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보통 사학에서 1920년대말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를 같이 묶어서 연구하는 것입니다. 1929년 대공황, 그리고 대공황에 따른 세계무역 파탄, '국가 경제'와 '블럭 경제'로의 전환, 초강경 권위주의 정권 출현 등 없이는 세계대전도 없었을 것이라고 대개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대공황이 본격화되는 대로 나에게 생긴 아주 큰 걱정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부분이죠. 이 번 대공황도 엄청난 규모의 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대공황의 시작단계부터 이 우려로부터 벗어나기가 힘든 것입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에게는 이런 '전쟁 걱정'은 아마도 좀 생소해 보일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즉 문민 정부로의 전환 이후에는 대한민국은 비록 군사화 수준은 매우 높고 가끔 가다 '서해해전' 등을 수행하긴 했지만, 대체로 '평화 레짐'을 견지해온 나라이었기 때문이지요. 즉 군대에 끌려가서 병영에서 고생하는 거야 한국에서 태어난 거의 모든 남성들과 그 가족의 고민, 걱정거리이었지만, 1994년 미국의 대북 폭격 위협 이후로는 심각하게 '전쟁 걱정'했던 경우는 그렇게까지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매우 높은 군사화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겉으로의 '평화 레짐'은 첫째, 역사적으로는 꽤나 새로운 것입니다. 사실 1953년 이후로는 남북한은 거의 1990년대 초반까지 서로간에 일종의 '저강도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왔습니다. 북파 공작원들이 북에 가서 살인, 파괴 등을 했으며, 남에서 '공비'라고 부르는 이북의 공작원들이 남으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무장 공비'라고 부르는 잠수정을 탄 공작원들의 마지막 상륙 시도는 1998년이었는데, 그 다음 햇볕 정책의 물결 덕분인지 이 '저강도 전쟁'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부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남북 사이의 평화 협정이 없으며, 여전히 남북 군은 서로를 주적으로 인식하며, 여전히 '저강도 전쟁'부터 시작해서 국지전부터 전면전까지 다 대비하는 것입니다. '평화 레짐'처럼 보이지만, 진짜 평화가 아직도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둘째, 한국에만 평화가 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웬만한 군사대국은 지속적인 전쟁 중에 있거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작전들을 일상적으로 수행합니다. Global Firepower 랭킹 (https://www.globalfirepower.com/countries-listing.asp )애서는 1위는 미국, 2위는 러시아, 3위는 중국, 4위는 인도인데, 이 네 나라는 사실 각종의 전쟁이나 유사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지금도 열심히 하는 중입니다.
미국의 아프간, 시리아 참전이나 대이란 특수 작전을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 같고, 러시아는 북카우커시스에서 다게스탄, 인구세티아 등지에서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하는 한편 시리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의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하고 있으며, 인도는 모택동주의적 게릴라들과 싸우고 있으며, 중국은 특히 신강에서 회홀(위구르) 민족을 상대로 대규모의 무장 경관들을 동원한, '평상시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분리주의 근절' 작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유럽은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말리, 차드, 니케르 등)에 파견된 프랑스군은 계속 작전 중에 있습니다. 스스로를 '평화 대국'으로 특화시키려고 이미지 메이킹하는 노르웨이만 해도, 몇년전까지 아프간에서의 미군의 작전에 동참해 참전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자본주의적 세계, 국민 국가들을 기본 단위로 하는 세계의 '정상'은 평화라기보다는 '영구적인 전쟁'입니다. 부디 착각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대전들은 왜 일어나지요? 근인은 물론 '세계 패권을 둘러싼 경쟁'입니다. 세계 패권부터 지역 패권까지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정해지곤 합니다. 예컨대 제1,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은 '세계 패권'쯤을 노렸지만,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시아에서의 패권 정도 겨냥했습니다. 제2차대전의 승전국인 미,영,불,소(러), 중은 결국 유엔 안보리 비토권을 가진 상임국이 됐으며, 오늘날의 패권 경쟁은 바로 이 "5개국 클럽" 안에서 벌어집니다. 한 편에는 미-영, 다른 편에는 중-러가 경쟁하는 사이에 불은 미-영에 더 가깝긴 하지만 동시에 중간에 '균형'을 잡아보는 포지셔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경쟁은 과연 과거 독-일을 상대로 한 그 당시의 경쟁보다는 꼭 더 평화로울까요? 세계대전의 원인들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 않을듯합니다.
근인은 패권 경쟁이지만, 원인은 훨씬 더 근원적입니다. 총동원 전쟁은 국가에 엄청난 권력을 부여하는 만큼 국가관료제도의 정비와 기능 확장에 크게 기여합니다. 영국의 연금제가 본래 제1차 대전 이후의 유족, 전쟁 미망인 연금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나, 일본 후생성이 제2차 대전 시절의 군인 유가족에 대한 사회보장부터 시작이 됐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지요? 자본주의 대국이 자동차라면 전쟁은 그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일종의 '휘발유'입니다. 관료 기구들의 권력 강화와 기능 확장 이외에는 전쟁은 자본주의 경제조직에서 기술적 혁신의 촉진제로 설정돼 있습니다. 전쟁 준비, 전시, 전후의 기술 발전의 상당부분은, 바로 각종 국방부들의 연구개발에의 전략 투자에서 비롯됩니다. 레이더부터, 컴퓨터, 인터넷까지는 '국방부 투자'에서 나온 발명품들이죠.
전시 징병과 전시 특수로 인한 생산 확대가 대공황이 낳은 실업 문제를 해결(?)해준 것은 미국이 갖고 있는 역사적 경험이라면, 유럽에서는 전시 폭격으로는 어차피 교체돼야 했던 공장의 옛 기기들이 파괴, 철거되고, 전후에 보다 생산성이 좋은 미국 기기들이 다시 들어온 경험이 있기도 합니다. 전후에 임금이 대대적으로 하락된 '저임금 노동력'은 서독의 '경제 기적'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느낌부터 들지만, 사실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가 '기계'라면 전쟁이란 이 기계가 가끔 들어가야 할 '모드' 중의 하나입니다. 이 '전쟁 모드' 없이는 자본주의 국가라는 기계는 정상 작동 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는 제3세계대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아직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양강', 즉 중-미의 전면전이 아닌, 금일 시리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지역 대리전들의 동시다발적인 발발과 시기를 같이 하는 경제전, 즉 상호 경제 제재와 냉전을 방불케 하는 국가적 대립의 조합일 수도 있는 것이죠. 여러 가지 형태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한/조선반도가 하나의 '전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 지금부터 남북 군사 대립의 수위를 가능한 한 낮추고, 가능하다면 평화협정과 상호 군축, 남북 양군 사이의 신뢰 구축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경제에의 악영향을 피하자면, "양강" 사이의 보다 중립적인 포지셔닝도 도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 한국의 결정권자들이 읽어야 할 책은, 스웨덴이나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냉전 시기에 미-소 양 진영 사이에 있으면서도 양쪽과 다 무역하고 두루 우호 관계를 맺는 데에 성공한 중립국들의 외교사 책들입니다. 그리고 세계인들에게 기후 정의를 위한 투쟁과 함께 지금 가장 필요한 시민 투쟁은 바로 평화 투쟁입니다. 금일만큼 세계 평화가 위협을 당한 일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등 냉전의 '최악의 순간' 이후로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본격화되는 "양강" 경쟁의 장기적 후과를 생각하면 말입니다.
(기사 등록 20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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