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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미국: 사회적 낙후성과 신자유주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6. 9.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우리가 늘상 '구미권' 같은 용어를 쓰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용어는 다소 기만적입니다. 수정 자본주의의 경험을 풍부하게 가진 서구와 미국은 많은 의미에서 각각 서로 '별천지', 달라도 아주 다른 세상들입니다. 금번 사태에서 노출된 미국의 근본적 문제들은 - 구조화된 인종주의부터 살인적인 경찰 폭력까지 - 사실 어제 오늘부터 시작된 것도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들을 비롯하여 이 번 사태가 계기 되어 눈에 띄게 된 미국의 상대적인 제도적 낙후성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자면 그 역사부터 시좌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애당초에는 '하나의 미국'은 없었습니다. 세계체제론적 의미에서는 '미국'은 적어도 두 개의 나라이었습니다. 북부는 초기 공업화 지역으로서는 이미 1820~30년대부터 세계체제의 산업 본위의 '핵심부'에 편입됐는가 하면, 남부는 핵심부(영국의 공업도시)에 목화를 공급해주는 원재료 공급지이자 완제품의 시장, 즉 주변부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주변부 지역(예컨대 브라질이나 농노제의 러시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노동력을 인신구속시키는 '노예제'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주변부에서 비자유 노동이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건 형성기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주요 특징이죠. 내전에서 북부가 남부를 제압시켜 북부에 종속시킬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애당초부터 있어온 '격차'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남부 농장주들의 일부에 형성기의 자본가 계층에 합류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과거 흑인 노예들의 상당부분은 '준중산층'이라 할 수 있는 숙련공 집단이 아닌 주변부적 노동력으로, 즉 산업 도시들의 미숙련, 저임금 노동자층으로 편입됐습니다. '부국' 미국 안에서는 이들 주변부적 노동자들은 거의 '3세계'를 방불케 한 게토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한데 이들, 그리고 노동시장 신입자(최근 이민자)들에 대한 집중적 초착취는 미국 자본의 아주 중요한 축적의 엔진이기도 했습니다. 극단적 부와 극단적 빈곤, 착취가 같이 공존하는 건 애당초부터 '미국 모델'의 특징이었습니다. 인종주의는 이 모델을 합리화하는 주요(비공식) 이념 중의 하나이었고요.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격차'를 처음부터 안고 있는데다가 미국은 처음부터 '무력'을 매우 중시하는 사회이었습니다. 백인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구축해야 했으며, 특히 남부에서는 무력 아니면 노예제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주로 주 민병대 수준이었던 무력은, 1,2차 대전을 거쳐서 연방 레벨에서 집중되었습니다. 1945년 이후의 미국은 줄곧 '세계 최강 군국'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미국의 총국민생산에서는 군비는 3,4%나 차지하고 있는데, 미국의 주요 라이벌인 중국의 경우에는 군비는 2% 미만입니다. 참고로, 독일은 1,3%, 일본은 0,9%.

 

세계의 어느 주요 경제도 미국만큼 '무력'에 돈 마구 쓰는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미국은 철저히 '연방', 즉 군사 이외의 분야에서는 중앙집권성이 꽤나 떨어지는 사회입니다. 애당초부터 그래왔습니다. 일본이나 한국, 아니면 예컨대 노르웨이와 같은 전국적이며 중앙의 통제가 가능한 경찰 훈련, 채용, 배치 기구는 미국에 없습니다. 북구와 달리 경찰이 되기 위해서는 경찰대를 꼭 졸업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 가주에서 경찰이 되기 위해 소요되는 훈련의 시간은 약 660시간 정도죠. 말 그대로 단기 훈련입니다.

 

이발사 되는 것보다 경찰 되는 게 더 빠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는 주민의 다수가 총기를 소지하는, 위험도 높은 사회에서는 과연 누구를 경찰로 채용하겠습니까? 맞습니다. 퇴역 군인들이죠. 결국 미국의 경찰은 경찰로서 전문성이 엄청나게 떨어지는 한편 본인 담당 구역을 전장으로 인식하기가 쉽습니다. 경찰의 군인화가 그 정도로 진척된 거죠. 그래서 그들은 '미국 모델'이 극단적 빈곤에 빠뜨린 게토들의 주민들 사이에서 경찰 업무를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과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의 '격차,' 부 속에서의 빈곤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모델, 이를 합리화하는 (비공식적) 이념으로서의 인종주의, 그리고 전문성이 없는 군인형 경찰.... 그런 사회에서 공권력 남용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이상할 것입니다. 추가적 문제는, 이와 같은, 극단적 빈곤이 자본가들에게 이윤창출의 메커니즘이 되는 사회야말로 신자유주의를 매우 쉽게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속에서는 과거 흑인 미숙련 노동자들을 고용했던 많은 공장들은 문닫고 해외 이전됐습니다.

 

결국 미숙련 저임금 노동자들은 서비스업이나 자영업 아니면 엄청난 규모의 '비공식 경제'로 떠밀려 들어가게 된 것이죠. 그들이 이제 '착취'라기보다는 주류사회로부터의 철저한 '배제', 격리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약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비공식 경제 참가자를 경찰이 잡아 감옥으로 보내면 다시 한 번 경제적 '착취'가 가능해집니다. 미국의 수감률 (10만명당 716)은 세계 최악이며, 미국의 죄수 인구(220만 명)은 전세계 죄수 총인구의 4분의 1이나 됩니다. 사실 '수용소 군도'라는 말은 현재로서 미국에 가장 잘 어울리는데, 이 감옥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착취공장처럼 운영됩니다.

 

그러니 비공식 경제에 종사했던 과거 노예들의 후손을 경찰이 잡아 감옥에 집어넣으면 그게 다시 한 번 자본에 이득이 되는 경제적 '재료'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찰이 게토에서 순찰을 돈다기보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노예 사냥'에 나가는 것입니다. 퇴역 군인 출신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만큼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가득 찬 백인 남성이 사실상의 '노예 사냥'으로 나갈 때에 어느 정도 폭력적일까요? 그러니 이번 경찰에 의한 플로이드 살인의 비극은 사실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엄청난 사회적 낙후성을 자본이 초과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교묘하게 이용하는 '미국 모델'을 과연 뜯어고칠 수 있을까요? 그런 '미국 모델' 수정에의 하나의 접근은 바로 샌더스의 '그린 뉴딜'이었는데, 결국 여야의 미국 제도권은 이 모델 수정 제안을 거부한 셈입니다. 트럼프 류의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저임금 노동에 대한 극단적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모델이나 미국의 극단적 군사화 등에 대해서는 손 댈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현재와 같은 쇠퇴기의 미 제국은 아마도 당분간 여전히 노예제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사회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항 폭력'에 대한 아주 짧은 단상

 

여러분들이 눈치 채시겠지만, 저는 폭력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폭력에 대한 체질적 반감이 강한데다가 늘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생기게 되는 '권력'을 회의적으로 보곤 합니다. 그런데 이번 흑인에 대한 살인적인 경찰 폭력을 반대하는 소위 '폭력 시위'에 대해서는 저는, 비판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고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물론 원리원칙으로 따지면 대항 폭력도 폭력이며 당연히 자제의 대상이 돼야지요.

 

미국 경찰관들 중에서는 역겨운 인종주의자들이 흘러넘치지만, 경찰관 몇 명에게 부상을 입힌다고 해서 그들이나 그 동료들이 인종평등론을 배울 일도 없습니다. 거기에다 폭력 시위에 아예 무관한 행인이나 상인부터 피해를 볼 수 있고, 끝판까지 가서 군이 개입되면 민간인 희생부터 많을 수 있어, 폭력은 당연히 시민적 '자제'의 대상이 되면 좋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마도 누구나 다 동의할 원론입니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따지면 국가 권력에 대한 비폭력 행사의 하나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있습니다. 국가 권력부터 피치자를 '동류'로 봐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컨대 서방의 병역거부자 단체들도 늘상 '식민지에서의 피식민자들의 저항은, 폭력저항이라 해도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곤 합니다. 식민지 권력자들은 피식민자를 애당초부터 '동류'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피식민자들도 식민 권력자에 대한 동류 의식이 존재하기가 힘들어, 식민지 해방 전쟁은 가끔가다가 정말 무서운 폭력의 장면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알제리의 전투> 같은 영화를 보시면 뭔 말인지 바로 아실 것입니다. 백인 식민 정착민들의 아이들이 많이 들어 있는 카페에서 수류탄을 터뜨리는 저항세력의 행위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수긍하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누구나에게요. 한데 특히 유럽인으로 태어난 저 같은 사람들은, 유럽 식민주의에 맞서 싸운 사람들에 대해 '비판'을 잘 못합니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원주민"을 처음부터 '동류'로 인정하지 않은 그 '원죄'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미국 상황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백인 경찰관들에게는 흑인은 '동류 시민'은 아닙니다. 일부 경우에는 차라리 '사냥감'이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잠재적 범죄자, '시민'이라기보다는 3등 주민 정도입니다. 흑인에 대한 살인적 폭력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폭력에 대한 대응이 폭력적 모습을 띠는 것은, 과연 그렇게 놀라운가요? 나와 내 부모, 조부모, 10대의 내 조상들이 저 사람들과 그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동류' 취급을 받지 못해왔다면 과연 나는 저 사람들을 '동류'로 인식하여 저 사람들에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마음을 자제라도 할 수 있을까요?

 

미국이든 어느 사회든 당연 비폭력을 향해 가야죠. 한데 거기로 가자면 일단 필요한 게 흑-백의 차별 없는 '동류 시민'의 공동체 형성입니다. 그리고 이런 동등한 공동체가 형성되자면 흑인에 대한 구조적 폭력, 그리고 구조화된 경제적 불이익 등부터 철폐돼야 되고, 아주 적극적인 지원책들부터 필요합니다. 인종차별의 유산을 청산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정책'은 비폭력으로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 정책들이 실시되기 전에는 우리는 전형적인 '빈민 봉기'의 모습을 계속 볼 것입니다. 그리고 '빈민 봉기'는 고대부터 최근까지 늘 폭력적이었습니다. 1862년 조선의 민란 같은 걸 생각해보시죠. 그 폭력의 책임은 과연 들고 일어난 민초들에게만 있나요


(기사 등록 20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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