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조국 사태가 보여 준 것
공부도 못했고 이름있는 대학도 가지 못했고 활동에 뛰어들면서 제대로 졸업도 못했던, 전문직 출신도 아닌 나는 지금도 학벌 콤플렉스가 있다. 대화를 하다가 출신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긴장된다. 운동사회도 학벌에서 자유롭지 않고 전문직 경력을 대접한다는 건 여러번 느껴온 바고, 운동하면서 제대로된 임금을 받아본 적도 없고 4대보험은 먼 얘기였고 당연히 모아놓은 재산도 별로 없다.
따라서 ‘조국 사태’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배신감을 정말 이해하고 공감한다. ‘세계선도인재’같은 용어부터 거부감이 느껴진다. 이번 사태를 통해서 드러난 학벌, 특권 구조를 철저히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들도 완전히 옳다. 특목고와 자사고를 없애고 대학을 평준화하고 교육, 입시 정책과 제도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학벌과 재산, 직업과 지위에 따른 격차와 차별을 없애나가야 한다.
높은 학벌과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추진하는 위로부터 개혁은 한계가 분명하고, 반자본주의 좌파로서 문정부나 조국과는 애초 정치적 차이도 분명했다. 그러니 ‘개혁’을 위해 문정부와 조국을 무작정 방어하자는 주장들엔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번에 언론과 우파가 주도한 조국 후보자와 가족들에 대한 마녀사냥과 인신공격에 대해서도 매우 큰 감정적 불편함을 느낀다. 2주간 2만3천건의 기사를 통해서 한 사람과 그 가족의 모든 것이 낱낱이 까발겨지고 온갖 비난과 조롱 속에 근거없는 의혹을 쌓아가는 방식은 그 대상이 누구든 옳지 않다.
물론 조국 후보자 일가는 자신들이 속한 엘리트층의 특권적 관습에서 자유롭지 않아 왔고, 놀랄 것도 없이 언행일치의 완벽한 인격체들은 아니었다는 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수언론이 묘사하듯이 그들이 단군 이래 최강의 악당이자 위선자이고 가족사기단인가? 하지도 않은 잘못이나 실제로 한 잘못 이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사실 확인도 없이 무조건 몰아가는 적의를 넘어 살의까지 느껴지는 언론의 행태에 눈감거나 같이 돌을 던져야 하는가? 부인과 부모, 자식만이 아니라 동생의 이혼한 전처와 그 자식까지 무대로 올려져 신원과 사생활이 공개되고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그런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도 결국 나약한 인간일 것이기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영혼에 커다란 생채기가 새겨지고 있는지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 쪽에서는 노무현의 경우와 비교하는데, 사실 우리 사회와 언론의 비슷한 패턴의 훨씬 더 강하고 큰 공격에 더 만신창이가 됐던 경우는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이다. 유감이게도 지금 조국을 강하게 옹호하는 사람들중 다수가 당시에 침묵하거나 같이 돌을 던진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그랬다고 우리도 그래야 하는가. 나와 계급이나 진영이 다르다고 누군가가 전사회적 여론재판과 인격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진영논리가 아닌가.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속한 계급이나 진영만이 아니라 누구도 이런 식의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정치적 비판보다 인격적 비난이 우선하고, 체제와 구조보다 개인에 대한 공격이 우선되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그런 공격에 가장 취약한 다음 표적은 바로 가장 힘없고 돈없는 개인(집단)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사태가 ‘계급’ 문제를 드러냈고 조국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특권계급과 밑바닥 계급간의 ‘계급투쟁’이라는 해석에도 갸우뚱하게 된다. 이럴 때는 항상 ‘우리는 노동자편이라는 사람들과 우리는 자본가편이라는 사람들이 양쪽에 일렬로 서 있는 순수한 계급투쟁은 없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현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우리 계급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적들이 지금 조국 결사 반대편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은 경제투쟁만이 아니라 정치투쟁이고 사법개혁과 검찰개혁도 (민주당에게 주도권을 그냥 넘기기엔) 너무 중요한 계급투쟁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가장 철저하고 의식적인 계급투쟁을 수행해 온 세력은 바로 대자본가들과 기득권 우파들이다. 조국 사태는 이들의 새로운 구상과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약발이 떨어진 종북몰이보다 중도우파나 진보좌파의 부패와 도덕성을 문제삼는 게 이들의 새로운 카드가 돼 왔다.
이미 ‘경기동부연합과 경선부정’ 마녀사냥에서 시작된 이 새로운 경향은 촛불 이후 몰락한 우파들에게 필승의 카드로 떠올라 왔다. 문정부에서 어떻게든 흠집을 찾아내 제2의 정유라, 제2의 국정농단으로 키우고 결국 촛불바다, 탄핵성공, 정권탈환의 우파버전을 이뤄낸다는 꿈이다. 2년 넘게 매주 광화문에서 행진하는 태극기 부대의 꿈이기도 하다.
특히 이들은 2030에게 파고들기 위해 더 여기 매달리고 있다. 2030의 절망과 분노를 586엘리트에 대한 반감으로 돌리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도 아니다. 이번에 서울대 등의 ‘촛불’은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기득권 우파는 생각할 것이다. (그 ‘촛불’을 주도한 명문대생들의 엘리트 의식을 볼 때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여전히 국가기구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협력자들도 여기에 힘을 보탤 것이다.(윤석열 검찰이라고 다를 수 없다.)
이미 브라질의 기득권 우파가 그 ‘모범’을 보여 줬다. 노동자당의 부패와 비리를 끄집어내 호세프 탄핵과 룰라 구속에 이어 보우소나르 당선까지 성공시킨 '세차작전'이 그것이다. 이런 ‘소프트쿠데타’가 성공하기 위해선 조건들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따른 대중의 불만과 분노/ 집권 중도세력의 개혁실패와 실제 타락과 부패/ 분열을 벗어나 새로운 지도부를 중심으로 부활한 우파/ 언론과 검찰 등의 협력/ 존재하지 않는 좌파적 대안.
한국사회에도 이 모든 것이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걱정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저들이 이번엔 실패하더라도 다음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따라서 ‘문정부의 한계가 드러나며 실패하고 있다, 민주당에 대한 대중의 환상이 사라지고 있다, 어차피 자한당이든 민주당이든 똑같은 자들이다’라며 기뻐할 때인지 모르겠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문정부와 민주당의 몰락과 실패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 그것이 이뤄지느냐, 그리고 과연 진보좌파가 그것을 대체할 대안적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느냐다.
● 조국 기자간담회 단상
어제오늘 조국 기자간담회에 관한 뉴스와 기사들을 보면서 몇 가지 단상이 들었다.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그는 ‘금수저’에 ‘강남좌파’였고, 정치적으로도 자칭 ‘개혁주의자’로서 나와 차이가 많았다. 물론 그가 쌍용차 해고자나 진보정당들을 후원하고, 백남기 투쟁 등에 연대했던 것은 평가해야하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의혹은 언론의 부풀리기와 아님말고였지만, 동시에 일부는 확인이 필요하다는 것도 드러났다.
그런 점을 떠나서도 걸렸던 것은 정신질환이나 국정원 프락치 공작, 차별금지법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는 정신질환에 대한 정책발표에 ‘오해가 있었다’면서 ‘정신질환자들을 처벌하지 말고 치료하자는 게 강조점’이었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억울해한다는 것도 이해가 갔지만, 이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 정책발표에서 정신장애인들이 분노한 것은 ‘정신장애인은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는 낙인과 편견이 기본으로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정원 프락치 공작에 대해서도 ‘대공수사 차원이었다고 하더라’며 변호처럼 들리는 발언을 했다. 물론 나중에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못했고 논란을 알고있다’며 여지를 줬지만 아쉬움이 컸다. 차별금지법은 찬성하고 추진하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하지 않고 빠져나갔다. 우파들의 혹독한 공격 속에 위축된 것은 알겠지만 옳지 않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뒤로 돌리고 여기선 그가 우파와 언론들로부터 당하고 있는 인권유린에 대해 말하고 싶다. 제발 딸의 집에 밤늦게까지 찾아가지는 말아달라고,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무덤까지 찾아가 무덤을 밟고 사진을 찍고 욕보여야 했냐고, 동생과 이혼한 제수씨는 무슨 죄냐고 말할 때 그 목소리의 떨림을 보았다.
실제로 네이버만 검색해 봐도 이미 그의 딸과 부인의 실명과 얼굴까지 공개된 상황이고, 신상털이와 조리돌림만이 아니라 입에 담기 어려운 추잡한 루머들까지 쉽게 보게 된다. 그도 분명 인간이고,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격받고 고통받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지옥으로 가 있게 마련이다.
나도 예전에 소속돼 있던 모임에서 내가 제기한 쟁점과 무관한 온갖 나의 인간적 흠집과 실수들을 끄집어내 공격하는 일을 겪은 바 있다. 사적인 대화와 술자리 언행들까지 끄집어내졌고, 그런 것들이 몇 권의 내부자료집으로까지 묶여져 배포되는 것을 지켜봤다. ‘토론회’에 불려나가 3시간 동안 수십명이 공격적 질문과 비판을 쏟아내는 것을 감내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끔찍했던 순간은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공격받을 때였다. 그 상황에서 놀라웠던 것은 서로 관점과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그런 인간적 고통에 대해 어떤 공감도 보이지 않으려던 옜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고통에 대한 호소를 ‘비정치적인 태도’나 나약함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그런 식의 인신공격을, 그것이 누구든 어떤 진영의 사람이 당하던 편하게 지켜보지 못하게 됐다. 단지 개인적 경험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편에는 엄청난 공감을 보이지만, 다른편에는 어떤 공감도 터부시하고 낭비라고 여기는 분위기, 이런 ‘선택적 공감’은 정치적으로도 위험하고 잘못된 판단과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계급과 진영이, 관점과 입장이 다르더라도,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더라도, 인간적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님말고식 의혹제기나 신상털이나 인신공격이나 인격모독이나 거친 표현과 막말이 아니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상대방을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본 드라마 <검블유>는 여성차별 사회에 대한 미러링 때문에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주인공 배타미는 자신의 인격을 모독하고 사생활을 공개해 포털실검에 올려버린 경쟁 상대에게 이렇게 속시원한 사이다를 날린다.
"난 안 할거야. 당신들 추락시키기 위해서 사생활 공격같은 거 안해. 사람들이 떠드는 더러운 가십에 당신 이름 오르내리게 안해. 왜? 난 그게 얼마나 엿같고 고통스러운지 아니까. 그런 방법이 얼마나 쪽 팔린지도 아니까. 아니까 안해. 더 나은 방법으로 이겨줄게. 당신들이 얼마나 바닥인지 증명해줄게. 그 순간이 오면 부디 오늘이 진심으로 쪽팔리기 바래."
자기들의 잘못을 가리고 자기들의 조직을 지키겠다고 타인의 사생활과 신상기밀, 프라이버시를 공개해버린 어떤 사람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 성평등 교육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억압받는 다수>라는 영화를 보여주며 성윤리 교육을 한 선생님이 직위해제되면서 시작된 논란이 계속 번져가고 있다. 관련 정보와 의견들을 찾아보면 볼수록 복잡하면서도 중요한 논의들이라고 생각이 든다. 일단 현재까지 찾아보면서 생각해보자면 해당 선생님의 의도는 분명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 좋은 영상자료를 바탕으로 성평등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인식을 이끌어내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의도가 꼭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을 수 있다. 성평등을 지지해 온 진보적 활동가라고 해서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는 전제도 없다. 따라서 이것은 그 좋은 의도가 구현되고 전달되는 과정의 구체적 상호과정에 따라서 평가할 문제인 것 같다.
예컨대 과거에 나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잔인한 영상이나 사진을 선전에 활용하면서 반발과 논란에 부딪힌 적이 있다. 돌아보면 체제의 폭력을 반대하는 의도가 갑자기 경고나 정보없이 그런 것을 보게된 사람이 입게되는 상처를 삭제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내용과 의도를 담고 있더라도 말이다. 더구나 그 영상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주장과 설명들을 덧붙였는지는 그 자체로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수업과 강의는 대체로 교사나 강사의 세계관을 청중이 일방으로 전해 듣게 되기에 그 자체로 위계적일 수 있는데, 거기에 학생과 교사라면 더욱 간과할 수 없는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어떤 부분에서 무엇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고 상처를 받아서 문제제기까지 하게 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좋은 의도와 훌륭한 영상을 이해하지도 못한 어리석은 사람과 생각들이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에 따라서 해명하거나 오해를 풀거나, 사과하거나 이런 과정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과정보다는 교육청이 나서서 관료적 행정처리를 하고 직위해제라는 너무 과한 처분까지 내리면서, 좋은 의도뿐 아니라 오랜 교직생활까지 송두리째 부정당했다고 느낀 해당 교사와 주변분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항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면서 해당 성평등 교육은 의도와 과정, 결과까지 조금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서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분들과, 반대로 보수적 성관념을 바탕으로 그것은 처벌받아 마땅한 단순한 성폭력일뿐이었다고 반대하는 분들이 평행선을 달리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그동안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에 불만과 반감을 쌓아오던 분들이 가세해, 이 논란을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고한 사람들을 낙인찍고 단죄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변질’된 대표적 사례인 것처럼 몰아가면서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이 분들의 일면적이고 편견어린 시선도 안타깝지만, 건수 잡았다는 식으로 동조하고 나서는 분위기도 보기 좋지가 않다.
더구나, 아무리 억울하고 갑갑하더라도 해당 선생님이 그런 목소리들과 연계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럴수록 그 선생님의 좋은 의도와 억울함을 이해하려던 사람들도 오히려 멀어지게 될텐데 말이다.
그러면서 생산적인 토론과 대화는 사라지고 단절의 벽만 높아가면서, 이 과정에서 정작 그 수업을 듣고 문제제기를 했던 학생들의 생각과 목소리는 무엇인지 들리지 않게 된 것도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이 이뤄져야 해명도, 필요하다면 사과도, 그리고 화해와 치유도 가능할 것인데 말이다.
그랬다면, 그 선생님의 좋은 의도가 학생들과 소통 속에서 더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됐을 것이다. 내 의도와 달리 전달 과정에서 상대가 상처를 입는 대화는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시도를 중단하는 것도 문제제기를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함께 돌아보면서 더 나은 방향을 찾는 것이다.
● 박노자의 한국 공산주의 문화사 6강
지난 8월 초에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박노자 선생님의 ‘한국 공산주의 문화사’ 6강을 들었다. 이번에 다룬 인물은 상해파 공산당의 국내지부라고 할 수 있었던 서울파의 김명식이었다. 재능있는 이론가로서 수많은 글을 생산했던 그는 고문으로 청각을 잃었고, 39년부터는 부분전향을 했다고 한다.
일본 유학 시절에 러시아 혁명을 보면서 급진화하고, 귀국해서 조선노동공제회에 개입하고 동아일보에 들어가 ‘레닌 일대기’를 쓰고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는 글을 쓰는 등 그의 궤적은 식민지 시절 사회주의자의 전형을 보여 준다.
식민지와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분석은 지금 봐도 타당한 부분이 있는데, 일제의 침탈과 부의 유출로 조선은 시초축적이 불가하고 저발전을 벗어날 수 없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탈식민과 과도적 민족자치를 제시했는데, 그러나 민족은 자본주의의 산물일뿐이라며 ‘단일민족’을 배격했다.
이광수의 이순신 숭배에 대한 그의 비판도 흥미롭다. 이순신의 무슨 영웅적 능력보다 당시 명나라와 조선의 해군 기술력 수준이 승전을 가능케 한 것이라 분석하며, 영웅 숭배가 일종의 조선식 파시즘이며 결국은 외래(일제) 파시즘에 대한 종속으로 나갈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이광수의 전향에 대한 예언이었던 셈이다.
파시즘을 코민테른식으로 금융자본의 독재라고 분석하는 것을 넘어 중산층의 룸펜화라고 분석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박노자 샘은 위로부터 국가공무원들이 주도한 일본 군국주의는 파시즘의 아시아적 형태로 독일과는 달랐다고 지적했다.
물론 김명식은 코민테른 노선에 충실했고 ‘합법적 표면단체(전술조직)는 비합법 당조직(원칙단체)에 복종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상명하복의 경직된 입장이었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를 말하며 온건파를 ‘사회파시스트’로 규정해 고립을 자초하던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1931년에 신간회 해소도 환영했다는데,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아베의 경제보복이 낳은 혼란 속에서 김명식의 고민을 돌아보는 질의와 응답도 있었다. 식민모국이었던 일본의 군국적 민족주의와 식민지였던 나라의 탈식민 민족주의는 같지 않을 것이다. 박노자 샘도 일제하 조선의 민족주의는 대개 자민족 우월주의나 배외주의와는 달랐고 중도적 민족주의자들마저 국제적 연대에 열려있었다고 지적했다.
1915년 김명식이 와세다대에서 참여했던 ‘신아동맹단’에서도 식민모국과 식민지의 지식인들이 한데 모여 연대주의적 반제국주의를 추구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운동도 지금 위험성과 가능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분명 민족주의의 강화는 한계를 낳을 수 있지만, 동시에 지금 반아베 집회를 가보면 ‘일본 국가와 국민을 구분해야 하고 국민들과는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들과 정부의 대응 방안에 대한 비판들이 나오고 있다.
집회의 요구는 한미일 동맹에 파열구를 내는 ‘한일군사협정 파기’로 모아지고 있고, 마무리는 한국 기득권 우파의 핵심인 조선일보 규탄행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과거와 민족이 아니라 미래와 계급이 중요하다’면서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배 책임을 그냥 넘어가서는 이런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
동시에 ‘경제전쟁’ 논리에 휘말리며 위험성에 눈감아서도 안 된다. 지금 벌어지는 것은 경제전쟁이 아니라 역사와 정의를 위한 정치적 투쟁이다. 과거와 미래를, 민족과 계급을 대립시켜 어느 하나를 단순 기각하기 보다 위험성을 견제하고 가능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다.
(기사 등록 20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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