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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논쟁

어느 하나의 투쟁 형태와 양상이 더 낙관적이라고 봐야 하는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4. 5. 23.

[편집자]  서범진 동지의 " '5월 3일... 후기를 읽고에 대한 답변'(http://rreload.tistory.com/38)에 대한 재반박"이다. 

 

 

전지윤


서범진 동지의 답변을 잘 봤다. 이 답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우리의 공통점을 확인했다. “노동계급 기층의 자신감이 아직 충분치 못하며 심지어 노조관료들조차 꽤나 위축되어 있다는 점”, “단기간 내에 산업투쟁이 얼마나 전국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질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 따라서 “‘노동계급의 귀환’은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이라는 것 등이 그렇다. 


이 점은 내가 지난해 말 다함께에서 논쟁을 벌일 때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이렇게 분석했다. “우리는 이미 2008년 촛불항쟁 이후부터 노동운동의 자신감 회복을 말해 왔다. 

그러나 현재 노동운동은 강성 우파 정부에 맞서서 얼마든지 단결해서 싸우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수준이라고 확신하기는 힘들다. 개혁주의 지도부나 노조 관료들의 통제를 제쳐 버리고 나아갈 자신감 수준은 더더욱 아니다.”(‘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가 돌아보자’) 

나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정치 투쟁·요구와 경제 투쟁·요구를 결합시키며 “노동운동의 단결을 고무하고 승리를 앞당기며 자신감을 높일 수 있는 주장과 전술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했듯이 계급투쟁의 두 계기이자 양상인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서로를 고무하며 결합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자는 다소 그 과정을 자동적으로 본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역도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의 정·경 분리 압력과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회피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을 방해하며, 그 속에서 정치투쟁의 부진은 경제투쟁의 발전도 가로막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2008년 이후 이 나라에서도 관찰된다고 생각한다. 

2008년 촛불의 패배 이후 2009년 쌍용차 파업의 패배가 있었고, 그후 거리의 촛불이든 작업장 투쟁이든 모두 어느 선을 넘어서 더 나아가지 못해 왔다. 예컨대 거리 촛불은 반값등록금, 한미FTA, 국정원 선거부정 등을 계기로 다시 점화되면서 ‘어게인 2008’에 대한 기대를 키웠지만 곧 사그라들곤 했다. 작업장 투쟁은 2010년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파업 등이 있었지만 역시 지지부진했다. 지난해 철도파업을 계기로 다시 기대가 커졌지만 결국 다소 허망하게 끝났다. 개혁주의 정치인과 노조 관료들은 두 투쟁 모두에서 투쟁의 결합과 더 한층 발전에 소극적이었다. 

 서범진 동지도 이런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서범진 동지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전망보다 거리운동에 대한 전망을 더 낙관적으로 보게”됐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앞의 글에서 지난 몇 년간 경험적·사실적으로 거리 투쟁이 작업장 투쟁보다 꼭 더 활발하거나 폭발적이었다고 볼 수 없는 점을 반증했다. 그것은 작업장 투쟁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것의 반편향일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서범진 동지는 작업장 투쟁의 전망이 거리 투쟁보다 더 어둡다는 근거로 다시 파업건수와 근로손실일수 통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2013년의 수치가 ‘건강 회복 국면의 잠깐 몸살’인지, ‘중병으로 가는 신호로서 몸살’인지는 향후 장기적 추세를 봐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밖에 없다. 서범진 동지는 어느 하나가 더 가능성이 큰지 제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렇지 않는 것은 “사실상 계급투쟁의 주된 양상에 대한 구체적 전망을 유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상호 연결된 계급투쟁의 두 형태와 양상 중에 꼭 어느 하나에 ‘베팅’을 해야 할까? 그람시는 ‘우리가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지 그 구체적 계기와 형태가 아니’라고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조나선 닐도 이렇게 지적했다. 

“모든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어디서 투쟁이 시작될까? 누구도 모른다. 어쩌면 공무원노동자, 어쩌면 패스트푸드 노동자, 쇼핑몰 노동자, 콜센터. 어쩌면 대학 강사들이 될 수도 있다. 누구도 알 수 없다. 결정적 전투가 시작되면, 역사가들은 왜 바로 거기서 시작됐는지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황혼이 되면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사후적으로 일반화한다는 뜻으로 헤겔이 한 말)일 수밖에 없다. 

서범진 동지는 “‘산업투쟁을 대립’시켜서 기각한다는 말의 조직적/실천적 의미[가] … 불분명”하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거리투쟁을 대립시켜 기각’하는 태도를 반면교사삼자고 말하고 싶다. 그런 태도는 산업투쟁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어긋나는 쟁점과 거리 투쟁(예컨대 세월호)이 벌어질 때 굼뜨게 만들 수 있다. 일면적 인식이 전술적 유연성을 제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리투쟁만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태도도, 그 전망과 달리 거리투쟁이 쉽게 사그라들거나 예기치 않은 산업투쟁이 벌어질 때 경직된 대응을 낳을 수 있다. 물론 현재 국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산업투쟁을 일면적으로 강조해 온 태도의 경직성이다. 이는 산업투쟁만을 진정한 계급투쟁이라고 보는 혼란, 세월호 국면에서 끓어오르는 대중의 분노와 정의감에 대한 공감 능력 부족, ‘계획으로서 전술’에 대한 오해 등 더 많은 문제점과 연결돼 있다. 

이는 지금 세월호 국면을 발전시키는 게 다가올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 건설이기도 하다는 점도 놓치는 것이다. 사실 지금 거리투쟁이든 산업투쟁이든 똑같은 난점에 직면해 있다. 아직 기층 대중의 자신감이 충분치 않다는 점, 진보의 분열이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 민주당 추수가 문제가 된다는 점, 개혁주의 정치인과 노조 관료들이 투쟁에 브레이크를 걸어 왔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거리 투쟁만이 이런 난점에 갇혀 있는양 보면서 작업장 투쟁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맞서 양 투쟁·요구의 결합을 주장한 것이 지난해 연말 나의 주장이었다. 나는 이것이 작업장 투쟁 강조에 거리 투쟁 강조로 맞대응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시 확인하지만 나의 이런 반론은 우리의 커다란 공통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치열한 고민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논의를 더 심화시킨 서범진 동지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서범진 동지의 지적처럼 “향후에 보다 구체적인 탐구와 토론 과정을 통해 구체적 분석을 함께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

 * 이런 토론이 딱지 붙이기와 인신공격으로 이어지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에 서글픔과 기쁨이 동시에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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