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의 역사를 재평가하고 재해석한 라스 리(Lars T. Lih)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토론과 논쟁을 촉발했다. <북극성 North Star>[미국의 좌파 재결집을 표방하는 사이트]의 편집자 다리오 캔코빅(Dario Cankovic)이 한 이 인터뷰는 리의 생각과 오늘날 좌파에게 그것이 가지는 시의적절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고 2013년 6월에 이루어졌다.
라스 리는 퀘벡의 몬트리올에서 일하고 거주한다. 그는 맥길대학교의 슐리히 음학부 음악학 부교수이며, 러시아 역사와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한 많은 글을 써 왔다. 그의 저서로는 <러시아에서 빵과 권위: 1914-1921>(1990), <레닌 재발견: 맥락에서 본 ‘ 무엇을 할 것인가’>(2006), 그리고 평전 <레닌>(2011)이 있다. 그의 온라인 글들에 대한 링크는 https://johnriddell.wordpress.com/2013/04/16/lars-lih-online-nine-recent-studies-on-bolshevism-lenin-and-kautsky/이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www.thenorthstar.info/?p=10443
당신은 1971년 옥스퍼드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나중에 학계로 돌아가 1984년 프린스턴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요.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은 무엇에 대해 썼나요? 어떻게 러시아 역사와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작업하게 됐나요?
옥스퍼드에서 제가 쓴 논문은 재미있게도 레닌과 마키아벨리에 대한 것이었어요. “마키아벨리와 레닌: 정치적 테크닉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지금은 다시 읽어 보기도 무서워요.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때 당시 레닌에 대해 통용되던 관점에 기초해서 썼거든요.
그러고 나서 박사학위 논문인데요. 그때가 기억이 납니다. 도서관을 걸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러시아 혁명에 대해 늘 나오는 주제가 ‘식량 공급의 정치학’이란 말이죠. 2월 혁명, 10월 혁명 둘 다 직전에 식량 공급이 무너졌었거든요. 신경제정책(NEP)과 페트로그라드에서의 소요도 그랬고요. 누군가 이걸 검토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체를 보면서 혁명과 식량 공급 사이의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는.
그러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하면 어떨까?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다. 한순간 영감을 얻어서 한 것이기도 했지만 결국 굉장히 좋은 주제였던 것으로 드러났죠. 저한테 차리즘 시기에서 출발해, 임시정부 시기로 넘어가고, 볼셰비키에서 끝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세 개의 정권이죠. 처음에는 시간적인 틀을 훨씬 더 넓게 잡았었는데, 그러고 나서 1914~21년으로 좁혔습니다. 사실 이것도 정말 충분히 넓은 거였고, 이게 제 첫 책이 되었습니다.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볼셰비키와 ‘전시 공산주의’에 대해 지배적인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전시 공산주의의 “환상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즉 ‘볼셰비키들은 자기들이 사회주의로 도약하기 직전이라고 생각했고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거나 거의 몰랐다’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 주요 역사가들이나 사람들이 정말 별의별 말을 다 합니다.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이 환상 모델은 제가 1914년에서 1921년 러시아의 식량 공급의 정치학에 대해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근본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제가 연구한 식량 공급 담당자들은 미친 사람들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현실의 문제를 다루면서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환상 모델과 제 연구로부터 나타나는 그림이 이렇게 충돌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이 저로 하여금 그 다음 관심사인 전시 공산주의, 사실 저로서는 ‘전시 공산주의 신화’라고 부르고 싶은 것으로 옮겨가게 만들었죠. 저는 1918년에서 1921년, 기본적으로 내전 기간의 전시 공산주의 시기의 현실에 대한 볼셰비키들의 관점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지점에서 저는 볼셰비키에 대한 광범위한 [러시아어] 원자료들을 보는 쪽으로 중요한 발걸음을 옮겼는데요. 이것은 정말 놀랍게도 새로운 접근이었습니다. 레닌을 넘어서서 다른 볼셰비키 대변자들을 다양하게 보는 것이죠. 예전에 한번 이런 생각도 들었는데, 아마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합쳐서 저만큼 많이 읽은 사람도 또 없을 겁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 나중에, <역사유물론> 시리즈에 포함됐으면 하는 책으로 묶으려는 일련의 글들을 썼습니다. 지금은 이 글들이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전까지 다양한 저널들에 흩어져 있죠. 책 제목은 아마도 <미루어진 꿈>이 될 것입니다.
저는 1920년에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이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는 꽤 확실하게 볼 수 있었지만,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큰 그림에 들어맞는 것일까? 특히, 레닌과 레닌에 대한 고정관념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느 순간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언젠가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 대해 한 문단 정도를 써야겠다’라고요. 혹시 그게 책의 한 장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역사유물론>의 편집자인] 세바스티안 버전(Sebastian Budgen)과 다른 사람들이 이 주제를 진짜로 살펴보라고 거듭 설득해서, 저는 레닌만 협소하게 보는 대신 그가 그 유명한 팸플릿을 썼을 당시 일어나고 있던 모든 일들을 보려고 노력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제가 가장 처음 한 일은 레닌이 그의 책에서 답을 한 모든 것, 그가 반박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고 그것들을 읽어 보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레닌을 맥락 속에 위치시킨 저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시다시피 이 프로젝트가 커져서 한 권의 두꺼운 책이 되었죠.
제 역사학 방법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드는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 VS <윌리를 찾아라!>'입니다. 왜,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에서 그런 그림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마오가 스탈린과 악수를 하고 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너른 벌판밖에 없고, 그저 이 두 '영웅'이 바람에 오버코트를 휘날리고 있는 그림이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한 역사학 모델과 유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역사를 쓸 때 중요한 사람들의 계보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잖아요. 마르크스에서 카우츠키에서 레닌으로, 그 다음 영웅이 트로츠키라고 보든 스탈린이라고 보든 아무튼요. 이와 대조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윌리를 찾아라!> 방법입니다.
여기서는 커다란 그림이 있고, 자세히 보면 레닌을 찾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엄청 많고, 저는 이 모든 사람들과 세부사항들을 채워나가고 싶었던 거죠. <레닌 재발견>에서 저는 이런 걸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다 짧은 <레닌>을 썼죠. 처음에는 맥락 속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작고 제한된 주제에 대해 커다란 책을 썼고 그 다음에는 큰 주제, 즉 레닌의 인생 전체라는 주제를 갖고 작은 책을 썼습니다.
제 글을 읽고 이의를 제기하는, 어떤 것들은 좋아하고 다른 것들은 좋아하지 않는, 그리고 이에 대해 저를 찾는 진짜 독자들이 있어서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독자들에게 답을 해 왔고 독자들과 소통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레닌 재발견>에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들 중 하나는 레닌과 카우츠키 사이의 관계입니다.
두 사람의 연관성을 거론한 게 제가 첫 번째는 전혀 아니지만, 저는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레닌이 카우츠키에게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고 그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빚졌는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응당 그렇듯이 거기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 책은 특히 1900년에서 대략 1903~4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니까요.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말했죠. 우리는 모두 나중에 레닌이 카우츠키에게 등을 돌린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나아가면서 레닌은 카우츠키가 상징했던 모든 것을 거부했고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생각했다고요. 그래서 저는 이런 비판들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레닌은 카우츠키와 어떤 의미에서 결별한 것일까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방식은, 지금 좌파의 통설인데, 레닌이 카우츠키가 상징한 모든 것을 거부했고, 모든 것을 다시 생각했고, 새로운 것을 생각해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식은 레닌이 ‘카우츠키는 그 자신 스스로의 원칙을 배신했다’고, 그래서 ‘배신자’(물론 이것은 카우츠키를 공격한 레닌의 팸플릿 제목입니다. 비록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않지만 일종의 암시인 것이죠.)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둘을 각각 ‘콩깍지 벗기 모델’(자신이 영웅이라고 본 사람과 그 사람의 관점에 대한 숭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이죠)과 ‘배신자 모델’이라고 부릅니다.
이건 사실 알고 보니 꽤 쉬운 질문이었습니다. 레닌 전집의 소비에트 편집자들이 제공해 준 색인 덕분에 저는 1914년 이후에 레닌이, 예전에 출판된 카우츠키의 저작들을 언급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일단, 언급이 굉장히 많았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매우 흥미로운 점이죠. 레닌은 거의 죽는 순간까지 카우츠키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마지막 글들 중 하나인, 사실상 임종을 맞으며 쓴 글인 “우리의 혁명”에서도 카우츠키에 대한 논평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발견은, 레닌의 논평들은 압도적으로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때는 훌륭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어서 안타깝다’는 것이죠! 레닌은 ‘오늘날의 카우츠키’에 대해서는 거의 강박적으로 비난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때의카우츠키’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은 거의 한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 제가 발췌해 놓은 이 모든 언급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온라인에 올려놓았습니다.
<레닌 재발견>은 레닌과 카우츠키의 1903~4년 이전 초기 관계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지만, 제 비판자들에게 답하는 과정에서 저는 이 시기 이후의 둘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정말로 놀라운 얘기거든요. 왜냐하면 카우츠키에게는 레닌만한 팬이 없었어요. 그만큼 강력하게 카우츠키의 팬이었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레닌은 죽는 순간까지 그랬습니다.
그랬던 하나의 이유는 카우츠키가 레닌의 생각에 심대하게 영향을 미쳤거나, 어쨌든 그 생각에 권위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닌이 자기가 아는 모든 것과 생각한 모든 것을 카우츠키에게서 배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건 아니죠. 하지만 분명히 레닌은 카우츠키에 의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레닌 재발견>에서 논의했듯이, 카우츠키가 레닌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거나 정당성을 입증해 준 것 중 하나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가 무엇인지와 당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레닌이 한 번도 관점을 바꾼 적이 없고, 사실 훨씬 나중까지도 한 번도 논란의 대상이 된 적조차 없는 기본적 개념들이었죠.
카우츠키가 레닌에게 영향을 준 두 번째 방식은 제가 “엄밀한 의미의 볼셰비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엄밀한 의미의 볼셰비즘”은 다가오는 러시아 혁명에 대해 볼셰비즘이 갖고 있었던 시나리오, 농민 문제에 대한 그들의 관점, 그리고 급격한 진보를 향한 길을 닦을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그들의 헌신입니다. 그리고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여기서도 지도자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 <연속혁명의 증인들>에는 이 문제에 대해 카우츠키가 1906년에 쓴 “러시아 혁명의 동력과 그 전망”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 이 글을 정말 좋아했고 자신들의 관점도 이와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들은 레닌과 카우츠키의 관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가치있는 자료들입니다.
카우츠키가 레닌에게 영향을 준 세 번째 방식은, 아마 이게 제일 놀라울 텐데요, 심지어 1914년 이후에도 세계에 대한 레닌의 관점(애매한 의미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정세에 대한 관점을 뜻합니다)이 주로 카우츠키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카우츠키를 비난하고 있을 때도 레닌은 여전히 초기 카우츠키의 견해를 갖고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레닌은 “상호작용하는 세계 혁명의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 다른 곳의 민주주의 혁명, 민족해방 혁명들, 제국주의 전쟁 등 나중에 레닌이 작업했던 이 모든 요소들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카우츠키에게서 나왔습니다. 이건 레닌이 저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레닌 자신이 그렇게 썼어요. 그가 저에게 카우츠키의 어떤 책을 읽을지를 알려줬고, 저는 읽었고, 이 방대한 주제에 대해 레닌이 자기 생각을 어디서 얻었는지에 대해 그의 의견을 동의하게 됐습니다.
레닌이 카우츠키를 언급한 이 모든 글들을 보면서, 저는 제 다음 관심사를 만났습니다. 1917년 3월,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 대해 막 듣고 글을 몇 편 썼습니다. 그 유명한, ‘멀리서 보낸 편지’들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카우츠키의 글 한 편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걸 읽고 반응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카우츠키의 글에서 몇 줄을 가져온 짧은 글에서 의견을 전개했는데, 그가 인용한 구절이 매우 인상 깊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다.
제가 열심히 찾아 본 바에 따르면 이것이 레닌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전도 그 후도 아니고, 즉 ‘4월 테제’ 자체가 아니고 바로 이때 레닌이 혁신을 한 것입니다. 최소한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고, 카우츠키가 레닌 주장의 촉매 구실을 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촉매라고 제가 말한 것은 카우츠키의 견해가 정확히 레닌의 견해였다는 뜻이 아니라, 카우츠키가 말한 것이 레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했고 이런 종류의 시나리오를 제시하도록 이끌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이걸 연구하는 동안, 저는 3월과 4월, 그리고 4월 테제에 대한 이야기 전체, 갈팡질팡하거나 심지어 멘셰비키들과 행보를 같이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되는 ‘옛 볼셰비키’들의 이야기에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았고 임시정부가 집권한 상태를 내버려 두고 싶어 했는데 레닌이 돌아와서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으로 당을 무장시켰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임시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등등의 그런 이야기요.
지금 제 주요 관심사는 이 이야기를 뒤집는 것입니다. “볼셰비즘을 볼셰비키 혁명 속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죠.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의 목적을 위한 제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제가 이들의 평판을, 최소한 이들이 1917년 3월에 했던 일에 대한 평판을 바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옛 볼셰비키가 문제가 많았다는] 그 모든 이야기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은 한 가지의 이유는, 특히 스탈린을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싶은 이해할 만한 욕구 때문이에요.
1950년대의 트로츠키주의자들, 소련과 스탈린에 비판적인 사람들, 그리고 서구 학자들(그들 내부에 어떤 차이가 있든), 이들 모두에게는 공통적으로 이 이야기를 별로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동기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카메네프, 이 사람은 뭔가 무시되는데요. 아무도 카메네프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죠.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엄청난 함의를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을 살펴보고 다시 생각하는 중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이 힘든 장거리 여행 동안 저는 어떻게 보면 한 발자국씩 움직인 것이기 때문에 제 작업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저는 굉장히 운이 좋았습니다. 이런 쟁점들에 대해 신경을 쓰는 더 큰 커뮤니티에서 제 첫 레닌 책을 출판했으니까요. 저는 이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비판에 대해 답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비판에 동의할 수 없을 때에도 반응을 보이고, 좋은 답을 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그러면서 저 스스로가 정말 많이 배우니까요.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위 받고 나중에 프린스턴 대학으로 돌아가 박사학위 받기 전에 자칭 사회주의자이자 캘리포니아주 미연방 하원의원인 로날드 델룸스의 사무실에서 일하셨는데요. 델룸스는 마이클 헤링턴이 설립한 민주사회주의 조직위원회 (Democratic Socialist Organizing Committee; DSOC)의 이전 회원이었고 나중에는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DSA)의 부의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정치적 참여가 학문적 관심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나요? 본인의 정치를 어떻게 묘사하겠습니까? 그리고 선생님의 정치와 학문적 작업 사이에 관계가 혹시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좋은 질문인데 제가 좋은 답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네요. 왜냐하면 저도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종종 하거든요. Dellums 시기에는 현실 정치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도요. 제가 조직의 높은 사람이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작은 사무실이었습니다. 하지만 1970~71년부터 1977년까지 굉장히 극적인 시기였죠. 워터게이트, [베트남전] 종전, 일이 참 많았죠.
저 자신의 정치 … 음, 이것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20세기 초반의 일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너무 바빠서요. 그래서 저는 그냥 제 관점이 대략적으로 애매하게 좌파라고만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건 자동적으로 제가 어느 정도 당파적이지 않다는 뜻이고, 그게 모두를 위해 좋은 것 같거든요. 저는 학계에 한 발을 걸치고 활동가 커뮤니티에도 한 발을 걸치고 싶으니까 저한테도 좋고요.
학계와 저를 연결하는 것은 제가 러시아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볼셰비키들에 진짜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활동가들의 주요 관심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활동가들은 저로 하여금 공산주의 운동,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라는 더 큰 질문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저는 저 스스로를 상당히 넓혀야 했습니다. 특히 저는 유럽 사회민주주의, 유럽 사회주의,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에 대해 많이 배워야 했답니다.
<레닌 재발견>에서, 선생님께서는 “레닌의 관점은 당대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와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 운동은 오늘날 자칭 ‘레닌주의’ 그룹들과 어떻게 다른가요? 오늘날의 활동가들이 제2 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테크닉, 실천, 우리가 현실을 보는 방식 전체가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더 제2 인터내셔널에 가깝습니다. 이 연속성은 제가 <시위 문화(Demonstration Culture)>라는 책을 읽으면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케빈 J. 캘러한(Kevin J. Callahan)은 국제 당대회와 기타 매우 구체적인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지만, 대중이 집결하는 것 및 비슷한 것을 의미하는 시위라는 바로 그 단어가 이 시기에 나온 것임을, 그리고 사회주의적 좌파가 어느 정도 이 단어를 만들어 낸 것임을 밝힙니다.
당 신문, 탄원서, 시위, 플래카드, 배너 등 좌파가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적인 자기 인식에 의해 시도되고 근거를 제공받았습니다. 그 자기 인식은, 우리에게는 목표가 있고 해야 할 일은 여러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다 큰 이 목표와 연결하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저는 ‘공산주의 연구 국제 회보’의 다음 호에 실릴 캘러한 책 서평을 썼는데 거기서 더 자세하게 밝힐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제3 인터내셔널은 “시위 문화”를 보존하고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이 문화 전체가 그저 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식 사회민주당과 관련되는 한에서는 어느 정도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시위 문화와 관련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회민주주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더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확실히 제3 인터내셔널과 공산당들, 공산당 정권들은 그걸 존속시켰습니다.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과거를 알게 해 주고, 그 테크닉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원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잖아요.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소셜 미디어가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만, 제 느낌으로는 그냥 수정하는 데 그칠 것 같아요.
흥미롭네요. 왜냐하면 기존 서사에서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이 있거든요. 제3 인터내셔널은 어떤 점에서 스스로를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한 것으로 생각한 건가요? 왜냐하면 기존 서사에서 그 단절은 말씀하신 그런 과정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거든요. 즉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운동의 목표를 배신했다고 비판하며 자신들이 그 목표에 맞게 활동하고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기존 서사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나아가서 운동의 기본적인 목표를 다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음 … 일단 제3 인터내셔널의 사람들이 자신들과 제2 인터내셔널의 관계에 대해 말한 바와 실천한 바를 정확히 검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이야기가, 그들이 말한 바에 대한, 그들의 서사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그들의 서사에 대한 우리의 서사가,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가, 틀린 것 같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한 가지 이유가 카우츠키입니다. 이들 중 아무도 전쟁 이전의 카우츠키에 대한 존경심을 공개적으로 부정한 적 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자기들이 존경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 카우츠키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사실 더 큰 것들과 관련 있습니다.
몇 가지 사례들이 있습니다. 스탈린 전집 2권의 시작 부분에는 그가 쓴, 제가 앞서 언급한 카우츠키의 1906년 글을 옹호하는 글이 있습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 글이요. 글의 도입 부분에서 스탈린은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카우츠키를 ‘훌륭한 권위자’로, “뛰어난 이론가”, “전술적 문제에 대한 철저하고 사려 깊은 연구자”로 여기며, ‘러시아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매우 중요한 그런 사람으로 여긴다’ 라고요.
그는 스탈린 시대에 자신의 글 속에서 이것을 출판합니다. 카우츠키가 반역자였다고 말하는 편집자 주는 없습니다. 스탈린은 그가 카우츠키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당시의 볼셰비키가 어떤 의미에서는 카우츠키에게 승인받았다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카메네프도 마찬가지입니다. 1910년에 멘셰비키 지도자인 마르토프와의 논쟁에서 그는 “비판당하는 자의 자리에 카우츠키와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씁니다. 마르토프가 볼셰비키들과 카우츠키 양자를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카메네프는 1920년대 초반에 이 글을 출판하고 이것이 자랑스러워할 지점이라고 여전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제2 인터내셔널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우리가 칼 코르쉬나 죄르지 루카치가 만든 용어인 “제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은 볼셰비키들 자신들이 생각했던 바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볼셰비키들이 “제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냥 마르크스주의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전쟁[1차대전] 전의 사회민주주의가 있었고, 그 안에는 혁명적 진영과 수정주의 내지는 기회주의 진영, 또는 좌파 진영과 우파 진영, 또는 급진 진영과 온건 진영의 두 개의 진영이 있었습니다.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죠. 혁명적 진영은 스스로를 “전위의 전위”로 여겼고 저는 이 구절을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전위의 전위”로서의 사회민주주의의 혁명적 진영이라는 개념은 혁명가들이 전쟁 전에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들은 혁명이 오면 모두를 자기들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혁명가들이, 물론 매우 많은 의심을 하면서도 기회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영웅들은 쥘 게드, 칼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르 파르부스와 같은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국제적인 아이콘이었습니다.
1914년 이후, 혁명가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회주의적 부패가 얼마나 심하게 진행되었는지 깨닫지 못했었다. 기회주의자들이 이겼고, 우리는 기회주의자 쥐들이 있는 배를 버려야 한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제2 인터내셔널을 내부에서부터 부패한 것으로 여겨서 거부했지만, 그 전과 같은 범주, 같은 분석을 사용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다는 게 드러났지만,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 및 다른 이들과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SPD)에서 갈라져 나왔고, 전쟁에 반대한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만들었는데도 왜 레닌에 의해서 “배신자”로 지탄받은 것인가요?
글쎄요, 카우츠키와 이 서사에서 그의 이후의 운명은 이렇습니다. 1914년에 그는 배신자로, 스스로 자주 천명해 왔던 원칙들을 져버린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제가 아직 밝히지 않은 세 번째 견해인데요, 사회민주주의에서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도파에 대한 견해입니다. 이 견해를 얘기할 때는 주의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카우츠키가 시종일관 중도주의자였던 것처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제 생각에 기회주의자들과 혁명가들 사이의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한 1910년 즈음에서야 말이 되기 시작한 견해입니다. 이렇게 커지는 균열에 대해 두 가지 가능한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을 고쳐서 계속 같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닌의 분석에 따르면, 카우츠키는 이념적으로는 여전히 혁명가들의 편에 있었지만 기회주의자들과 같이 가고 싶어 했습니다. 레닌이 ‘카우츠키적 사고’(kautskianstvo)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그는 집요하게 ‘카우츠키적 사고’를 규탄했는데, 저는 이것을 단결을 위해 상황을 덮어 보고자 하는 장황한 말로 규정합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는, 카우츠키가 말하고 있었던 것 자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우츠키가 지금 쓰는 글이 아주 파괴적이라고 레닌이 생각했던 이유는 그 글들이 기회주의자들의 처지를 편하게 만들어 주려는 의도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레닌이 원했던 것은 깨끗한 단절, 새로운 인터내셔널이었고 기회주의자들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반역자로 여겼고 혁명가들은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없고 일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레닌이 “카우츠키적” 관점의 “계급 전체의” 당이라는 개념에 반대하여 “새로운 유형의 당”을 도입했다는, 오늘날 “레닌주의” 안에 존재하는 서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두 구절 모두 발명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카우츠키나 레닌은 제가 아는 한에선 그런 말을 쓴 적이 없습니다. 저는 레닌이 “새로운 유형의 당”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 그가 원했던 것은 오래된 유형의 당이지만 스스로 천명하는 기준에 정말로 부합하는, 정화된 당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것을 조금 읽어 보면 그런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최소한 저는 그랬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제2 인터내셔널을 원했던 것입니다. 제2 인터내셔널의 거부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오히려 그는 이상적인 제2 인터내셔널 혁명적 진영을 원했던 것입니다.
“계급 전체의 당”에 관해서라면, 저는 아직도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그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카우츠키는 아닙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아무도 “카우츠키가 어디서 그런 말을 하는지 보자”고는 하지 않으니까, 그냥 그렇게 시작된 거겠죠. 저는 “카우츠키는 계급 전체의 당을 지지했다”는 말을 누가 시작했는지 혹은 누가 처음 말했는지를 집어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건 1903~4년에 볼셰비키들과 멘셰비키들이, 즉 레닌과 마르토프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원 자격에 대해 논쟁할 때 나왔던 수사에서 왔을 겁니다. 제2차 당대회에서 이 토론을 합니다. 그들이 갈라졌던 문제들 중 하나였죠.
레닌과 마르토프가 각각 제안한 대안적 당규 두 가지는 굉장히 유사했는데, 레닌의 당규가 조직 회원을 합의된 대의에 헌신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더 제한을 많이 두는 것이었고, 한편 마르토프의 당규는 공감하는 사람들을 들일 수 있다는 쪽이었습니다. “계급 전체”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보다 느슨했던 것이죠.
그 시점에서 레닌은 마르토프의 당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우리는 아무나 다 받아들이는 당을 갖게 될 것이고, 우리의 메시지가 희석될 것이고, 우리는 전위가 되지 못할 것이고, 당신이 당 전체를 다 망칠 것이다, 기타 등등 이렇게요. 마르토프도 레닌한테 그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우리는 편협하고 음모적인 조직을 갖게 될 것이다’ 라고요.
저는 1907년쯤에 트로츠키가 쓴, 잘 모르는 외부인들에게 이런 종류의 사회민주당 내부의 논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그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여서 상대방의 관점의 불합리함을 보여 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트로츠키는 “[당 논쟁에서의] 그런 묘사를 누군가의 관점에 대한 정확한 진술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라고 말하면서 역사가들에게 굉장히 좋은 충고를 합니다.
어쨌든 간에, 카우츠키도 마르토프도, 그 어떤 사회민주당원도 당이 “계급 전체의” 당이어야 한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든 간에요. 언젠가 팜 빈이 이런 식으로 깔끔하게 말한 걸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RSDLP의 일상 활동은 오직 모든 종류의 계급투쟁을 지도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라고요. 사회민주주의 운동 밖의 노동계급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다른 일들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이 기초적인 사실은 당연히 다 알고 있었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는 자기들의 메시지가 있었고, 그들은 정말로 계급 전체가 결국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레닌도요. 그러니까 “새로운 유형의 당” vs “계급 전체의 당” 이런 식으로 프레임을 짜는 것은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차이들에 대해 논할 때 정말 유익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민주적 집중주의”라는 흥미로운 말에 대해서 글을 두 편 쓰셨는데요, 그 글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것 또한 오늘날에 진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적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로, 레닌은 그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필수적인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딱 두 번의, 특별하게 정의된 시기에만 그 말을 썼습니다. 한 번은 1905년 혁명 직후에 러시아에 어느 정도 제도적 자유가 도입됐을 때, 그 전이나 그 후 어느 때보다 더 자유로웠을 때였습니다.
다른 한 번은 1917년 혁명 이후 볼셰비키들이 집권하여 그런 문제들을 다뤄야 할 때였습니다. 제가 파악한 한에서 ‘민주적 집중주의’라는 용어는 오직 이 두 특정 시기에만 쓰였고, 서로 다른 시기마다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1905~7년에는 민주적 집중주의를 의미했고, 1917년 혁명 이후에는 민주적 집중주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가지 사실로부터, 이 말이 볼셰비즘에 대해 어떤 본질적인 것을 말해주는 말로는 쓰인 적이 없다고 추정합니다.
그 글을 쓰고 나서, 우연인지 아니면 제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문제를 정말로 확실히 해결할 두 개의 참고자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지노비예프가 1923년에 당내 민주주의가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한 것입니다. 그가 이걸 용어상 프레임화하는 방향은 “노동자 민주주의”(rabochaia demokratiia)가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러시아에서는 위에서 내리는 지시가 너무 많고 아래로부터의 자유로운 토론은 충분치 못해서 당내에 건강한 활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지노비예프에 따르면 지금 당장은 당이 “민주적 집중주의”의 원칙에 기반하여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많은 당원들의 낮은 교양 수준으로 인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민주적 집중주의”에 이렇게까지 의존해야 할 필요에 대해 오히려 유감스러워한 것처럼 보입니다.
저조차 이걸 보고 놀랐는데, 특히 민주적 집중주의를 이론으로서 만들어 내고 옹호했던 사람이 레닌이 아니라 지노비예프라고 이따금씩 이야기되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비록 그가 당분간은 이게 필수적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민주적 집중주의를 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볼셰비키들에게 민주적 집중주의는 볼셰비즘의 본질이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으며 강요된 타협이었습니다.
화제를 바꿔 보면, 러시아 혁명과 레닌 평전에 관한 작업 말고도, 선생님은 오페라와 멜로드라마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신화의 표상에 대해 연구하셨습니다. 2011년 책 <레닌>에서 레닌의 낭만주의와, 혁명이 레닌의 머릿속에서는 마치 오페라의 클라이맥스와 비슷한 무언가인 것처럼, 레닌이 노동계급을 혁명적 변혁의 영웅적 주체로, 즉 신화적이고 낭만적이라는 의미에서 “영웅적”인 주체로 본 것에 대해 강조하셨는데요. 이것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가능하면, 혁명에서의 이런 낭만주의와 영웅주의의 역할에 대해, 그리고 혁명적 낭만주의가 우리의 “포스트모던”한, 모순적이고 반낭만주의적인 문화에서 여전히 필요하거나 포착할 가치가 있을지에 대해서도요.
이 모든 것이 제 작업에서 하나로 엮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자료를 보고 서사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 말이 잘못 해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아무튼 저는 어떤 점에서는 이 혁명적 텍스트들을 사람들이 문학 텍스트를 대하듯이 대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패턴을 찾아보고, 서사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생각할 때 서사의 관점에서 생각을 하고 서사에 따라서 행동하니까요. 정치에서 핵심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서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 문학적 관심으로부터 오는 또 다른 것은 언어를 주의 깊게 보고, 사람들이 그 시간 속에서, 맥락 속에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살펴보고, 어휘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감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 “지루한 원문 분석”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진짜 빠져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사실 저는 자세히 읽기를 정말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뭔가 가치 있는 것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업을 레닌의 사례에서 했습니다. 이건 제 박사학위를 지도하신 로버트 터커(Rober Tucker) 교수님이 저를 잘 가르쳐 주신 것 같습니다. 그분이 레닌한테서 보이는 이런 낭만적인 관점을 강조하셨었거든요. 왜 사람들이 “레닌이 낭만주의자라고?”하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하는지 알 것 같아요. 왜냐하면 레닌의 글 어떤 것을 골라서 보든 그는 항상 화를 내고 있고, 분개하면서 논쟁 상대방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계속해서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고, 저렇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그는 계속 신경질을 내는 논객처럼 보이죠. 하지만 낭만주의를 찾아보면 찾을 수 있고, 일단 찾으면 그게 도처에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들을 그에게로 이끈 게 그것이었어요. 만약 그가 항상 심술궂은 논객이기만 했다면 사람들은 도망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그들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그에게는 분명 낭만적인 면, 영웅적 전망이 있었고 심지어 그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레닌에 대한 당대의 가장 통찰력 있던 비판자들은 그의 이 낭만적인 면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레닌이 그토록 파괴력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침 어제 제가, 볼셰비키였지만 1917년 초에 당을 떠난 블라디미르 보이틴스키(Wladimir Woytinsky)라는 사람의 글 하나를 읽었습니다. 막 돌아온 레닌에 대해 이야기하는 굉장히 인상적인 구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레닌은 지지자들의 비밀스러운 꿈을 파악하는 것을 해냈다. 그는 그들이 되고 싶어 하는 감정으로 다가갔다. 레닌 현상을 이해하려면,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제가 보기에 혁명적 텍스트들의 서사 구조에 대해 보다 정확한 유추라고 생각되는 것은 오페라보다는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입니다. 사실, 저는 <삶의 모방>이라는 제목의 러시아 멜로드라마에 대한 책 속에 실려서 출간된 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스탈린 시대를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주로 레닌 시대에 관심이 있지만,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도 쓴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연극을 살펴보았고, ‘공개 재판’, 철저히 말 그대로의 의미인 공개 재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재판들이 진행되던 시점의 <프라우다>를 보니까 정말 연극 대본처럼 읽히는 법정기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재판은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연극, 대본이 있는 연극이었던 것이죠. 만약 그것이 대본이 있는 연극이었다면, 그런 공개 재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할 문학적 도구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레닌과 멜로드라마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았습니다. 볼셰비키 ‘계몽’ 인민위원, 즉 다른 말로 하면 교육부 장관이었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멜로드라마에 대해 호의적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멜로드라마는 19세기에 굉장히 인기 있는 장르, 무대 장르였고 대중 관객들을 위해 정말로 기본적이었습니다. 제 생각엔 크룹스카야의 회고록에 레닌이 파리에서 멜로드라마를 보러 가는 것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좋아했고 그것이 정치적 내용인 것 또한 좋아했습니다(제가 기억하기에는 아마 누명을 쓴 어떤 선원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고 질문에서 현대에 대한 부분은 어떨까요?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시대를 돌아볼 때, 대중 운동, 정말 살아 있는 마르크스주의 대중운동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시대를 돌아볼 때, 살아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세계사적 사명감, 프롤레타리아트가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은유는 여러 번 반복되었고, 이 집단의 사람들이 세계를 최종 목표로 이끌고 갈 것이라는 은유죠. 그러니까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날에, 심지어 좌파들 사이에서도 이런 세계사적 사명감이 살아 있나요? 이것을 여쭤보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집단에 사명이 있다는 진지한 느낌과 그것이 정말 일어날 거라는 진짜 느낌이 있나요?
이것이 좌파가 계급 분석과 모든 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라는, 매우 유용한 목욕물은 그대로 두고, 내버린 아기입니다. 목욕물은 훌륭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는 죽었거나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좌파가 과거처럼 뭔가를 하려면 이런 세계사적 사명감이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만들어 낼 방법이 있을까요? 만약 이에 대한 믿음이 정말로 있는 게 아니면,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그것을 믿게 할 수 없고,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할 수 없죠.
이것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종합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통합 공식”이라고 부르고, <레닌 재발견>에서 이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당장의 개량을 목표로 하는 시위 행동과 더 큰 목표와 종착점의 결합이라는 것이죠. 이 결합은 좋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볼셰비즘, 전쟁 이전 볼셰비즘에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들을 지도하는 것이 좋을지의 여부를 논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들은 “그건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지도력은 기정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낙관주의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이건 오늘날 종종 진정한 낙관주의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어쨌든 이런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라는 종합이라는 전제는 무너지고 있었고, 더 불가지론적으로 말하자면 1905년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과 전쟁과 기타 등등으로 압박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대개 우리는 이런 퇴보를 일련의 배신, 오류, 그리고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그런 결합이 그냥 없었던 것이고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보면, 이건 일종의 불가피한 것이 됩니다. 다음과 같이 보는 게 더 유용합니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사이에 분열이 있다고요.
전쟁 이후의 사회민주주의자들, 우리가 지금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사이의 결합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방식으로 이 긴장에 대응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통합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고요. 그들은 노동운동 그 자체나 사회주의 그 자체 중 어느 하나만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종합은 여전히 목표였습니다. 당장의 임무와 더 큰 궁극적 임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이런 믿음은 마치 서서히 바람이 빠져 가는 타이어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그 믿음이 없어진 것이죠. 이게 바로 제가 소련 공산주의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냥 어느 날 일어나 보니까 믿음의 마지막 작은 조각조차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열정과 상상력이 존재하는데, 그러면 그 종합을 다시 얻어낼 수 있을까요? 그것이 과제입니다. 그 사람들이 강력했던 것은 그냥 “나는 이것을 믿고 싶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들은 그것을 진짜 믿었고,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할 만한 사실들을 현장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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