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규
네이버 포스트 ‘최태규의 동심보감’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이미지 출처 - 곰 보금자리 : Project Moon Bear
유교에 대한 오해와 개발독재 시대의 권위주의를 경험한 탓에 한국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지켜야할 예의만 강조해왔다. 21세기가 된지 20년이 지났지만 높임말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만 쓰고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초면에 반말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특히 자신보다 늙은 인구보다 자신보다 어린 인구가 많아진 세대에 들어선 노인들은 심하다. 나는 이삼십대를 시골에서 보냈고 대뜸 반말을 하는 예의없는 자들이 지긋지긋하다. 여전히 나이는 지혜의 상징이기보다 권력의 징표에 가까운 사회다.
초면에 반말을 듣기 쉬운 사람들은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생물학적 분류가 여성이거나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다. 시골에서 동물병원을 하던 시절 젊은 여성이 홀로 병원을 지키고 있고 나는 출장을 다니는 일이 잦았는데, 그 때 50대 이상의 남성들 태반은 처음부터 반말을 지껄이기 일쑤였다. “원장 어딨어?” 이 글을 읽는 교양있는 분들은 상상하기도 어렵겠지만, 2020년 서울 한 복판에서도 이런 황당한 장면은 자주 보인다. 어제도 카페에서 “도우미 아가씨 화장실?”이라고 질문도 아니고 주문도 아닌 소리를 내는 아저씨를 만났다. 다행히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봉변을 당한 사람은 “뭐라고 하셨어요?”라고 대들 수 있었다.
사회 구성원에서 나이가 어리고 정체성이 소수자인 경우 그렇게 봉변을 많이 당한다. 사회적으로 안전과 자유를 온전히 보장받을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늘 불안한 사회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주도는 권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쉽사리 뒤집히기도 어렵다. 민주주의 사회라고 선언은 하지만, 3초만에 투표 용지에 도장을 찍고 나오면 대개는 내 손에서 권력이 떠나갔다는 허탈함을 느낀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예의와 규칙은 언제나 만들 수 있을까.
사회적 소수자의 범주를 더 넓혀보자면, 영원히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약자들이 있다. 인간과 함께 사회를 이루고 사는 동물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인간끼리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온갖 동물들이 인간이 주도하는 사회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 목줄에 묶여 공원을 산책하는 개, 사람의 시선을 살피며 주차된 차 밑으로 숨어드는 고양이, 과자 조각을 물고 다급히 걸음을 재촉하는 비둘기는 도심이라는 복잡한 사회에서도 인간들과 마주친다. 우리가 집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면 매일 눈인사를 하게 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말도 할 줄 모르고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할 줄도 모른다. 사회적 약속도 매우 얕은 수준으로만 지키거나 강제당한다. 개는 사람을 물면 안되고 고양이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서는 안되며 비둘기는 사람 가까이 날아서는 안된다. 당연하게도 인간사회의 예의라서 이 동물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이기도 하다.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다보니 규칙을 어겨서 비참한 죽음을 맞거나 심각한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약속을 잘 지킨 동물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에 의해 무고한 피해를 받기도 한다.
다행히 인간 외 동물에게도 지켜야 할 규칙이 한국 사회에도 늘어나고 있다. 사회가 약자에 대한 예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도 처벌받기 시작했다. 개를 전기꼬챙이로 감전시켜 죽이거나 길 가는 고양이를 패대기쳐 죽인 자들이 실형을 받는 판례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물론 동물의 삶 전체를 빼앗아버린 죄의 무게나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안긴 충격과 비교하자면 형편없이 가벼운 형량이지만, 어쨌든 동물에게 잘못을 해도 감옥을 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동물들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보호받기 시작했다.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낼 정도의 범죄만 잘못인 것은 아니다. 모든 잘못을 법에만 의존해서 따질 수는 없다. 초면에 반말한 사람을 모두 감옥으로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범죄의 수준이 아니라도 우리 대부분은 (몇 명을 빼고) 서로에게 예의를 지켜야한다는 것을 배웠고 안다. 여기에서 말한 ‘서로’는 동물들도 포함된다. 사람들은 동물에 비해 큰 권력을 가진 자들로서 동물들을 배려해야 하고 동물에게 함께 살기 위한 예의를 가르쳐야 한다. 그 예의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인 사회라면 인간 외의 동물 뿐 아니라 인간 중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에게도 훨씬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가까이 지내는 동물 몇 종에서 몇 가지 맥락을 뽑아 지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예의만 예로 들어보겠다.
1. 지나가는 동물(개 포함)을 함부로 만지지 말자.
그건 당연하고 함부로 다가가지도 말자. 인간이라는 동물은 덩치가 대단히 큰 동물이다. 인간과의 거리가 좁아지면 웬만한 동물들은 모두 다소간의 공포를 느낀다. 혹시라도 귀여워서 못참겠다면 동물을 데리고 있는 사람에게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 뒤, 동물에게 아주 천천히 손등을 보여주며 정면으로가 아니라 옆걸음질으로 다가가야 한다. 손이 닿을 정도까지 가지 다가가서는 안된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져서 동물이 호감을 가지고 다가올 수 있을 거리까지만 다가간다.
2. 동물에게 말을 걸 때 군대식으로 말하지 말자.
동물을 잘 못 배운 사람들의 이상한 습관 중 하나는 개를 만나자 마자 “앉아!”라고 외치는 것이다. 자기 소유의 동물이든 남의 동물이든 쓸데없이 명령하는 것은 정말 지시가 필요할 때 지시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게다가 동물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동물들은 인간의 재미를 위해 앉거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먹이를 준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동물에게도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 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실용적인 목적으로 훈련을 해야 한다. 어린 아이에게 “공부해!”라고 끝없이 외치면 안되는 것과 같다. 동물도 아이도 소통과 이해의 상대이지 일방적이고 생각 없는 명령의 대상이 아니다. 이름을 부를 때도 상냥하게 좀 부르자.
3. 쫓지 말자.
인간은 오랫동안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왔다. 그래서 가축 뿐 아니라 대다수의 야생동물은 인간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한다. 스스로 위험한 존재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게 왜 재밌는지는 모르지만, 길에서 걷고 있는 비둘기도, 먹이를 쪼는 까치도, 햇볕을 쬐는 고양이도 쫓으려는 사람이 많다. 어린 아이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어른이 그렇게 한다면 주변의 눈초리를 받고 항의를 받아야 한다. 재미로 동물을 쫓을 때 도망가는 동물의 지독한 공포를 이해하는 것은 사회구성원의 행동이 다른 구성원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을 생각하는 아주 기초적인 사고다. 적어도 그 정도는 생각을 하고 살자.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뒷사람을 위해서 잠깐 문을 잡아주는 것이 예의이고, 전염병이 돌 때 길에 가래침을 뱉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동물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도 규칙과 예의가 필요하다. 규칙도 예의도 낮은 곳에 있는 존재들에게 강요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라도 더 가진 자들이 지킬수록 빛나는 것들이다. 이번 선거에 출마해 숱한 약속을 공연히 하는 사람들에게도 꼭 하고 싶은 말이다.
(기사 등록 20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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