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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 돼야 하는 이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3. 21.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 돼야 하는 이유: '여성'이라는 식민지의 해방을 위해서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좌파 중에서는 가끔가다가 (요즘은 그나마 좀 드물게) 페미니즘을 오해하면서 '정체성 정치가 계급 의식을 왜곡시킨다', '기본적인 적대적 모순에 대한 관심을 이렇게 딴 쪽으로 돌리면 안 된다'와 같은 소리를 내뱉는 남성들을 아직도 볼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야 80년대 운동의 가부장적 색채 등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지만, 꼭 국내만도 아닙니다.

 

믿을까 말까 할만한 일이지만, 굴지의 해외 트로츠키주의 사이트 www.wsws.org 에서는 최근 1년간 계속해서 #미투 운동을 비난해왔습니다. -자 사이의 기본적 모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희석시키는 총자본의 계략이라는 식으로요. 글쎄, 이 트로츠키주의자 분들의 말대로 #미투 운동을 먼저 일으킨 피해자들은 가시성이 높은 직종 (여배우 등)의 중상층 구성원들이었습니다.

 

물론 일반 노동자, 특히 서비스 직종 여성들의 성폭력, 성희롱에 대한 투쟁의 폭발은 꼭 뒤따르고 그랬지만, 또 유명 여배우들의 #미투 만큼의 언론 조명을 받지 못해 "#미투를 여성 사회 귀족들이 한다"는 식의 착각을 일으키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죠. 그런데 말이죠. 예컨대 3.1운동의 지도자, "33인의 민족 대표"들이 전부 다 가시성이 높고 상당수가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종교계 인사이었다고 해서 3.1운동 그 자체의 의미를 평가절하해도 됩니까? 인도 독립 운동을 일으킨 간디와 그 측근 인사들은 그 당시 인도 토착 사회로 치면 전부 다 "최상위 5%"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오늘날 엉터리 "트로츠키주의자"와 달리 생전의 레브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에 영향을 미쳤던 1920년대 초반에는 레닌 등과 함께 식민지와 반쪽 식민지, 종속 지대에서의 민족운동과 계급 운동의 '합작' 노선을 수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 노선에 따라 예컨대 3.1운동에 버금가는 19266.10 만세운동을 지하 조선 공산당과 천도교계가 같이 합작해서 지도한 거죠.

 

모스크바에서의 코민테른 지도부가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종교 비판을 일단 당분간 삼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도교와 손잡고 합작하라"고 강조했을 때에는 천도교 지도자들의 계급적 배경 (주로 중소 지주 등)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당연 천도교에 대해 알 걸 다 알았죠. 그런데도 좌우 합작, 민족운동과 계급 운동의 합작을 중시한 것은 그만큼 '민족문제'의 일차성과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에요.

 

여성주의 의제와 식민지 치하의 민족 문제는 도대체 뭔 관계냐고 따질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관계는 아주 분명합니다. 평균적 한국 여성의 벌이는 평균적 한국 남성 벌이의 63% 정도입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의 임금차 수준과 거의 같죠. 임금 뿐만입니까? 만약 통계청의 통계를 그대로 믿는다면 남자 피고용자 중의 비정규직 비율이 26%인 반면 여성 노동자 중의 비정규직은 아예 41%입니다.

 

그런데 비정규직이라도 되는 여성은 실은 소수입니다. 전체 성인 여성의 고용 노동 시장으로의 진입 비율은 51% 정도 밖에 안되는데, 남성의 경우에는 70%를 훨 넘습니다. 여성은 여전히 가내 부불 노동 (번식 및 가사, 육아 노동)으로 몰려 있는 것이고, 가정 구성원으로 가정의 사업을 '돕는다' 해도 그게 독립적 '소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죠. 개선 중에 있긴 하지만, 한국 여성은 여전히 사회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가사, 육아 노동의 강제된 전담자입니다. 하루 가내 가사 노동의 시간은, 한국 여성은 한국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8배나 길죠.

 

밖에 나가도 여비서나 마트 비정규직, 집에 있어도 조용히 쉬는 시간은 거의 가지지 못하지만, 거기에다가 주로 남성이 가해자로 돼 있는 온갖 범죄에 노출되기까지 합니다. 대한민국 강력 범죄 피해자의 84%나 여성이죠. 하여튼, 세계 성차 평등의 지수상으로 대한민국은 116위를 차지하는 것은 다 충분한 이유가 있는 일입니다. 이 나라의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시민'이 아니고 여전히 '식민지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전투적인 페미니즘이란 반제 민족해방운동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코민테른이 중국이나 조선 민족 운동을 지원과 합작 대상으로 봤듯이, 오늘날 계급운동자 역시 페미니스트 되는 것은 그저 자연스러울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죠.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저와 같은) 남성 사회주의자/계급운동론자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본인 공산주의자와 같은 처지입니다. 일제가 폭력 통치하는 조선에서의 '지배 민족' 구성원의 신분을 가진 사회주의자의 일차적 임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불문가지의 일이죠. 식민지 반제 투사들과 손잡는 것이었습니다. 경성제국대 교수로 부임하여 이강국과 최용달, 박문규, 박치우 등 기라성과 같은 한국 맑시스트들의 한 세대를 가르친 일본 공산주의자 미야케 시카노스케(1899~1982)가 경성의 조선인 지하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지명 수배 중인 독립투사 이재유를 자신의 관저에서 한 달 넘게 숨겨준 일화에서 보이듯이, 그들 중에 이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동지들이 분명 계셨던 것이죠.

 

공산주의자들끼리 서로 돕는 거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의열단과 같은 의혈 투쟁을 지원하는 일본 양심가들도 가끔 있었습니다. 투쟁 방법에 대해서야 이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반제, 식민지 해방 투쟁이야말로 일차 과제라는 것을 어쨌든 사회주의자인 이상 다 인정해주는 것이었죠. 그러니 저도 '미러링'과 같은 투쟁 방식에 대해서는 심각한 회의를 개인적으로 갖고 있긴 하지만, 여성이 대한민국에서 사실상의 피차별 식민지 백성으로 남아 있는 이상 '여성들의 투쟁'이라면 일차적으로 연대 대상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2008년 세계 공황이 닥쳐왔을 때에 하버드대의 제프리 삭스 씨가 남긴 명언(?)은 있습니다. 본인은 본래 신자유주의 이론가이었지만 "인제는 우리 다 사민주의자가 돼야 한다"라는 명언(?)이었죠. 글쎄, 저들이 다 '사민주의자'들을 자칭한다 해도 금년이나 내년에 아마도 닥쳐올 또 하나의 공황을 저들 주류 경제학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예방하지도 못할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 말 본따서 "우리 다 페미니스트 돼야 한다"고 저도 외쳐보고 싶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계급 모순의 해결은 젠더 모순과 관련된 투쟁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페미니즘을 포함하지 않는 사회주의 내지 계급투쟁 이론은 절대 성립 불가능한 것이죠.

 

 

 (기사 등록 2019.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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