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야 할 ‘정상적인 일상’은 없다: 트라우마에 연대하는 우리의 자세
윤미래
사람들은 대체로 선량해서 마음이 파손되고 망가진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고쳐주고 싶어한다. 잠시 정도는 제 일상의 한 자리를 떼어 감정적, 관계적 봉사에 할애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가 안전하고 정의로우며 나를 가치로운 존재로 대우한다는 믿음은 안타깝게도 그런 정도의 선의로 수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런 시도는 열 중 아홉여덟 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느낀 케어자들이 질려서 떨어져나가는 결과로 귀결된다.
이 선량한 마음이 항상 배신당하고 실패하여 돌아설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트라우마를 ‘훼손’으로만 규정짓고 상대를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는 의지,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시혜적인 동정이라는 것이다. 기실 우리는 명백히 비정상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은 될 수가 없다. 현실의 비정상성을 외면하거나 비현실적인 낙관으로 덧칠하여 부조리한 일상을 받아들이든지, 그것을 직시하고 정상적으로 평가하여 일상 부적응자가 되든지 어느 쪽이든 고장이 나야 이 세계에서 숨이 붙어 있을 수가 있다.
트라우마는 전자의 방식이 외상적 사건으로 인해 선택 가능한 대안에서 배제된 상태이다. 세계가 위험하고 고통스러우며 부정의와 모욕으로 가득하다는 진실이 잊을 수 없이 뇌리에 각인되었을 때, 끝없이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도움을 구하며 우는 것은 당연하다. 현실과 관념 사이의 괴리에 맷돌에 낀 낱알처럼 갈려나가더라도, 관념 속에서라도 인간성을 붙들고 있는 것이 그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살아나갈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니까.
그러니까 트라우마에 연대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세계를 바꾸어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싸움을 필요로 하고 그 싸움에서 안 다치고 안 죽는 법은 없다. 정신질환자가 당신의 평화로운 일상을 위협한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이 세계가 애초에 인간에게 일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체감하지 못한 것이다. 고통에 주저앉지도 않고 망가지거나 폭주하지도 않으며 주위를 착취하고 힘들게 하지도 않는 사람들만 있는 공동체는 기득권자 중의 기득권자들이나 상상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희생을 가능한한 줄이고 서로의 상처를 봉합해주면서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를 대하는 데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고통과 훼손은 언제나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 함께 싸우는 것, 싸우면서 서로 어깨를 거는 것. 돌려놓을 ‘일상’이란 게 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공유하는 것, 나는 감히 그것을 고통 그 자체에 대한 연대라고 부르고 싶다.
(기사 등록 2018.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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