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정리의 편의를 위해서 질의 응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실제로는 많은 부분 다양한 참가자들의 주장과 토론 속에서 나온 내용들이다. 물론 정리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돼서 정리된 내용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논쟁됐던 내용에서도 양 쪽의 입장을 동등하게 정리했다기 보다 정리자의 입장으로 써있다는 점을 주의하라. 토론 때 충분히 정리되거나 답변되지 못한 점도 정리자의 의견으로 보충했다.)
-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조건 등의 차이가 큰데 과연 하나의 노조로 조직하거나 단결하는 게 가능할까?:
물론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분열 경쟁시킨다. 그리고 노조는 자본주의가 가하는 기업, 업종, 산업별 차이를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노조마저도 기업과 업종과 노동조건의 차이를 넘어서 산별노조라는 큰 틀로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노동조건의 차이가 단결을 막는 핵심 문제도 아니다. 현대차에서 앞바퀴와 뒤바퀴를 만들며 노동조건이 비슷한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돼 있는 것을 보라.
대체로 여러 가지 차이를 이유로 조직화를 회피하거나, 또는 어떤 시점에서는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를 추진하는 것에는 노조 관료들의 이해관계와 판단이 개입되곤 해 왔다. 예컨대 현대차는 아직도 1사1노조가 거부되고 있고, 기아차에서는 비정규직 독자노조의 힘과 투쟁이 강해지니까 오히려 1사1노조가 채택된 바가 있다.
- 의료연대노조를 보면 원청과 하청이 따로 교섭하는 게 정말 한계가 있다. 1사 1노가 진정한 대안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1사1노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의 조직에 있을 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 투쟁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1사1노조나 노조 통합,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을 거부하는 노조 지도부를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조직 형식이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기아차에서는 1사1노조 이후에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정규직 노조의 통제가 더 강화되거나 여전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함께 단결하고 투쟁해 본 경험과 그 속에서 발전하는 의식이다.
한편, 의료연대노조는 보건의료노조에 대한 비판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포괄하는 지역중심의 산별노조를 내세우며, 서울지부 산하에 정규직분회와 비정규직분회가 같이 있는 형태다. 즉 형식적으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포괄하는 형태인데, 막상 개별 사업장에서 원청과 하청이 하나로 통합되지는 못한 것이다.
기아차도 1사1노조이지만 비정규직분회가 따로 존재한다. 그 점에서 1사1노조를 만들 때, 비정규직을 따로 분회로 두지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뒤섞여서 대의원을 선출할 수 있도록 하자는 ‘선거구 통합’ 주장은 타당하다.
- 비정규직 분회마저 없애면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고, 교섭권을 통합 노조의 정규직 지도부가 사실상 독점하면서 제대로 비정규직의 이해를 대변할 수 없다는 반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투쟁에 대한 통제 문제는 노조 통합이 낳는 문제라기 보다는 노조 자체가 가진 한계로 봐야 한다. 노조는 체제 내 개혁을 추구하는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투쟁을 조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불만을 어느 선 안에 가두고 통제하는 구실도 한다. 따라서 정규직 노조와 통합한다고 이런 문제가 생기고, 비정규직 독자 노조를 유지하면 이런 문제가 안 생기고 이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비정규직 독자노조의 역사를 봐도 노조관료의 등장과 투쟁에 대한 통제 문제가 나타나 왔다.
교섭권 문제도 핵심은 정규직 지도부에게 주느냐, 비정규직 지도부에게 주느냐가 아니다. 핵심은 노조 민주주의이다. 즉 모든 교섭, 체결 과정에서 항상 평조합원들이 그 과정을 보고받고 승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일반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개별 작업장과 투쟁에서 비정규직의 독자성과 교섭권의 행방 등은 구체적 상황에 따라 우리가 전술적 판단을 내릴 문제일 것이다.
- 학비노조의 경험을 볼 때, 초기에는 비정규직 독자노조가 일반적으로 더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조직 형태와 방식은 어느 하나가 일반적으로 맞다고 보기 힘든 점이 있다. 사실 비정규직 독자 노조는 정규직의 외면 속에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차나 기아차가 바로 대표적인 경우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는 아직도 조직 대상자 중에 1~20%밖에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처음부터 노조를 통합하며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받았다면 100% 조직율도 가능할 것이다.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국 최강의 민주노조 조합원이 되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학비노조도 만약 처음부터 전교조가 교사든, 조리사든, 수위든 교육 부문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를 포괄하겠다며 조직화에 나섰다면 더 빨리 더 많이 조직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전교조 초기에 그런 방향을 제시하는 좌파적 활동가들이 있었지만 채택되진 않았다. 이제 학비노조와 전교조와 교수노조 등을 합쳐서 교육대산별노조를 건설하자는 입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 교재에서 말하듯이 이 나라 지배자들이 비정규직을 늘려 온 핵심 이유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것이고 저임금/ 고용유연성 확보/ 노조로 인한 저항비용의 절감 등이라고 봐야 하지 않는가? 또는 경제 위기가 낳은 결과라고 봐야 하지 않나?: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서 진보진영의 가장 영향력있는 전문가인 김유선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 불안정 고용은 1980년대에도 있었다. 1987년에도 임시일용직 비중이 전체 노동자의 45퍼센트에 달했다. 다만 당시에는 상용직과 임시일용직의 임금이나 근로조건의 차이가 별로 없었다. 이들간의 분열도 심각한 쟁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임시일용직 비중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신경영전략’이 대두하던 1994년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다. 예컨대 현대차에는 1997년 전에 이미 4천여 명의 비정규직이 있었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IMF 때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통과되면서 이후 급격히 늘었다.(<비정규직 결정 요인> 김유선)
결국, 비정규직 확대는 1987년 이후 등장한 강력한 민주노조 운동과 IMF로 본격화된 경제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이었다. 기업주들은 민주노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민주노조 운동이 투쟁으로 쟁취한 권리들을 제공하지 않고 회피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늘려나갔다.
정규직 민주노조를 함부로 공격하기 어려워지니까 비정규직을 늘려서 노조를 회피하고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려 한 것이다. 경제 위기로 인해 쪼그라든 이윤은 이 방향으로 가속도를 높이게 만들었다.
87년 이전에는 지역주의가 핵심적인 노동계급 분열지배 전략이었다면 이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이간질하는 게 핵심 전략이 됐다. 즉 비정규직 증가는 시장 경쟁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 지배자들의 의식적인 행위의 결과였다. “시장 환경이라는 객관적 조건의 변화보다 행위 주체인 기업의 전략적 대응이 비정규직 증가를 초래”(<기업의 비정규직 사용비율 결정요인>김유선)했다.
- ‘자본주의의 필요성 때문에 비정규직이 무한정 늘 수는 없다’는 주장은 이 나라에서 현실의 검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일단 ‘비정규직’은 불안정 노동의 한국적 형태라는 점을 봐야 한다. 예컨대 크리스 하먼은 <세계의 노동계급>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보다는 ‘유연 노동’, ‘불안정 노동’, ‘비공식 부문’이라고 쓰고 있다. 마르크스도 이런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특수 부문”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 비정규직을 어떻게 어디까지로 볼지도 논란거리다. 김유선의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비정규직의 규모를 8백만여 명, 전체 노동자의 50% 정도로 본다. 반면 노동부는 비정규직 규모를 4백만여 명이라고 본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노동부가 장기임시직 노동자 수백만명을 비정규직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용어에 집착하기 보다 ‘자본주의에서 불안정 노동력을 무한대로 늘릴 수는 없다’는 주장이 옳은지를 봐야 한다. 일단 논리적으로 보자.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숙련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안정되고 숙련된 노동력이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현대차에서 안정된 고임금의 숙련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몫을 빼앗고 있는 게 아니라 정몽구에게 엄청난 이윤을 만들어주고 있는 장본인이다.
둘째, 경험적 증거를 보자. 크리스 하먼은 ‘비정규 불안정 노동’에 대한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에서 ‘종신 고용 대 비종신 고용’의 비율은 8:2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세계의 노동계급>)
이 나라에서도 비정규직 비율은 2007년 8월 54.2퍼센트에서 2012년 8월 47.8퍼센트로 감소한 반면 정규직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김유선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2012)
결국, 자본가들이 노리는 것은 비정규직의 무한정 확대라기 보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이간질해서 노동계급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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