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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갑자기 생각난 만화: 들장미 소녀 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9. 3.

갑자기 생각난 만화: 들장미 소녀 린

- 피해자에게 인내와 순종을 요구하는 서사들

 

박철균



 

1.

뜬금없이 어렸을 때 봤던 만화가 생각났다. 우리집은 별로 비디오를 빌리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 나는 집에서 녹화한 애니메이션을 더 선호했다 - 그 몇 개 안 되는 비디오 중에 하나가 캔디캔디 1,2화였다. 뭔가 신파같은 게 초등(국민)학교 1학년 밖에 안 된 아이에게 너무 충격적이었겠지. 그 후 얼마 안가 KBS에서 작은숙녀 링으로 나오는 것으로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다닐 때 SBS에서 "들장미소녀 린"이로 재더빙해서 나왔는데, 그 때는 챙겨 보기는 어려운 시기라서 아주 가끔씩 보긴 했었다. 아마 이 만화를 기억한다면 20대 후반 혹은 3,40대가 됐을 것이다.

 

2.

사실 한국에서 한창 막장드라마 붐이 일어났을 때 나는 그래도 왠지 이런 전개가 한국드라마 아니더라도 많이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런 해답들은 어렸을 때 봤던 작품들을 다시 톺아보면서 답을 찾았는데, 사실 어릴 때 봤던 이 만화가 상당히 막장이었다.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영일 혼혈 여자애 링이 아빠 만나러 엄마랑 같이 영국에 갔다가 교통사고로 엄마는 하늘나라 가고, 마블 저택에서 지내게 됐는데 거기 있던 이복 큰언니 세라는 꽃 선물을 하는 다섯 살 아이에게 폭언을 하며 꽃을 던지고(물론, 이후 세라와 링은 막역한 자매 관계가 되지만 첫 만남이 너무 폭력적이야), 그 이후 아빠가 사업이 망해서 할아버지가 재혼하라고 데리고 온 부잣집 여자랑 그 아들딸들이 온갖 못된 짓을 하고 괴롭히고, 이런 원인 제공을 하는 친할아버지는 린을 마치 사생아 취급하며 매몰차게 구는 것이 1기 주요 플롯이다.

 

어느 정도냐면 남자애는 비비탄 총을 다섯 살 아이에게 쏘아 대고, 여자애는 온갖 수작을 부리고 괴롭히며, 보다 못한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에 대항하다 해고가 될 정도다. 링이랑 세라는 한국 막드 보는 것처럼 열심히 당하다가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링이 일본(한국판에선 고향)으로 돌아가려다 나중에 진실을 알고 뒤에서 쫓아온 아서, 에드워드, 세라를 다시 만나게 되고 우유부단하게 굴던 아빠는 이제야 결혼 안 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1기는 끝난다. , 뭔가 한국 막장드라마 같은 구성이 80년대 말 일본 순정만화에선 이미 존재했더랬다.

 

그랬는데 애니 2기는 그 부잣집 성격 나쁜 분이랑 결혼을 안 해서 집안 가세가 비틀 비틀거려서 아빠, 세라, 링이 각각 이산가족이 되고 마블저택도 넘어가기 직전에다 링이 머무는 할아버지의 누님 저택에 소피네가 와서 온갖 수작을 부리는 등 곤란을 겪다가 승마로 성장하고 성장해서 원하던 크러스트와 레이디 칭호를 얻고 예전의 마블저택을 다시 찾게 되서 셋이 함께 살았더래요로 끝나고 있다.

 

만화책 원작은 더 가관이라서 아빠는 그 못된 집 여성이랑 재혼을 하고 그 사이에서 이복남동생이 태어나고, 링은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아빠가 병에 걸려 결국 돌아가시는 와중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에드워드랑 맺어지고 그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가 나오는 걸로 끝난다.

 

3.

그냥 전형적인 캔디형 순정만화 노선, 그러니까 어떤 착하디 착한 여자 주인공이 온갖 괴롭힘과 수난 속에도 굴하지 않고 착하고 착하게 살다 마지막에 웃는 해피엔딩 노선을 그대로 가고 있다. 이러니 비디오판에선 아예 이름이 캔디로 개명이 되고, SBS에선 들장미 소녀 린이라는 제목이 되고 있다.

 

아무리 마지막에 웃는 전개라 해도 5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하고 폭력적인 환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폭언 듣기는 기본이고, 비비탄 총 맞기, 누명 쓰기, 패대기 당하기, 사람 취급 못 받기 등등등. 좀 더 어른이 된 사람들이 당해도 멘탈이 터져 버리는 온갖 폭력을 그저 아빠 만나러 영국에 왔을 뿐인 애가 계속 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변 착한 사람들(주로 일하는 사람들)"참고 견뎌라. 그러다간 좋은 숙녀가 될 거다." 란 식으로 달래고 달래면서 계속 링을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시킨다. 과연 현실에서도 그 시련을 넘은 어린 여자아이가 계속 착함을 유지하며 레이디가 되고 크러스트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어린이집에 갈 나이의 애가 계속 그런 폭력에 노출되면 우울증이 발생하고(보다보면 링 역시도 그런 징후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그 괴롭힘과 폭력이 PTSD로 이어져서 자신도 폭력적이 되고 자제를 하지 못하고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것이 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4.

결국 저 만화에서 제일 나쁜 사람들은 어른들이다. 저기 나오는 어른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책임지는 어른들이 없다. 사건의 원흉인 할아버지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5살 아이를 못 살게 굴고, 예비 새엄마란 사람도 인성은 안드로메다로 가면서 그 밑에 있던 자식들도 인성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2기에선 소피 엄마는 어린 딸(소피)에게 아예 나쁜 짓을 부추기기까지 한다. 제대로 확실한 결정도 하지 못하고 우물 우물거리면서 계속 두 딸(세라, )을 생지옥 속에 방치하는 아빠도 마찬가지.

 

혹시나 이 만화를 토대로 새 작품을 만들라고 한다면, 링과 세라가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서 이 망할 어른들을 죄다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저택을 장악해서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적극적인 결말로 만들고 싶다.

 

약한 사람과 피해자에게 계속 참을 것을 착하게 살 것을 강요하면서, 나쁜 사람과 가해자가 계속해서 못된 짓을 하도록 방치하거나 부추기는 짓은 애니메이션에서도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어렵겠지만 그 저항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고 본다


(기사 등록 20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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