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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여성과 노동: 슈 퍼거슨과의 인터뷰 - 2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3. 24.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슈 퍼거슨(Sue Ferguson)과의 인터뷰 기사이다. 슈 퍼거슨의 새책인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Women And Work: Feminism, Labour, and Social Reproduction - Pluto, 2020)을 중심으로 성별화된 노동, 반자본주의 투쟁,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해서 폭넓게 이야기하고 있다. 슈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발전시키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체계화시키는 경험을 수십 년간 해 왔다. 노동력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이 작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젠더의 교차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글이 다소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2편이다.(번역: 두견)

 

출처:

http://newsocialist.org/women-and-work-an-interview-with-sue-ferguson/?fbclid=IwAR3wP6sehhZHJXbHrfBkxzcVlGZiX9Em9hnlusaG3ha5VyVvM_Ll4HVqog4

 



 

1편에서 이어짐 

 

 

역사에서 좀 뒤쪽으로, 그리고 당신 책의 연대표로 가보겠다. 당신이 소위 여성의 일에 대한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통찰력을 본 직후인 1970년대에 있었던 가사노동을 위한 임금’(WfH) 캠페인에 대한 당신의 토론을 읽으면서, 나는 WfH가 어떻게 이미 얼마나 많은 사회적 재생산 활동에 임금이 지급되고 있는지, 특히 노동자들이 인종화된 곳에서 그러고 있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당신은 일반적으로 초기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이론적 단점을 확인하게 된다. 보다 최근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당신이 '마르크스 학파'라고 부르는 것)의 재정식화는 대체로 그것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는 가능한 공공연한 부불 노동을 추출함으로써 작동하기 보다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생산적(잉여가치 창출) 노동과 비생산적(잉여가치 비창출) 노동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활용함으로써 더 많은 작업을 하는데, 그 중 상당 부분은 표면상으로 임금을 지불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다. 나는 당신이 사회적 재생산에서 무급 노동과 임금을 받는 노동과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보는지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한편으로는 과소평가되지만 임금을 지급받는 가내 서비스 노동, 또는 보상을 덜 받지만 임금을 받는 교육과 간병,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이나 다른 여성화된 사람들이 여전히 가정과 다른 관계에서, 그리고 심지어 작업장(예를 들어, 남성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 동안 학생들을 위한 비공식 치료사로 일하는 여성 교사)에서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전적으로 무급인 돌봄노동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짧은 해답은 억압이라고 생각한다. , 여성들이, 특히 인종화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저평가되어 자본주의가 가능한 한 값싸게 시켜야 할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외된 자본주의가 우리의 몸으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대지로부터 우리를 만드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친밀하고 인간적인 종류의 일들이 많은 면에서 어떻게 숨겨지고 가치 저하되는지 말이다. 국가의 개입 없이 비교적 건강하고 교육받고 훈련된 노동력을 가질 수 있다면, 여성들은 여전히 집에서 대가없이 그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부분적으로 (공공 서비스를 통해) 사회화되었고 (민간 산업에서는) 상품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저렴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가치절하된, 따라서 노동력을 더 낮은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신체에 의해 행해지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 나는 행해지고 있는 일이나 그것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선천적으로 질 낮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가치절하는 사회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나는 전통적인 가족이나 가정 영역에서 제외되거나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특히 (일부) 퀴어와 트랜스젠더같은 사람들을 통합할 수 있는 페미니즘적 프레임 틀의 개발에 대해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높이 평가한다. 이를 통해서 결코 가정주부로 보여지지 않거나, 말하자면, 성별에 기반한 급여 형평성이 일관된 요구인 작업장에서 여성화된 사람들로부터 자본의 복잡한 노동 추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특히 성노동은 그것과 바로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재생산 투쟁에서 이처럼 주변화된 사람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성노동하는 트랜스 여성이, 말하자면, 자신의 공동체에서 전체적으로 중요한 무급 사회적 재생산 기능을 수행하면서 덧붙여 성노동으로 인한 유급 사회적 재생산 노동을 하는 것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러한 정치의 중심적 주체로 이해될 수 있을까?

 

최근의 퀴어적이고 트랜스적인 사회적 재생산 이론과 정치의 폭발은 멋지다. 내 책에서 내가 공정하게 할 수 없었던 매우 유익하고 종종 도발적인 토론이다. 당신의 질문은 몇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정확히 그들이 주류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와 제도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퀴어와 트랜스인 사람들은 그것이 자본주의 안에서 운영된다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들 자신의 돌봄과 생존의 공동체를 만들어 왔다. 이것들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각각 다르며, 억압적인 관계로부터 항상 또는 반드시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들은 사적인 삶, 성적 행위, 돌봄 노동의 사유화와 개인화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들이 억압에 민감하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돌봄과 생존의 공동체를 만들어낼 때, 그러한 공간은 또한 사람들이 그 공동체에서 그들이 하는 유급이나 무급인 사회적 재생산 활동의 조건들을 정치화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과 자신감을 얻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그리고 그들이 특정한 억압을 재생산할 때, 그들은 당연히 비판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퀴어와 트랜스젠더의 잠재적인 역할은 이것을 훨씬 넘어선다. 그들은 더 나은 건강 돌봄, 직업 차별과 성희롱의 종식, 더 안전한 거리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위해 일하는 지역사회 조직을 형성하고 정치화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한 목표가 어떻게 그들을 더 나은 학교나 전통적인 토착지를 보존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공통의 기반 위에 두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케이트 도일 그리피스(Kate Doyle Griffiths)2018년 런던 <역사유물론> 대회에서 한 강연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듯이, 퀴어와 트랜스젠더인 사람들도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유급 사회적 재생산 부문에서 과다하게 대표되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지역사회와 작업장에 걸쳐 트랜스젠더와 퀴어를 포괄하는 삶의 요구들을 앞세우기 위해 일하는 의식적인 "전투적 소수파" 또는 "친밀한 그룹"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 것은, 퀴어와 트랜스인 노동자들은 또한 불안정한 직업과 실업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고 있는데,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투쟁이 다른 실업자 및 불안정 노동자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회적 재생산 투쟁을 자본의 이익보다는 삶의 이익을 위해 노동을 조직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삶을 형성하려는 투쟁이다. 즉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살게 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삶을 재생산하려는 시도들이다. 당신은 이탈리아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내려온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한 갈래의 비평을 제시한다. 자본주의로부터, 예시적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공동체와 직업의 "공간 분리"를 추구함으로써 삶을 다르게 재생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반하여, 당신은 삶을 다르게 재생산하려는 시도는 더 비옥하게, 어쨌든 항상, 교사들의 파업과 같이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투쟁 속에서 펼쳐지고 있고, 새로운 삶의 형성은 그러한 투쟁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투쟁 속에서 재생산하고 있는 삶의 형성이 오래된 억압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그러한 분리가 투쟁의 주요 알려진 관심사에 종속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인가? (나는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파업 노동자들이 그들의 신체를 격렬한 방법으로 나타내며 위기를 호소하고자 할 때, 장애 정의에 대한 고려들이 갑자기 사라질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런 투쟁 속에서 보다 많은 사회적 힘을 가진 사람들, 즉 어떻게 백인 남성들, 보통의 백인들 등이 그것을 지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형성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인가?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언급하는 종류의 것들을 막을 수 있는 어떤 마법의 조직화 공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필수적 조건이나 원칙이 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의 투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포괄적이고 민주적인 조직, 운동, 노조, 연합체, 집회 등을 건설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회원이나 참가자들이 우선순위와 행동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갖도록 보장하고, 중심적 조직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전문지식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얻으려하며, 다양한 사회적 억압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식과 의식을 구축하려는 집단적인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어떤 조직화된 그룹 안에도 있는, 특히 노동의 정신적/육체적 분할 같은노동의 분할을 염두에 두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직해 온 많은 세월 동안 더 일상적인 일들(정리정돈, 간식 제공, 육아 등)이 여성들과 여성화 된 사람들의 어깨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흔한 일인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반면에 더 지적이거나 정치적인 의사 결정 작업은 남성들이 맡는다. 그리고 단체에 참여하는 게 얼마나 자주 장애인 차별적(엘리베이터나 적절한 세면시설이 없는 건물에서 만나는 것)가 되거나, 보모를 부를 여유가 없는 부모나 지하철 노선 근처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시킬 수 있는가. 모든 만일의 사태를 미리 알고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건은 그러한 우려를 말할 수 있고 이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내부 문화를 육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비교적 짧은 분출의 시간 동안, 상당히 집중된 의제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파업의 경우, 우리는 연대 그 자체의 행동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온타리오의 파업 교사들은 Wet’suwet’en 사람들의 투쟁을 앞세웠고, 또는 Wet’suwet’en 사람들은 지난해 해밀턴의 퀴어들이 극우 폭력배들에게 공격당하자 그들을 위해 일어섰다. 이러한 종류의 시나리오는 공동체들 간의 관계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중요한 삶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은 강력한 교육이 될 수 있다


(기사 등록 2020.3.24)                                                                                   *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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