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원(충북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이 글은 <동국대학원신문> 6월 4일자에 204호에 먼저 실렸던 것이다.( http://www.dgugs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9) 좋은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와 <동국대학원신문>에 감사드린다.]
대한항공 일가의 갑질 논란이 연일 화제였다. ‘물벼락’ 조현민뿐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 역시 숱한 갑질을 행사했다는 보도들이 등장했다. 필리핀 출신의 가정부에게 하루 16시간 일을 시키고 45만 원을 월급으로 주었으며, 여권을 빼앗는 등 온갖 불법적인 방식으로 노동력과 인격을 모두 착취했다는 사실도 충격이다. 제3세계 저임금 노동자에게 행사된 인종주의적 착취는 진정 우리를 분노케 한다. 몇 년 전 조현아 씨가 저지른 ‘땅콩회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파렴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이한 갑질들은 재벌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지배구조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Chaebeol과 Gapjil 모두 한국어 발음표기 그대로 외국의 유수 어학사전에 등재된 단어들이자, 어느덧 외신이 한국발 기사를 보도할 때 단골로 사용하는, 한국의 ‘국격’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되었다. 철옹성과도 같은 재벌의 사회적 지배력은 정권이 바뀐다 한들, 총수들이 구속된다 한들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지금 한국에는 단순히 재벌들이 대다수의 ‘선량한’ 직원들과 국민들에게 행하는 갑질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은 자사 직원들에게, 대기업 직원은 중소기업에게, 중소기업은 또 다른 하위 하청업체에게, 하청업체는 계약직,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갑질을 행사하며, 대형마트는 납품업체에게, 마트 소비자들은 계산대 직원들에게 번갈아가며 갑질을 부린다.
프랜차이즈 본사는 가맹점들에게, 가맹점주들은 알바생에게, 알바생 중에는 먼저 온 선배가 신입으로 들어온 후임에게 조금이라도 갑질을 행사하고자 치열하게 분투한다. 인천공항의 정규직 직원들은 계약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고, 기간제 교사들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것도 이미 정식 임용된 교사들이며, 파리바게트 제빵사들의 정규직화에 반대한 것은 본사뿐 아니라 도처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을들이었다.
자신이 사는 비싼 아파트 인근의 주공아파트 단지 아이들과 자기 자식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싫어 민원을 넣은 부모들, 택배기사들에게 단지 내 배달차량 운전을 금지시킨 세대주들 모두 따지고 보면 거대권력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닌, 각자 나름의 더 큰 갑들에게 늘 시달리며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을들인 것이다.
누구라도 나보다 약해보이는 사람에게 자신을 ‘갑’으로 내세우면서 자기만족감을 과시하는 사회,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유형의 ‘갑질 공화국’이 되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홉스의 문구를 차용해본다면, 오늘날에는 “인간은 인간에게 갑으로 행사한다”는 법칙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에서의 ‘사회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갑질’이 통용되는, 무한생존경쟁의 정글과도 같은 ‘자연상태’로 퇴보해버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의 해체를 겪으며 원자화되는 가운데 한국 사회는 훨씬 더 세분화된 형태의 갑과 을의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 사회에는 삼성, 대한항공을 비롯해, 한국사회 전체를 무대로 거대한 갑질을 수행하는 재벌의 사회 지배력과 장악력을 넘어서 민주적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현재 겪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필요한 것은, 을의 삶을 살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횡포를 부리는 갑의 정체성을 내면화하여 또 다른 을을 마주쳤을 때 스스로 갑의 위치에 올라타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개인의 욕망, ‘을에게 내면화된 갑’이라는 이 거대한 욕망을 극복하는 일이다. 즉 수많은 미시적인 갑들의 미시적인 횡포들의 구조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는 지난 20년간의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로 촉발된 사회의 원자화와 해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매우 복잡한 물음을 제기한다. 사회가 해체되고 공동체성이 파괴되었다면, 우리는 해체되고 파괴된 그 ‘사회’ 내지 ‘공동체’를 ‘복원’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복원해야 할 어떠한 (연대적) 사회 내지 공동체가 존재했던가? 신자유주의 이전 시기의 사회는 과연 <응답하라 1988>과 같은 드라마가 상정하던 쌍문동 골목길의 훈훈한 인간냄새가 흐르던 공간인가?
오히려 그 시절은 교사가 학생을, 남편이 아내를, 군대 선임이 후임을 마음대로 폭행해도 되던 시절, 여성은 성폭행을 당해도 말조차 꺼내지 못하던 시절,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판자촌을 통째로 헐어버리고 인간을 추방해버린 야만적 폭력이 지배하던 시기가 아니었는가? 또 그 시기의 ‘공동체성’이란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는 폐쇄적인 유대관계가 아니었던가?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복원해야 할’ 어떠한 연대적인 사회나 공동체적 관계의 원형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각각의 영역들을 횡단하고 교차하는 다양한 형태의 을의 반란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연대적인 사회관계와 공동체성을 ‘창출’해나가는 것이다. 이 반란은 조양호 일가의 퇴진을 위해 가면시위를 벌이는 대항항공 직원들, 몰카를 퇴출하기 위한 전사회적 대책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여성들,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에 저항하는 상인들, 최저임금과 노동권을 요구하는 알바 혹은 불안정 노동자들 등 모든 영역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갑과 을의 경계선이 언제나 상이하며 그 기준이 매 순간 달라지므로, 갑의 횡포에 저항하는 을의 반란 역시 매우 복잡한 구조를 형성한다. 좀 더 고전적인 용어를 써보자면, 중층(과잉)결정된 모순(알튀세르)에 대항하는 각각의 저항들이 이루는 성좌(星座) 내지 짜임관계(아도르노)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결코 불협화음 없이 진행될 수 없다. 을의 저항에 직면한 갑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수행한 갑의 행위를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을 영원한 을로 동일시한다. 미투운동과 여성들의 저항을 접한 다수 남성들은 ‘왜 죄 없는 우리까지 욕하는가?’ 하면서 이 운동이 ‘순수성을 잃었다’고 한탄한다.
이들은 갑(예컨대 ‘진보적’ 남성 네티즌들이 규탄하는 재벌이나 수구세력)의 횡포에 분노하는 본인 역시 동시에 또 다른 을(여성, 소수자)에 대해서는 갑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프랜차이즈 본사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는 가맹점주들은 그들이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알바노동자)에게는 갑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영세상인들은 최저임금 상승에 반대한다.
을의 반란은 거대권력과 거시적인 갑뿐만 아니라 이들 모든 미시적인 갑들에 대항해서도 수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을의 반란은 투쟁을 통해 “평등을 증명”(랑시에르)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18.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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