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인종주의적 혐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이 확산되면서 막연한 공포도 급증하고, 그것이 인종적 혐오로도 연결되고 있다. 우한에 전세기를 보내서 사람들을 데려와서는 안 된다거나, 중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아무 과학적 근거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말들이 나온다.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 등은 아주 노골적으로 ‘혐중’을 부추기는 중이다.
사실 중국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각종 영화에도 줄곧 나타나던 오래된 문제인데, 이것은 ‘박쥐까지 먹는 야만적 식습관이 문제’라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물론 지금의 전염병이 박쥐에서 뱀으로, 다시 인간으로 옮겨졌다는 추정은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몸(정력)에 좋다’면 별 이상한 것을 다 찾아 먹는 사람들(흔히 중년 남성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과 서방국가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차라리 야생동물 밀렵과 육식문화가 문제라는 지적이라면 타당할 것이고, 비건지향을 해온 사람으로서 반가운 이야기일 것이다. 나아가 메르스 등 인수공통 전염병이 계속 나타나는 것은 기업형 밀집사육과 축산을 놔두고 설명하기 어렵다. 돈벌이를 위해 좁은 곳에서, 많은 동물을, 빨리 키우려고만 하는 그런 곳에서는 바이러스도 많이 빨리 키워지고, 종을 넘어서 번지며, 내성을 키우면서 돌연변이를 일으키곤 한다.
두 번째로는 급격한 도시화와 슬럼화를 빼놓을 수 없다. 경제와 금융이 압축성장하는 나라들은 농민들을 저임금 노동자들로 도시로 급격히 빨아들이면서 난개발과 철거가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런 도심과 변두리의 슬럼가는 과밀한 주거, 낮은 수준의 주민 영양상태, 비위생적 공공시설, 상하수도 시설과 공공방역 체계의 부족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선가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번져나가는데 가장 좋은 환경이 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묘사되던 더러운 오물과 고인 물웅덩이들로 질척거리던 산업혁명기의 영국 도심을 떠올리면, 그것이 바로 그동안 중국에서 나타나고 있던 슬럼가들임을 알 수 있다. 소수에게 부를 집중시키며 농민들을 대거 노동자로 만드는 자본의 시초축적이 중국처럼 단기간에 급격하고 폭력적으로 이뤄진 나라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봐야할 연결된 문제는 공공의료의 부족과 의료의 영리화이다. 메르스를 겪으면서 우리가 절감했듯이 전염병을 잘 관리하고 확산을 막는데는 공공의료 시설과 공공병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먼저 바이러스를 차단하고 박멸하는데는 (평소에는 돈이 안 되고 별로 필요도 없는)‘음압시설’을 갖춘 격리병상이 필수적이었다. 반대로 대책없는 병원의 다인실은 오히려 바이러스를 배양, 전파하는 허브 구실을 했다.
또 환자의 돌봄이 모두 가족에게 전가된 구조는 지역사회로 2차감염을 부채질하는 효과를 냈고, 격리 대상자에게 아무 생계지원이 없으면 몸이 아픈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억지로 일하러 돌아다니면서 바이러스가 전파됐다. 병원에서 만연한 비정규직 차별도 질병 관리의 구멍으로 작동했다. 당장의 돈벌이가 우선인 민간대형병원은 이 모든 것에 취약했고, 정부의 강력한 개입과 통제가 그나마 재앙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런 문제들에서 중국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시장개혁을 통해서 의료에 시장논리가 대거 도입됐다. 정부의 보조금과 통제는 축소됐고, 병원들은 수익경쟁에 내몰리고, 대도시 대형병원에 환자가 몰리고, 지방병원들은 인력이 부족하고, 의사들은 성형외과와 피부과로 몰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갈 엄두를 못 내고, ‘2등시민’인 농민공들은 의료보험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한다.
결국 기업형 축산업, 급격한 슬럼화, 의료의 영리화 등 위에서 살펴본 어떤 문제도 중국의 민족적, 인종적 특성과 거리가 멀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문제이고, 오히려 중국은 그것을 뒤늦게, 그만큼 더 급속하고 압축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라는 특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득을 얻은 것은 중국의 권력자와 서방의 권력자와 다국적 자본들이고 피해를 입은 것은 중국의 민중들이었다. 우한의 시민들은 신해혁명의 발상지인 곳에서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지 무슨 ‘야만적 미개인’들이 아니다.
물론 중국의 권력자들은 사태 초기에 환자와 의사들을 ‘괴담유포자’라고 처벌하고 입을 막으면서 초동 대응에 실패했고, 지금도 인터넷을 통제하고 도시를 봉쇄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나오는 중국 정부의 어떤 발표도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툭하면 ‘괴담’이라고 입을 막고 속죄양을 만들어내던 ‘이명박근혜’ 시대를 살아본 우리에겐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중국 권력자들의 저런 태도가 바로 최근까지 홍콩 민중들의 민주주의 요구와 저항을 불러 왔던 것이다. 이제 이번 사태를 통해서 중국 본토의 민중들도 지금의 권위주의 체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더 커졌을 것이고, 그것이 중국사회의 민주적 변혁을 위한 투쟁과 홍콩 민중과의 연대로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하루 비행 여행객만 9백만인 세상을 만들어냈다. 명절 기간에 중국에서만 연인원 30억 명이 이동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시대에서 더 이상 ‘우리’와 별 상관없는 ‘저들’만의 문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변종 바이러스의 번식과 창궐이 어떤 재앙을 낳을지 모른다는 경고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지적재산권과 특허권과 수익 논리 때문에 백신 개발과 비축이 가로막히거나 독점돼 있는 상황도 인류 모두가 직면한 공동의 위험일 것이다. 이런 시대에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게 문제를 떠넘기고 차별하고 혐오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있을 수 없다.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인종주의적 혐오 2
앞서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기업형 공장식 축산의 문제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는데, 그보다는 야생동물에 대한 관리와 유통의 문제라는 반론을 들었다. 타당하고 옳은 지적이다. 산림파괴, 기후변화, 도로와 도시 확장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이동시키면서 인간과 야생동물의 직접적 접촉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생태환경 파괴가 낳은 결과이면서 기후변화의 또다른 위험을 보여주는 것 같다.
특히 ‘곰 보금자리’ 캠페인을 해온 최태규 동지는 한국에서도 “야생동물을 도심의 실내동물원이나 야생동물카페에 가둬놓고 직접 접촉하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며 이것이 큰문제로 터질 수 있다는 경고를 전해 줬다. 정말 중요한 지적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지금 이 사안이 중국인에 대한 인종적 혐오로 연결되는 양상은 매우 심각하고도 충격적이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던 혐오가 갑자기 생겼다기보다, 이미 물밑에 있던 혐오와 편견이 이번을 계기로 분출하면서 가시화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드러난 혐중 인종주의는 복잡한 역사적 뿌리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일제시대의 중국인 멸시 교육, 한국전쟁과 냉전시대를 거치며 공고해진 반공주의, 미국에 종속된 형태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식된 위계적 인종주의(백인-> 일본인-> 한국인-> 중국과 동남아인-> 흑인과 아랍인)가 결합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급격하게 경제가 발전한 중국에 대한 견제심리와 위기의식도 내포돼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역시 자유한국당과 새보수당, 조선일보 등이 앞전에 홍콩 투쟁을 지지했던 것은 결코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때문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중국 관광객을 송환해라, 주사파 정권에게는 공산주의 이념이 국민 안전보다 중요하냐’는 선동을 보자면, 저들이 바로 한국판 신나치이자 인종주의 극우라는 게 드러난다.
이들은 지금 인종주의를 끄집어내서 더욱 증폭, 확산시키는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공포를 부추기고 패닉을 부채질하면서 마치 바이러스가 더 빨리 더 많이 퍼져나가서 한국사회가 아수라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자한당과 조선일보 등을 보고있으면 영화 <부산행>에서 배우 김의성이 연기했던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자기만 살려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버스회사 상무가 생각나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좀비들은 신문지로 막으면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데, 지금 혐중 인종주의 선동 언론들이 바로 그런 신문지처럼 사람들의 눈을 막는 구실을 하고 있다.
<부산행>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감염된 좀비가 아니라, 공포에 휩싸여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이었다. 저들이 우리에게 바이러스를 옮길지 모른다는 불신과 증오의 눈빛으로 살려달라는 사람들 앞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바리케이트를 쌓고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었다. 그런 장면을 지금 누가 여기서 현실로 불러내고 있는가.
고립된 우한시민들과 불안에 떠는 중국 민중에게 국경 너머에서까지 혐오의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게 누구인가. 겨우, 전세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저 참담한 시위와 구호를 목격하도록 만든 게 누구인가. 열악한 조건 속에서 잠도 못자면서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사투하다가 방송에 나와서 울먹이던 의료, 방역인력들이 절망의 늪에 빠지도록 등을 떠미는 게 누구인가.
며칠 전은 아우슈비츠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유대인 수백만 명이 공장식 대량생산의 방식으로 학살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고 방조했던 과거를 기억해야하는 날이었다. 그것은 트럼프가 말하듯이 ‘유대인 국가’라는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또 다른 인종범죄를 덮기위해 소환돼야 하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2차대전 당시에 일본, 소련, 미국, 영국 등이 저지른 또다른 전쟁범죄, 인종적 학살과 더불어 기억돼야 하는 날이다. 그것은 당시에 각 나라에서 진보운동과 민주주의가 패배하고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인종주의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은 결과였다. 그리고 지금,또 다시 여기저기서 트럼프, 보리스 존슨같은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분오열, 이합집산을 거치며 재구성되고 있는 우파는 혐오를 중요한 무기로 삼고 있다. 전광훈 등의 혐오선동은 지금도 광장과 유투브에 넘쳐나지만, 아직 이 사회에는 차별금지법조차 제대로 추진되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그가 누구든 함부로 낙인찍히고 학대와 비난을 당해도 그 고통을 공감할 필요도 없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당해도 싸다는 식의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아우슈비츠를 겪은 인류는 계속해서 ‘절대 다시는!(Never Again)’이라고 말해 왔다. 그런데 지금 신종코로나 사태를 마치 기다려온 것처럼 신이 나서 공포를 부추기며 혐오와 배제를 선동하고 있는 저 어리석은 세력들은 마치 ‘제발 다시 한번 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아픈 몸들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윤리의 문제이며 인권의 문제이다. 또한 의료적으로는 질병 예방의 문제이기도하다. 아픈 몸들이 칠병으로 인한 차별과 낙인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서 사회적 예방이 가능해진다.
더 이상 낙인으로 인한 좌절감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두려움으로 인해 질병을 숨기지도 않을 것이다. 즉, 질병 때문에 사회가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낙인과 차별 때문에 사회가 위험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픈 몸들은 질병이 주는 생물학적 통증 때문이 아니라, 질병 이미지와 낙인 때문에 치료제도 없는 고통을 겪는다.”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반대한다
다시 한 번 확인 부탁한다. 본인의 얼굴 사진과 이름 보도해도 괜찮나?
= 괜찮다. 끝까지 남을 거다. 끝까지 육군에 돌아갈 그 날까지 싸울 거다.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순간이고 말이었던 것 같다. 어제, ‘A하사’가 ‘변희수’라는 이름과 얼굴을 스스로 드러냈다. ‘성주체성 장애’로, ‘관심사병’으로 몰려서 이름없이 지워져 갔던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벅차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이 엄청난 용기를 가능하게 했을까.
결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애국심”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싶은 군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감동적이고 새로운 의미로 들리게 될 줄은 몰랐다. 누구보다 ‘애국심과 군인정신’을 강조하던 자들은 지금 하늘이 무너진 듯 난리다. ‘진짜 총을 떼고 온 사람이 무슨 군인이냐, 군기강이 해이를 넘어서 해체되고 있다, 의도가 악의적이고 죄질이 불량하다, 사회가 비정상을 용인해서는 안된다...’
남근중심적 가부장제와 군사문화가 얼마나 뿌리깊이 연결돼 있으면 고환과 음경이 ‘진짜총’이라는 말이 나올까. 그러자 국방부는 ‘강제전역’이라는, 호르무즈 파병에 이어서 최근에 있었던 가장 악의적이고 불량하고 비겁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군대 생활을 아무리 돌아봐도 고환과 음경이 있어야만 수행할 수 있는 업무, 작전, 훈련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는데 말이다.
만약 군인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용기’라면 지금 한국군 지도부처럼 용기없는 군인들이 어디 있을까, 변희수 하사처럼 용기있는 군인이 어디있을까. 그리고 무엇이 변희수 하사의 엄청난 용기를 가능하게 했는지는 알 것 같다. 기자회견을 보면 변희수 하사는 '전우'들을 만나서 작별 인사할 기회도 주지 않으려는 결정에 가장 분노하고 있다.
만화 <송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두려운 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혼자 남는 것’이라는 대사였다. 그리고 변희수 하사는 결코 혼자가 아닌 것 같다. 변희수 하사의 옆에서 격려를 보내고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 모든 주변의 병사들과 군간부들이 이런 역사적 순간과 용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소속 대대에서도 저의 발전된 모습을 감안하여, 부대에서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결정인 수술을 위한 국외여행 허가를 승인해 주셨습니다. 성전환 수술 이후에도 계속 복무를 저의 상급부대에 권유하였고, 상급부대인 군단에서도 육군본부에 이와 같은 의견을 제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저를 믿고 응원해주셨던 소속부대장님, 군단장님, 소속부대원, 그리고 안팎으로 도와주신 모든 전우에게 그간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대대 주임원사랑 통화를 했는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 임은정 검사와 검찰개혁을 위한 투쟁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고, 뭔가를 파헤칠 수도 덮을 수도 있는 검찰의 막강한 권한은 수많은 억울한 고통과 죽음만이 아니라 전관 검사들이 수임료로 수백억을 벌었다는 전설로도 남아있다. 이런 무소불위의 기득권을 결코 놓고 싶지 않은 ‘검찰대란’은 끝나지 않았고 검찰의 ‘화려한 분장술’도 여전하다.
이번에는 자신들을 ‘경찰개혁’의 수호자로 내세우며 반대편의 사람들을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모는 프레임이다. 그러면서 ‘배신자’ 임은정 검사에게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일부 ‘검찰 받아쓰기’ 언론이 여기서도 검찰을 돕고 있다. 경찰을 손발로 부리면서 인권침해와 고문, 비리를 방조를 해온 게 바로 검찰인데 정말 기가 막힌다.
검찰 수뇌부는 지금 임은정 검사가 ‘사실을 왜곡해 조직을 욕보이고 명예를 훼손했다. 구성원들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매도하고 있다. 검사들을 줄세워 임은정 검사에 대한 대대적 공격과 왕따를 벌이고 있다. 검찰 내부통신망에서 후배검사들이 번호를 매기면서 임은정 검사를 비난하는 수백 개의 댓글을 달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임은정 검사가 얼마나 내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검찰이 얼마나 다른 목소리를 용납할 수 없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조직인지를 입증할 뿐이다. 성찰과 혁신이 불가능한 폐쇄적 ‘죽은 조직’. 이것은 검찰의 수많은 문제점을 설명해주는 핵심이기도 하다. 이탄희 전 판사는 검찰을 ‘총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시동원체제의 군인들’에 비유했다.
검찰 수뇌부가 임은정 검사를 얼마나 증오할지는 알고도 남는다. 순응을 거부하고 거침없는 쓴소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검찰 수뇌부에 있는 상당수 검사가 검사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 “내가 아는 것을 국민이 다 안다면 검찰이 없어져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어떠한 악인보다 악하고 위험합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 충성하고 침묵했던 자들이 지금 임은정 검사를 ‘정권에 충성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지금 열렬한 ‘반정부 투사’가 됐다. 왜냐면 어찌됐든 문정부가 검찰의 기득권을 건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정부가 검찰을 ‘적폐청산의 주역’으로 추켜세울 때만 해도 검찰은 문정부에 ‘충성’했다.
반면 임은정 검사는 언제나 일관됐다. 이명박근혜 때도 용기있게 할말을 했고, 현정권 인사들이 윤석열을 찬양하고 있을 때도 외로이 윤석열을 비판했다. 윤석열이 주도하고 문정권이 지지했던 지난번 검찰인사를 “낙제점”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임은정 검사다. 임은정 검사는 오로지 검찰개혁에 ‘충성’했던 것이다.
더구나 임은정 검사는 갑자기 어떤 자기성찰도 없이 ‘인권’과 ‘권력감시’를 운운하고 있는 저런 검사들과 차원이 다르다.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이 가해자의 일부라는 것을 성찰할 줄 알았다. “역사의 심판에서 피고인석에 앉을 검찰은 검사동일체 원칙에 따라 모든 검사들일 테고, 저도 검사이니 심판을 피할 길이 없네요. 부끄러워 하늘을 우러를 염치가 없습니다.”
징계 등 온갖 수단으로 임은정 검사의 입을 막으려 해왔던 검찰 수뇌부는 이제, 가장 야비하고 잔인한 방법을 쓰고 있다. 가까운 동료, 후배들로 하여금 임은정 검사를 공격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이지메를 당하는 사람은 영혼의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나도 과거에 몸담았던 운동조직에서 다른 목소리를 냈다가 집단 이지메를 겪으며 쫓겨나온 작은 경험이 있다.)
‘검찰 받아쓰기’ 언론은 ‘오죽하면 후배들까지 임검사를 비판하겠냐’며 물타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폐쇄적 상명하복 조직의 특징일 뿐이다. 그런 조직에서 그가 누구든 수뇌부의 눈밖에 나면 곧바로 멋대로 짓이겨도 되는 사람이 된다. 조직 구성원 모두가 우르르 돌을 던지며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해야 되는 것이다. 지금 댓글 검사들의 요구가 윤대진의 요구(페북과 언론 기고를 그만해라)와 일치하는 것을 보라.
억압적 자본주의 국가기구로서 한국검찰이 얼마나 유독하고 자체 정화가 불가능한 조직인지, 그리고 이런 조직을 내부에서 비판하는 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감수하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다시 입증되고 있다. 그런 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사람들이 임은정, 서지현, 안미현, 진혜원 등 대부분 여성들이었다는 것도 검찰이 특히 가부장, 마초적이며 성차별, 성폭력적인 조직이라는 점과 관련있다.
임은정 검사는 최근 칼럼에서 윤대진의 회유를 거부하던 때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르더군요... 다짐했지요. 돌멩이만도 못한 그런 검사장이 아니라 할 말 하는 검사가 되겠노라고.” 다시 봐도 그 결기와 진정성에 전율하게 된다.
임은정 검사를 확고하게 지지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수뇌부에 줄서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검사들이 비겁하게 내부게시판에 숨어서 수백개의 댓글 릴레이로 임은정 검사를 괴롭힌다면, 임은정 검사의 용기와 투쟁을 지지하는 댓글 릴레이는 수천, 수만개도 넘게 가능할 거라고 확신한다.
(기사 등록 2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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