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규
[네이버 포스트 ‘최태규의 동심보감’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동물복지를 이야기하면 꼭 나오는 질문이다. “그럼 풀만 먹고 살라는 건가요?” 대답부터 하자면 “아니, 그 얘기가 아닌데요”다. 지난 번 글(어차피 먹을거라 괜찮아? 물고기 죽을 때까지 실컷 괴롭히는 나라)에서 물고기 복지 이야기를 썼더니 사람들이 화가 많이 났다. 개나 고양이, 소나 돼지, 아니면 동물원의 호랑이나 원숭이, 그런 동물들의 복지를 이야기를 할 때랑은 전혀 다르다. 혹시나 물고기를 못먹게 될까봐 걱정이 돼서 화가 난 걸까? 물고기라는 낱말과 복지라는 낱말이 붙은 걸 처음 봐서 놀란 걸까? 괜찮다. 어차피 시대가 가면 새로운 개념도 생기고 말도 생겨난다. 모른다고 화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복지를 생각한다고 안먹을 필요도 없다.
동물복지의 대상
동물복지는 지각(知覺)하는 어떤 동물에게나 적용할 수 있다. 동물에게 고통을 주면 안된다는 도덕적 판단은 이제 현대사회에서 보편윤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동물복지는 그 보편윤리에 과학적 근거를 명확히 함으로써 인류가 동물을 대할 때의 태도를 학문적으로 법적으로 합의를 이루게 한다. 당장 한국의 동물보호법만 해도 포유류를 비롯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척추동물에 적용된다. 안타깝게도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파충류, 양서류, 어류는 제외한다고 단서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물고기에게 동물보호법을 적용하면 골치가 아파지니까 적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먹는 물고기라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동물복지가 필요 없다는 선언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화천 산천어 축제가 동물학대가 아니라고 한 검찰의 무혐의 처분은 가뜩이나 허술한 법을 기계적으로만 해석한 결과다. 식용이라는 말만 앞에 붙여주면 세상 어떤 물고기도 동물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만드는 처분이다. 산천어가 식용이기 때문에 동물학대가 아니라는 검찰의 해석은 어류 뿐 아니라 양서류와 파충류 모두 동물보호법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자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산천어 축제는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물고기들을 견딜 수 없는 통증과 고통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집단으로 동물을 괴롭히는 행위를 축제화함으로써 동물학대를 즐기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동네 꼬마들이 뒷골목에서 저질렀어도 말려야할 일인데, 무려 지방정부의 공무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은 지역경제를 핑계대고 자행하는 모습은 한참 늦된 우리의 정치사회 체계와도 이어져있다.
동물복지는 인간이 동물을 이용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식용으로 기르는 동물이라서 학대를 적용할 수 없다는 논리는 역으로 동물을 학대하면 안되기 때문에 먹어서도 안된다는 논리와도 이어진다. 그러나 동물복지의 관점에서 동물을 먹고 말고는 동물학대와 무관하다. 동물복지는 동물이 살아있는 동안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는 동물복지의 고민이 아니다. 동물의 종이나 동물과 인간의 관계 등 여러 가지 맥락에 따라 동물학대와 복지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동물복지는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개나 소와 같은 가축들이 가장 먼저 도덕적 존재로 고려되기 시작했고 법적인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학문으로서 동물복지의 발전은 단지 동물을 행복하게 하거나 아프지 않게 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동물을 더 잘 길러서 더 잘 잡아먹고 수월하고 오랫동안 이용하고 싶다는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동물에게 삶의 질을 보장하면 어느 수준까지는 축산의 생산성이 그에 비례해서 올라간다. 그 수준 이상의 생산성을 추구하다보면 복지는 다시 낮아진다(그림1). 그리고 동물복지과학은 그 곡선 전체를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그림2).
그림1 - 동물복지와 생산성의 충돌 (McInerney, 2004)
그림2 - 동물복지를 고려한 생산기술의 발전은 복지와 생산성을 함께 높일 수 있다.
어떻게 죽일 것인가
동물을 어떻게 죽일 것이냐도 동물복지에서 중요한 문제다. 인류는 동물을 먹기 위해서 도축 하고, 동물의 복지를 위해서 동물을 안락사하며,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규모 살처분을 한다. 동물을 죽이는 이유가 무엇이 됐든, 동물복지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동물이 죽는 순간까지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에 동물이 누리는 삶의 질은 인간이 동물을 죽이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잣대가 아니다. 동물을 죽여서 인간이 얻을 이익이 무엇인지가 가장 주요하다. 인간이 얻는 이익과 동물의 삶을 무게 다는 것은 동물복지의 영역이 아니라 윤리의 소관이다. 동물복지는 죽일 동물을 잘 속여서 동물이 스스로 죽는지도 모르게 죽이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다.
다시 예컨대, 인간은 물고기를 먹기 위해 기르거나 잡고 죽여서 손질하는 과정을 거친다. 물고기복지가 관여하는 부분은 인간이 물고기를 먹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먹고 싶으면 먹는데, 죽여서 먹기 전까지 물고기가 경험하는 시간을 어떻게 배려할 것이냐가 물고기복지의 고민이다. 물고기를 먹기 위해 죽이더라도 공기 중에서 질식시켜 죽이면 죽는 순간까지 너무 괴로우니까, 물 밖에서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전기로 빠르게 기절시켜서 방혈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량으로 기르고 산채로 배로 실어 나르고 수조차로 옮겨서 작은 수족관에 넣어놓는 행위는 동물복지를 저해시키는 동시에 맛도 위생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근본 없는 부조리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복지와 동물을 먹는 일
따라서, 동물복지를 고려하자는 주장은 동물을 먹지말자는 말이 아니다. 더 잘 기르고 죽을 때까지 동물들이 어떤 기분으로 살아가는지를 배려하자는 이야기다. 물론 동물을 먹는 행위에 원칙적으로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동물을 지나치게 많이 기르고 많이 먹는다. 앞서 말했듯, 대체로 이윤을 위해 기르는 동물의 삶은 생산성의 최고점 이상으로 나아지기 어렵다. 대부분 가축의 삶은 썩 살만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통의 총량을 줄이려면 가축의 수를 줄일 필요도 분명히 있다.
지구에 인간이 이렇게 많이 살고, 못올라가는 곳, 바닷속 못들어가는 곳이 없어져버린 세상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처음 겪는 일이다. 어딘가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더 많이 죽여서 더 많이 먹는 일은 이제 인류의 주업무가 아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할 시대다. 그러려면 동물을 적게 먹을 필요는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먹더라도 음식이 된 동물이 어떤 삶을 살던 동물인지 걱정할 필요도 있다.
(기사 등록 20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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