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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과 보고

반올림 농성 참가기 - 그 많던 절망은 누가 다 먹었을까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4. 24.

허승영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에 돌입한 지 200일을 넘어섰다. 농성에 참가한 허승영 동지가 보내 온 참가기이다.]  





미세먼지가 심했던 봄의 어느 날 강남역에 있는 반올림 농성장을 지키고 왔다. 까마득히 솟은 삼성 사옥 앞에 나지막하게 자리한 농성장 앞에는 소원을 담은 나무 인형이 늘어선 사이로 화분에 담긴 꽃들이 작은 밭을 이루고 있었다. 천막 벽에는 목소리를 담은 각종 대자보들이 붙어 있었다.

 

농성장 안으로 들어가니 전 시간에 지키는 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처음 만난 분들이었지만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를 묶어주는 어떤 끈을 함께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한 분이 나에게 맛있는 사과즙을 건넸다.

 

사과즙을 먹고 있는 나에게 그분은 앞으로 삼성 사옥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내 얼굴이 이미 CCTV에 찍혀서 블랙리스트에 올라갔을 거라고 했다. 그 정도 급은 아닐 거라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심 삼성의 감시 대상이 됐다는 것에 불안하면서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농성장은 아늑했다. 바닥엔 푹신한 매트릭스가 깔려있었고, 공간은 넉넉했다. 흥미로운 책과 다양한 단체에서 발행한 간행물을 비롯한 읽을거리가 많았다. 간식도 많았다. 초코파이, 식빵, 사과즙에 심지어 츄러스와 한약까지 있었다.

 

그 아늑함이 나를 한없이 미안하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갖은 고생을 한 시간 위에 내가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 공간을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 사람이 이 공간을 만들지 못 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이곳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처음 딸의 죽음을 알리려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 아버지를 도와 몇 사람이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은 법정에서 거리에서 할 것 없이 이루어졌다.

 

삼성은 강했다. 법도 국가도 그들의 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많은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최고 권력이 쌓아 도저히 넘은 수 없을 것 같은 벽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이윽고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는 스크린을 독점한 거대자본 앞에 상영될 기회를 거의 얻지 못 했다. 그때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역과 대학 등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관을 통째로 빌려 표를 나눠주었다.

 

그 활동에 참여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표만 끊었습니다. 영화관까지 오는 교통비, 팝콘과 콜라, 영화 끝나고 있을지 모를 생맥주 한 잔 값은 모두 당신이 부담해야 합니다. 게다가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를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 합니다. 크게 밑지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두 시간 내내 함께 울고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따듯한 경험이 영화관 바깥으로 널리 널리 전염됐으면 좋겠습니다.” (정철, <카피책> 중에서)

 

진짜 따스함이 전염되었다. 공감하는 사람이 늘었고, 사회적 반향이 일어났다. 그 힘으로 SK에서 예방 대책을 실행했고, 이어 삼성도 예방 대책에 합의했다. 아직 사과와 보상 문제가 남았지만 놀라운 진전이다.

 

더 큰 전진을 위해 강남역 한 가운데 농성장이 만들어졌다. 농성장은 삼성 사옥에 비해 한없이 작지만, 남한 최대의 기업도 무시할 수 없는 공간이다. 삼성에게는 농성장을 부술 물리적 힘이 있지만, 사람들의 온기를 식힐 마음의 힘은 없다.

 

경이로운 일이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 결국 세상을 바꾼다. 보이지 않는 힘이 모여서 보지 않을 수 없는 힘을 만든다.

 

노동자 76 명의 죽음, 유가족의 슬픔, 인정받지 못한 진실과 정의. 절망이 쌓여가던 시간이 있었다. 사람들은 눈물로 땀으로 절망을 나눠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절망을 먹어 치운 자리에 희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감옥에서 주인공 앤디가 이렇게 말한다.


마음속에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자신만의 것. 바로 희망이죠.”


그러자 친구 레드는 이렇게 답한다.


희망은 위험한 거야. 사람을 미치게 하지. 이곳에서 희망 따위 쓸모없어.”

 

세월이 흘러 앤디는 탈옥하고, 레드는 출소했다. 앤디는 출소한 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기억해요 레드. 희망은 좋은 것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몰라요. 좋은 것은 사라지지 않아요.”

 

반올림 농성장은 숱한 위험에도 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만든 희망의 공간이다. 한 사람이 결코 만들 수 없는 희망.

 

그 농성장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천막을 쳤다. 누군가는 대자보를 썼고, 누군가는 꽃을 심었고, 누군가는 조형물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모금을 했고, 누군가는 돈을 냈다. 누군가는 친구를 데려 왔다. 누군가는 책을 가져오고, 누군가는 초코파이를 가져오고, 누군가는 사과즙을 가져오고, 누군가는 한약을 가져왔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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