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수많은 책을 썼다. 본인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현재 한국 불교계의 전반적인 탁류 (濁流) 속에서 제가 애당초에 아주 존경했던 스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한국 전쟁 때 인간 살육의 잔인함을 보고 출가의 뜻을 굳힌 분이셨는데, 일제때부터 정진해온, 사회의식도 매우 강력했던 효봉스님의 고제 (高弟)이었습니다. 암울했던 독재 시절에 성철 선사와 같은 귀족적이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지니지 않고 반대로 불교 명서의 국역과 각종의 수필로 일반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상구보리하화중생 (上求菩提下化衆生)의 업을 훌륭하게 해내셨던, 진보적 불교인의 전형이었던이 분은 한국 불교계의 보기 드문 보배 중의 보배이었습니다.
결국 민주화되고 나서는 이 분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 운동도 일어나고 거기에다가 한 단월 (檀越)이 그에게 도심에서 작은 사찰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는 이 분의 평소의 자세가 상당히 바뀌었다고 합니다. 중벼슬이 닭벼슬이라는 게 산중의 상식이지만, «주지» 입장이 된 스님의 어깨와 얼굴표정부터 바로 달라지는 거죠. 아무리 평생동안 불교의 민중화에 공을 들여오신 분인데 말이죠.
한 양심수 출신의 유명 지식인을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아주 아주 오랫동안 죄없이 «간첩»의 누명을 덮어쓰고 군사정권의 감옥에서 지내셨던 그는, «국제사면기구»의 석방촉구 켐페인의 해묵은 대상이었고 전세계 앞에서 한국에서의 짓밟혀진 인권을 상징했습니다. 한데 옥고도 결국 끝나고 어느덧 과거의 양심수는 지식계의 권위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와 거의 일을 같이 못할 만큼 그의 권위주의적 태도가 대단히 심각한 것이죠. 이 나이 때의 지식계 «실력자»라면 대체로 권위주의적이지 않는 사람도 매우 드물지만, 이 경우에는 거의 상습화된 갑질에 가까운 것입니다. 지금 이런 모습을 보면 인권투쟁과 저항의 상징이었다는 걸 믿기가 어려울 지경이죠.
불교에서 인간을 썩히는 3대 요인을 «탐진치 (貪瞋痴) 삼독 (三毒)»이라고 합니다. 탐욕과 화냄, 그리고 어리석음이 인간의 번뇌를 키우고 해탈의 순간을 늦춘다는 거죠. 이건 맞는 말이겠지만, 아마도 권력만큼 이 삼독을 또 키우는 외부적 환경도 없습니다. 타자에 관련되는 결정을 내리고 이 결정을 타자에게 합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이란 ‘이고’ (自我)를 상식과 이성이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확대시키고, 결국 이성의 궤도를 벗어나게끔 합니다. 그만큼은 인간에게 타자 위에서의 군림이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거죠. 인간 역사 3-4백만년 중에서는 계급사회/국가의 역사란 그저 5천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두뇌는 그러니까,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지 않았던, 비교적 평등했던 원시공동체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두뇌는 권력이라는 독약에 대단히 약합니다.
우리 몸이 예컨대 방사능에 약하듯 말입니다. 권력에의 노출은 어쩌면 심리적 차원에서는 방사능에의 노출보다 상대적으로 더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죠. 권력에 노출되고 나서 이상 (異常) 심리의 현상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을, 저는 거의 본 적은 없습니다. 독약 치고도 최악의 독약이죠. 그리고 ‘슈퍼이고’ (超自我), 즉 신념과 내면화된 윤리, 도덕 등은 권력 행사에의 심취 (深醉)를 전혀 제대로 예방하지 못합니다. 아주 드문 예외들이야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원님이 되고 판서 되고 대감이 되고 궁궐에 드나들게 되면 대개 그 어떤 군자 (君子)도 다 소인배 (小人輩)가 되고 말지요.
저는 이 생각을,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우는 한 조직체에서 그 리더 중의 한 사람에 의한 성추행 사건이 발생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하게 된 것이죠. 아무리 다수에게 잘 안알려진 단체라 해도 그 내부자들에게는 그 지도자는 엄청난 권위를 지니는 사실상의 권력자죠. 그가 아무리 «진보적 여성관»을 수십년 토론하고 아무리 남녀평등에 대한 그 모든 이론들을 달달 외우는 등 ‘슈퍼이고’를 다 총동원해도, 권력의 늪에 빠져든 이상 이성 (理性)의 궤도를 벗어날 기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봐야 합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위치 자체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죠.
해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권력 그 자체를 최소화시켜야 하는 거죠.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말입니다. 되도록이면 권력을 분산시켜야 하고 견제해야 합니다. 조직은 «지도자»도 «지도부»도 아닌, 모든 멤버들의 항상적인 감시와 견제 속에서 그저 심부름꾼으로서 일을 «맡아보는» 사람에 의해 굴려가야 하는 것이죠. 체제내 권력이든 반체제적 권력이든 권력 그 자체가 악입니다. 어떨때엔 필요악인지 몰라도 어쨌던 악은 악이죠. 권력이라는 독약에 사람을 되도록이면 노출시키지 말아야 인권 수호가 가능해지고 각종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부터 확 줄어듭니다. 특히 혁명을 지향하는 조직체라면 더더욱더 탈(脫)권력화돼야죠.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무권력적, 무계급적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인 만큼 말씀입니다….
(기사 등록 201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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