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억압과 차별

반자본주의와 퀴어 해방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10. 10.

앨런 시어스(Alan Sears)

 

 

[이 글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가 쓴 <뒤틀린: 게이 정상성과 퀴어 반자본주의(Warped: Gay Normality and Queer Anti-Capitalism)>(Brill/Haymarket, 2015)에 대한 서평이다. 비록 이 책이 한국에 아직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이 글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소개하며 퀴어 해방을 위한 정치를 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퀴어 해방의 정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이 서평의 필자인 앨런 시어스(Alan Sears)는 성소수자 사회주의 활동가로서 캐나다의 사회주의 조직 뉴 소셜리스트(New Socialist)’의 지도적 회원이며 토론토 라이어슨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이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www.solidarity-us.org/site/node/4530

 




2015년에 열린 게이 퍼레이드(Pride Day)는 지난 6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레즈비언과 게이의 혼인할 권리를 인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번 결정으로 레즈비언과 게이에 대한 법적 차별 철폐를 위한 중요한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이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오늘날의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그리고 트랜스젠더 운동(LGBT 운동)을 촉발시킨 스톤월 항쟁 46주년을 기념하는 선물이었던 셈이다.

 

피터 드러커의 새 책 <뒤틀린(Warped)>, 하나의 항쟁으로부터 탄생한 해방운동이 어떻게 해서 자신들이 혼인할 권리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자료다. 한 가지 면에선 이렇듯 법적인 평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들은 운동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69년 스톤월 항쟁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그리고 트랜스젠더(LGBT)들이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처벌받기도 했다. 예컨대 캐나다에서는 동성애 행위 자체가 1969년에야 비로소 합법화되었는데, 이 때는 의미심장하게도 스톤월 항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많은 주들에서 동성애 행위는 2003년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동성애 처벌법(sodomy)에 따라 처벌대상이었다.

 

1969년에는 몇몇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보여 줄 때를 빼고는 영화, ,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LGBT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주류 언론은 범죄나 추문에 연관되지 않는 이상, 퀴어 의제를 다루지 않았다. 이들은 LGBT라는 이유로 해고되었고, 법적으로 호소할 방법도 없었다. 실제로 캐나다에서는 썩은 과일 색출 기계(fruit machine)”라는 것을 이용해 경찰이 퀴어인 공무원들을 색출하고 이들을 해고시키려 했다.

 

[“Fruit machine”은 캐나다에서 발명한 장비의 이름으로, ‘과일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게이들을 일종의 썩은 과일이라고 경멸했기 때문이다. 이 테스트는 기본적으로 피실험자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피실험자의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호흡, 그리고 성적인 반응과 연관 있다고 여겨지는 각종 신체적 반응들을 체크하는 것이다]

 

이처럼 힘든 과정을 거쳐 얻은 결과이지만 모든 사람이 이번 연방대법원의 동성애자 혼인 권리 인정을 축하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는 해방과는 꽤 거리가 있고,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체제에 대한 순응으로 심각하게 후퇴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게이 정상성: 포용된 사람과 배제된 사람들

 

레즈비언과 게이의 결혼권은 가족이나 우리 삶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려는 교회와 국가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 체제 내에 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채, 자신들이 소유한 자산 가격을 올리거나, 가능하다면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전념할 수 있는 커플들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 말이다.

 

예컨대 유색인 퀴어, 트랜스젠더, 바이섹슈얼, 소득이 낮거나 법적 신분이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 선주민 출신 퀴어, 싱글이거나 1:1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데, 이들은 결혼과 소비주의를 누리는 새로운 레즈비언과 게이의 세계 속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

 

현재의 정치 풍토에서 우리는 종종 극단적인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레즈비언과 게이 결혼을 대단한 성취로 축하하기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우리가 벌이는 해방 투쟁에 방해되는 후퇴라고만 비난하는 것이다.

 

이 모순적인 승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활동가들에게 <뒤틀린>만큼 적절한 자료는 없다. 이 책은 성 해방을 더 넓은 반자본주의적 사회변혁 프로젝트의 일부로 위치 지음으로써, 체제 순응주의와 영구적인 비합법 지위라는 양자택일을 넘어서서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게이 결혼권을 인정하기로 한 연방대법원 결정은, 드러커가 게이 정상성(gay normality)”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으로, 게이 정상성안에서 특정한 레즈비언 및 게이의 라이프스타일은 광범위한 법적, 문화적 적법성을 획득하는 한편, 다른 퀴어들은 점점 더 주변화 된다.

 

함께 사는 동성 커플들은 파트너로서의 중요한 권리와 함께 보다 폭넓게 문화적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게이 정상성은 트랜스젠더와 성적으로 주변화된 퀴어들의 배제, 인종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가 지배적인 국가들로 통합되는 현상, 그리고 결혼에 기반을 둔 정상 가족의 형성도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게이 정상성을 단순히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잘못된 방향 전환이나, LGBT 운동 내에 존재하는 보다 보수적인 부위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낸 배신적 정치전략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드러커는 게이 정상성에 대해 비난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찬사를 보내지도 않은 채,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그것이 가진 강점과 한계를 평가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정상성

 

드러커는 게이 정상성을 신자유주의 국면에 들어선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벌어지는 정치 투쟁의 결과로 묘사한다.

 

오늘날 게이 정상성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그동안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게이 정상성은 신자유주의가 다른 장벽들은 재강화하는 한편, 특정한 공간들은 열어주면서 자유를 위한 투쟁들이 다른 곳으로 향하도록 만든 결과물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1970년대 이래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이 같은 장벽들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은 노동계급과 유색인종, 그리고 소득이 적은 사람들에게 불리한 정책이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우리의 삶을 시장에 맞추는 것으로, 이는 고용주들에게 우리의 노동력을 판매할 때나 생활필수품들을 구매하는 경우 모두에서 그렇다.

 

이렇게 시장을 중심에 놓다보니,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대안적인 방법들은 억압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교육과 보건의료 및 사회적 프로그램들은 대폭 삭감되거나 수익자 부담을 중심으로 재조직화되었으며, 그 결과로 공공부문 같은 비상업적 서비스들은 제거되었다.

 

이는 사람들을 한층 더 취약하고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한 강력한 탄압을 동반했다. 수감율은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특히 유색인들을 중심으로 현저했다. 경찰의 공무집행은 군사화 되었는데, 이로 인해 특정 인종이 밀집된 지역사회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민은 힘들어진 반면, 투자는 환영받았다.

 

노동조합의 권리는 전 방위적으로 공격받았다. 사용자들은 린(lean) 생산방식을 통해 임금노동을 대거 재구조화하였다. 당연히 이런 것들 가운데 LGBT 권리를 위한 투쟁의 공간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없다. 실제로 초기의 신자유주의는 악랄하게 반동성애적이었던 사회적 보수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후반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같은 정치인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소수 민족과 여성의 교육 기회와 고용에 있어서 차별 철폐 조처(affirmative action) 및 기타 반인종주의 조치들에 대한 가차 없는 반대와 함께, 반낙태, 반동성애 입장과도 연결시켰다.

 

2016 대통령 예비선거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보수주의는 여전히 미국 공화당의 정치적 견해들과 같이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자유주의가 반드시 사회적 보수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실제로 드러커가 썼다시피,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가져온 예상 밖의 상황 전개 가운데 하나는, 시장이 보수적 도덕을 잠식하는 방식이었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수익(bottom line)에 대한 것이고, 따라서 가차 없는 이윤 추구는 도덕을 둘러싼 그 어떤 관념이든 상당히 좀먹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은 돈이 되는데, 섹슈얼리티를 제한하게 되면 상거래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번성하게 된 레즈비언과 게이의 삶의 형식은 상업적인 게이 업소들과 그것들과 잘 맞는 성 정체성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가시화된 게이 정체성(gayness)은 특정한 바나 카페, 식당에 가는 것이나 특정한 감수성(“퀴어 취향이라고 불린다)을 드러낸 옷을 입고 외모를 꾸미는 것, 또는 그것과 관련된 특수한 문화 행사에 참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러한 상업적인 게이 업소들은 수익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와 매우 잘 어울린다. 그 안에서는 이윤이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시장에 대한 대안을 없애 버리면서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사람들이 시장에서의 선택을 통해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강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이 정체성은 일종의 소비주의적 정체성이 된다. 이는 실로 꽤 돈이 많이 되는 정체성이다.

 

게이 소비주의는 정체성과 소비를 연결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게이 남성들은 새로운 형태의 남성 소비주의의 모델이 되면서, 진짜 남자는 하드웨어와 맥주, 그리고 스포츠 용품 말고는 쇼핑을 하러가지 않는다는 오래된 규범을 깨뜨렸다.

 

, 게이 시장은 광고 성애화(sexualization)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는데, 특히 남성 신체를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그랬다. 부유한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겨냥한 상업 및 거주 지역 공동체가 형성됨에 따라, 많은 북아메리카 도시들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발생했다.

 

주변화된 사람들

 

주류 사회가 부분적으로나마 법적 평등의 형태로 레즈비언과 게이를 수용한 것은 게이 관련 상업 부문 때문인데, 이 부문이 신자유주의와 매우 친화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이들의 권리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았다면 주류사회가 이들을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하지 않았겠지만, 이 운동은 다른 많은 이들(노동자, 유색인, 선주민, 이민자)은 설 자리를 잃고 있던 바로 그 때, 자신들의 권리 확장을 위한 틈새를 발견했다. 이는 주로 게이 소비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친화성에 기인한 것이다.

 

더 나아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자 권리(gay rights)에 적대적이었던 정부들이 이제는 정복과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문화적, 정치적 우월성의 표지로서 이러한 평등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혐오는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자원이며, 동성애자 권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본토에서의 차별과 해외에서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꺼내 쓰는 공구 상자의 일부가 되었다. 그 결과, 일부 레즈비언과 게이는 그런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행렬에 횃불을 높이 들고 참여해 동성애를 혐오한다는 이유로 이슬람을 비난하기도 했다.

 

게이 관련 상업 부문은 그럴만한 돈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과 이처럼 소비주의적인 라이프스타일의 틀에 적합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쫓아냈다. 스톤월 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거리의 청년들과 유색인종들, 선주민, 그리고 트랜스젠더들은 퀴어 정체성(queerness)이 상업 중심으로 맞춰지면서 점차 주변화되고 배제되었다.

 

특정 인종 중심(Racialized)의 퀴어들, 특히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그리고 남아시아 출신의 퀴어들은 이슬람 혐오주의가 확산되고 서구의 우월성이라는 주장을 종종 믿는 레즈비언/게이 조직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게이의 부상

 

물론 신자유주의의 맥락 속에서 게이 정상성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드러커가 처음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리사 더간(Lisa Duggan)과 자스비르 푸아(Jasbir Puar), 그리고 로즈메리 헤네시(Rosemary Hennessey)같은 사람이 이룩한 선구적인 기여에 의존했다.

 

그가 이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 그리고 게이 정상성을 동성애 행위가 거쳐 간 형태들의 역사적 범위 내에 위치 지운다는 측면에서, 이들 앞선 선구적 저자들보다 더 멀리 나간다는 데 있다.

 

특별히, 드러커는 변화하는 섹슈얼리티의 형태들을 축적 체제”, 즉 일련의 특정한 경영 전략과 정부 정책, 그리고 제국주의적 관계들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주의 발전의 국면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사용자들과 국가의 전략들은 저항에 대응해 전개되고, 그로인해 자유를 위한 투쟁의 토대를 놓는다.

 

오늘날의 게이 운동은 신자유주의가 전개되기 이전, 그러니까 대략 1940년대~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포디즘의 맥락 속에서 생겨났다. 복지국가를 수반한 포디즘은 핵심적인 경제적 추동력으로서 대량생산의 역할에 기초해 있고, 이는 거대한 공장들의 발전과 운송 관련 인프라의 확장, 도시의 성장, 그리고 자원 추출 강화로 이어졌다.

 

처음에 포디즘은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자 투쟁과 부상하는 반식민주의 투쟁, 그리고 반인종주의 운동을 포함한 거대한 대중운동이 떠오르면서, 이에 대응하고자 1930년대~1940년대에 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은 전폭적인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가능한 모든 악랄한 수단을 사용해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유례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에 맞섰다. 하지만 일단 이런 운동들이 일정 정도 반란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서 중요한 승리들을 쟁취하게 되자, 자본가들은 이윤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개발했다. 노동조합 권리를 인정하고, 노동계급 내 일정 부분들에게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보장해 주었으며, 특정한 조건 하에서 민족 독립을 인정해주었다.

 

오늘날의 LGBT 운동은 포디즘 시대에 걸쳐 발전하였고 1960년대 말에 폭발적인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냈다. 1969년에 벌어진 스톤월 항쟁은 여성과 유색인종, 선주민들, 여전히 식민화돼 있는 지역의 민중들, 청년들, 그리고 빈민들을 포함하여 그동안 복지국가에서 이등 시민 대접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벌이는 투쟁이 등장했을 때 발생했다.

 

1960년대에 벌어진 운동은 냉전이 펼쳐지던 세계의 숨 막힐 것 같은 억압과 순응에 맞서서 저항했고,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사상들을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LGBT 운동이 영감을 받은 것은 이런 투쟁들과 함께 섹슈얼리티를 포함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사상들이었다. 이렇게 부상하는 운동은 LGBT 공동체에 자극을 주었는데, 이들은 마침 동성 관계의 새로운 모델들을 둘러싸고 포디즘 시대 내내 재조직되고 있던 중이었다.

 

과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동성 관계는 젠더와 계급, 인종 그리고/또는 연령에서의 차이로 특징지어졌었다. 예를 들어,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동성애에서 이루어지는 남자 역할/ 여자 역할 (butch/femme)관계에서는, 한 파트너가 자신을 남성(masculine)으로, 다른 사람은 여성(feminine)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스로 동성애자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만든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1870년대~1940년대 시기에는 젠더가 생물학적 성과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 관계에서 젠더가 생물학적 성에 보다 일치하는 사람들, 예컨대 남성 젠더를 가진 남성들은 여전히 자기 스스로를 동성애자와 동일시하거나, 구별된 공동체의 일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동성애 행위를 한 남성들 가운데 남성 젠더를 가진 많은 이들이 여성과 결혼했다. 동성애자임을 자처하는 공동체, 특히 대도시들에서 등장하던 곳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은 젠더와 생물학적 성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드러커는 이렇게 양극화된 동성애 패턴이 발전하는데 있어, 제국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유럽 식민주의는 유럽의 토착적인 동성애 행위와 젠더와 생물학적 성이 일치하지 않는 행위의 형태들은 억압하려고 했다.

 

반면, 유럽인들의 성 매수 관광(sex tourism)과 관련된 새로운 동성애 행위의 형태들과 일과 삶에서 나타난 새로운 리듬은 강요하려고 했다. 보다 부유한 유럽출신의 남성 동성애자들은 종종 본국에서보다 젊은 노동계급 남성들, 혹은 식민지 환경에서는 특정한 인종 중심의 남성들과 비대칭적 관계를 맺고자 했다.

 

포디즘 시대에 와서는 보다 대칭적인 레즈비언 및 게이 관계의 모델이 성장했다. 이런 관계에서 커플인 두 여성 또는 두 남성은 기본적으로 같은 젠더 정체성을 공유했다. 자신을 퀴어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더는 주되게 젠더와 생물학적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트랜스젠더의 삶과 레즈비언/게이의 경험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성 해방과 반자본주의

 

드러커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각기 다른 국면이라는 맥락 속에서 섹슈얼리티들이 전개되고 있는 모습과 성 정치 투쟁을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동성애 행위는 비자본주의 사회에도 만연했지만, 우리가 동성애자(the homosexual)”, 즉 특정한 성적 정체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은,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과 가정(household)이 분리된 이후이다.

 

1870년대~1940년대에 이렇듯 퀴어라는 성적 정체성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주로 젠더와 생물학적 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1940년대~70년대 포디즘 시대에는 트랜스젠더의 삶과 분화되는 경향이 있는 보다 대칭적인 레즈비언과 게이 정체성의 새로운 형태가 부상했고, 성적 정체성을 둘러싸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투쟁도 아울러 성장했다.

 

1980년대 이후 시작된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게이 정체성이 발전했는데, 이 때에는 일부 동성애 정체성에 대해서는 온전한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반면,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주변화했다. 이처럼 풍부한 역사적 분석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쟁취한 것들에 내포된 모순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드러커는 퀴어 해방이라는 의제가 평등권을 넘어서 전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계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일과 삶이 보다 광범위하게 조직화되면서 얽히게 되는 방식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항쟁 속에서 탄생한 해방운동이 지닌 에너지가 어떻게, 그리고 왜 결혼과 평등권이라는 방향으로 수렴되는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형식적 평등과 실체적 불평등 사이의 간극은 퀴어 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에 저촉하기 십상인 아웃사이더의 지위를 가지자는 미명하에 정상성을 무작정 거부하는 것이 해법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를 변혁하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전략들은 우리가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길을 찾아가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장애물과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이해하는 데 있다.

 

드러커의 책은 젠더와 성 해방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자료다. 그는 풍부한 분석적 프레임을 발전시켰는데, 그의 분석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역동적인 맑스주의 설명이 퀴어와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그리고 반식민주의 관점이 가진 핵심적인 측면들과 통합되어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계급에 대한 이해도 한층 더 높일 수 있었다. 드러커는 정치적, 학문적인 자료에 의존해, 성 해방 정치를 풍부하면서도 공들여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진정으로 세계화하려 애쓰는 자유를 향한 다른 여러 투쟁들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책이 이룩한 이 같은 놀라운 성취로 인해, 오늘날에 해방을 위한 정치를 발전시키려 노력하는 퀴어 활동가들과 반자본주의자들이라면 모두 다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기사 등록 2016.10.10)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anotherworld.kr/164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