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당을 건설하는 것인가 망치는 것인가



이 글은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전기 <당 건설을 향하여>에 대한 날카롭고 논쟁적인 비판글이다. <당 건설을 향하여>가 워낙 강렬하고 영향력있는 책이었기에, 그 책을 인상적으로 봤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글이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가차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정신을 떠올려 볼 때, 이런 돌아보기와 비판은 의미없지 않을 것이다. 신성불가침한 정해진 답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이 누구이고 무엇이든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이 글이 기존의 생각을 다시 의심해 보고, 더 깊은 고민과 활발한 토론을 하는 데 건강한 자극이 되길 기대한다.

이 글의 필자인 팜 빈(Pham Binh)은 미국의 국제사회주의자 조직(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의 멤버였었고, 2011년 시작된 월가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에서도 적극 활동한 바 있다. 이 글을 번역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꼼꼼히 교정을 봐 준 남수경 동지에게도 감사하다. 

 

출처: http://links.org.au/node/2710

 

 

1975년에 출간된, 토니 클리프의 <레닌: 당 건설을 향하여>는 레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쓴 단행본 길이의 정치적 평전으로서는 최초였다. 그 결과 이 책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미국 국제사회주의 조직(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 같은 그룹에 있는 수천 명의 사회주의자들, <레닌과 혁명정당>의 저자이자 미국 SWP (클리프 그룹과는 관계가 없음)의 전 멤버였던 폴 르블랑 같은 이들의 생각뿐만 아니라 라스 리(Lars T. Lih)와 같은 학자들의 그 뒤를 잇는 연구의 접근방식 틀을 만들어 주었다.

 

클리프는 “[레닌에게] 초인간적 자질들을 부여한공식적인 소련의 종교화된 레닌 숭배를 비판하면서 평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막상 책 속에서 클리프는 내내 레닌의 그러한 초인간적 자질들을 언급한다:

 

레닌은 공장에서의 선동의 필요성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레닌은] 이론과 실천을 완벽한 수준으로 결합시켰다.

 

만약 이렇게 지나가듯이 하는 논평들이 클리프의 책이 가진 주요 결점이라면, 그의 책은 여전히 정치적 및 역사적 교훈으로 가득 찬 유용한 읽을거리 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않다클리프의 오류와 왜곡은 레닌의 1890년대 중반의 정치활동에서부터 시작된다. 클리프에 따르면:

 

<선동론>[크레머 (Ardadii Kremer)와 마르토프 (Martov)가 같이 쓴 팜플렛]단계론에 기초해 공장에서의 투쟁, 고용주들에 대한 투쟁과 차리즘에 대한 정치적 투쟁 사이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레닌의] 공식 전기 작가들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진실은 1894~96년에 [레닌은] <선동론>을 편향적이고, 기계적이고, “경제주의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았다. 당시 그가 썼던 글들은 <선동론>에 나온 노선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 시기 레닌의 글이 <선동론>에 나온 주장과 정확히 일치함을 보여주기 위해, 클리프는 레닌의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강령 초안과 우리의 장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을 인용한다. 그리고 레닌은 편의상 차르를 논의 대상에서 치워 버리고, 대신에 고용주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법과 노동계급적인 내각 장관들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했다고 주장한다.

 

클리프는 <당 건설을 향하여>에서 나중에 부분적 개혁과 차리즘의 혁명적 전복 사이의 직접적 관련성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노동자들을 속이는 것이요, 자유주의로 빠지는 것이다라고 서술한다. 그러면 레닌은 그의 이러한 초창기 활동에서 자유주의로 빠졌던 것인가?

 

위의 두 글 중 하나라도 읽어 본 사람은 레닌의 관점이 <선동론>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강령 초안도 클리프가 인용하는 글도 기계적이거나, 편향적이거나, 단계론적이거나, 혹은 경제주의적이지 않다. “우리의 장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서 레닌은 편의상 짜르를 논의 대상에서 치워 버리고 대신에 고용주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법과 노동계급적인 내각 장관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하지 않았으며, 자유주의로 빠지지도 않았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부정확하게 레닌의 관점을 설명하는 것은 <당 건설을 향하여> 전체에 걸쳐 발견된다.

 

막대 구부리기

 

클리프는 레닌이 막대 구부리기를 즐겨 사용한 것이 그의 전 생애 동안 지속된 특징이었다고 주장하며 2장을 끝맺는다.

 

[레닌은] 필수적인 것을 간단하고, 강력하고, 가장 외골수처럼, 일격을 가하는 듯한 선언으로 계속 되풀이하여 강조하면서 항상 당대의 과업을 상당히 명확하게 규정했다. 그런 후에, 그는 다시 균형을 찾아 막대를 펴고, 그런 다음에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다시 구부리고는 했다.

 

책 전반에 걸쳐 클리프는 레닌의 막대 구부리기, 클리프에 의하면, 레닌이 어느 날에는 고의적으로 그리고 일면적으로 하나를 과도하게 강조한 후 다음에 상황이 달라지면 그와 반대되는 것을 또 그렇게 강조했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막대 구부리기가 정말 레닌의 정치적 방법론이었다면, 이는 그의 저작들 중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된다. 각각의 모든 글이 일면적인 과도한 강조와 왜곡을 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법론은 또한 레닌의 지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정직함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만약 레닌의 주장이 늘 어떤 식으로든 과장되어 있었던 거라면 그가 실제로 말하고자 한 바나 생각한 바에 대해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만약 그의 메시지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것이 무언가를 과장한다는 특징뿐이라면, 대체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어느 누가 레닌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겠는가? 그런 방법론은 레닌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번 막대기를 구부릴때마다 더욱 악화될 불신과 냉소의 문화를 조성할 것이다.

 

클리프가 레닌의 막대 구부리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하는, ‘경제주의경향[작업장 투쟁만 일면적으로 강조한 러시아판 개혁주의]에 대해 레닌이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에게 쓴 편지는 클리프가 주장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경제주의 경향은 물론 항상 오류였지만, 그때 그 경향은 매우 초기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경향 없이도 경제적선동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있었지만 (그리고 여전히 여기저기에 있지만) 그것은 1880년대 말 혹은 1890년대 초에 러시아에 존재했던 우리 운동의 조건에서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한 발짝 내딛기 위해 정당하고 불가피한 동반자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아마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으며,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 기어서 빠져나오는 동안 발을 헛디뎠다고 질책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기어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협소함은 필요하고도 정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이론으로까지 확대되고 베른슈타인주의와 연계가 되면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경제선동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대중운동에 영합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레닌의 실제 방법론이 나타난다. 클리프가 칭찬했던 일면성은 레닌의 특징이 아니라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 즉 학습 서클과 선전으로부터 대중 행동과 선동의 장으로의 발전이라는 특정 단계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행 과정에서 몇몇 실수들은 불가피했고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 빠져 나오는 동안 발을 헛디뎠다고 질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가피한 실수를 하고 오류와 헛발질한 것을 하나의 완전한 이론으로 그것을 격상시키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연결시켰을 때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렇게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 후에, 레닌은 1899년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를 썼던 것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객관적인 발전의 특징들과 단계들을 그것들에 대한 레닌의 주관적인 반응과 뒤섞는다:

 

1899년 하반기 동안 러시아 경제주의와 독일 수정주의의 부상으로 인해 운동에 드리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레닌으로 하여금 자발적이고, 일상적이고, 파편화된 경제 투쟁으로부터 전국적 정치 정당의 조직을 향해 다시 막대기를 구부리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레닌은 학습 서클의 책상머리 혁명가로부터 공장의 경제주의 선동가, 공장의 경제주의 선동가로부터 위로부터 당 건설가, 그리고 위로부터 당 건설가로부터 다시 1905년에는 자생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노동계급이 모든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아래로부터 당 건설을 찬성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다. 국면이 변화할 때마다, 계속 자신의 기존 입장을 공격하면서 말이다.

 

그는 러시아의 노동자-사회주의 운동의 각각의 특유한 단계들을 지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이 운동을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붙들고 씨름했다. 각 단계들에는 모두 고유한 과제들과 기회들(과업들”)이 있었다. 이것들을 다 함께 놓고 볼 때, 이 단계들은 라스 리가 레닌의 위대한 시나리오라고 묘사한 전체 과정의 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RSDLP가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그러면 노동자들은 전제정을 무너뜨리고, 국제적 사회주의 혁명의 무대를 마련하는 혁명에서 농민들, 억압받는 민족들과 차르 체제 러시아에서 짓밟히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지도할 것이었다.

 

논쟁에서 레닌은 이 과정의 개별적 요소들을 별개로 보는 대신, 이 발전 과정 전체를 염두에 두는 것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거듭 상기시켰다:

 

사회주의에 헌신했고 그렇게 박식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카우츠키, 오토 바우어 등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에게 일어난 일은 유용한 교훈을 제공해 줄 수 있다(그리고 제공해야만 한다). 그들은 유연한 전술의 필요성을 완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익혀서 남들에게도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이 이 분야에서 한 일의 많은 부분은 사회주의 저작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변증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저질렀거나 혹은 실천상에서는 너무나 변증법적이지 못했다. 형식의 급격한 변화와 옛 형식이 급속하게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운명은 하인드먼, 게드, 플레하노프보다 딱히 나을 게 없어졌다.

 

그들이 파산한 핵심적인 이유는 그들이 노동계급 운동과 사회주의가 성장해 온 정해진 형식에 빠져서, 그 형식의 일면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의해 불가피해진 결별을 인식하기를 두려워했고, 32보다 크다와 같이 그들이 달달 외웠던, 언뜻 봐서는 반박 불가능한 단순한 공리들을 계속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는 기초 산수보다는 대수학과 같고, 기초 대수학보다도 더 수준이 높은 것이다. 현실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모든 옛 형식은 새로운 내용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기호, “마이너스(-)”기호가 모든 숫자들 앞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똑똑하신 분들은 고집스럽게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3”“-2”보다 크다고 계속 주장했다(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새로운 과업들에 적응하면서 위대한 시나리오의 한 단계로부터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던 경제주의자들, 멘셰비크[멘셰비키 활동가], 보그다노프 추종자들, 청산주의자들, “좌익공산주의자들과 칼 카우츠키를 반박하는 논쟁적인 글을 레닌이 쓸 수 있었던 것은 막대 구부리기가 아니라, 그가 발전의 총체성에 대한 이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3장에서도, 클리프는 막대 구부리기이야기를 계속한다.

 

레닌으로 하여금 자생적이고, 일상적이고, 파편화된 경제투쟁으로부터 전국적 정치 정당의 조직을 향해 다시 막대를 구부리도록 만든 것은 1899년 하반기 동안 러시아 경제주의와 독일 수정주의의 부상으로 인해 운동에 드리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는 완전히 틀렸다. 레닌이 썼고 클리프가 2장에서 인용한 1895RSDLP 강령초안은, ‘경제주의경향이 나타나기 수 년 전부터 레닌이 전국적 정치 정당 건설을 추구했음을 증명해 준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그들의 조직을 추진하고 투쟁의 목표와 대상을 짚어냄으로써 러시아 노동계급의 투쟁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함을 선언한다. 스스로의 해방을 위한 러시아 노동계급의 투쟁은 정치적 투쟁이고 이 투쟁의 첫 번째 목표는 정치적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다.

 

레닌의 강령초안을 읽은 사람은 누구든 1895년에 레닌이 당 문제에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국적 정치 정당을 조직하는 것에 대한 레닌의 전념은 두려움과 별 관계가 없었다.

 

레닌과 당 규약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클리프가 쓴 장은 당 규약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다루는 부분만 빼면 특별한 것이 없다. 클리프는 레닌이 관료적 형식주의와 규약 만능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레닌이 1902년에 썼고 1904RSDLP 팜플렛으로 배포되었던 <우리의 조직적 과업에 대해 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용한다.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이어서 말한다:

 

레닌의 분파는 오랫동안 실제적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이스크라 배포자들을 통해 그의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2차 당대회 이후 그가 그 자신이 조직한 중앙위원회의 지지를 잃었을 때, 그는 러시아 사무국(Russian Bureau)을 선출한 새로이 소집된 협의회 주위로 자신의 지지자들을 재조직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로 이스크라 배포자들의 목적은 RSDLP를 건설하는 것에 있었지, 레닌에게 충성하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당 건설을 향하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사실과 다른 점은 볼셰비크들과 중앙위원회가 [레닌]의 것이었다는 개념이다).

 

두 번째의 더 심각한 오류는 RSDLP 2차 당대회의 후유증 속에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분열을 낳은 레닌의 행동을, 그가 규약에 얽매이지 않았거나 느슨한 규약을 선호했다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 동조자들이 멘셰비크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제기한 중심적인 잘못들 중 하나는 그들이 당 기구에서 사임하고 그 결정을 따르지 않은 것, 1903년 당대회 대표단 다수의 분명한 의사에도 불구하고 3차 당대회 소집을 거부한 것, 그리고 해외 사회주의자 동맹(League of Social Democrats Abroad)RSDLP로부터 자율적이라고 선언한 것 등이 모두 1903년 당대회에서 채택된 규약들을 위반했다는 점이였다.

 

누구든 레닌의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읽는다면 레닌이 규약, 규칙, 세부적 절차에 매우 주의를 기울였고 그것들을 준수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애초에 레닌이 1903년 당대회를 소집하기 위해 노력하며 몇 년을 보낸 이유 자체가, 사회주의 서클들 사이에 팽배했던 형식에 매이지 않은 규칙과 절차들을 프로페셔널한 정치 정당의 업무를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공식적 규약들로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요즘 말로 하면 레닌은 페미니스트 조 프리먼이 무조직의 독재 (the tyranny of structurelessness)”라고 묘사한 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레닌의 <우리의 조직적 과업에 대해 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클리프가 주장하는 바와 정반대를 입증한다. 그 편지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실천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다양한 그룹들과 하부그룹들의 활동에 관한 전당적인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1902] 그러한 규약을 작성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규약이 아니라, 이러한 식으로 표현해도 된다면, 당내 정보의 조직화이다. 우리의 지역 조직들은 지금 각기 규약을 토론하느라 적어도 며칠 밤을 지새우고 있다. 대신 만일 회원들 각자가 자신의 특별한 직무에 관해 전당에 보내는 상세하고 잘 준비된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이 시간을 바친다면, 그 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100배쯤 늘어날 것이다.


내가 지금 규약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혁명사업이 항상 명확한 조직적 형식을 자신에게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명확한 조직적 형식이 필요하며, 우리는 가능한 한 우리의 모든 사업에 그러한 형식을 부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허용될 수 있고 이것은 규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전적으로.(우리는 이것을 계속 반복해야만 한다) 정확한 정보를 당 중앙에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책임성과 (당 내부의) 공개성에 연결된 진정한 조직적 형식을 갖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들 사이의 심각한 갈등, 의견 차이가 실제로 규약에 따른투표가 아니라, 투쟁과 사임하겠다는 위협으로 해결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지난 3~4년 동안, 우리 위원회들 대부분의 역사는 그러한 내부투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투쟁이 명확한 형식을 취하지 않았던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당에 훨씬 더 많은 교훈을 주었을 것이며, 우리의 계승자들의 경험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규약도 그렇게 유용하고 필수적인 조직적 형식의 명확성을 만들어낼 순 없다. 이것은 오직 당 내부의 공개성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전제정치 아래서 우리는 당 중앙이 정기적으로 당의 일을 보고받아 알게 하는 것 이외에 당내 공개성을 위한 다른 수단이나 무기를 가질 수 없다.

 

여기서 레닌은 RSDLP의 지도자들이 각각의 당원들이 하고 있는 일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규약에 대한 제대로 된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올바르게) 믿었기 때문에 규칙이 아니라 보고와 당내 공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레닌은 당원의 활동과 관련된 정보를 당 지도부의 손으로 집중시키는 것을 비합법 조직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보았다. 아마도 만약 당이 합법이었다면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정보는 당원 전체에게로 분산될 수 있었을 것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끝맺는다:

 

그리고 오직 우리가 이러한 당내 공개성을 더 넓은 규모로 적용하는 법을 배운 이후에야 우리는 다양한 조직의 활동 속에서 경험을 실제로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수 년 간의 그러한 광범위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만 우리는 그저 종이 위에 쓰인 규약에 그치지 않는 규약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레닌이 규약 만능주의를 굉장히 싫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레닌이 1903년 당대회에서 채택된 규약들을 방어하면서, 그리고 멘셰비크들이 끊임없이 사용했던 비공식적 방법들에 대항하여 1904년과 1905년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1903년 당대회에 대해 다룬 5장 역시 오류로 가득 차 있다. 당원 자격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한 레닌과 마르토프의 유명한 논쟁에 대해 논하면서, 클리프는 마르토프와 트로츠키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된 레닌의 조직 계획은 지지하면서 당원 자격에 대한 레닌의 정식화에는 반대했다고 그들을 공격하며 이렇게 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도부와 느슨한 당원 자격을 혼합하는 것은 극단적 절충주의였다. 혁명정당은 당원들에게 희생과 규율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당원 자격에 대한 마르토프의 정의는 그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의 부실함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클리프는 1906년 당대회에서 멘셰비크들이 (볼셰비크들과 함께) 레닌이 1903년에 사용했던 용어와 일치하는 정식화에 동의하기 전까지 3년 동안, RSDLP의 볼셰비키 분파도 마르토프의 당원 자격 규정에 따라 당원을 모집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결국, 클리프의 논리대로면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도부와 느슨한 당원 자격을 결합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부실함으로 인해 극단적 절충주의에 빠진 것은 바로 1903~1906년의 볼셰비크들이란 말이 된다. 반면 멘셰비크들은 1906년 이후에는 당원 자격에 대한 레닌의 규정을 지지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책임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절충주의 아닌가!

 

이 점에서, 클리프는 1903년의 당원 자격 논쟁에 인위적이고 몰역사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대부분의 다른 레닌주의자들과 유사하다. 레닌은 이 문제를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중에서 RSDLP의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 공산주의 독자들을 위해 쓴 볼셰비즘 역사의 주요 단계라는 부분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관점에서 이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클리프의 또 하나의 심각한 오류는 RSDLP 내부에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경향을 탄생시킨 1903년 당대회 이후의 레닌의 실천에 대한 논의에서 발견된다:

 

제네바의 크룹스카야와 러시아 내에서 활동하던 지지자 집단의 도움을 받아서, [레닌은] 위원회를 조직하고 승인할 권리를 중앙위원회에게만 부여한 당 규약 제6조를 아예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중앙집권화된 위원회들을 건설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완전히 새로운그리고 중앙집중권화된 위원회들1904년에, 이전의 당대회 끝 무렵에 멘셰비키들과 볼셰비키들 사이에 제기된 분쟁을 풀기 위해 새로운 RSDLP 당대회를 하자고 선동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만약 클리프의 서술이 사실이라면, 레닌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이 당 규약을 따르지 않는다고 공격해 놓곤 자기 자신은 그 책임에서 면제시키는, 위선적이고 무자비한 분파주의자란 말이 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1903년 이후에 볼셰비키가 새로운 당대회를 열자고 선동한 것의 모든 기반을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선동은 2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다음과 같은 규칙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 협의회(Party Council)는 당대회에서 합쳐서 절반의 표를 획득한 당 조직들이 요구할 때는 당대회를 소집해야 한다.”

 

만약 레닌 스스로가 완전히 새로운 중앙집권화된 위원회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규칙들을 위반했다면, 그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RSDLP의 규약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은 멘셰비키라고 주장했을 때 RSDLP 내에서 지지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클리프의 단언에 대해서는 주석이 없어서, 그의 주장의 출처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크룹스카야의 회고록에는 (RSDLP의 규약에 어긋난다는 의미에서) 위법적인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중앙집권화된 위원회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레닌이 클리프가 주장하는 바대로 했다면 멘셰비크들은 이 황당한 사실을 물고 늘어졌을 것이고 당대회 이후 이스크라 지면에 쓴 레닌에 대한 극렬한 공격에 그 사실을 포함시켰을 것이다.

 

이 장과 <당 건설을 향하여> 전반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레닌이 말했거나 한 일에 기초하지 않은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한 클리프의 진부한 경구이다. 예를 들어

 

혁명정당의 지도부는 일상에서 헌신의 가장 뛰어난 모범과 당에 대한 완벽한 일체감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평당원들로부터 최대한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를 지도부에게 부여한다.

 

레닌은 분명 사람들이 혁명운동을 위해 하는 희생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는 당 지도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당원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예를 들어, 나로드니키들과 데카브리스트[러시아 근대화를 추구한 19세기 초 혁명가들]들과 같은 이전 세대의 러시아 혁명가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렇다). 레닌은 당 지도자로서의 그의 지위를 평당원들로부터 최대한의 희생을요구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는 어느 시기에나 들어맞는, 교훈적인 구절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는 스탈린 시기나 마오쩌둥의 <붉은 수첩( Little Red Book)> 같은 곳에서 나온 말처럼 보인다.

 

레닌이 규약을 무시했다는 클리프의 언급은 <당 건설을 향하여>의 서사에서 중요한 목적에 부합한다: 레닌은 끊임없이 규약을 무시해야 했고, “보수적이 되어서 정치에 대해 형식주의적으로 접근하면서 레닌의 계속되는 막대 구부리기에 저항한 자신의 지지자들과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서사는 19054월에 열린 2RSDLP 당대회에서 레닌이 두 쟁점을 둘러싸고 볼셰비키 위원[간부 활동가]들과 싸운 것을 칭찬하는 8장에서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그 두쟁점들은 당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문제와 1905년 혁명의 한가운데에서 당을 민주화하는 것이었다. 클리프에 따르면 “[볼셰비키 위원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온 인용구로 스스로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고 민주주의 놀이를 비난했다.”


클리프의 설명의 문제점은 레닌과 볼셰비크들이 3차 당대회에서 당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당을 민주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그런 일은 없었다. 라스 리는 <당 건설을 향하여>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가 솔로몬 슈바르츠(Solomon Schwarz)를 그대로 베낀 것임을 발견했다. 슈바르츠는 볼셰비키였다가 멘셰비키가 된 인물로, <1905년 혁명: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사상투쟁>을 쓴 사람이다.

 

클리프의 이런 표절은 정말로 놀라운 다른 오류들에 비하면 사소하다. 확실히, 클리프는 19055월에 쓰인, 러시아 RSDLP 3차 당대회에 대한 레닌의 보고서를 읽지 않았다! 만약 클리프가 3차 당대회에 대한 레닌의 보고를 읽었더라면, 그가 1905년 혁명으로 인해 창출된 새로운 조건에서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문제나 당을 민주화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갈등, 논쟁, 혹은 마찰도 언급하지 않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 보고서는 3차 당대회의 결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 결과에는 더 명확하게 다듬어진 당 규약(레닌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주장을 떠올려 보자)1905년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RSDLP의 실천을 지도한 일련의 결의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의 결론이 불가피하다: 클리프는 레닌이 19053차 당대회에 대해 말한 것을 읽지 않았거나, 아니면 레닌 VS 그가 건설했던 당 기구라는 그의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글에서 가져온 틀린 사실을 알면서도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둘 모두 레닌에 대한 정치적 전기의 작가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클리프의 레닌은 그가 건설한 당 기구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는 서사에 배태된 모순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 장이다. 위원회 구성원들이 정말로 3차 당대회에서 노동자들을 당에 가입시키는 문제를 놓고 레닌을 패배시켰고 그런 노력을 고집스럽게 거부했다는 클리프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된다:

 

어떻게 RSDLP의 볼셰비키 진영이 그렇게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노동자들이 기존 당원들의 의사에 반하여 당에 가입할 수 있었는가? 클리프는 이 불가능한 일을 설명하지는 않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했다고 칭송하며 1905년과 그 이후 볼셰비키의 급속한 성장을 보여주는 수치들을 인용할 뿐이다. 클리프의 레닌은 분명 당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실천을 당이 하도록 만들 수 있는 마술사였음이 틀림없다.

 

민주집중제와 당 규율

 

15장에서 클리프의 장황한 오류들은 계속된다. 1905년 혁명은 RSDLP의 급속히 성장하는 평당원들로부터,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분파를 통합하라는 강력한 압력을 만들어 냈다. 이 통합은 1906년 스톡홀름에서 열렸던 RSDLP 당대회에서 완성되었다.

 

클리프는 이 당대회가 3명의 볼셰비크들과 6명의 멘셰비크들로 구성된 중앙위원회를 선출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탐메르포르스에서의 RSDLP 당 협의회가 대기업으로부터 후원받는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Cadets)과의 선거 연합을 결정했다고 이야기한다. 레닌은 이 당 협의회에서의 결정이 지역의 당 조직에는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놀란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레닌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민주집중제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수 년 동안 그는 당의 하위 기구가 상위 기구에 복종할 것을 주장해 왔고 당에 대한 연방주의적 개념에 반대했다. 19042~5월에 쓰인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레닌은 중앙집중주의에 반대하여 자율주의를 옹호하려는 명확한 경향은 조직 문제에서 기회주의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말했다.

 

클리프가 말하는 민주집중제당의 하위 기구가 상위 기구에 복종하는 것과 연방주의적이지 않은 당이다. 레닌이 말했던 민주집중제는 전혀 달랐다.

 

클리프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인용하는 구절은 적절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레닌은 트로츠키처럼 당 신문의 편집부가 자율적이어야 하고 당대회의 민주적 통제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지역의 위원회나 지역 당 조직이 지역의 사업과 관련하여 결정을 내릴 자율성과는 매우 다른 쟁점이다. 지역적 자율성이 1907년의 레닌의 사상에서 새로운 요소였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레닌은 1905RSDLP 3차 당대회가 이 원칙을 확인했음에 주목했다:

 

위원회의 자율성은 더 정확하게 정의되었고 그 구성원 자격은 간섭할 수 없는 것으로 선언되었으며, 이는 C.C(중앙위원회)가 더 이상, 위원회의 동의 없이 지역 위원회에서 성원들을 내보내거나 새로운 성원을 임명할 권리를 갖지 못함을 의미한다. 모든 지역 위원회는 외연(을 확대하는)조직 (또는 외곽 조직)을 당 조직으로 승인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외연(을 확대하는)조직 (또는 외곽 조직)들은 위원회 성원 자격을 위한 후보들을 지명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자율성의 원칙은 1903RSDLP 2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당에 속하는 모든 조직들은 그 조직들이 다루기 위해 설립된 당 활동의 영역에 특별히 그리고 배타적으로 관계되는 모든 사업을 자율적으로 수행한다.

 

민주집중제에 대한 클리프의 설명에서 빠져 있는 또 한 가지 요소는 역시 2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다음과 같은 규칙이다:

 

모든 당원 그리고 당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제시하는 모든 진술이, 원래의 형태그대로, 중앙위원회 혹은 중앙 기관지 편집부 혹은 당대회에 제출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 규칙은 모든 레닌주의조직들을 괴롭히는, 당직자들에 의해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축출과 거의 항상 민주집중제의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여타 권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용어는 너무 심하게 오용되어서 1917년 혁명 때까지 RSDLP의 멘셰비키(이 용어를 처음 만들어 냈던)와 볼셰비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조직적 규범을 더 이상 의미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레닌이 민주집중제토론의 자유, 행동의 통일로 정의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클리프는 이것이 실천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해 레닌을 적절하게 인용한다.

 

책임있는 기구들이 결정하고 나면, 우리 모두는 당원으로서 마치 한 사람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오데사에 있는 볼셰비키 당원은 정말 하기 싫더라도 카데츠의 이름이 적힌 투표 용지를 투표함에 넣어야만 한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있는 멘셰비키 당원은 그가 마음 속에서는 카데츠를 지지하더라도 사회민주당원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어야만 한다.

 

토론의 자유, 행동의 통일이 의미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를 주목하라. 이는 소수파가 승리한 다수파의 노선이나 주장을 공공연하게 옹호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의하지 않는 소수파에게 행동 통일이란 그냥 다수파에 협조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지, 그들의 목소리를 같이 내거나 그들의 노선을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 어디서도 레닌은 오데사에 있는 볼셰비키 당원은 자신의 현장 동료들에게 카데츠 지지를 호소해야 한다거나 모스크바에 있는 멘셰비키 당원이 온 마음으로 카데츠를 지지하고 싶더라도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사회민주당에 투표하라고 설득해야만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행동의 노선과 주장의 노선은 별개이다. “행동 통일은 주장이나 정치적 입장에서의 통일을 의미하지 않았다.

 

민주집중제가 레닌과 RSDLP에게 의미한 바를 이렇게 이해했을 때, 클리프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극도로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

 

몇 개월 후 19071, 레닌은 당이 직면한 쟁점들에 대해 모든 당원들 총투표의 도입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는 물론 민주집중제라는 개념 전체에 반하는 제안이었다.

 

민주집중제에 대한 레닌의 정의가 아니라 클리프의 정의를 사용할 경우에만, 당의 실천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당원 투표를 하는 게 민주집중제와 상반된 것이 된다. “레닌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민주집중제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라는 클리프의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클리프가 민주집중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17장에서 그가 1907년 멘셰비키가 주도한 레닌에 대한 [당내 규율 위반에 대한] 재판을 논의할 때 다시 한 번 문제가 된다. 놀랍게도, 클리프는 레닌이 당 규율을 어긴 죄가 있다는 멘셰비크들의 주장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재판에서 레닌의 행동은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당 내의 우익에 맞서 분파 투쟁을 할 때의 가차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재판이 열리자, 레닌은 그가 같은 당 동지 사이에서 허락될 수 없는 언사를 사용했음을 침착하게 인정했으나,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사과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실제로, 운동에서 청산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맹군들과 싸울 때, 그는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사용하기를 절대 주저하지 않았다. 절제는 볼셰비즘의 특성이 아니었다.

 

그 재판의 원인이 된 사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멘셰비크들이 지역의 RSDLP 조직 다수파에 반발하여 카데츠와 선거 연합을 한 후에 발생했다. 레닌은 이에 대해 멘셰비크들을 공격하는 팸플릿을 썼다. 멘셰비크들은 자기들이 다수였던 RSDLP 중앙위원회로 하여금 레닌을 당 규율 위반 혐의로 고발하도록 함으로써 보복했다. 그러니까 RSDLP의 규율을 위반하고 있었던 것은 레닌이 아니라 멘셰비크들이었던 것이다.

 

볼셰비키 당: 1912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7장에서, 클리프는 RSDLP에서의 청산주의적 경향에 대한 레닌의 투쟁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19101RSDLP 당대회에서의 투표가 레닌으로 하여금 볼셰비키 분파를 해산하고 분파의 신문을 폐간하고 평당원들 중 보이코트파와 단절하도록 강제했고, 멘셰비키도 똑같이 분파를 해산하고 신문을 폐간하고 그들 중 청산주의자들과 단절하도록 의무화했음에 주목한다. 레닌은 충실히 따랐다. 멘셰비키는 그렇지 않았다.

 

멘셰비크들이 그들의 의무사항을 지킬 의사가 없음이 입증된 후, 레닌은 1910년 말에 새로운 주간지 즈베즈다(Zvezda)를 창간했다. 클리프는 이 사실을 누락시키고 대신 19121월 프라하 당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집어넣는다. 그는 또한 이 당대회가 당을 지키려는(pro-party) 멘셰비크 (참석자 두 명중 한 명)RSDLP 중앙위원회에 선출했다는 사실도 누락한다


이는 중요한데, 1912년 프라하 당대회는 항상 멘셰비키와 분리된 당으로서 볼셰비키가 시작된 것으로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클리프는 1912년에 중앙위원회에 선출된 사람들을 <당 건설을 향하여>의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용어인 강경파들로 지칭함으로써 이 문제를 피해간다.

 

17장 이후에 클리프는 RSDLP의 일간지 프라우다가 볼셰비키 당 건설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볼셰비크들이 1912~1914년에 대중정당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볼셰비키 두마 의원단이 1913년 말에 멘셰비키 의원단과의 관계를 마침내 단절했다고 말한다(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의원단들이 공동성명을 냈기 때문에 이는 틀렸다). 이런 주장들에 기초해 볼 때 클리프가 멘셰비크들과 볼셰비크들이 1912년에 두 개의 당으로 갈라졌다는 신화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1912년 레닌의 글을 대강 보기만 해도 이 관점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 수 있다. 1912년 프라하 당대회 직후에, 레닌은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에 보낸 설명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20개 조직이 이 당대회를 소집한 조직 위원회와 긴밀한 연계를 수립했다. 다시 말해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둘 다를 포함하여 현재 러시아에서 활동을 하는 조직의 실질적인 전부가 그렇게 했다.

 

1912년 프라하 당대회는 당을 지키려는 멘셰비크들과 볼셰비크들을 청산주의자들과 분리시켰다. 멘셰비키-볼셰비키 분열은 1917년 혁명 전까지는 두 개의 분리된 당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1912~1914년에 대한 클리프의 설명은 틀린 사실관계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치명적으로 오류가 있다. 볼셰비크들은 하나의 당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중정당이 될수는 없었다


또 프라우다가 볼셰비키 당 건설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실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청산주의적 라이벌 신문인 루츠(Luch)에 맞서 프라우다가 성공을 거두었을 때 레닌이 왜 노동자들의 4/5가 프라우다의 결정을 자신들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프라우다주의(Pravdism)를 찬성하고 실제 그것으로 결집했다고 썼지 볼셰비즘의그리고 볼셰비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레닌과 프라우다의 역사를 클리프가 다루는 방식은 <당 건설을 향하여>의 나머지 부분만큼 오류가 많다. 예를 들어 그는 레닌이 실질적으로 프라우다를 운영했다고 말한다. 그가 언급하지 않는 것은 레닌의 글들 중 47개가 게재를 거부당했고, 신문에 실린 글들 중 많은 수가 정파적 내용을 약화시키기 위해 많이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레닌이 실질적으로 프라우다를 운영했다면, 왜 스스로의 글을 그렇게 많이 거부하고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검열했겠는가?

 

프라우다는 레닌이 운영한 것이 아니라 한 팀의 편집자들이 운영한 것이었고 주도력은 당의 보다 낮은 평당원들로부터 온 것이었다. 클리프가 말하는 것처럼 레닌의 프라우다가 아니라, 레닌은 여러 기고자들(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 카우츠키도 여기에 기고했다) 중 하나였던 노동자들의 신문이었다. 시와 유머 칼럼을 포함한, 프라우다의 내용의 압도적인 대부분은 신문의 편집진이나 당의 높은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쓴 것이었다.

 

결론

 

<당 건설을 향하여>에는 너무 많은 심각한 사실관계상의 그리고 정치적인 오류들이 있어서 레닌의 실천과 사상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서는 가치가 크지 않다. 이것은 책을 꼼꼼히 읽고 그 책을 레닌의 글과 역사적 기록과 비교해 보면 누구든 벗어나기 어려운 결론이다. <당 건설을 향하여>를 읽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맥락에서 레닌의 활동에 대해 합리적인 수준으로 정확한 그림을 그려보고자 한다면, 그 책에 있는 틀린 사실관계와 잘못된 정보들을 잊어버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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