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미 제국이 이제 가시적으로 힘이 빠지는 현 상황에서는, 중국이 '미국을 대체해서' 다음 세계 패권국이 되지 않을까, 라는 문제들이 계속 제기됩니다. 굳이 '궤도'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꼭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방향'으로 치면 미국의 쇠퇴는 가면 갈수록 가시화되는 반면, 중국은 여태까지 역병과 경제위기 등의 상황을 비교적 효율적으로 관리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쪽의 하향 궤도, 그리고 다른 쪽의 상향 궤도는 확실히 보이지만, 중국은 '미국과 같은' 세계 패권국이 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아마도 앞으로 그렇게 된다기보다는 세계체제는 패권 다극화의 방향으로 갈 듯합니다. 이유는 몇 가지입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세계 패권은 제2차 대전과 냉전의 산물입니다. 미국이 제2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과 의태리, 일본에 대한 전략적/군사적 통제권을 접수하여, 나아가서는 옛 일본제국의 식민지이었던 한반도의 남반부까지 인수인계한 것이죠. 나중에는 냉전의 과정에서 대영제국의 일부분(말레이시아, 호주 등)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하고, 또 냉전에서 승전해서 옛 동구권을 접수한 것입니다. 이런 궤도를 그대로 모방하자면, 중국이 세계전쟁을 시작해서 대만은 물론, 남한과 일본 등 역내 미국의 군사 보호국들을 다 군사 점령한 뒤에 러시아와 합동해서 동구권이라는 주변지대를 다시 빼앗는 전쟁에 임해야 하는데.... 미래를 완벽하게 알 수야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건 현실적 시나리오는 전혀 아닙니다.
미국이 재정난으로 주일, 주한 미군을 뺀다 하더라도, 이들 나라들은 계속해서 미-중 사이에 '줄타기'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건 '미국과 같은' 일극적인 패권은 전혀 아니지요. 패권 차원으로 이야기한다면, 중국은 체제가 비슷한 인접국인 북조선이나 월남의 내정에조차도 거의 간섭을 못할 정도입니다. 미국의 캐나다, 멕시코와의 관계 패턴과 사뭇 다르죠. 그러니 중국이 미국의 쇠퇴로 비워진 자리를 단순히 '채울 것이다'라고 보기가 힘듭니다.
● 미국 패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서구라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요람'에 대한 장악인데, 이런 장악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미국과 서구 사이의 아주 끈끈한 '연결'이 있습니다. 사유재산권이 정치권력에 거의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이나, 여러 이익집단들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서의 다당제 시스템을, '구'와 '미'는 공유합니다. 그래서 '구미권'이라고 흔히들 하죠. 거기에다 문화적으로는 서구 지배/주도층의 전원은 다 영어 구사자들입니다. 중국이 서구에 경제적으로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정치권력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해도 되는 제국형 시스템은 서구 엘리트들의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그들 사이엔 중국어 구사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요. 중국은 그렇다 치고, 같은 전통을 일부 공유해도 역시 정치권력이 사유재산권 위에 서 있는 러시아와 같은 제국형 시스템도 서구의 엘리트 사이에선 완벽한 '타자'로 인식됩니다. 그러니까 중-러가 서구를 '장악'한다기보다는, 미국이 주독 미군 등을 모조리 뺀다 해도 서구는 부단히 미-중-러 사이의 '줄타기'를 거듭할 셈입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무장화, 군국화의 길로 가지 않으면요. 이것 역시 '미국과 같은 패권'의 판도는 아니지요.
● 미국의 세계 패권 장악은 열전과 냉전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패권의 제도화는 냉전 속에서 진행됐는데, 냉전은 '이념의 전쟁'이었던 거죠. 스스로 사회 혁명을 거친 바 없는, 즉 재산권이 절대적으로 안정돼온 미국은, 기존의 재산권을 부정해 '전위' 정당 지배를 확립시키려는 주변부에서의 변혁의 시도들을 실존적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국가식의 정치권력들은 미국 재벌의 주변부 자원에의 접근을 차단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중국의 전략은 주변부 정권들의 획일적인 '관리'라기보다는 차라리 포섭, 유착입니다. 그 포섭, 유착에는 이념 따위 없습니다. 당-국가식 체제인 라오스도 보수적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도 다 성공적 포섭의 대상이 될 수 있죠. 엘리트의 포섭도 지배의 형태이긴 한데, 냉전식 미국의 지배 방식보다 훨씬 더 느긋한 지배 방식이죠.
일언이폐지하자면, 중국은 "제2 미국"이 될 리가 없습니다. 중국 군사 기지들이 70여개 국가에서 생길 일도 없고, 전세계가 모든 계산을 위안화로 할 일도 없고, 중국이 일당 지배 체제를 전세계에 강요할 일도 없습니다. 미국의 힘은 조금씩 빠져나가는 만큼, 세계 각처에서 그 지역 강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지역적 영향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 중에서는 물론 중국 영향권은 가장 크겠지만,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하는 일부 국가들이 군사, 안보 차원에서 여전히 대미 연결의 끈을 놓지 않는 등 '이중 소속'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다극적 패권의 세계는 지속적인 이합집산, 합종연횡의 세계일 것입니다.
굳이 역사적 '전례"를 찾자면, 영국의 패권이 다소 약해진 19세기말의 유럽의 "5강 체제"를 방불케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전을 준비하는 독-불의 경쟁, 발칸을 놓고 벌이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경쟁, 독일을 제압하기 위해 불-러와의 동맹을 결국 체결한 영국의 패권 지속 시도.... 그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그 파국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에게 닥쳐올 다극 패권의 세계는 얼마든지 어떤 끔찍한 대량 도살극으로 귀결될지도 모릅니다. 자본과 군사력의 살벌한 세계에는 자비도 인류애도 없습니다. 오로지 '힘'을 향해 달리는 지배자들의 욕망들만 존재하죠.
(기사 등록 20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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