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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어떤 공식의 운명: ‘민주' 집중주의에서 민주 '집중주의’로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3. 21.

역사학자인 라스 리(Lars T. Lih)가 볼셰비키와 민주집중주의에 대한 기존 통설을 재검토하며 신화 해체를 시도한다.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레닌주의에 대한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레닌의 재발견: 맥락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책을 썼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s://johnriddell.wordpress.com/2013/04/14/fortunes-of-a-formula-from-democratic-centralism-to-democratic-centralism/


블라디미르 네프스키(1876~1937)(1920년대에 쓰인 자서전적 스케치의 구절을 빌려오면) “보통의 당 활동가로서 볼셰비키 지하운동에서의 전업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1897년에 당에 가입한 그는 1917년에 군대에서 당 업무를 수행하면서 두드러진 중간 수준의 볼셰비키 활동가였다. 같은 세대의 아주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30년대 중반에 체포되었고 1937년 처형당했다.

 

네프스키는 혁명 이후, 선구적 당 역사학자가 됐었고 1925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작에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짧은 에세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겸손한 부제에도 불구하고, 이 두꺼운 500페이지짜리 연구는 모든 범위의 원자료에 기초해 온전하게 기록된 최초의 볼셰비키 당사이다


반면 앞서 나온 지노비예프의 <볼셰비키 당사>(1923)는 꼼꼼한 역사학적 작업이기보다는 지도적 활동가의 수필 겸 회고록에 가까웠다. 네프스키의 역사서는 진지한 역사적 해석에 가장 유리하던 짧은 기회의 시기에 나타났다: 혁명 이후 원자료가 모이고 견해들이 펼쳐질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아직 스탈린주의 정통파학설이 그 자체의 서사를 강요하기는 전이었기 때문이다.

 

네프스키의 역사서는 최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신프로메테우스(New Prometheus)출판사(2009)에서 훌륭한 새로운 판으로 재출간되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우리는 볼셰비키 역사의 다양한 논점들에 대한 예상치 못했던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 하나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문구의 의미와 위상에 대한 것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적겠지만, 네프스키의 논의는 이 개념이 볼셰비키 지하운동에서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한 최고의 원자료 중 하나다. 네프스키의 역사서에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주요 주제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그 논점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두 가지 논의밖에 없다. 나는 관련된 대목들을 번역하여 이 글에 대한 별첨문서로 첨부하였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구절은 1905년 혁명이 차르에게 강요했던 양보조치들로 인해 등장했다. 사람들을 들뜨게 하며 2년 정도 더 부분적으로 지속되었고 자유의 시기가 시작되었을 때인 1905년 말부터 당의 어휘 목록에 등장했다


새로운 정치적 자유의 분위기와 그에 따라 찾아온, 숨 막히는 지하를 떠날 기회는 사회민주당의 두 분파들로 하여금 공개 활동에 더 적합한 방식으로 당 조직들을 재구조화할뿐 아니라 당의 재통합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할 수밖에 없게 했다. 멘셰비키들이 먼저 11월에 페트로그라드 협의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에서 이 필요성을 표현했다. 해당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강력히 주장했다:

 

RSDWP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

 

모든 당원들은 당 기구의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

 

모든 당 기구들은 [구체적인] 기간 동안 선출되고, 주기적으로 그리고 그들을 선출한 조직들의 요구가 있을 때는 언제든, 소환당할 수 있으며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지도적인 집단적 결정은 그 집단이 기관인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구속력이 있다. [그 다음에는 안건이 미리 배부되어야 한다는 것 등 민주적 실천을 보장하기 위한 보다 작은 조치들이 나온다.]

 

캐나다인 역사가 카터 엘우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아마도 [190511월의] 멘셰비키 결의안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관한 것이다. 주로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 함축된 레닌의 조직적 원칙과 연관된 당 조직론에 대한 레닌의 주요한 기여로 여겨지는 이 용어는 사실 레닌 그 스스로에 의해서도, 볼셰비키 자신의 결의안에서도 이 [멘셰비키의] 협의회 전에는 쓰인 적이 없다.”

 

얼마 후 곧, 탐메르포르스(핀란드의 마을)에서의 볼셰비키 활동가들의 협의회에서도 비슷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임을 인식하며, 이 협의회는 선거 원칙의 광범위한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선출된 지도부에게 이념적 그리고 실천적 지도력의 문제에서 완전한 권한을 부여한다. 한편, 지도부는 소환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의 행동은 광범위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그들은 이런 행동들에 대해 엄격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

 

이 협의회는 신속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의 지역 조직들을 선거 원칙에 따라 재조직할 것을 모든 당 조직들에게 지시한다. 지금 당장은 선거 기구들의 모든 체계를 완전히 동일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완전한 민주적 절차에서의 이탈(간접선거 등)은 오직 극복할 수 없는 실천적 장애물이 있을 경우에만 허용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오늘날에 이 유명한 용어에서 강조점은 명백히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있다. 반면 결의안 두 개와 심지어 네프스키의 해설까지 보아도, 그 용어를 사용한 볼셰비키 활동가들에게 이 문구의 강조점은 명백히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이전 영향력 있는 페테르부르크 당 조직의 모든 수준에서 선거의 중심적 역할을 묘사한 후, 더 나아가 네프스키는 그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조직의 의지에 반하여 지도부 자리의 동지들을 교체하거나 임명하는 일은 이 시기 동안 조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기본 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거의 항상, 우리 조직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권위 있는 회원은 완전히 평범한 당 활동가로서 지역에 들어갔고, 오직 서서히, 다수 [회원]의 신뢰를 얻으면서, 평회원에서 책임있는 지도부 자리로 올라갔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이런 정의는 이것이 오직 특정 조건에서만, 즉 비교적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고 당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아마도 네프스키 논평의 가장 놀라우면서 흥미로운 점은, 진정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가 이루어졌던 시기를 그가 연대상으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에 있다.

 

이 시점부터, 2년이 넘는 기간 동안(1908년에 우울한 반동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당은 완전한 민주주의에 따라 움직였다. 심지어 경찰기구의 압력이 극도록 강했던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도, 심지어 1906~7년에도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은 신속하게 이해되어서 엄격하고 철저하게 준수되었다. ...

 

이어진 반동의 시기[1908년 이후]는 다시 우리 조직을 오랫동안 지하로 몰아넣었고, 오직 1917년과 1918년 초의 잠시 동안만 우리 당은 [다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에 맞게 존재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맞게, 네프스키의 역사서는 1917년 차르 몰락 때까지 이 논제를 다시 꺼내지 않는다. 그 다음에 그는 당이 지하로부터 올라와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의 조건 하에서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이 곧바로 시행되었고 가장 엄격한 선거 원칙이 효력을 발휘했다고 단언한다. 1906~7년에 그랬던 것처럼, 1917년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핵심 특징은 자유로운 토론, 의견의 활발한 교환, 지역적 이슈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국 이슈에 대한 숙고였다. (관련된 대목들 전체를 실어 놓은 아래 별첨 문서를 참고하라.)

 

네프스키의 논의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를 볼셰비즘의 고유한 혹은 본질적인 특징으로 여기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 용어를 처음 도입한 것은 멘셰비키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네프스키가 언급하듯이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정치적 자유의 불안정한 상태를 재빨리 이용해 그들의 조직을 민주화했다. 다른 한편,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볼셰비키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별 관련이 없었다. 우리는, 진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볼셰비키가 억압받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을 억압하지도 않았던 그 짧은 막간들 동안에만 가능했다는 네프스키의 주장을 되풀이할 수 있다. 

 

레닌과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레닌이 1905년 말 탐메르포르스 협의회 전에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용어를 전혀 쓴 적이 없다는 엘우드의 논평에 호기심이 생겨서, 나는 그 날짜 이후 그의 글에 그 유명한 문구가 나올 때마다 정확한 위치를 각각 찾아보려 했다. 나는 레닌 전집 제5판에서 소비에트 편집자들이 제공한, 대체로 믿을만한 색인에 의존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어떤 용어를 언제 사용하지 않는지에 대해 일반화하는 것은 항상 약간 까다로운 법이다. 누군가가 어떤 반대 사례를 가져오더라도 나는 감사할 것이다.


내가 찾아본 것의 결과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레닌은 두 번의 엄격하게 제한된 기간에만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06~1907년과 1920~1921년이었다. 이 두 지점들에 대해, 나는 정확히 하나씩의 사례(아래에 개괄된 특이하고 흥미로운 맥락에서)를 찾았다


두 기간들 각각에서, 레닌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가 반대한 그룹들 때문이었다: 1906~7년에는 멘셰비키들에 대해서였고, 1920년에는 오신스키(N. Osinsky) 등이 이끄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그룹에 대해서였다. 그 어떤 시기에도 그 용어의 의미에 대한 체계적 설명은 찾을 수 없다. 레닌은 특정한 주장을 하기 위해 지나가듯이 그 용어를 사용할 뿐이다.

 

더 놀라운 것은, 1906~1907년에 사용된 이 용어의 의미와 1920~1921년에 사용된 의미 사이에 거의 아무 연관성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강조점이 다른 것 이상의 문제이다. 두 시기에 그 용어는 그저 서로 다른 것을 뜻했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구절은 항상 실제로 작용하는 부분과 수식하는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1906~1907년에, 작용하는 부분은 민주적이었고 당내 선거, 아래로부터 통제, 기타 등등을 의미했다. 1920~1021년에, 작용하는 부분은 중심주의였고 집권 정당으로서 요구되는 단일한 정책들을 주로 의미했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본질적으로 동음이의어인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문구이다.

 

 

1906~1907년의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19064월 스톡홀름 통합 당대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에 그 용어가 소개되고 나서 1906~1907년에, 레닌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네프스키의 당 역사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부여했다: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선거를 통한 당 지도자들의 선출, 열려 있고 활기찬 논의, 선출된 관료들의 교체 가능성 등.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사치가 되었다. 만약 이 말이 너무 심하다면, 사회 전체가 그나마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특정 시기에만 가능했던 무언가라고 할 수 있다.

 

엘우드가 지적한 대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오늘날 종종 레닌의 1902년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와 연관된다. 이렇게 연관시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아이러니하다. 그 책에는 이 용어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약 그 용어를 사용했다면 레닌의 주장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지하활동 조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책에서, 완전한 선거 절차가 지하 조직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거나 지하 활동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거나, 혹은 둘 다라고 주장했다. 이스크라 편집위원회에 있는 최초의 멘셰비키들도 이것을 반박하지 않았다.

 

많은 저자들, 특히 좌파진영에 있는 이들은 레닌이 1905년에 당내 민주적 절차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레닌은 한 번도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 바뀐 것은 사회 전체적인 정치 제도였다. 레닌의 관점은 일관된 것이었다: ‘진정한 당내 민주주의는 가능할 경우에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는 못하는 것이다.’

 

비록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의미가 레닌과 네프스키에게 상당히 비슷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보여준 태도는 상이한 것으로서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레닌은 심지어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를 지지할 때에도 그 러시아 기반 활동가[네프스키]가 보여준 감정적 투여, 자긍심과 열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레닌은 비록 그것이 가능한 조건에서는 선거 절차를 지지하긴 했지만, 1905년 혁명 이전 시기에 정말로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것은 중앙집중주의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엄혹한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조직적 응집력을 유지하려고 분투하던 지하정당의 맥락에서 중앙집중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지 되새겨 보아야 한다. 지하활동 시기 레닌에게 전형적인 쟁점은 당 중앙이 얼마나 강력해야 하는지, 지역기구들과 당 중앙의 정확한 관계 같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기초적·실존적인 문제였다. 당이 기능할 수 있을 것인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중앙 제도들을 가져야 하는지 아닌지 그 자체였다.

 

1902~1903년은 당이 아직 아무런 공식적인 중앙 기구도 만들어내지 못하던 때였다(<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계획을 제시했고 널리 지지를 받았다). 다른 한편, 1910~1912년은 분파적 갈등 속에서 그 어떤 중앙위원회의 존속에도 문제가 생기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반대는, 내가 수공업적 한계라고 번역하는, 그리고 서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지역 당 조직들을 주로 지칭하는, 가내수공업적 사고’(kustarnichestvo)였던 것이다. ‘가내수공업적 사고는 지하정당의 자연발생적인 평형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레닌은 또한 단순히 소수가 다수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 중앙집중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그는 1903~1904, 그리고 1912~1914년처럼 자신이 다수를 대표한다고 느꼈을 때 이 점에 대해 훨씬 더 고집스러웠다.

 

 

규칙을 확증해 주는 예외: 1915년의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191511, 레닌은 사회주의선전연맹’(Socialist Propaganda League)이라는 미국 그룹이 발행한 리플릿에 대해 직접 영어로 써서 답변했다. 이 그룹은 치머발트 운동의 반전 노선을 지지했으며 새로운, 기회주의적이지 않은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당연히 레닌은 열의를 갖고 반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폐단에 대해 과도하게 반응한 것으로 느껴지는, 사회주의 선전 연맹의 특정한 입장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짧은 글은 그래서 1920년에 그가 좌익 공산주의에 맞서서 쓴 보다 긴 논쟁 글에 대한 예비적 개요이다. 또한 내가 1907년과 1920년 사이에서 발견했던 단 한 번의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용어 사용도 여기에 들어 있다.

 

레닌은 먼저 우리는 절대 우리 신문에서 이른바 당장의 요구들이 너무 강조되어서 그것 때문에 사회주의가 희석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 다음 그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논제로 옮겨가서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규범이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명확히 했다.

 

우리 신문에서 우리는 언제나 당내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당의 중앙집중화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찬성한다. 우리는 독일 노동운동의 중앙집중화는 운동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고 장점이라고 말한다. 현 독일 사회민주당의 결함은 중앙집중화에 있는 게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이 전쟁 당시의 배신 행위를 하고 나서도 득세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레닌은 당내에서의 조율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에 대한 당의 지도력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중앙집중주의를 사용했다. 다음 대목은 내가 다른 곳에서 당과 계급 지도력에 대한 레닌의 영웅적 시나리오라고 부른 것의 또다른 사례이다.

 

만약 어떤 위기에서든 소규모 집단(예를 들어 우리 중앙위원회가 소규모 집단이다)이 강력한 대중을 혁명적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활동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이 당장 행동할 수 없는 상황인 모든 위기에서, 대중은 당 중앙의 소규모 집단에 의해 도움을 받는 것을 필요로 한다. 19149월 이 전쟁이 시작될 때쯤의 우리 중앙위원회는 대중이 방어 전쟁이라는 거짓말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기회주의자들 그리고 자칭 사회주의자인 배외주의자들”(방어 전쟁에 찬성하는 사회주의자들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과 단절하도록 이끌었다. 우리는 우리 중앙위원회의 이러한 중앙집중적 조치가 유익했고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1920~1921: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1915년의 이 논의가 1907년부터 1920년까지 레닌의 글에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를 발견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사례이다. 이어서 19203~4월 제9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스스로를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자’(Democratic Centralists)로 칭한 당내 반대파의 비판에 답하기 위해 다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그룹은 다양한 기구들에 대한 ‘1인 지도와 반대되는 동지적 지도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레닌은 이런 종류의 집단적 지도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아니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오히려 이 용어는 당의 기층 평당원들이 상위기구들을 선택하고, 그러면 상위기구들은 자기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집행할 수 있음을 뜻했다. 특히 당 대회를 통해 중앙위원회의 활동을 검증하고, 중앙위원회를 갈아치워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세우는 것을 뜻했다. 용어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혁명 이전과 그리 멀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공방 이후에 어떤 의미로든 민주적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중앙집중주의에만 독점적인 강조점이 놓였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한 사례는 그 유명한, 1920년 여름에 발표된 코민테른 가입 승인을 위한 “21개 조건에서의 한 문단이다(강조는 원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속하는 당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에 기반하여 건설되어야 한다.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는 현 정세에서 공산당은 가능한 한 중앙집중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어야만, 거의 군대의 규율과 같은 철의 규율이 그 안에서 승리해야만, 그리고 당 중앙이 광범위한 권력을 행사하는 위엄 있고[vlastnyi] 권위 있는 기관이어야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대목이 레닌 전집에 실려 있긴 하지만, 이는 십중팔구 그레고리 지노비예프가 초안을 썼을 것이다. 내 귀에는 더 이 글이 지노비예프의 글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확히 누가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레닌은 이것을 완전히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종류의 민주적 절차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으며 독점적인 강조점은 중앙집중주의에 있다


하지만 명백히, -군대 같은 규율에 대한 이 강력한 주장은 명시적으로 특정한 맥락 즉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는 현 정세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코민테른의 글에 나오는 엄격한 중앙집중주의는 지하활동 시기의 보다 기초적이고 존재 차원의 중앙집중주의와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이다.

 

1920년 여름 이후, 레닌은 집권 정당으로 활동하면서 새롭고 예상치 못한 과제들에 직면하여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다양한 토론과 논쟁에서 이 용어를 썼다. 당은 노동조합과 같은 당이 아닌공간에 개입할 때는 단일한 노선을 옹호해야 하지 않는가? 당에는 온 나라 전체에 걸쳐 단일한 정책들이 집행되도록 확실히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기타 등등.

 

1921년 봄 제10차 당대회에서 통과된 분파 금지결의안은 이러한 많은 염려들을 잘 요약한 것이다. 그 결의안에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단어는 최초의 한 분파 그룹의 이름으로만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의안은 의심의 여지없이 당의 중앙집중주의의 현재 의미를 집약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을 당에서 추방할 권리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꼭 그만큼 명시적이었고 네프스키에 의해 전개된, 지역 기구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혁명 이전의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로부터 한 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온 것이다.

 

이같은 자료 검토의 결과로서, 나는 레닌이 볼셰비즘에 고유하거나 본질적인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특정한 조직 철학을 가졌다는 일반적인 추정이 일종의 신화라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혁명 이전 시기에 그 용어는, 한 덩어리로 뭉쳐있고 분파가 없는 (지노비예프에 따르면) “하나의 틀에서 빚어진”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전망과 관련된 적이 전혀 없다.


혁명 이후 시기에, 볼셰비키들은 러시아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 새롭고 완전히 전례 없는 과제에 직면했기에 실제로 새로운 유형의 당이 되었다. 내 생각에 코민테른 가입 정책에 의해 의무화되었던 준군사적인 규율은 권력 장악 이전까지는 바람직하지도 않았고, 필요도 없었고, 불가능했던 반면 그 이후에는 바람직하고, 필요하고, 가능한 것, 그리고 정말로 거의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레닌 사후의 신화화

 

더 큰 신화는, 모종의 방식으로 영원한 조직적 딜레마인 응집력과 단결 vs 자발적인 열의와 자율성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마술 같은 공식과 만능키의 존재이다. 이런 생각은 흥미를 끄는 역사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언제 그리고 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마치 그런 마술 같은 공식으로서 바이블로 승인을 받았던 것일까? 내가 이 질문에 답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기준점들에 주목해 볼 수는 있다.

 

1923년에 출판된 지노비예프의 당사는 멘셰비키들이 지하활동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과장했다는 주장 이외에는 이 문구나 근저에 깔려 있는 쟁점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 스탈린이 쓴, 1924년에 출판된 <레닌주의의 기초> 역시 그 문구를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 스탈린은 위에 인용된 1920년 코민테른 결의안을 인용할 때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를 언급하는 도입부 문장을 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의 기초>는 변화하는 당의 규범에 대해 꽤 좋은 안내를 해 준다.

 

1925년에 출판된 네프스키의 당사는 그 용어가 혁명 이전의 볼셰비즘에서 실제로 쓰인 방식뿐만 아니라 신화화된 공식으로서의 그 용어의 새로운 위상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무엇을 할 것인가>와 초기 이스크라 시기(1901~1903)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네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강조는 인용자).

 

이런 식으로 오늘날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이름으로 알려진 것, 다시 말해 각 조직의 모든 회원들의 최대한의 자유가, 모두가 기꺼이 인정하는 단일한 중앙의 단일한 의지와 공존하고 그 지침은 가장 엄격하게 집행되는 혁명적 조직의 한 유형을 위한 초석이 놓였다. (224)

 

완벽한 의지의 단합과 함께하는 완벽한 개인의 자율성! 이런 것은 아마 하늘의 천사들에게는 가능하겠지만 이 먼지투성이 지상에 살며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들에게는 아닐 것이다. 바이블로 승인된 공식에 대해 네프스키가 보여주는 불편함은 내가 강조한 단어들에서 나타난다.


실제로 네프스키는 같은 논의에서 이 시기에 선거와 관련된 당 민주주의가 무책임했고 파괴적이었음을 명시적으로 말한다. 어쨌든, 모든 맥락에서 모든 조직적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마술 같은 공식에 대한 이런 언급은 네프스키 스스로가 이 책의 후반부에서 기록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의미와 확실히 동떨어져 있다.

 

 

판단 근거로서의 네프스키

 

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블라디미르 네프스키의 논의가, 혁명 이전 볼셰비즘에서 그 용어가 실제로 의미한 바에 대한 역사적으로 정확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져야하는지를 자세히 이야기하며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먼저 네프스키는 한 옛날 코미디 쇼의 캐치프레이즈인 너 거기 있어봤니?”라는 물음에 분명하게 긍정으로 답할 수 있다. 러시아에 기반을 둔 지하 볼셰비키 활동가의 삶을 그만큼 충실히 산 사람은 거의 없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가들이 아직은 진실을 말할 수 있었던 짧은 기회의 시기(혹은 아마도 좀 더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들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던 시기)에 당사를 썼다.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해 속이기 어려운, 상황을 대단히 잘 아는 독자를 대상으로 쓰고 있었다. 또한 네프스키의 논평들은 전혀 논쟁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한 해석을 옹호하고 다른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이 민주적 집중주의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망명해 있던 이론가로서 레닌이 혁명 이전 시기에 이 용어를 사용한 방식도 지하 활동가 네프스키가 보여준 의미와 대략적으로 일치한다. 특히 레닌이 지하 조직에는 그 용어를 한 번도 적용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혁명 이전의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공식은 지하정당에는 적용이 그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비교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존재했던 그 짧은 시기 동안에만 존재했다. 혁명 이후의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공식은 오직 치열한 내전과 국가의 기능을 떠맡은 당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비교적 정치적 자유가 존재하며, 반면 내전이 막 시작되려고 하거나 당-국가가 존재하는 상황 속에 살고 있지는 않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표제로 오늘날 정당화되는 실천들이 블라디미르 네프스키가 묘사한 그 용어의 역사적 의미와 닮은 점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자 한다.

 

 

별첨: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블라디미르 네프스키의 논평

 

1. 이 결의안[190512월 볼셰비키 탐메르포르스 협의회에서 통과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결의안]은 우리 당의 역사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심지어 통합 당대회 이전에도 볼셰비키들(과 멘셰비키들)은 민주적 원칙에 기반하여 그들의 조직을 재구조화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부터, 2년이 넘는 기간 동안(1908년에 우울한 반동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당은 완전한 민주주의에 따라 활동했다. 심지어 경찰기구의 압력이 극도록 강했던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도, 심지어 1906~1907년에도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은 신속하게 이해되어서 엄격하고 철저하게 준수되었다.

 

[페테르부르크] 조직은 지하로부터 올라오면서 완전히 재구조화되었다. 소관구(小管區), 지역과 도시 위원회들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지역 조직의 모든 회원들은 일반 도시 협의회를 선출했고, 동시에 그런 선거 기간 동안에 우리 조직의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역시도 선출되었다. 이런 식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일반 도시 협의회는 페테르부르크 사회민주당의 가장 높은 입법 기관이었다. 협의회들 사이의 집행 기관은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였고, 이는 매일 지속되는 일상사업을 위해 그 자체의 당원중에서 아주 소규모의(3~5) 집행위원단을 선출했다. 가장 온전한 민주주의 제도, 지휘하는 중앙의 큰 위신과 가장 자유로운 의견 표명의 자유가 이런 방법들을 통해 성취되었다.

 

조직의 의지에 반하여 지도부 자리의 동지들을 교체하거나 임명하는 일은 이 시기 동안 조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기본 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거의 항상, 우리 조직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권위 있는 회원은 완전히 평범한 당 활동가로서 지역에 들어갔고, 오직 서서히, 다수 [회원]의 신뢰를 얻으면서, 평회원에서 책임있는 지도부 자리로 올라갔다. 오로지 이런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들을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볼셰비키 조직은 런던 당 대회에서 스스로를 보주며 조직 노동자들의 압도적 다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어진 반동의 시기[1908년 이후]는 다시 우리 조직을 오랫동안 지하로 몰아넣었고, 오직 1917년과 1918년 초의 잠시 동안만 우리 당은 [다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에 맞게 존재하는 데 성공했다. 명백히, 페테르부르크의 사례를 따라, 당의 다른 조직에서도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은 신속하게 실현되었다.

 

-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짧은 에세이)> 355~356.


 

2. [19172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조직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조직으로 온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 당이 지하로부터 올라와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의 조건 하에서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원칙이 곧바로 시행되었고 가장 엄격한 선거 원칙이 효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4월에 도시 협의회에서 채택된 RSDWP 페트로그라드 조직의 당규 5절은 당의 기초 지역 기관은 지역 위원회라고 규정했고,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위원들은 지역 회원들에 의해 선출됐다(8). 유사한 원칙이 모스크바 조직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당 조직은 어디서든 같은 기본적인 사상 위에 건설되었다.

 

자유로운 토론, 의견의 활발한 교환, 지역적 이슈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국 이슈에 대한 숙고, 현재 쟁점들에 대해 흔치 않게 활기찬 관심, 이런 쟁점들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참여, 집행에 있어서 그 어떤 관료적 태도도 없는 것,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조직의 일에 대한, 전 회원들의 철저하고 활발한 참여가 우리의 세포조직들과 위원회들의 독특한 특징들이었다.

 

-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짧은 에세이)> 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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