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고찰 - 1

사무엘 파버(SAMUEL FARBER)

번역: 두견

 

 

러시아 혁명과 그 변질에 관한 이 기사는 스탈린과 1928년의 '반혁명'만을 문제삼던 기존의 전통적 급진좌파들의 입장을 넘어서서, 어떻게 혁명 초기부터 변질이 시작됐는지를 주객관적 상황과 레닌과 볼셰비키의 선택을 바탕으로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분량이 상당히 길어서 10월 혁명까지 가는 과정을 다룬 앞부분은 생략해서 번역했고,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 이후를 다룬 나머지 부분도 2번에 나누어서 싣는다. 이 글의 필자인 사무엘 파버(Samuel Farber)는 쿠바에서 나고 자랐으며, 러시아 혁명에 대한 많은 탐구와 글을 남겨왔다.

 

출처:

https://jacobinmag.com/2018/11/russian-revolution-civil-war-peasants-red-victory

 


 


19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서 출판된 수많은 책과 기사들 중에서, S. A. 스미스(Smith)<혁명 속의 러시아: 1890~1928 위기 속의 제국>는 그 시기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유익한 저작으로서 두드러진다. 이 야심만만한 책에서, 러시아에 대한 중요한 역사가인 스미스는 급진적인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정신에서 영감을 받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어떻게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 정권으로 전락했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의 책은 1890년에서 1928년까지의 러시아의 획기적 사건들에 대한 파노라마와 심도 있는 견해를 보여준다. 이것은 과거의 문헌들과 소련 몰락 이후에 이용할 수 있게 된 역사적 기록물들을 토대로 한 최근의 학술적 연구까지 망라한 풍부한 역사적 조사다.

 

역사학자 로널드 그리고르 수니(Ronald Grigor Suny)가 지적했듯이 스미스는 "1890년대부터 1928년까지의 사건들과 개성, 정책, 대중정치와 씨름하여 그것을 보통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로 진입하고, 러시아가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독재국가로 추락하는 일관성 있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정리했다." 이 책의 방대한 자료에 비추어볼 때, 이 기사는 정치적 논쟁에서 가장 널리 논의되는 이슈와 사건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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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스미스의 책은 모스크바에서와 같이 그들의 봉기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이후에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SR) 동맹들이 어떻게 권력과 지지를 통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의 약속에 따라, 그들은 즉시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를 합법화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변화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것은 임시정부 아래서 발전된 이중권력의 동역학에 따라서 이미 규제받지 않고 현장에서 일어나던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미 상당 부분 토지를 점거한 농민들에게 그것의 사용권을 부여했다. 또한 그들은 전선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군대 장교들에 대한 선거제를 도입하고, 모든 사회적 재산과 계급들을 폐지하고, 제국의 비러시아 민족에게 자기결정권을 부여하고, 은행을 국유화하며, 세속적 결혼제도를 도입하고, 알파벳을 개혁하고, 외채를 무효화했다.

 

이어서, 그들은 낙태의 권리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여성 및 동성애자의 권리를 도입했다. 성공적인 볼셰비키 반란은 노동계급과 농민의 광범위한 급진화를 부추겼으며, 이는 새 정부의 시책과 함께 혁명적 권력의 큰 중심지들을 넘어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고 스미스는 쓰고 있다. 혁명 정부는 또한 러시아의 전쟁 참가를 종식시키는 문제, 그리고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의회 대표자 선출 문제로 눈을 돌렸다. 이것은 짜르 정부가 무너진 이후 오랫동안 약속되어 왔고 임시정부에 의해 지연돼 온 것이다.

 

191711월 말부터 드디어 제헌의회 선거가 시작되어 그해 12월까지 계속되었다. 스미스에 따르면 러시아의 81개 선거구 중 75개 선거구에서 유효득표율은 총 4,840만 표로 나타났으며, 이 중 사회혁명당은 39.5%, 볼셰비키는 22.5%, 카데츠(입헌민주당)4.5%, 멘셰비키는 3.2%를 얻었다. 무엇보다 사회혁명당이 큰 승자로 나타났고, 특히 그들에 대한 투표가 집중된 농촌 지역에서 더욱 그랬다. (비러시아 국민 중에서는, 인구의 3분의 2가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또는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에 투표한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700만 명 이상이 비러시아 사회주의 정당에 투표했다.)

 

그러나 선거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회혁명당이 지배적인 의회가 소비에트 권력의 원칙을 지지하기를 거부했을 때, 볼셰비키-좌파 사회혁명당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고, 결코 다시 재소집되지 않았다. 정부는 의회를 위한 사회혁명당 후보자 명부가, 사회혁명당에서 (정부 안에서 볼셰비키의 동맹인) 좌파 사회혁명당이 분리해나가면서 분열되기 전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의회에 참가해야 하는 실제 세력을 진정으로 대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이 선거 투표에서 대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좌파 사회혁명당이 각각 따로따로 출마했던 6개 선거구 중 5개 선거구에서도 그들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몇 개 지역에서의 선거 결과는, 분열의 현실이 그 지역 내 지지자들의 마음에 가라앉기 전에, 너무 일찍부터 좌파 사회혁명당의 후보자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의 결과일 수도 있다.

 

러시아의 전쟁에서 철수와 관련해 혁명 정부는 일찍이 191710월부터 11월까지, 배상이나 병합 없는 평화를 요구하고 러시아 제국 민족들의 자결권을 추구하면서 러시아의 전쟁에서 해방을 위한 독일과의 협상을 개시했다. 그 후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증명하기 위해 연합군이 만든 비밀조약을 공개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독일은 적대행위를 종식시키는 대가로 매우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다.

 

혁명 정부는 이 문제로 분열되었다. 레닌은 러시아가 그것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비추어 이 조건을 즉각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부하린이 주도하고 좌파 사회혁명당이 지지하는 좌익 공산주의분파는 항복에 반대하며, 독일로 혁명을 확산시키기 위해 틀을 벗어난 혁명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독일과 아무런 조약도 체결하지 않은 채 러시아군을 해체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포함하는 "평화도, 전쟁도 아니다"는 자신의 "중도적" 입장을 주장했다.(볼셰비키당 내부의 이러한 투쟁은 대중에게 널리 배포된 분파 문건들을 포함하여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는데, 이는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는 내전 이전의 볼셰비키당의 다원주의를 가리키는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언급할 가치가 있다. 이는 분명히 내전 직후와 소비에트의 나머지 역사에서 나타나는 당내부 단속과는 강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의 성공적인 공세가 계속되면서 독일이 요구하는 평화협정의 조건은 더욱 엄격해졌다. 그 공세로 러시아가 입은 손실은 악화되고 있는 국가 경제 상황과 결합되었고, 혁명정부에게는 레닌의 제안을 채택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1833일 러시아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의 조건은 러시아에게 재앙적이었다. 평화를 대가로 러시아는 발트해 지방, 벨로루시의 많은 부분, 우크라이나 전체를 잃었다. 러시아는 일격에 농업과 철도의 3분의 1을 잃었고 석유와 면화 생산의 거의 모든 것을 잃었으며 석탄과 철강의 4분의 3을 잃었다.

 

정부가 독일과의 평화 조건에 굴복하기로 결정한 결과, 좌파 사회혁명당은 정부를 떠나면서, 볼셰비키 세력을 유일한 집권정당으로 남게 만들었다. 곧이어 전국 각지에서 치러지는 소비에트 선거에서 패배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에 식량 위기로 인한 정치적 후폭풍, 그리고 더욱 광범위하게는 국가적으로 경제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면서 말이다. 스미스는, 4월 말에 소비에트 노동자 대표에 대한 부분적 재선거에서 멘셰비키에게 47석을 주고,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은 13명을 선출한, 중요한 직물 도시인 이아로슬라블(Iaroslavl)의 예를 들어 이것을 묘사한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 도시에서 소비에트를 해산하고 멘셰비키들을 체포함으로써 파업을 촉발시켰고, 그러자 계엄령을 발동시켜서 대응했다. 그 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정책을 따르기 시작했으며, 이른바 "적대적인" 세력의 통제 하에 놓였다고 여겨지는 소비에트들을 폐쇄했다. 이것이 스미스에게는 원래 민주주의 혁명이었던 것이 종말하기 시작한 표시였다. 혁명정부는 일당국가가 되어 소비에트에서 다수당의 경쟁을 없애기 시작했다.

 

그 정치적 효과를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이 획기적인 사건은 볼셰비즘의 비민주적 성격을 확인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냉전시대 전체주의 학파에서부터, "사회주의""일당국가"는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스탈린주의의 기본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혁명에 대한 급진적으로 서로 다른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붙잡혔다. <스탈린주의 이전>에서 내가 주장했듯이, 볼셰비즘 주류는 부분적으로 객관적인 상황,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지배적인 된 주류 볼셰비키 이데올로기의 압박 때문에 혹독한 내전으로 인해 부과된 불가피한 일을, 미덕으로 전환시켰다.

 

내전

 

19185, 내전의 시작은 혁명의 운명을 봉인하면서 그 하향 나선형을 더욱 심화시켰다.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는 적대행위를 빌미로 전시 비상 권력을 주장하면서 당을 소비에트 권력의 우두머리로 선포하고 "소비에트 권력의 법령과 조치들은 모두 우리 당에서 나온다"고 명시했다. 이는 그해 614, 정부를 불안정하게 하기 위해 중상모략, 음모, 무장 반란을 사용했다고 알려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소비에트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권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에서 민주주의의 상실을 더욱 심화시켰다.

 

볼셰비키 정부는 내전으로 야기된 절망적인 경제 상황에 대응하여 점점 더 어려워지는 도시와 지역에 식량을 공급하고, 산업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스미스는 이것이 경제 전체에 대한 극도로 중앙집중화된 관리 시스템을 수반하는 것으로 특징짓는다. 대부분 산업의 국유화, 국가에 의한 곡물과 다른 농산물들의 독점화, 민간 무역의 부분적 금지, 주요 소비재의 배급, 노동의 군대화. 이것은 노동자들이 생산을 통제하는 것의 종식과 농민 자치권의 극적인 축소를 의미했는데, 이것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정의해 온 서로 다른 두 기둥이었다.

 

볼셰비키 정부의 옹호자들이 아주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처럼,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는 도시들을 먹여 살리고 전선에 공급할 필요가 이러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채택한 객관적이고 구조적 원인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보여주듯이 볼셰비키 지도부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이러한 정책들을 공산주의의 반가운 도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니콜라이 부하린은 그의 <전환기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이라고 찬사를 노래하면서 전시 공산주의의 최우선적인 이론적 주창자가 되었다.

 

레닌은 1919년에 "이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 활동의 조직과 공산주의자들의 정책 전체가 최종적이고 안정된 형태를 완전히 획득했으며, 나는 우리가 올바른 길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할 때 최소한 부하린의 정서를 공유했다.

 

스미스는 "구조적 제약, 우발적 사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모두 전시 공산주의를 구성하는 정책들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옳은 지적을 한다. 그리고 강력하게 덧붙인다. “정책 선택은 객관적인 상황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된 것이 아니었다. , 그것들은 [볼셰비키]의 지배적인 개념과 내재된 성향에 의해 정의되기도 했고, 때로는 노골적인 선택의 방식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인 반사작용으로 규정되기도 했다.” 이 경우 스미스의 훌륭한 판단은 일부 좌파들이 역사 발전을 오로지 객관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보는 경향과 또다른 일부 좌파들이 그에 대응하여 역사 형성에서 정치적 사상과 의지를 역시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향 사이의 간극을 연결시켜 준다.

 

그리고 스미스는 그러한 볼셰비키 개념과 성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그가 극히 폭넓은 필치로 그리는 레닌의 성향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 자신의 이념적 엄정함에 대한 확신, 양보를 꺼리는 마음, 그리고 [그의] 사상과 행동의 권위주의적 습성"에 사로잡혀서 상당히 거친 태도였다. 마치 그의 정치가 모든 문제에 대해 항상 변함없이 같았을 것처럼 말이다.

 

레닌은 1921(아래를 보라)에 신경제정책 채택을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받침대로서 협동조합에 대한 지지를 표방하면서 분명히 생각을 바꾸었다. 레닌은 또한 스탈린에 대한 생각을 급격하게 바꾸었는데, 1922년에는 스탈린을 "실질적인 진정한 '민족주의적-사회주의자'이자 저속한 대러시아주의적 불량배"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체르니셰프스키(Chernyshevskii), 네차예프(Nechaev), 트가쵸프(Tkachëv) 같은 작가들을 들먹이면서,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나 레닌과 그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레닌의 사상을 그가 권위주의적으로 보는 러시아의 혁명적 전통과 연결시킨다. 놀랍게도, 그는 유럽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와 전통에 대한 레닌의 오랜 연계, 특히 역사가 라스 리(Lars T. Lih)와 그의 비판가들에 의해 최근에 아주 길게 논의되고 있는 이슈인 칼 카우츠키와 레닌의 연계를 무시한다.

 

전체적으로 볼셰비키 정당에 대해 그는 좀 더 미묘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다. 변화를 허용하면서, 그는 1917년에 노동자, 병사, 수병들이 그 안으로 밀려들면서 "1903년에 레닌이 고안한 꽉 짜여진 음모적 당과는 아주 다른 유기체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볼셰비키를 "보통 사람들의 이익을 가장 완강히 옹호하는 사람들"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한동안 볼셰비키 당이 다원주의를 허용한 것을 인정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매우 다양한 사상과 가치들의 묶음이었다"며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의 공존"을 포함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1920년대 초반에 이르러 당이 점점 단일체가 되고 민주주의의 기본 메커니즘이 붕괴하면서 끝나 버렸다.

 

그러나 융통성없다고 추정되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이론적 배경이나 성향과는 별개로 전시 공산주의는, 내가 내 책 <스탈린주의 이전: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상과 몰락>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전쟁 상황에 대한 불가피하고 일시적인 대응이 아니라 혁명적인 미덕으로서, 다당제 소비에트에 대한 억압, 적색 테러(아래를 보라)를 허용하는 정치 문화를 구체화했다. 그 때 도입된 다른 조치들에는 추가적으로 노조 민주주의와 독립성의 심각한 제한, 정치적이거나 법적인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적 반대파에 대한 억압 같은 것들이 있다.

 

볼셰비키 정부의 전시 공산주의는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더욱 떨어뜨려 정부를 더욱 고립시켰다. 특히 소작농들은 정부의 명령으로 수행된 농촌으로 파견된 도시 사람들의 "식량 파견대"에 의해 곡물을 강제로 몰수당함으로써 그 정책의 가장 피어린 측면 중 하나를 경험했다. 파견대들이 압수한 소위 '잉여 곡식'에는 흔히 소작농들의 빈약한 식단의 일부, 또는 다음 계절에 씨앗으로 사용하기 위해 비축한 곡식이 포함돼 있었다. 정부는 농촌에서 더 많은 식량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하며, 상상과 근거 없는 계급 구분을 바탕으로 농촌에서 '빈농 위원회'(kombedy)를 만들어 곡물과 공산품 소비재를 유통하고, 쿨락(kulaks: 부농)으로부터 잉여 식량을 압수하는데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그 대가로 빈농 위원회는 곡물 및 기타 징발된 물품에서 몫을 받게 되었는데, 이런 방식은 수많은 학대가 일어나도록 구조적으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탐보프(Tambov)에서 800개 이상의 마을 수준의 빈농위원회에 대한 연구를 인용했는데, 이 연구는 그들 구성원 중 3분의 1이 농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그들의 비공식적이고 자의적인 운영 방법을 고려할 때 예측 가능한 발전인 빈농위원회에 합류한 범죄자와 도둑들의 수와 일치한다. 놀랄 것도 없이, 이 위원회들은 농촌 인구의 대다수에게서 증오심을 이끌어냈다.

 

1920년 가을이 되자 볼가(Volga) 지방에 기아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1921년 극심한 가뭄이 추수를 망쳐, 주로 볼가 지방과 남부 우랄 지방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기아 사태를 불러왔다. 아마도 이 새로운 위기를 예상하고 19202월 트로츠키는 농민들이 더 많은 곡식을 파종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징수를 현물 세금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당 지도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내전은 1920년에 끝났고, 영국이나 미국 같은 다양한 외세의 지원을 받아 옛 지배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백군에 대한 적군의 승리로 끝났다. 스미스는 이들을 대부분 "러시아는 하나고 나뉠 수 없다"는 강한 국가의 회복, 정교회의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혁명적 대중의 증오로 고무받은 계급 갈등으로 야기된 "무정부 상태"에 대한 진압을 목표로 하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에게 볼셰비즘은 러시아 국민에게 강요된 '독일-유대인'의 음모였으며 '유대인'(zhid)이라는 용어는 곧 '공산주의자'에 해당했다.

 

스미스는 왜 적군이 우세했는지에 대한 훌륭한 분석을 제시한다. 첫째, 그는 적군이 백군보다 더 큰 군대였다고 주장한다. 1920년 가을까지, 그들은 500만 명 이상의 신병을 확보했다. 비록 병사들의 실적은 고르지 못했으나, 트로츠키는 짜르 체제의 군에 있었던 군사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백군이 가진 전문성과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점들을 의미없게 만들었다. 스미스는 또한 적군이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고무하는데 더 뛰어났다고 지적하는데, 이로 인해 장교단 내 고용된 군사전문가의 비율을 19183/4에서 1921년에는 1/3 조금 넘는 수준으로 줄일 수 있었다.

 

더구나 백군의 편에서 싸우는 코사크 기병대는 최고의 기량이기는 했지만 본토 밖에서의 전투는 결코 편치 않았다. 게다가 볼셰비키군은 백군보다 더 잘 조직되고 통일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전의 기반으로서는 더욱 적당하고 통합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스미스는 또한 프랑스, 영국, 미국 측의 백군에 대한 지원과 군사적 개입은 상당했지만, 백군이 기대했고 필요로 했던 규모로는 결코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스미스가 단언하듯이, 이것은 연합국 정부들이 자신들의 본국에서 전쟁에 지친 사람들, 그리고 좌파적 반대파와 싸워야 했기 때문에 백군이 필요로 하는 인력과 물질적 자원을 내전에 바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게다가 스미스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백군은 지주의 동맹이라는 것을 농민들의 마음에서 결코 지울 수 없었고, 농민들이 적군의 식량 징발을 못지않게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적군을 차악의 존재로 여겼다고 쓰고 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이외의 민족들은 적군이 백군보다 그들의 민족적 요구에 더 호의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내전에서 적군의 승리는 매우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스미스가 자세히 설명했듯이 그들의 생활수준에서 큰 손실을 입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만연했다. 이러한 불만은 한편으로는 1921년의 크론슈타트 반란으로 이어졌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 정부가 그 불만을 달래기 위해 신경제정책(NEP)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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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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