 정권이 만든 유명한 '간략한 당의 역사 강의'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분명히, 그것은 당내의 분파들을 불법화한 정권과 잘 어울렸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또한 역사적 문서들과는 대립했다. 프라하 대회의 기록은 1980년대 후반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라는 이 같은 논리는 프라하 대회의 주요 학술적 조사관인 카터 엘우드(Carter Elwood)의 작품 해석에도 중심적이었다.
그의 <레닌 선집>에서 폴 르블랑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RSDLP는 청산주의자, 비청산주의 멘셰비키, 레닌주의자와 반레닌주의적 볼셰비키 등에서 트로츠키가 이끄는 파벌주의에 반대하는 또 다른 파벌 등으로까지 절망적으로 분열되었다! 레닌과 그의 주변 사람들은 효과적인 혁명 과업이 그러한 실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고 결론짓고, 1912년에 그들은 그 이름을 가진 다른 모든 실체들과 구별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으로서 그들 자신을 재편성했다…. (198쪽)."
르블랑은 명시적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정당' 해석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내가 믿기에는 부정확하게도) 레닌이 다분파적 정당을 비효과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오직 한 분파만이 그의 새로운 "재편성된" 정당에 남아있도록 만들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르블랑은 분파의 과잉보다는, 특정 분파 즉 청산주의자들의 행위에 의해 정당의 사업이 비효율적으로 되었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명확히 하는데 실패했다.
레닌은 당내에서 청산주의자들에 반대하지만 그들을 배제해야 할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혹은 아마도 단순히 그들을 배제하는 그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그들을 당에 데리고 있는 것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고 그는 그들을 어떤 의미 있는 방법으로도 배제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내 생각에는 1912년에 볼셰비키당이 창당됐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어떤 '새로운 유형의 정당' 해석이나 레닌이 분파에 적절한 논리를 지금 당 전체에 적용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거부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 역사적 기록은 1912년 현재, 레닌이 "분파는 정당이 아니다"라고 믿었다는 것을 압도적으로 보여준다.
찬탈 아니면 지속성?
르블랑은 '멘셰비키와의 마지막 결별'이라는 제목을 부여한 그의 선집의 한 섹션에서 우리에게 레닌의 최근 프라하 대회에 대한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에 보낸 보고서를 보여준다. 이 보고서에서 레닌은 대회를 조직하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20개의 조직들이 이 대회를 소집하는 조직위원회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즉,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를 포함해 현재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실상 모든 조직들이 말이다."(204쪽)
'멘셰비키와 마지막 결별'을 준비하는 재미있는 방법은 분파에 상관없이 모든 러시아 지하 조직을 대변하기 위해 선의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레닌이 프라하에서 선출된 지도적 기관과 기존 정당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 모순은 더 나아가고 있다. 그는 프라하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가 그 당의 권위 있는 대표자였으며 기존 당 결정(특히 멘셰비키들이 참여하고 관련 결의안에 동의한 1908년과 1910년의 당대회)의 충실한 집행자라고 주장했다.
프라하 대회의 목적이 볼셰비키 정당을 세우는 것이었다면, 그때 레닌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모두의 유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뚜렷하게 오만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당내에서 그에게 공통적으로 적대적인 꼬리표는 '찬탈자'라는 것이었다. 그의 목적이 정말로 뚜렷한 볼셰비키 실체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이 딱지는 적절해 보인다.
최근 토론에 대한 기여에서 폴 다마토(Paul D’Amato)는, 레닌이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자신의 활동을 묘사하는 방식에 표리부동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만약 실제로 다마토가 말하는 그 일을 레닌이 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다마토는 모두 좋은 의도가 있었다며 이 표리부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레닌의 활동에 대한 자신의 설명('뚜렷한 볼셰비키 실체'의 설정)과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보고서에 나오는 레닌 자신의 설명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인식하지 않는 듯한 폴 르블랑보다는 다마토가 문제에 대한 통찰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볼셰비키들이 실제로 진정한 '전체 정당의 대회'를 조직하기 위해 선의의 노력을 했는지 아닌지 여부는 골치 아픈 문제다. 그 시기의 문서를 직접 조사한 결과, 나는 볼셰비키들이 분파적 대회를 조직하지 않고 있다는 일관되고 정력적인 주장에 감명을 받았다. 일부 비볼셰비키의 의견 또한 최소한 러시아의 지하조직들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지지했다. 나는 내가 다른 곳에서 표명한 엄격히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일 것이다: 만일 레닌이 정말로 볼셰비키 당을 만들고 싶었다면, 그는 기만적이고, 신의가 없고, 파괴적이고, 배울 게 없는 방식으로 그것에 착수했다.
프라하 이후
1912년 1월(프라하 대회 날짜)부터 1914년 사이의 사회민주주의적 활동을 보면, 나는 사람들이 두 개의 별개의 정당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별로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들을 하나의 당의 두 분파, 즉 분리된 조직을 가진 분파이고 파괴적인 내부적 쟁투에 (그들이 항상 그래왔듯이)헌신한다고 봤지만, 여전히 자신들을 불분명하지만 의미있는 전체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1912년 이후의 상황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프라하 이후 한 달여 만에 대회가 창간한 <프라우다>(Pravda) 신문이 첫호를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분파를 넘어서는 당의 통합을 촉구하는 - 공교롭게도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이 쓴 - 논설이 실렸다. 다가오는 입법부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적 후보 선정을 둘러싼 프라우다와 경쟁지 루치(Luch)간의 싸움에서 양측은 당의 통합이라는 생각에 그 바탕에 두었다. 프라우다는 당의 기강을, 루치는 공동전선을 호소했다.
1912~14년 동안, 레닌은 종종 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대표한다고 말하면서 '프라우다주의자(Pravdists)'('볼셰비키'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라)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즉, 프라하 대회에서 특정한 '청산주의자' 집단이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여전히 노동자들 사이의 기회주의적 소수를 사회민주주의의 합법적인 일부라고 자동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이해였다고 해도 말이다.
지노비예프(Zinoviev)는 1920년대에 쓰여진 그의 당사에서 내가 프라하에 대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멘셰비키와의 완전한 결별의 순간"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예를 들어 대회에 멘셰비키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그가 말하는 것도 상당히 부정확하다). 따라서 방금 인용한 코멘트를 한 직후에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바로 누설하고 있다. "멘셰비키로부터의 마지막 단절은 1912년에 온 것이 아니라 1917년에 왔다… 그 순간까지 모든 사람들은 짜리즘의 몰락 이후까지 사회민주주의가 그럭저럭 연합할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볼셰비키가 멘셰비키와 통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인상들을 보고했지만, 확실히 이것은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할 수 있는 주제다.
결론: 폴 르블랑은 프라하 이후의 RSDLP는 “모든 실천적 의미에서” 볼셰비키 정당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 결론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분파와 당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 점에서 역사적 기록은 모호하지 않다: 그들은 분파와 당은 서로 다른 종류라고 믿었다(또는 믿는 것처럼 행동했다).
볼셰비키는 정당이 아닌 분파였고, 프라하 대회는 그것이 주장한 대로 즉, 사실상 전체 당의 대회였다. 그들은 기회주의자들을 당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취지의 비방을 거부했다. 그들은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제2인터내셔널 전체에 공통되는 규범에 의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정당화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는 있지만, 내 생각에 볼셰비키가 이런 견해가 아니었다고 멋대로 주장할 수는 없다.
(기사 등록 20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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