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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코로나19/ 삼성해고자 고공농성/ 국가와 자본주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3. 11.

전지윤 


코로나19 - 희생양을 찾고 검찰까지 불러들어야 하는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적어도 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는 공정하게 평가해줄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나름 노력하고 있고 어느 정도 효과도 있었다는 것은 이란, 이탈리아, 일본, 미국 등과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전권을 주면서도 정부가 충분히 소통하면서 필요한 최대한의 지원을 하는 방식이 유효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온전히 정부만의 공이 아니다. 무엇보다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한 방역, 의료인력들의 온몸을 던지는 노력과 헌신에 감사하게 되고, 성숙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도 감동적이고 중요했다. 메르스의 경험과 과거 정부의 오류도 반면교사와 쓴 약이 됐을 것이다.

 

정부의 잘못과 문제점도 있었다. 그 중에서 마스크 대란은 정부의 좌충우돌을 넘어서 주되게 시장논리의 한계를 보여준 것 같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면 혼란과 재앙이 올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 이 경험을 앞으로 부동산 등 많은 부분에 적용해야 하고, 시장논리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도 나갈 필요가 있다. 이미 재난기본소득 등의 요구도 나오고 있고, 미국에서도 지금 시장주의 의료체제에 대한 비판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늦장대응보다 과잉대응이 낫다는 말을 과도하게 확장한 그야말로 과잉대응도 있었다. 과학적이지도 인권적이지도 않고 자원 낭비적인 무조건적 동선 공개, 격리, 봉쇄, 폐쇄, 소독 등은 문제가 많아 보였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인권에도 손상을 가했다. 경제 위축을 너무 우려해 2월말쯤에 섣불리 곧 조기 종식을 언급했던 것도 실수였다. 그것이 낳은 방심과 긴장완화는 분명 피해로 돌아왔다.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이 감염병에도 더욱 취약한 현실에서 더 적극적인 지원과 복지 제공도 크게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고 잘못과 실수는 그것을 통해서 배우고 반복하지 않으면 자양분으로 여길 수 있다. 특히 보수우파가 부추기는 혐중 인종주의에 타협하지 않은 것은 잘한 것이다. ‘코로나 = 중국 = 문재인 = 종북좌빨과 연결돼 있는 이 논리는 종북몰이가 사라진 게 아니라 중국을 중심축으로 삼아 글로벌하게 업데이트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선거운동 도중에 테러를 당한 민중당 지역구 후보의 최근 사례는 혐중-종북몰이가 선동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불길할 징후일 수 있다.

 

하지만 혐중논리에 타협하지 않은 것은 집권여당의 일부 주요정치인들과 주변 언론, 열성 지지자들이 신천지 악마화와 마녀사냥에 동참하면서 크게 빛이 바래고 있다. 뭐라고 변명하더라도 이것이 세월호 때 유병언-> 구원파 -> 검찰수사와 압수수색으로 연결시키며 본질을 흐리고 화살을 돌리려던 시도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가리기 어렵다고 본다.

 

신천지 마녀사냥은 최근 대구 한마음아파트 사례에서 특히 심각했다. 월세가 2~5만원 밖에 안 되는 30년된 이 낡은 임대아파트에 신천지 여성 신도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신천지가 가난하고 소외된 젊은 비혼 여성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은 이유에 대한 고민을 제기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 엄청난 음모, 특혜, 은폐가 있는양 왜곡하면서 신천지가 바퀴벌레처럼 모여 있었다’()는 잔혹한 매도가 이뤄졌다. 반인권적이라는 코호트 격리가 실시돼도 누구도 뭐라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더구나, 중대본에서도 신천지의 고의적인 자료누락이나 비협조 등은 확인돼지 않았다. 강압적 방식은 반발과 은폐라는 역효과를 낳기에 방역에 도움이 안 된다고 거듭 지적하는데도 검찰을 향해 신천지에 대한 구속수사, 압수수색을 반복해서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신천지와 오랜 경쟁적, 적대적 관계에 있던 종교인, 언론인, 전문가들을 불러서 계속 이런 논리와 선동을 강화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원칙은 있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조차 그러는 것을 보면 상당히 당혹스럽다. 종교, 양심, 결사의 자유에 대한 원칙은 어디로 갔는가. 양심의 자유와 기본적 인권은 내가 싫어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적용돼야 하고, 그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었는가. 인권은 심지어 악질적 범죄자에게도 보장돼야 하는 게 아니었나.

 

특히 신천지 혐오에 열심인 사람들(예컨대 김어준 씨)이 바로 얼마 전까지 스스로 주장하던 검찰개혁과 반하는 입장에 서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검찰은 결코 공정하고 정의로운 심판관이 아니며, 따라서 검찰의 수사권을 강력하게 제한하고 나아가 폐지해야 한다. 압수수색과 별건수사를 남발하면서 피의사실 유포와 아니면 말고식 언론활용과 여론재판을 해온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던 주장은 어디로 갔는가.

 

그런 검찰에게 자신들 스스로가 방역과 보건의료까지도 검찰의 개입 영역으로 확대하고, 압수수색과 별건수사와 여론재판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검찰개혁의 중요성과 대의를 스스로 깎아내리지 말고, 편견이 아니라 이성으로 돌아보고 판단해야 한다. 물론 신천지와 보수우파의 연결성이나, 검찰의 이중적 태도에 분노하고 의심할 수 있다. 실제 검찰(과 보수우파)의 소극적 태도는 총선을 앞두고 화살이 신천지보다는 문재인 정부에 가기를 더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결국 여론과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적당한 시기에 전격적으로 나서 얼마든지 검찰권의 칼을 휘두를 수 있다. ‘이런 문제도 결국 검찰만이 단호하게 해결할 수 있고, 이래서 검찰의 수사권은 폐지, 축소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에 이용할 것이다. 신천지가 접촉을 시도해 온 여야 정치인들을 골고루 섞어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문제들은 가리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다시 올라서려 할 것이다.

 

신천지의 교리가 아무리 문제가 많고, 방역에 차질을 준 신천지 지도부의 행태에 수많은 비판이 필요하더라도, 코로나19의 원인이나 책임을 모두 떠넘기며 혐오를 부추기고 희생양을 삼아서는 안 된다. 결국 문제는 바이러스의 특성과 집단감염의 매카니즘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폐쇄된 공간에서 밀접한 접촉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비말감염이 시작되고, 감염자가 다른 지역이나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확산이 이뤄졌던 것이다. 종교집단만이 아니라 병원, 콜센터, ‘줌바댄스클럽에서도 똑같은 매카니즘이 이뤄진 것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

 

신천지가 아니더라도 환자를 곧 바이러스로 보는 낙인과 혐오가 두려워 사실을 숨긴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비판과 문제의식은 증상이 나타나서 몸이 아픈데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 계속 일을 나가야했던 사람들, 신천지같은 종교에 빠져든 사람들보다는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사회와 구조를 향해야 한다. 이단을 감별해서 사회에서 척결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이단으로 지목된 집단 내부의 결속만 강화하고 그 지도부에게 박해받는 순교자로서 권위만 만들어줄 것이다. '정통''이단'의 이분법은 무엇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삼성 해고자 고공농성과 사회적 거리두기

 

삼성해고자 김용희 동지의 고공농성 269일째였던 지난 34일에도 침묵시위가 있었다. 코로나19로 모든 행사나 집회를 잠시 멈춤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자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멈출 수가 없었고, 거리를 두기 어려웠다.

 

해고노동자 김용희가 여전히 저 지상 20여미터 위의 철탑 위에서 사회와, 우리와 거리두기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높은 철탑 위에서 그는 바이러스로부터는 안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으로부터는 격리돼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잠시 멈춤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제 침묵시위를 하면서, 위험과 필요를 뻔히 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됐다. 잠시 멈춤이 허용돼지 않는 삶, 잠시 멈추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위태로운 삶, 먹고 살기 위해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삶.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않는다. 왜 위험한데 돌아다녔냐고, 왜 일을 했냐고, 왜 사람들을 만났느냐고, 비난하고 의도를 의심한다. 감염병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을 가해자로 몰아버린다. 만약에 확진자가 그랬다면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켄 로치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를 떠올려보면 좋겠다. 거기서 주인공 리키는 강도를 당해서 얼굴과 가슴, 다리 등에 큰 부상을 입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차를 몰고 일을 나간다. 막아서는 가족들을 뿌리치고 차를 몰며 가는 리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 울음소리가 커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학교도 어린이집도 모두 문을 닫은 지금,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같이 오손도손 휴식하면서 코로나를 피하기보다, 아이들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꾸역꾸역 일을 나간다.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불안함을 가진채로. 그리고 어제 외할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긴 부모들이 갑작스런 화재로 아이 3명을 잃었다는 뉴스를 봤다. 지금 온몸이 마비될 정도로 울고 있다는 그 부모와 외할머니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하기도 싫다.

 

이런 사회가 너무너무 싫고, 이런 사회를 만든 책임자들이 너무너무 미운데, 그나마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이런 문제를 개선하자고 목소리를 내던 양심적인 전문가와 전문가 단체(범학계 코로나19 대책위원회)가 대한의사협회와 조중동의 공격 속에 결국 해체했다는 뉴스도 보게 된다. 그분들이 의료사회주의자들이라는, 문정부의 의료정책을 뒤에서 조종하는 비선실세라는, ‘최순실과 다를 바 없다’(안철수)는 공격들 끝에 벌어진 일이다.

 

왜 김용희는 269일 동안 강제로 거리두기를 당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잠시 멈춤을 못하고 침묵시위라도 이어가야 하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러 나가고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는가? 왜 많은 부모들이 아이 돌봄을 해결하지 못해 발을 동동구르고 있는가? 왜 돌봄의 책임을 사회가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져야 하는가? 왜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게 되고 있는가? 이런 사회구조와 그 구조 위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삼성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해서 300억을 기부하고 인력 등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뉴스를 보면서 씁쓸함을 삼킨다.

 

국가 관료 자본주의의 모순과 저항의 가능성토론회

 

지난달에 박노자 선생님이 발제해 주신 국가 관료 자본주의의 모순과 저항의 가능성토론회는 흥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박노자 샘의 발제는 폭넓은 시야와 통찰이 가득했다.

 

자본주의는 세계체제고 그 정치적 형태와 축적레짐은 역사적으로 다양했다. 20세기에는 주로 준주변부에서 혁명들이 일어났는데, 이런 혁명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성격 속에 강력한 국가권력을 수립해 갔다. 혁명은 전쟁으로 이어지며 군국화됐고 내자동원형 근대화가 추진됐다. 결국 세계체제로 재진입하는데, 그런 시장화를 통제하고 주도하는 것도 국가다. 외세의 간섭과 압박은 내부적 계급갈등을 유예시키는 구실을 하고 안면인식 기술, 휴대폰앱 등 첨단기술을 통한 감시 속에 단기중기적 저항의 전망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양한 질문과 문제제기, 토론이 이어졌는데 역시 미국과 서방이 중국, 북한, 이란 등을 악마화하며 거짓 정보들을 흘려온 것에 대한 경계의 주장들이 나왔다. 맞다. 친서방 반공 냉전 진영에 속했있던 우리로서는 더더욱 이런 악마화와 혐오를 경계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19 속에서는 이것이 혐중 인종주의로까지 나가는 모습을 봤다.

 

그러나 그것이 이런 사회의 문제점과 잘못에 눈감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크라이나 여객기 피격에서 드러난 이란 체제의 문제점,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에서 보인 중국정부의 오류 등은 서방언론의 왜곡과 거짓으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그동안 중국에서 경제투쟁은 산발적으로 증가해 왔지만, 이것이 반정부 정치투쟁으로 일반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보였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19는 시진핑 정부의 정치적 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이것은 경제투쟁의 발전은 정치투쟁이 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며 양자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던 지적들을 상기시킨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만 상호작용하는게 아니다. 세계체제 속에서 한 지역의 투쟁은 다른 지역의 투쟁을 자극한다. 지금 중국정부의 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얼마 전에 홍콩의 민중들이 온갖 탄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던 요구들과 비슷하다.

 

코로나19와 그것에 대한 관료적이고 경직된 대응, 그것이 낳은 파장이 시진핑 체제의 정치적 위기를 촉발하는 모습은 지난해 히트친 미드 <체르노빌>에서 핵발전소 사고와 소련 정부의 대응을 떠올리게도 한다.

 

초기에 사고를 은폐하려던 시도, 나중에 감염병과의 인민전쟁을 선포하며 동원 체제의 구축, 반대 목소리를 혁명의 배신자 취급하며 억압하는 모습, 중앙 지도부의 책임을 회피하며 하급 관리자들에게 책임 전가하기, 결국 정치체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나는 재앙의 원인 등이 너무 유사하다.

 

실제 체르노빌 사고는 나중에 소련 체제 몰락의 핵심적 계기가 됐는데, 이번 코로나19로 나타난 재앙이 중국의 국가관료 자본주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내외부적 계급의 적과 싸우며 혁명적 전통과 성과를 지켜야하는 엄중한 상황이라는 핑계로 권력을 독점하고 반대 목소리를 차단하며,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것(주로 러시아 혁명 이후에 내전 과정에서 등장해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돼 온)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장 자본주의도 국가관료 자본주의도 문제라면 사회변화의 방향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박노자 샘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바로 생태적 전환이었다. 지금 기후위기와 인류절멸의 실질적 위협을 볼 때 앞으로 우리의 방향 중 하나는 탈성장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체제 중심부에서 이뤄진 자본주의적 근대화도, 준주변부에서 혁명을 통해 이뤄진 또다른 근대화도 결국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통해 성장을 추구하다가 한계에 직면한 상황에서 필요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사회변혁의 전략에 대한 논쟁


요즘 미국의 좌파들 속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사회변혁의 전략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적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가 대선 후보가 돼 당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이런 논쟁의 기반이 되고 있고, 단지 이론적이 아닌 실질적 논쟁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마르크스, 레닌, 풀란차스 등의 논의들이 광범하게 재검토되고 있다. 여러모로 부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그 논쟁 과정에서 라스 리(Lars T. Lih)가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카우츠키에 대해 최근에 언급한 흥미로운 지적을 보게 됐다.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로 레닌과 볼셰비키의 저작들을 샅샅이 조사 독해해 기존의 굳어진 교조적, 신화적 해석들을 뒤집는 것으로 유명한데, 레닌의 글만이 아니라 레닌이 인용한 글의 출처까지 찾아가 집요하게 그 내용을 맥락에 맞게 재해석해 왔다.

 

그가 이번에 지적한 것은,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마르크스의 파리 꼬뮌과 꼬뮌 국가에 대한 분석을 발견하면서 카우츠키를 기회주의자로 낙인찍은 것이 착각과 오류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라스 리의 지적은 이렇다.

 

레닌은 꼬뮌 국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던 사람은 기회주의자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기회주의다다. 라는 주장을 펴는데 그 기준에 따르면 그 전까지 한번도 꼬뮌 국가를 말하지 않았던 레닌 자신도 기회주의자가 된다. 더구나 카우츠키는 <사회혁명과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는 꼬뮌 국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공화국과 사회민주주의>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의 분쇄와 꼬뮌 국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문제는 그 책을 레닌은 읽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 레닌은 1916년 말/1917년 초에 마르크스의 글에서 이 중요한 주제를 발견하고는 놀라서, 내가 왜 몰랐지하고 묻고는, 그걸 자신의 스승인자 멘토였던 카우츠키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자기가 잘못이 아니라 카우츠키가 나를 속이거나 잘못 가르쳤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의 책을 다 보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이것은 정말, 레닌에 대한 어떤 신화도 가차없이 무너뜨려온 라스 리다운 지적이다. 라스 리 자신은 결코 레닌에 대해서 비판적이라고 보기 어렵고, 상당히 그의 입장과 노선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편이지만, 객관적 사실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수행하면서 레닌의 오류와 한계에 대한 어떤 외면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그는 카우츠키의 악마화레닌의 신화화라는 연결고리를 계속 파헤쳐 왔다. 예컨대 174월테제에서 보인 레닌의 전환도 그 직전에 다른 누구도 아닌 카우츠키의 논문을 보고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이것은 레닌이 헤겔을 읽고서 변증법을 이해하게 됐기에 그랬다’, ‘레닌이 트로츠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고 그래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주장들을 모두 흔들리게 한다.)

 

라스 리의 이런 지적들을 보며, <국가와 혁명>을 인용하면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인지를 가르는 중요한 검증 기준이라는 식으로 제시하던 과거가 떠올라 좀 허탈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요즘의 논쟁이 이런 굳어진 신화와 고정관념들을 더 많이 해체하면서 새로운 혁신적 접근과 고민을 만들어내면 좋겠다. 기존의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없는 의심과 비판적 접근은 좌파들 자신에게도 적용돼야 맞다.



 (기사 등록 20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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