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래
<조선일보> 정의연 관련기사의 끝없는 리스트.
조중동은 지난 10년간 정의연 관련기사의 거의 절반을 지난 3달간 만들어냈다.
'제4의 권력(Die Vierte Gewalt)'라는 독일 스릴러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정치부 기자가 현직 장관의 비리를 입증할 문서를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전달받는 장면으로 시작하지요. 문서의 진위가 확실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주인공은 신문사에 침입해 문건을 훔쳐내 자작극을 일으킴으로써 대형 스캔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의혹의 주인공인 장관은 억울한 자살에 이르게 됩니다. 한 명의 기자가 행정부 각료의 명운을 들었다놓았다 농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국가를 구성하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 옆에 나란히 놓을 만한 '제 사권(四權)'으로서 언론의 힘을 서늘하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정치를 주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명백하게 아무 내용이 없는 시비거리를 대형 비리 스캔들로 만들어내는 기사들이 쏟아지는 요즈음, 저는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게 됩니다.
말과 글을 다루는 힘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기능으로부터 생겨났고, 많은 지식과 훈련을 거쳐야만 행사할 수 있고, 피를 흘리지 않고 교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상대적으로 나은 종류의 권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공적 제도에 의해 선출되거나 통제되지도 않고, 높은 장벽을 넘지 않으면 진입할 수 없다는, 즉 그만큼 엘리트주의적이며 비민주적인 권력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경계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릇되게, 함부로 사용된 권력은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지금의 사태를 담론 권력을 가진 '지원 단체'와 가지지 못한 '피해자'의 대립처럼 규정하고 자신을 후자의 편으로 위치짓습니다. 그러면서 국가와 사회, 무엇보다 그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권력 불평등의 구조를 그 뒤에 숨깁니다. 그리고 좌우 양편의 언론들이 이런 속임수를 좀더 대중적인 말로 받아쓰면서 용기 있는 폭로인 양 치켜세워줍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다른 것도 아닌 담론 권력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2008년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망가뜨린 것은 노조도 정부도 아닌 고삐 풀린 금융자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지금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력을 잠식하고 전문가와 지식인에 대한 불신을 퍼뜨리고 있는 것은 대안 언론도 유튜브도 포퓰리스트 선동도 아닌 언론과 지식인들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과 믿음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멸시하는 정도는 자본 가진 자, 지위 가진 자들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무지렁이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믿음을 내심으로 가진 채로 너무 오래 살아온 까닭에, 우리는 지금 그들 또한 누가 자기 편이고 누가 아닌지 매우 잘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 앞에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얼굴로 말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이런 글을 쓰는 까닭은, 온갖 지엄한 권위들이 무너지고 남은 다음에도 말글을 쓰는 일에 여전히 의미가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니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가치, 공동의 언어, 공동의 신념이 없이 우리는 소통할 수 없고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각개의 무리들로 찢어져 날것의 갈등과 투쟁만이 판치는 미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린 지금이라도 정신을 좀 차려야 합니다. 사실 지금도 이미 때가 많이 늦었습니다.
(기사 등록 20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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