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바커(Colin Barker)
이 글의 필자인 콜린 바커는 맨체스터 rs21(‘21세기의 혁명적 사회주의’: revolutionary socialism in the 21st century)의 활동가이다. 이 글은 <사회재생산 이론: 계급의 재배치와 억압의 재조정> 책 발행에 맞춰 런던에서 있었던 ‘역사 유물론’ 컨퍼런스에서 그가 발표한 내용이다. 번역에 수고해준 정강산 님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원문 링크:
https://www.rs21.org.uk/2017/12/08/social-reproduction-theory-going-beyond-marxs-capital/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에 의해 편집된 새로운 훌륭한 책(<사회재생산 이론: 계급의 재배치와 억압의 재조정>)에서 설명했듯이, 사회재생산 이론(SRT)은 강력한 혼합물이자 매우 생산적인 사유 방식이다. 그 출발점은 마르크스주의의 바이블이라 할 법한 책에 대한 비판을 수반하는데, 즉 마르크스의 <자본> 3권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물론 <자본>은 잘 알려졌듯 미완의 작업이다. 제 3권은 마르크스가 계급들(과 아마도 계급투쟁)에 관해 논의하려는 부분에서 갑자기 중단된다. 본래 마르크스는 국가, 국제 무역, 세계시장과 위기까지 포함하여 6권짜리 작업을 계획했다. 허나 내가 아는 한, 남아있는 그의 원고들에는 가장 흐릿한 개요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지대에 관해 서술하면서, 그는 논의 전체를 그가 1870년대에 맹렬하게 탐구했던 러시아 소농 농업에 관한 자료들로 다시 고쳐 쓰려 했다. 그는 경쟁에 관해 계획되어 있는 더 추가된 작업을 언급한다. 허나 잉여가치가 산업적, 상업적 이윤과 이자, 지대로 분배되는 방식들에 관한 제 3권의 논의는 더 나아간 형식 - 즉 국가 조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마르크스는 자신의 중요한 이론적 발견인 노동력이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지(이것이 사회재생산 이론의 출발점에 다름 아니다)에 관해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 그의 거룩한 작업은 매우 구멍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데에 유용한 지침을 가지고자 한다면, 더 많은 것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필요한 덧붙임과 보충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두 개의 다른 접근이 상이한 탐구 방식들을 거쳐 발전되어왔다.
첫 번째 전략은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더 완전한 일련의 범주들과 개념들을 제공해줄 자원을 마르크스주의 바깥에서 찾는 것이다.(때로 이런 ‘바깥에서의’ 연구는 마르크스주의가 어쨌든 결정론, 환원론, 경제주의, 유럽중심주의, 유토피아주의에 의해서 갖가지 결함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 동조적이다.)
따라서 국제 관계론의 학도들은 국가 체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채우기 위해 ‘현실주의’로 기울었다. 어떤 이론가들은 젠더 지배를 설명하기 위해 억압과 계급에 대한 ‘이원적(dualist)’ 이론을 제공하는 ‘가부장제 이론’에 주목했다.
인종주의와 다른 형태의 불평등을 추가하려는 몇몇 이론가들은 ‘이원론’ 외에도 ‘상호교차성’ 이론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여러 자율적인 체계들은 서로의 궤도를 가로지른다. 만약 더 심화된 복잡성을 마주한다면, 역시 더 많은 ‘요인들’이 열거되었다.
두 번째 전략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통일성을 지키면서, 마르크스의 사유 범주 자체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이것을 추구하고, 그것의 빈틈과 침묵에 의해 제기된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관점으로 ‘<자본>의 한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리즈 보겔(Lise Vogel), 마이클 A. 레보위츠(Michael Lebowitz) 등에 의해 취해진 경로인데, 이 집단들 속에서 폭넓게 대변된다. 이러한 전략은 본질적으로, 마르크스가 충분히 명백하게 말하지도, 제기하지도 않았던 문제들을 쫒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에서, 광범하게 상호 관련된 필자 집단 전체는 <자본>의 범위를 넘어 마르크스주의 언어를 ‘심화시키고’, ‘확장하고’, ‘보충하고’, ‘넓히’ 거나 ‘늘리’려 했다.
적어도 이 책[<사회재생산 이론>]에 등장하는 저자들의 경우 사회재생산 이론은 두 번째 전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전략의 한 부분은 자본주의 재생산의 핵심적인 전제 조건을 확인하는 일과 관련된다.
자본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념의 중심에는 ‘유동적인 가치(value in motion)’가 있다. 가치는 생산 단계를 거치고(여기서 잉여가치가 창출된다), 계속해서 넓어지는 인간 사회 행위 영역들을 통합하고 종속시키는 확장된 사회적(societal) 재생산의 반복되는 순환에서 실현 단계와 분배 단계를 거친다.
그러나 그 운동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시장교환의 법칙과 전제들에 종속되지는 않는 일련의 전체적 조건에 의존한다. 마르크스는 이들 중 하나, 즉 생산의 ‘숨겨진 거처’에 관해 폭넓게 논의했는데, 이때 시장에서 구매된 노동력은 자신의 자유를 잃게 되며 그 에너지가 추상적 노동으로 전환되면서 자본의 횡포한 법칙에 복종하게 된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은 끝나고, 예속이 지배하게 된다. 부자유는 다양한 측면에서 자본주의 재생산의 필수적인 기초이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 재생산의 힘이다. 마르크스는 <자본 I>의 시초 축적(혹은 더 낫게는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 밖에선, 특히 자본주의적 발전에 관한 부분을 빼놓으면 상품 생산과 교환의 전체 체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힘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적 힘의 배치와 조직화는 자본주의 생산 속에서 공동 구성적(co-constituting)이고 지속적인 필요성으로서 수반된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자본주의의 다른 전제조건에 관한 탐구를 시작한다. 즉,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그 자체의 비용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독특한 상품인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에 관해서 말이다.
어떻게,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누구의 목적으로 노동력은 생산되는가? 실로 이것이 ‘생산’ 활동 자체인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문제시함에 따라 이러한 질문들이 나타났지만, 다른 생산적인 질문들처럼 이들은 그 함의가 탐구되면서 자신들의 기원을 넘어서 뻗어나갔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과정은 자본관계의 재생산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자체의 과정 속에서 노동력과 노동 조건들 사이의 분리를 재생산한다…. 완전하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보이는 생산의 자본주의적 과정, 즉 재생산 과정은 단지 상품들과 잉여가치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 그 자체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자를 만들어 낸다.”
(<Capital I>, 723~4)
자본주의적 생산은, 계급과 그 적대와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한다. 이 계속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에서 임금 노동력의 재생산을 필요로 한다.
ο 기존의 노동자들은 매일 재생산(regeneration)되거나 유지되어야한다.
ο 그러한 재생산과 보존은 또한 어린이, 노인, 병자, 그리고 그 외의 부양가족을 포함하여- 노동자가 아닌 이들을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
ο 병, 노령, 죽음으로 떠난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이 낳아지고 양육되어야 한다.
잉여 가치를 생산하거나 자본과 국가의 필수적인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건으로 노동자들을 직장으로 데려오는 것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필요 자원이나 재생산 수단에 인간 활동을 적용하는 과정들에서 노동력은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한다.
놀랄 것도 없이, 그 기원을 고려할 때, 사회재생산에 관한 문헌 대부분은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주요한 장소로서 가족-가정(family-household)을 주목해왔다. ‘가사노동’의 성격과 그것이 정치경제의 나머지 영역과 맺는 관계에 대한 일단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탐구로 시작된 것은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되어 왔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migrant worker)들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의 이들 사안에 대한 탐구였다. 그 관련 쟁점은 단지 이주노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있어 지속적인 강탈 혹은 시초축적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세계 시장에 대해 마르크스가 쓴 책이 없는 것이 인종주의의 체계적인 조직에 관한 우리 이해에 기여했을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마르크스가 매우 칭찬한) 공장 감독관의 업무와 보건의료 관리들의 보고서에 대한 약간의 관심을 제외하면, 마르크스는 노동계급 재생산의 조건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같은 다른 조건들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관련 사안은 물론 이후 150년의 과정에서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사회재생산 이론에 의한 검토 범위와 계급투쟁에서 모든 종류의 연대를 위한 영역을 가족-가정을 넘어 상당히 확장시킬 것이었다.
노동 계급이 주택, 도시 생활의 질, 교통, 교육, 물과 위생, 건강과 약, 연금, 노동 시간(그리고 여행), 음식의 질, 전시와 가스, 연료의 공급 등을 빌리고 구매하는 조건들은 계급투쟁 자체와 계급투쟁이 수행되는 사회운동에 대한 확장된 개념을 요구하며 다른 많은 사안들과 함께, 전지구에 걸친 계급투쟁에서 중심적인 부분을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최근 한 페이스북 상의 토론에서는 국가와 사회재생산에 관해 추가된 판본에 대한 아이디어가 논의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티티 바타차리아가 그것을 편집하는 데에 도움을 주길 희망하고 - 이를 필시 필요로 할 것이다.)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단지 경제적 범주와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 그녀 혹은 그 자체, 활동하는 생산자, 명백히 사회화된 역사적 존재, 마르크스와 그람시가 다양하게 명명한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행위들의 결합 혹은 중심 자체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재생산에 대한 행위자라면, 그들이 생산하는 것은 행위자로서의 그들 자신이다.
가치의 기준을 제공하는 ‘추상 노동’은 추상적인 누군가의 산출물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위치하며 역사를 구성하는 실제 개인들의 산출물이다. 노동자/생산자는 관념, 역사, 사회적 관계, 기술, 문화[수준에서의 분할]와 함께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개인이다.
이 개인, 노동자(혹은 노동계급의 구성원)는 그들 자신에 대해 세계에 관한 어떤 종류의 감각을 만들고,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행위 하려 하는 적극적인 ‘철학자’인데, 여기서 ‘만족’으로 간주되는 것은 동시에 활동적인 반영 혹은 반영적인 활동이며, 이전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물 자체이다.
마이클 레보위츠가 자신의 저서 <자본을 넘어서(Beyond Capital)>에서 보여준 그 논의에 대한 기여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서 결정적이다. 레보위츠는 - 비록 마르크스가 노동시간에 관한 19세기의 쟁투에 <자본>의 긴 장을 할애했더라도 - 임금에 대한 노동자와 자본 간의 투쟁이 <자본>의 구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자본의 재생산 순환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필수적 측면에서는 상반되는, 노동력 생산과 판매에 관한 두 번째 순환을 전제한다.
이 순환에서 수행되는 노동은 자본의 직접적인 비호 아래 놓여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에 자본이 부과하는 한계 내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이들은 자력으로 과업을 수행한다. 나아가, 이 순환에서의 동력은 노동자 자신일 뿐 아니라, 생산을 위한 동력도 잉여가치의 경쟁적인 축적에 의해 추동되는 첫 번째 순환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여기에서의 동인은 단순히 소비를 위한 물질적 재화만이 아니라 즐거움, 자기 계발, ‘그들 스스로의 신체적, 정신적 힘에 대한 자유로운 행사’ 즉 사회적 삶을 위한 노동자 자신의 필요이다. 자본주의의 두 가지 순환들 사이의 상호 관계는 계급투쟁의 진정한 핵심이다.
<자본>에서 빠진 것은 단지 ‘경제적’ 범주로서 노동력의 생산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특히 자본에 대립하는 노동자들의 자기활동의 원리이다. 이는 우리가 <자본>을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 읽는데 있어 자본의 운동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이 제공하는 ‘해부학’을 통해 사회에서 진행되는 사회·정치적 투쟁을 포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 반대편 적들의 ‘음울한 과학’(19세기 영국 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경제학이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 규정되는 자율적 시장법칙만 강조하며 통치자의 역할을 축소한다며 이렇게 비판적으로 이름지었다 - 역주)의 한계를 넘어서 말이다.
이것은 한 가지 원리, 즉 가치의 자기 팽창에 기초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라는 시각을 넘어서, 그 중심에 대립하는 원리들 간의 투쟁이 있는 어떤 하나의 더 열린 체계로 우리를 이끈다. 비록 <자본>에선 아니지만 마르크스의 저술 다른 곳에서 이는 대립하는 정치경제들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즉 자본의 정치경제와 ‘노동의 정치경제’말이다.
1860년대에 마르크스는 특히 이것이 표명되고, 그 속에서 어떤 발전이 이뤄졌던 두 가지 형식을 식별했다. 그것은 첫째, 노동일에 법적 한계를 부과하려는 오랜 싸움이었고 둘째, 그것의 존재가 고용주 없는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증거였던 협동적인 작업장의 형성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노동자들의 생산을 순응적인 것으로 제시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은 교육, 전통, 관습 등에 의해 그 생산양식의 요구를 자명한 자연 법칙으로 간주하는 노동계급을 만들어낸다. 생산에 대한 자본주의적 과정의 조직은 일단 그것이 충분히 발전하면, 모든 저항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적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때로는 저항의 ‘수준’과 ‘질’에 낙담할 수도 있지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전의 형태를 만드는데 있어서 노동자들이 임금계약을 맺거나 파기할 수 있는 ‘자유’, 피임과 낙태 같은 재생산 투쟁 영역에서의 모든 형태의 자유 (그리고 자유의 결여),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법적 권리를 위한 정책들, 국가 ‘복지’ 정책의 발달, 파업을 하고 노조를 결성할 수 있는 권리, 집회 결사의 자유, 참정권 등등 같은 저항이 한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상한 설명일 것이다.
허나 만약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와 그 재생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결정적인 것으로서 다시 중심으로 선다면, 자본 자체 - 그리고 그 대변자들과 국가 - 는 노동 자체가 활동하는 방식을 형성하려하는 데 있어 능동적인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자기 발전(self-development)’에 대한 노동의 추구는 모든 지점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요구하면서, 자본과 국가에 대해, 똑같이 단지 경제적인데서 그치지 않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1960년대 초의 탁월한 에세이에서, 에드워드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이 어떻게 ‘전 방면에 걸쳐 사회를 형성해 왔는지’에 관해 썼다. 하지만, 그는 그 이면에 대해 지적하는 것에는 소홀했다. 즉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 운동을 전 방면에 걸쳐서 형성해 온 방법들, 즉 끌어들이고, 제한하고, 활동 형태들을 가둔 것들 말이다.
사회재생산의 형태인 ‘노동 계급의 형성’은 항상 논쟁적인 영역이 되어왔다. 계급투쟁은 단지 이미 형성된 존재들 사이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실로 이를 통해 대중 계급이 ‘스스로를 위해’ 자신들을 무언가로 되게 하거나, 되지 않게 하는 수단이다.
(기사 등록 2018.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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