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전지윤 동지의 "어느 하나의 투쟁 형태와 양상이 더 낙관적이라고 봐야 하는가"(http://rreload.tistory.com/39)에 대한 반박이다.
이재빈
이 글을 쓰게 된 기본적인 동기는 전지윤 동지가 지난 5호에 쓴 "‘5․3 세월호 참사 첫 촛불 대중집회 후기’를 읽고"(http://rreload.tistory.com/22)이다. 그러나 내가 문제라고 느낀 것이 비단 이 글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지배자들에 대한 폭로가 아닌 이상, 우리 사이의 토론과 논쟁에서 다른 견해를 비판하는 방법과 목적은 분명해야 한다고 이전부터 느껴왔다. 지금부터 쓰려는 짧은 글은 이와 관련되어 있다.
서범진 동지의 글이 지닌 장점을 굳이 새삼스럽게 언급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전지윤 동지도 이에 대해 아주 훌륭하게 정리했고 나 역시 이에 대부분 공감하기 때문이다. 전지윤 동지가 이견이라고 밝힌 것이 사실 나와 서범진 동지 사이의 공통점이기 때문에, 전지윤 동지가 문제로 제기한 것이 나에게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만 추가로 덧붙이면 될 것이다.
동지들 사이에 견해가 다른 것을 문제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전지윤 동지가 제시한 견해는 그 자체로 신중한 판단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견해가 내재적으로 지닌 약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전지윤 동지의 글은 서범진 동지의 주장을 긍정하며 제시한 장점을 스스로 뒤엎기 때문에 일관성이 떨어진다.
전지윤 동지는 “[서범진 동지의] 글에서 지적한 과제들에 매우 공감하며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과제들”이었다고 평가하는데, 동시에 “거리투쟁과 산업투쟁을 대립시키며 어느 하나를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게 부적절”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서범진 동지는 명백하게 산업투쟁(거리에 대응되는 개념이라면 작업장 투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보다 거리투쟁의 정치적 파급력이 강하다는 전제 하에 작성되었다(13쪽).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통해 이 주장의 유효 시점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범진 동지의 주장도 “거리투쟁과 산업투쟁을 대립시키며 어느 하나를 일면적으로 강조”했다고 할 수는 없다.(아마 전지윤 동지는 노동자연대의 지난 주장에 대한 거울 이미지로 서범진 동지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서범진 동지의 비판이 과도하다고 말한 대목은 정확하지 않다.)
‘당분간’을 ‘앞으로’로 바꾼 것도 단순한 오독이었을지언정 서범진 동지가 쓴 글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된다. 서범진 동지는 ‘당분간’ 거리투쟁의 파급력을 작업장투쟁보다 크게 보았던 것이지, 그것이 항구적인 경향으로 표현된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독은 불가지론으로 발전해서 양자 간 더욱 큰 파급력을 낼 부문은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차라리 서범진 동지의 주장이 향후 잘못된 것으로 입증될지언정 현재로서는 그의 주장이 지닌 정치적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오독
나는 전지윤 동지의 이해가 타당한 것인지를 검토하기보다, 서범진 동지의 견해를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경제위기 시대에 노동자 투쟁이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질 것”이라고도 했고, “노동운동의 힘이 전체 운동에서 큰 중요성을 가질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다만 두 가지 현상을 언급하며 현 노동운동의 약점을 진단한다. 첫째로 2006년 이후 작업장 투쟁 자체의 영향력과 규모가 줄어드는 추세였다. 근로손실일수 통계가 그 근거로 활용된다. 둘째로 평조합원이 노조관료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철도와 전교조 투쟁이 그 근거다.(여기서 서범진 동지가 영국의 사례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특별하게 폭발적인 시기를 제외한다면 대체로 평조합원은 노조관료를 넘지 못하거나 넘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관료는 자본가가 아니라서 평조합원이 노조관료를 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단절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전지윤 동지는 거리/작업장 투쟁의 연결과 결합을 강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둘 중에 하나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연결과 결합이 가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굳이 전지윤 동지가 언급해야 할 책임은 없다. 서범진 동지의 견해에 대한 자신의 첨언으로도 충분히 유용하고 좋은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범진 동지의 견해 자체가 딛고 있는 전제가 거리/작업장 투쟁의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지윤 동지도 ‘두 투쟁’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이 둘이 같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적어도 단기적인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예측은 필요하다.
구체적인 폭발 양상을 점쟁이처럼 찍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 국면의 성격과 단기적 전망을 시도한 글에 대해 전지윤 동지가 취한 태도는 사실상 부질없다는 것과 다름없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전지윤 동지가 ‘부질없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분석과 평가를 통해서 조직의 중핵을 단단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글을 마무리한다. 그렇다면 날카로운 분석과 평가는 어디에 적용되어야 하는가? 나는 예측과 전망이 빠진 분석은 정치조직으로서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우려도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을 제시한 1905년 혁명의 평가글도 『연속혁명―평가와 전망』이지 않은가? 이후 블로그에서 이어진 논쟁을 통해 전지윤 동지는 ‘베팅’의 필요성 자체를 문제시하기까지 . 물론 ‘노동자연대다함께’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형성된 ‘베팅’이라는 용어와 함의에 대한 문제제기로서의 성격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측과 전망에 입각한 힘의 집중은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의 고유한 특성도 아니고, 사실 시공간을 초월해 조직 일반에 모두 적용되는 원칙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없고, 어딘가에는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타당한 곳에 집중해야 한다. 꿈에 할아버지가 나와서 공장에 뛰어들라고 했다고 공장으로 가기보다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분석하고 이에 따라 다음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 중요한 것은 집중의 타당성이지 집중 자체가 아니다.
예측과 전망
전지윤 동지의 주장처럼 세월호 참사 이후 운동의 향배는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다. 5월 3일 집회 후기에서는 더더욱 희뿌옇던 상태였다. 진정으로 빛나는 정치적 분석은 희뿌옇던 상태에서도 사후 올바른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전망과 결합되어야 한다. 현상이 희뿌옇다고 해서 현재는 불투명하고 앞으로도 불투명하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불투명성은 누구나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논쟁을 흥미롭게 읽으며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현재 나는 서범진 동지의 견해에 보다 더 공감한다.
나는 대규모 작업장에서의 투쟁이 나중에 언젠가 박근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잠재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박근혜의 정치적 위기가 시작되는 곳은 서울 도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의 사기와 자신감은 2008년 촛불 때 개혁주의 지도부가 취한 어정쩡한 자세의 영향을 받고 있기에, 정권을 향한 분노는 표현될 수단과 방법을 적절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
트로츠키의 비유를 활용하자면 매우 부실한 피스톤이 증기를 제대로 폭발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형세다. 하지만 박근혜가 정치적 위기로 내몰렸던 시점은 피스톤 자체가 매우 부실하더라도 증기량이 절대적으로 치솟았던 때였다. 결국 이번에도 박근혜는 남재준까지 지키지는 못하지 않았던가?
지난 번 윤창중 이후 청와대 물갈이는 김기춘을 불러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 때엔 운동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윤창중처럼 명백한 잘못에 의한 인과관계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운동(‘민심’)에 압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재준을 잘라내야 했다.
고위 관료들 입장에서는 정권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정권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던 인사라도 대중적 압력으로 잘릴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인사개편의 교훈일 것이다. 지배계급의 위기는 대체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관된 활동이 그들 내부로부터 보호받지 못할 때 촉발된다. 거리에는 여전히 그 정도의 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계급의 현장 투쟁과 결합되기 위해서는 단지 ‘둘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 거리에서 벌어진 투쟁과 작업장에서 벌어진 투쟁이 자체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투쟁은 현재 지도와 전략의 문제에서 분명하게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흐름에 조응하기 위해 민주노총도 움직이고 있으며, 거리투쟁에서 금속노조 위원장이 연행되기까지 했다. 거리투쟁과 작업장 투쟁의 중요성을 헤아리면서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 단기적으로 따져봐야 하는 이유는 구체적인 운동의 현실과 조응하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거리투쟁의 약점이 무엇이며, 이것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논쟁했다면 더 생산적이었을 공산이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숱한 오류를 겪어야 했겠지만 말이다.
최소한 서범진 동지는 노동계급 자신들의 투쟁이 어느 수위에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자료라도 제시했다. 나는 서범진 동지가 제시한 자료를 통해 그와는 조금 다르게 분석하려 한다. 서범진 동지와 나 사이에는 계급의 귀환을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이 유사할지언정, 결론을 내리기까지 거쳐가는 길은 꽤 다르다.
먼저 2013년의 투쟁은 분규건수와 노동손실일수 모두 2009년과 비슷하다. 2009년 이후 우리 모두는 ‘쌍용차 트라우마’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적어도 2013년의 현상은 쌍용차 트라우마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2년의 ‘폭발’은 사실상 이명박 정권 말기에 일어난 현상으로 설명되는 편이 자연스럽다. 광범한 정권교체 열망이 반영된 투쟁의 분출이 있었던 것이다.
‘니들이 내년에도 저렇게 떵떵거릴 수 있나 보자’는 그런 자신감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2012년은 분명 예외적인 사례다. 마찬가지로 2007년의 경우는 민주당 정권에 대한 광범한 환멸과 우파 집권을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결합된 예외적인 시기였다고 판단된다.
중요한 것은 ‘예외적인 폭발’이었던 2012년조차 2006년에는 미치지 못하며, 우파정권이 들어선 이후 노동계급의 투쟁은 7년간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점 때문에 ‘계급의 귀환’을 말하기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단지 2013년에 수위가 낮아서만이 아니라 최근 몇 년간의 추세는 ‘귀환’을 언급할 수 있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우파 정권이 들어선 이후 계급투쟁의 완충장치 역할을 하던 노조관료들이나 NGO의 ‘(기성)정치참여’가 줄어들었는데, 이것이 계급투쟁의 예측가능성을 낮추고 휘발성을 높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별도의 자료가 제시되지 않는 한, 계급의 귀환은 사실상 만트라에 불과하다.
나로서는 솔직히 다소 실망스럽지만 전지윤 동지의 비판은 기존 자료의 재해석도, 새로운 근거의 제시도 빈약한 논평이었다. 최근 삼성전자서비스, 케이블 비정규직의 예를 들며 산업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언급했지만, 나는 그것이 정말 ‘새로운’지 의문이다.
대학청소경비노동자, 학교비정규직, 학습지, 심지어 화물연대 등등 새로운 부문이 노동운동의 일부로 개척되는 현상은 줄곧 있었다. 우파 정권 하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것이 계급투쟁의 상황을 역동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신생 노조들은 대개 열악한 상황에서 출발하다보니 부문주의 압력에서 더욱 자유롭지 못하다.
긍정적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요소들도 있지만, 변증법이라는 것은 결국 내적 모순에 주목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파업지속일수와 파업 참가자 수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전지윤 동지가 자료를 제시하지 않아서 판단이 어렵다. 만일 전지윤 동지가 두 지표를 제시하면서 반박했다면, 논의가 더욱 구체적으로 현 상황을 진단하는 방향으로 이어졌으리라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세월호 참사는 실로 답해야 할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지배계급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과 싸우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이놈의 계급투쟁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한지 답답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적잖게 보인다. 서범진 동지의 글은 우리가 딛고 있는 사회의 객관적 현실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면서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답답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실마리를 안겨줄 수도 있는 글로 의미가 있지만, 나는 이 논쟁의 결과로 우리가 정치적 예측을 통해 힘을 집중시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운동주의적인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 촛불이 가라앉은 다음에 이를 평가하는 것은 역사가들이 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단기적-장기적 전망과 예측을 통해 이 운동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일이다. 설사 우리가 지금 당장 여기에 개입할 역량과 절대 규모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전망과 예측을 기각해선 안 된다. 전망과 예측에 따라 내려진 결론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작은 역량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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