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이석기 의원은 반드시 당장 석방돼야 한다
이번 성탄절 사면에도 이석기 의원이 포함돼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지금 나와도 이미 9년의 형기 중에 7년이 지나 무슨 의미일까 싶은데 말이다. 조작된 혐의로 마녀사냥당하고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을 7년이 넘도록 풀어주지 않는 사회와 정부다.
내면화된 종북 프레임은 아직도 강고하다. ‘이석기’, ‘통합진보당’은 아직도 낙인과 주홍글씨로 작동한다. ‘아이들법’ 통과를 위해 국회의원 앞에 무릎꿇은 부모에 대한 기사를 보다가 ‘저 사람들 보라색 옷을 맞춰 입은 걸 보면 통진당 아닌가’라는 댓글을 봤다.
전광훈같은 자가 광화문에 100만이 모였다며 ‘10월 항쟁’을 운운하며 몇 달째 광화문 일대를 막말과 혐오의 해방구로 만들고 있는 중심 동력도 종북 프레임이다. 요즘은 종북-이슬람-동성애를 연결시켜서 기상천외하고 해괴망측한 창조적 막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태극기를 든 노년층이나 보수기독교도들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검찰이 처벌도 않고 덮어버린 쿠데타 모의 문건을 보면 “진보(종북) 세력 동향” 문구가 나온다. 주한미대사 해리스는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좌파에 둘러싸여있다는 보도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 마치 이 나라의 실질적 최고권력자인양 막가는 칼춤을 추는 윤석열은 이미 청문회 때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이고 이석기 사건과 통진당 해산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옳다’며 확고한 소신을 드러냈었다.
자신들의 특권과 지배질서를 흔드는 급진적, 심지어 아주 온건한 개혁조차 모두 ‘이적과 종북’으로 몰아서 싹을 잘라온 기득권우파 - 독점재벌 - 주류언론 - 검찰, 기무사, 군부, 국정원 등의 강고한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지난 몇 달간 한국사회를 요동치게 한 사태의 배후에도 이들의 입김이 강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단지 검찰의 개혁저항과 언론의 받아쓰기를 넘어서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저들의 프레임과 전술은 더욱 세련되고 교묘해졌다. 핵심적폐인 검찰은 촛불 이후 거꾸로 적폐청산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신뢰, 권위, 정당성까지 회복했다. 꼬리뿐 아니라 일부 팔다리까지 잘라내며 독하게 반격의 기회를 노린 덕이다.
검찰과 주류언론의 프레임이 먹히고, 서사와 담론이 신뢰를 얻고, 여기저기서 재생산되는 것을 보면, 2012~13년의 종북몰이를 떠올리게 된다. 그때 이석기 의원과 그 동료들을 광장의 십자가에 매달고 칼을 휘두른 것은 물론 검찰, 국정원, 언론이었지만 이어서 곳곳에서 수많은 돌멩이들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석기 의원과 그 동료들의 생각과 활동에 대한 이견, 비판, 앙금, 조롱, 비난 등이 쏟아졌다.
사실에 근거한 타당한 비판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모두 종북몰이의 일부로 뒤섞여 버렸다. 나도 당시 그많은 돌중에 하나를 던졌다는 것을 또다시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야 태도를 바꾸며, 함께 돌아보자고 했을때 주변동료들은 나에게조차 ‘통진당 변호인’, ‘경기동부연합의 파르티잔’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게 당시의 서글픈 분위기였다.
나찌의 마녀사냥에 대한 니묄러 목사의 유명한 시 <그들이 처음 왔을 때>는 공산주의자를, 유태인을, 노조원을 잡아갈 때 침묵하다가 결국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의 방관자의 당혹감을 담고 있다. ‘그들이 유태인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는 단지 침묵하기만 했던 것일까?
피해자의 관점으로 시를 쓴다면 어떨까?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나의 친구들과 나를 알던 많은 사람들이 나와 선을 긋고 비난하고 조롱하며 같이 돌을 던졌다. 그들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침묵은 끝나야 하고, 다시 손을 잡아야 한다. 이석기 의원은 반드시 당장 석방돼야 한다.(https://www.anotherworld.kr/3)
● 장애인노동조합 출범대회의 의의
지난 노동자대회에서 여러 사전대회와 행사가 있었는데 그중 매우 인상깊고 중요했던 것은 장애인노동조합 출범대회였던 것 같다. 많은 동지들의 오랜 노력과 준비 끝에 마침내 출범하게 된 장애인노조는 어제 출범선언문과 강령에서 ‘여성, 소수자, 이주민들과 연대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투쟁하겠다’고 선언했다.
출범선언문과 정명호 장애인노조 위원장의 발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속도와 생산성을 우선하는 자본주의에서 장애인과 그들의 노동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그것에 크게 공감가면서 동시에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접근에도 한계가 있었다는 페미니스트적 비판이 떠올랐다.
직접생산과정에서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는 노동만 ‘생산적’ 노동으로 취급하면서 노동력 재생산 과정이나 직접생산과정 밖의 수많은 보이지 않는 노동들이 무시되거나 ‘비생산적’ 노동으로 단정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과정에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 가장 중요하고 변혁의 핵심 주체, 동력이라는 주장과도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처럼 비생산적이고 주변적이라고 여겨져왔던 노동, 활동이야말로 이 사회와 체제를 유지하는데 핵심적이고, 그것을 수행하는 존재들이야말로 변혁의 새로운 핵심 주체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요즘 칠레, 아르헨티나, 레바논, 수단, 이라크 등을 휩쓰는 세계적 반란 물결 속에서도 여성과 소수자들의 주도적인 구실이 두드러진다. 이런 흐름은 전통적 사회운동에 큰 자극이 되기도 한다. 어제도 한 노조 대표자가 국회를 비판하면서 ‘절름발이’라는 용어를 썼다가 바로 장애인노조 동지들을 찾아와서 정중하게 사과하는 장면이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안에 스며있는 차별적 용어와 표현들은 무수하다. 그것을 즉시 인지하고 바로 사과한 대표자도 정말 훌륭했지만, 그런 것을 인지하고 고쳐가도록 추동하고 있는 것은 바로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왔고 이제 장애인노조까지 만들어낸 동지들일 것이다.
● 인헌고 논란과 성장하는 청년우파
인헌고 논란에서 처음에는 어느 정도 교사들의 과도함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일본과 아베정부에 대한 비판, 탈원전, 검찰 비판 등 교사들이 주장했다는 내용들은 크게 공감이 갔지만 그것이 일방적으로 강요됐다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봤다.
비록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터트리는 게 너무 걸리고 못미덥긴 했지만 말이다. 이 나라 교육은 주입식 전통이 강하고 기본으로 학생과 교사 관계는 기울어진 면이 있으니 말이다. 입시에 미치는 교사의 권한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학생수호연합’의 주장은 들여다볼수록 이상했다.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을 ‘반일파시즘’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 과했고, 자신들은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교사에겐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것도 말이다.
교사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형사고발하겠다는 주장까지 보면서, 무엇보다 이들의 페이지 등에 들어가 주장과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많은 게 분명해졌다. 일방적 강요와 주입은 없었고, 교사들의 일부 과도함도 정정과 사과가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침묵을 요구하고 ‘공산주의’, ‘전교조’ 등의 낙인을 찍고 있었다.
이들은 성소수자의 인권과 난민 환영 등에도 반대하면서 교사들과 대립해 왔고, 이미 지난 여름에 여성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을 ‘페미니즘 독재’라 규정하며 충돌을 일으킨 바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조국 대전을 계기삼아 다시 ‘사상 독재’라고 교사들을 낙인찍으며 논란을 일으켜 기득권 우파들의 호응을 얻었다. 극우익 청년단체 ‘트루스포럼’과 오세라비 씨가 주도하는 반페미니즘 단체 ‘성평화연대’와도 연결고리가 보인다.
주변의 교사나 학생들에게 물어보고 대화하면서 우려는 더 커졌다. 이처럼 반페미니즘적이고 극우파적인 논리가 주로 남학생들 사이에서 예상보다 꽤나 많아지고 강해져 왔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공부도 잘하고 다른 학생들을 리드하는 ‘센캐’(강한 캐릭터)들이 대부분 이쪽이라고 한다. 이런 학생들은 유머, 재미, 게임 코드와 연결돼 이미 일반화된 일베류의 사이트에 드나들고 급속히 커진 청년우파 유투브(성제준, 윤서인 TV...)를 즐겨본다고 한다.
교실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가고 있는 이들은 특히 페미니즘이나 진보적 지향을 드러내는 여교사를 망신주거나 논쟁 속에서 ‘발라버리’면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고 한다. 젠더위계가 교사-학생 위계를 넘어설 때가 있는 것이다.
3년전 촛불을 통해서 심각한 타격과 분열을 겪었던 우파가 새롭게 재구성되는 흐름 속에서 가장 쓰라린 부분이 여기에 있다. 광화문에서 ‘문재인은 간첩총책, 조국은 개자식, 50만 주사파를 때려잡자’고 외치는 기독교근본주의 어르신들보다도 더욱 더 말이다. 무엇이 이런 불길한 재건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지, 어떻게 이런 흐름과 헤게모니를 되돌릴 수 있는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 박노자 강연 - 허정숙과 붉은 페미니즘
얼마전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있었던 박노자 선생님의 ‘한국 공산주의 문화사’ 7강은 ‘허정숙과 붉은 페미니즘’을 다루었다. 강의에서 나왔듯 ‘조선의 콜론타이’라고 불렸던 허정숙의 인생과 사상적 실천적 궤적은 정말 콜론타이와 매우 흡사했다. 허정숙이 여성 혁명가로서 식민지 조선사회에서 겪었던 차별과 억압도 매우 심각했던 것 같다.
박노자 선생님은 그것을 “잔혹한 인신공격”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사회와 언론은 허정숙의 주장과 활동뿐 아니라 연애, 이혼 등 사생활의 하나하나를 선정적으로 기사화하고 끝없이 소비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여성 연예인 등에 대해 어뷰징 기사를 쏟아내고, 포털에 실검으로 올리고, 악플을 달고 하는 문화는 매우 역사와 전통이 깊었던 것이다.
허정숙은 1924년에 이미 ‘조선여성동우회’를 만들면서 ‘자본의 사슬/ 남성의 권력/ 동양도덕적 억압’이라는 3중의 억압과 굴레를 비판하며 여성해방의 전망을 모색했다. 허정숙의 분석과 주장들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에 충실했었다고 한다.
그런 허정숙의 급진적 주장과 실천이 결국 북한에서 국가가부장 체제와 타협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 박노자 선생님은 단순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허정숙은 한편으로 동지들을 외면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며 생존을 도모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진보적 젠더정책을 도입하기 위한 ‘동맹’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냉전적 편견과 색안경을 벗어내고 보면, 북한은 이미 1945년에 호주제를 폐지하고 46년에 양성평등법을 제정하고 이혼의 자유와 출산휴가 등을 보장했다고 한다. 남한이 2005년에야 호주제를 폐지한 것을 돌아보면 대단한 성취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양성평등’이라는 명칭에서 보이듯 허정숙의 사상이나 북한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이미 1930년대에 스탈린주의적 후퇴와 왜곡을 겪고나서 한반도에 본격 유입된 것도 여기에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박노자 선생님이 지적했듯이 진보적 젠더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북한사회도 위계적 남성본위 사회에서 벗어나진 못했고 수령을 정점으로 한 국가가부장체제로 나아갔다. 이것은 단지 북한만이 아니라 가사와 육아를 사회화하고 여성을 사회적 생산에 참가시키면 여성해방이 이뤄질 것이라고 했던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소설 <세여자>에서 가장 쓰라렸던 부분에 대해서도 질문을 했다. 북한에서 연안파 대숙청 과정에서 허정숙이 옛 동지들을 외면하고 마녀사냥 당하는 그들에게 같이 돌을 던졌던 것에 대해서. 이것은 허정숙이 주세죽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 순 없었는지에 대한 서글픈 의문과도 연결된다.
박노자 선생님은 ‘아직도 감옥에 있는 이석기 의원이 전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돼 마녀사냥 당할 때 그것을 외면한 심상정 의원’과 유비하며, 그것이 북한이나 과거만의 비극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전국가적 비난의 대상이 된 사람과 재빨리 손절하는 것’ 그것이 현실정치의 냉혹함이고, 온 사회에 어두운 바람이 몰아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려워질 때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는 선택일 것이다. 요즘도 계속 느끼는 두려움이다.
(기사 등록 201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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