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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볼셰비키 역사에 대한 두 가지 신화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1. 19.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1905년 당대회와 1912년 협의회에 대해

 

 

라스 리(Lars T. Lih)



[이 글은 지난번에 실었던 팜 빈의 클리프 비판 글(http://rreload.tistory.com/240)이 촉발한 논쟁의 연장선에서 나온 글이다. 그 글은 곧 날카로운 반론과 재반박들로 이어졌다. 레닌주의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자인 폴 르블랑의 반론(http://links.org.au/node/2716), 이에 대한 팜 빈의 재반박(http://links.org.au/node/2718)이 이어졌다. 다시 폴 르블랑의 재반론( http://links.org.au/node/2719)이 있었고, 미국 국제사회주의자인 폴 다마토도 팜 빈을 비판하는 글(http://links.org.au/node/2726)을 써서 논쟁에 개입했다.

레닌주의에 대한 신화 해체와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온 라스 리(Lars T. Lih)도 이 논쟁에 뛰어들었고, 이 글은 그것을 번역한 것이다. 우리의 능력, 시간과 여력이 허용한다면 관련 글들을 모두 번역하고 싶지만 매우 아쉽게도 그렇지는 못하다. 그래도 이 글을 보면 논쟁의 진행 과정과 쟁점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라스 리는 다시 한번, 통념을 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엄정하고 철저한 재해석을 수행하며 레닌주의에 대한 재평가에 큰 자극과 영감을 주고 있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links.org.au/node/2751

 

최근에 볼셰비즘 역사의 몇몇 특정한 쟁점들에 대해 흥미로운 논쟁 하나가 온라인에서 일어났다. 팜 빈이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 1(<당 건설을 향하여>, 1975)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논쟁을 시작했다. 폴 르블랑이 뛰어들어서 클리프를 변호하고 팜의 비판을 기각했다. 팜과 르블랑은 몇 번의 논쟁을 더 주고받았고, 폴 다마토도 합세했다.

 

이 토론에 대한 나의 개입은 특정한 두 쟁점에 한정된다: 1905년 제3차 당대회와 1912년 프라하 협의회가 그것이다. 내 작업이 팜과 르블랑 둘 다에 의해 인용되었기 때문에 나는 발언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두 에피소드 모두에 대한 러시아어 원자료들에 친숙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할 말이 있다고 느낀다.

 

하나의 쟁점인 1905년 당대회에 대해서 나는 내가 이전에 두 차례 했던 클리프 비판을 되풀이할 것인데, 내가 알기론 이제까지 아무도 여기에 실제로 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쟁점인 1912년 협의회에 대해서는, 내 생각이 최근 1차 자료에 대한 연구로 인해 바뀌었다. 그 결과 나는 내가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 견해를 옹호하는 것으로 인용되게 되었다. (온라인 논쟁에서 제기되었던 또 다른 쟁점인 클리프의 막대 구부리기문제에 대한 내 의견에 대해서는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18:3 [2010]를 참고하라.)

 

이 두 가지 역사적 쟁점들의 요지에 대해 나는 클리프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맞서 팜의 편에 선다. 그러므로 나는 내 글이 클리프의 정치에 대한, 혹은 온라인 논쟁에서 나왔던 그의 레닌 전기 전체에 대한 다른 쟁점들과는 완전히 무관함을 명확히 해야겠다.(팜은 클리프의 작업이 라스 리와 같은 학자들의 이어지는 연구가 보여주는 접근방법의 틀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나의 경우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두가지 사안에 대해 나는 클리프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는 (책의) 대부분 믿을만한 근거를 따르고 있어서 특별히 찝어내 지적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클리프 같은 영향력 있는 저술가가 오래 지속되어 온 잘못된 사실을 계속 신주단지처럼 받들고, 좋은 평판을 가진 저술가들이 바로 그런 잘못된 사실들에 대해 클리프를 옹호할 때, 역사적 이해라는 대의는 그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주목을 요구한다.

 

코미테치키사이에서의 논쟁: 1905

 

멘셰비키의 보이콧 동안, 1905년 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WP) 3차 당대회는 구성상 볼셰비키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대회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논쟁들 중, 하나는 지역 지하 당 위원회 직책에 기존에 지배적이던 지식인(intelligenty: 교육받은 사람들)과 다른,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1975년에, 토니 클리프는 이 논쟁에 대한 영향력 있는 묘사 글을 출판했다. 보다 초기의 학문적 분석에 기반을 두고, 클리프는 위원회에 노동자들이 있기를 원했던 레닌과 그렇지 않았던 볼셰비키 코미테치키(komitetchiki) 볼셰비키 위원[간부 활동가]”들 사이의 극적인 대결을 그려냈다. 클리프에 따르면 볼셰비키 위원(지역 당 위원들)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1902)를 인용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했고, 그에 대응하던 레닌은 그 책의 핵심 주장들 중 하나를 반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2006, 나의 책 <레닌 재발견>에서, 나는 러시아어로 된 당대회 원래 기록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했고 그 논쟁에 대한 클리프의 묘사가 사실관계상 부정확하고 매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했다(<레닌 재발견>, 540~3). 3차 당대회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클리프 버전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옹호하는 사람은 누구든, 내 생각에,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큰 볼셰비키 집단과 레닌의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에 나는 <레닌 재발견>에 대한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심포지움에서 이 비판을 되풀이했다.

 

나는 이 쟁점에 대한 추가적인 진지한 논쟁, 특히 좌파 내에서의 논쟁은 내 자세한 주장을 최소한 고려는 할 것이라고 약간 순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2012년에, 바로 이 쟁점에 대한 논쟁은 마치 내가 이전에 한 비판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인터넷상에서 터져 나왔다.

 

팜 빈의 기본적인 주장은 내 주장과 같은데, 클리프가 그 볼셰비키들의 논쟁을 지역 당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의 바람직함에 대한 충돌로 그린 것이 매우 잘못 안 것이라는 점이다. 팜은 내 작업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불행히도 부적절한 부차적인 쟁점들에서만 인용한다. 그 실제 논쟁에 대한 내 설명을 언급하는 대신 그는 거의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못하는 레닌의 문서(이 점들은 아래에서 더 자세히 논의될 것이다)에 기초하여 자기 주장을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팜의 입장에 본질적으로 강력히 동의한다. 폴 르블랑과 폴 다마토가 클리프를 옹호하는데, 그들은 제3차 당대회에 대한 내 자세한 설명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더 안 좋은 것은 르블랑이 내가 마치 팜에 맞서 르블랑의 편을 드는 것처럼 내 입장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세 번째로 내 입장을 표명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부분적으로는 내 입장에 대한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이지만, 주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급한 진짜 쟁점들을 다루도록 하려는 것이다. 1905년에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묘사한 후 나는 클리프가 그 당대회에 대해 자기 말로 묘사한 것을 제시하고, 클리프에 대한 내 비판을 다시 한 번 표명하고, 마지막으로 현재 인터넷상의 토론을 살펴볼 것이다.

 

이제 1905RSDWP의 제3차 당대회의 사건들로 돌아가 보자.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은 실제로 있었고, 상당히 감정적인 토론이었으며, 레닌은 깊이 관여했고, 자신과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결의안 초안을 작성했다)가 발의한 결의안이 근소한 차이로 부결된 것에 대해 몹시 실망했다.

 

논쟁은 있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논쟁이었는가? 팜 빈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전적으로 옳다: “1905년 제3차 당대회에서의 논쟁은 노동자들을 어떻게 모집할지에 대한 것이었지, 모집할지 말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클리프가 말한 것처럼 당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모집하지 말자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http://links.org.au/node/2718).

 

당대회에서 아무도 노동자들을 위원회에 오게 한다는 목표를 반박하지 않았고, 아무도 현 상태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아무도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것이 위원회의 활동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실, 레닌의 특정한 그 결의안에 대한 공통된 반론은 그것이 너무 뻔하며, 모두가 공유하는 목표를 그저 반복하기만 했고, 명백한 진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하나라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대표들 사이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토론은 현장의 경험적인 현실에 대한 것이었다. 위원회 일을 할 만한 자질을 갖추어서 등용할 만한 노동자들이 충분히 있는가? 노동자들의 자질을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이 지식인들에 대한 기준과 같아야 하는가? 위원회에 있는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측면이 있는가?

 

근래에 실질적인 지하활동의 경험이 있는 대표단들 대부분은 위원회에 더 많은 노동자들을 오게 하는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을 원했다. 그것은 당시 간과되고 있었던(그랬다고 주장되었다), 일종의 당 차원의 교육을 통해 필수적인 자질들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레닌의 결의안이 불필요한 것으로 부결된 이후에, 이런 해결책을 제안하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기권 1표가 있었다) 통과되었다. 그 결의안은 다음과 같이 쓰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엄청난 성장”] 하에서, 목적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의 가능한 한 많은 수를 운동에서 선동가, 선전가, 특히 지역 지도부와 당 전체 지도부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모집하는 것은 각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그런 노동자들은 이 운동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당을 그 운동과 연결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중 그런 정치 지도자의 수가 불충분하다는 것 자체가 당 지도부에서 이제까지 관찰되었던, 지식인의 상대적 우세를 설명해 준다.

 

다시 말해서: 당대회는 모든 수준의 당 지도부에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것이 긴급함을 만장일치로 인식하였다.

 

3차 당대회에서 논쟁이 된 쟁점, 즉 억압적인 지하활동의 조건에서 어떻게 노동자들을 당 위원회로 모집할 것인가는 당 민주주의 문제와는 상당히 별개이다. 당 민주주의 문제는 세 가지 차원에서 제기되었다: 특정 지역에서 사회민주당원 다수와 위원회의 관계, 더 상위의 당 지도부와 위원회들의 관계, 사회 전체와 당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세 가지 차원 모두 1905년 말에 토론 지점으로 대두된 것이었다. 몇몇 저술가들은 이 나중의 토론을 보다 일찍 발생한 토론과 연관 지어서 레닌과 다양한 볼셰비키 위원들 사이에 1년 동안 지속된 투쟁을 읽고자 한다. 예를 들어, 상당 부분은 믿을 만한 책 <레닌과 혁명정당>에서 폴 르블랑은 1905년에 대해 이렇게 쓴다.

 

그 해에 나중에, 레닌은 새로운 합법 그리고 반합법 조직들을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라고 썼다.” 레닌이 그 해 말에 한 제안들을 묘사한 후, 르블랑은 “19054월 제3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위원들은 그런 생각에 맞서 저항했고 이러한 새로운 지향을 반영하는, 레닌과 보그다노프의 결의안을 패배시켰다라고 논평한다.(<레닌과 혁명정당>, 118)

 

이는 틀렸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첫 번째로, 그 해 말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은 봄과는 완전히 달라졌는데, 그 사이에 10월 선언[차르 정부의 일시적 유화책]이 광범위한 정치적 자유를 허가했고 짧은 자유의 시기(the days of freedom)”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제 당 민주화는 새로운 합법 조직들을 만드는 것이 계획에 올라와 있지 않아서 매우 달랐던 봄의 지하 상황에 비해,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구상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1905년 말 당 민주화에 대한 레닌의 제안들은 특별히 논쟁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르블랑과 다른 저술가처럼 자유의 시기동안 이루어진 레닌의 선언을 가져와서 1905년 제3차 당대회에 끼워 넣는 것은 활동가(praktiki) 비민주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것이다.

 

이제 클리프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의 설명 중에서 나의 시선을 끈 첫 번째는 노동자들을 위원회에 넣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나 자신의 독해를 정말로 시험대에 올려놓게 될 것이다. 그의 입장에 대해 불확실한 점이 없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클리프의 책에서 긴 문단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05년 봄에 열린 제3차 당대회에서 레닌과 보그다노프는 노동자들한테 당의 문호를 폭넓게 개방하여 노동자들이 당에서 앞장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고, 당과 노동계급 대중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훨씬 더 넓은 부문의 프롤레타리아와 반()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완전한 사회민주주의 의식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그들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활동을 발전시킴으로써, 우리 당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조직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만드는 것을 통해, 운동과 당 조직을 지도할 능력이 있는 노동자들을 노동계급 대중 속으로부터 지역 지도부와 당 지도부 자리로 끌어올림으로써, 당에 들어오려 하지 않거나 들어올 수 없는 노동계급 조직이 적어도 당과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그래야 한다.[Lenin,Collected Works, vol.8, pp.409~10].

 

대회에서의 논쟁은 차츰 매우 격렬해져 갔다. [그 다음에는 2차 자료들에서 골라 모은 논쟁의 토막토막들이 길게 나온다.]

 

대회에 참여한 대부분의 대표들은 평당원들에 대한 자신들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경향을 보일 어떤 조치도 반대하는 위원들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따온 주장들을 버팀목 삼아 그들은 노동자를 위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민주주의 놀이를 비난했다. 레닌의 결의안은 반대 12 대 찬성 로 부결되었다. 그가 볼셰비키들 사이에서 소수파가 되고 심지어 볼셰비키 당대회에서 야유를 받은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곤경에 처한 레닌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설득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안되었던 노선에 반대하게 해야 했다. 그는 그가 제2차 당대회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한 공식들을 특별한 원칙들로 이루어진 강령수준으로 격상시킬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클리프는 계속 레닌의 발언들을 발췌해서 인용하는데 이 발언들은 1905년 제3차 당대회에서가 아니라 1907년에 이루어진 발언들이다.]

 

이제 클리프에 대한 나 자신의 비판으로 돌아가 보겠다. 3차 당대회에 대한 그의 설명은 사실관계상 부정확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매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자세한 인용에 대해서는 <레닌 재발견> 540~43쪽을 참고하라.)

 

3차 당대회에서 쟁점은 당이 노동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야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지하활동이라는 조건에서 불가능한 조치였다.

 

클리프는 당대회 대표단들이 당과 노동계급 대중 사이의 연결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와 같이 전혀 논쟁의 여지가 없었던 부분까지 반대했다는 인상을 준다. 목표에 대한 그런 표준적인 문안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의 결의안에 대한 반대자들에 의해서도, 이 논쟁에 참여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사실 이 논쟁은 레닌의 관점의 불연속성을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레닌은 자기가 이전의 글에서 비슷한 제안들을 한 적이 있음을 단언했고 다른 대표단들도 정확히 그 지점에서 그의 연속성을 칭찬했다.

 

*클리프는 당대회에 온 대표단들 대부분이 평당원들에 대한 그들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조치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볼셰비키 위원들이었다라고 쓴다. 이 논쟁에서 이런 식의 설명을 뒷받침해줄 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게다가 한두 명의 노동자 구성원은 위원회의 권위를 강화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대표단들이 그렇게 느꼈다는 클리프의 단언은 몇 줄 내려가서 그가 적은 레닌의 결의안에 대한 근소한 차이의 투표 결과(129½)로부터 허구임이 드러난다.

 

나는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들이는 데 극도의 주의를 요청하는 그 어떤 발언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경우든 그런 의견은 주변적이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온 구절들에 반대하도록 그의 지지자들을 설득해야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클리프는 여기서도 레닌의 1905년의 입에 1907년의 발언을 끼워 넣음으로써 심하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클리프는 당대회가 노동자 모집의 건에 대해 실제로 통과시킨 결의안도, 가능한 한 많은 노동자들을 위원회에 오게 하는 목표에 대해 위에 인용된 강력한 권위 있는 승인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클리프의 사실관계상의 그리고 해석상의 오류이다. 하지만 이런 오류들은 나에게는 진짜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클리프의 책을 읽는 독자가 믿게 될,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이야기이다.

 

3차 당대회에 대한 클리프의 설명은 이런 식으로 가는, 잘못된 더 큰 이야기의 틀 내에서만 말이 된다: 1902년에 레닌은 노동자들이 위원회에 들어오는 것을 억제하거나 최소한 그들을 모집하는 데 극도의 주의를 해야 함을 주장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메시지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깊이 받아들여졌고 초기 볼셰비키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래서 반노동자적인 정서가 처음부터 볼셰비즘의 일부였다. 1905년에 레닌은 이 반노동자적인 정서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신은 노선을 바꿔서 <무엇을 할 것인가?>와 단절했다. 하지만 그는 당 활동가들의 관점을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고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예전에 주장했던 바에 맹목적으로 매달렸고, 초기에 레닌이 보였던 반노동자 정서에 계속 충실했다.

 

클리프의 설명의 사실관계상의 정확성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배경적 이야기를 인정하는 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나의 경우,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이 이야기는 말도 안 되며 강력하게 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클리프의 설명은 내가 레닌 vs. 볼셰비키들서사라고 부르는 것의 고전적인 사례이다. 이는 또한 어떻게 일부 좌파들의 주장이 <무엇을 할 것인가?>노동자들에 대한 우려가 깃든 것으로 보는 학문적 해석에 강력한 힘을 보태주는지도 설명해 준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최근의 온라인 토론을 살펴보자. 내가 앞에서 서술했듯이, 클리프가 제3차 당대회를 묘사한 바에 대한 팜의 비판은 본질적으로 옳다. 불행히도, 팜의 설명에는 팜의 반대자들에 의해 신속하게 지적된 약점들 몇 가지가 있다.

 

먼저, 팜의 원래 정식화는 충분히 정확하지 못했다: “클리프의 설명의 문제점은 레닌과 볼셰비크들이 3차 당대회에서 당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것에 대해서도, 당을 민주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그런 일은 없었다.” 비판에 답하여, 팜은 (앞에서 인용된 대로) 그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905년 제3차 당대회에서의 논쟁은 노동자들을 어떻게 모집할지에 대한 것이었지, 모집할지 말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클리프가 말한 것처럼 당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모집하지 말자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정식화가 전적으로 옳다. 또한 팜이 제3차 당대회에서 당을 민주화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 없었다고 말한 것도 옳다.

 

두 번째로, 팜은 그의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 즉 1905년 논쟁의 실제 경로에 대한 나의 분석을 깜박 잊고 언급하지 않았다. 팜은 내 작업을 인용하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직 부차적인 쟁점에 대해서만, 클리프가 2차 자료를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것만 인용한다. 이 쟁점은 클리프가 실질적으로 맞았는지 틀렸는지와 무관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는 팜의 비판자들에게 동의한다.

 

당대회에서의 실제 논쟁을 지적하는 대신, 팜은 3차 당대회에 대해 레닌이 그 직후에 쓴 자랑스러워하는 보고를 이용하여 그의 주장을 정립했다. 이 보고의 전체 목적은 실망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당대회가 남긴 성과에 대해 열광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팜의 비판자들이 이 증거를 기각한 것은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블랑과 다마토는 팜의 주장에 대해 <레닌 재발견><역사유물론 : Historical Materialism> 잡지에서 제기된 가장 강력한 증거를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에 논의를 거의 한 발자국도 진전시키지 못한다. 대신 그들은 마치 이 주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루어졌던 학술적 주장이 클리프의 출처 특히 솔로몬 슈바르츠(Solomon Schwarz)인 것처럼 글을 쓴다.

 

슈바르츠는 1905년 혁명에 참여하였고 여러 해가 지나서 1905년에 대한 유용한 학술논문(<1905년 러시아혁명>, 1967)을 저술하였다. 다마토는 슈바르츠의 설명을 배척할 유일한 근거는 순전히 정치적 편견밖에 없다는 식으로 암시하며 팜이 이 논의에서 슈바르츠가 어떤 설명불가능한 오점을 갖고 있다고(보아하니 멘셰비키는 심지어 사실을 말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믿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쟁점은 슈바르츠의 가치가 아니다. 3차 당대회에 대한 클리프의 묘사가 사실관계상 올바른지가 쟁점이다. 클리프는 슈바르츠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반레닌주의 학자 존 킵(John Keep)(<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부상>, 1966)에 자신의 설명의 근거를 두었다. 나는 당대회 기록을 직접 점검했고 킵과 슈바르츠가 그 논쟁에서 자신들의 결론을 이끌어낼 때 편향적이고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기꺼이 작업을 다룬다. 왜냐하면 클리프, 르블랑과 다마토와 달리 그들은 실제로 관련된 원자료를 읽었기 때문이다.

 

당대회 의사록은 구하기 어렵지 않다. 사실 온라인 링크(http://publ.lib.ru/ARCHIVES/K/KPSS/_KPSS.html)에서 의사록들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들은 러시아어로 되어 있고 영어로는 구할 수 없다. 나는 이 자료들을 보고 나의 경험적인 설명이 부정확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누구와도 기꺼이 학술적 토론을 할 것이다.

 

나에게 가장 속상한 것은 폴 르블랑이 내가 팜에 맞서서 자기 편을 드는 것처럼 암시하는 방식으로 나를 논쟁에 직접적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르블랑은 그의 첫 글에서 이렇게 쓴다:

 

이 문제에 대한 나와의 학술적 토론에서, 라스 리는 그 논쟁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런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고 레닌이 현실에 대해 틀렸으며 논쟁의 반대편에 서서 표결에서 그를 이겼던 볼셰비키 동지들을 부당하게 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런 문제들은 그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논의해 볼 만한 문제들이다. 하지만 팜은 클리프를 나쁘게 보이게 하는 데 너무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이런 논의를 같이 할 기회를 놓친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클리프가 묘사한 그 논쟁, 즉 노동자들을 위원회에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했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나는 이 논쟁에서의 레닌의 입장의 중요성을 최소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조하고자 하지만, 클리프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관점에서 그 입장의 중요성을 본다. 클리프는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오게 하려는 레닌의 노력을 레닌의 기존 관점과의 불연속성의 증거로 보는 반면 나는 그것을 연속성의 증거로 본다.

 

폴 다마토는 1905년 노동자 모집의 건에 대한 레닌의 입장이 부르주아 학계 레닌학 전문가'”들에게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았다.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불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클리프가 부르주아 학계 레닌학 전문가’”들과 같은 의견이게 되는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독해에 힘을 실어 주게 된다는 것이다. 클리프에 따르면 레닌은 오직 그의 지지자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안된 노선을 부정해야 한다고 설득함으로써만 비로소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모집하자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레닌이 현실에 대해 틀렸다고 주장하는가? 글쎄, 내가 <레닌 재발견>에서 근래의 직접적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몇 년간 외국에서 살아야 했던 레닌보다는 몇몇 구체적 현장 상황에 대해서 아마 더 잘 알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다. 3차 당대회 의사록을 연구하면서 나는 경험적 현실에 대해 매우 흥미롭고 초점이 잘 맞추어진 논쟁을, 레닌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한 논쟁을 보았다.

 

나는 이 논쟁의 주변을 찾아서 돌아다니며 간접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지하 활동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있는 그대로) 정말 많이 배웠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클리프의, ‘현명한 레닌 vs. 노동자들을 가까이 못 오게 하고만 싶어 하는 바보 같고 거만한 위원”’들이라는 조야한 신파극에 대해 굉장히 심란해졌다.

 

르블랑은 레닌이 명백히 옳고 위원들이 틀렸다고 선언할 정도로, 정말 1905년 초 러시아 지하활동의 경험적 현실에 대한 자신의 지식에 대해 충분한 확신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확신을 공유하지 않는다. 하지만 클리프가 제3차 당대회에서의 논쟁에 대해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주는지 아닌지의 문제에 비하면 이 문제는 부차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누구든 어떤 저술가에게 가해진 비판에 맞서 그 저술가를 방어한다면, 명시적인 언급이 없더라도 그들은 그 저술가가 말한 것을 인정한다고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클리프의 사실관계상의 주장 중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바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클리프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창피한 실수들만 조롱하는 것은 표리부동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르블랑과 다마토가 레닌에 반대한 당대회 대표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따온 주장들을 버팀목 삼았음을 믿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그저 그들에게, 이 주장에 대해 무슨 증거를 갖고 있는지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뿐이다.

 

또한 우리는 르블랑과 다마토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드러난 반노동자적 편향에 대해 클리프와 부르주아 학계 레닌학 전문가모두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당대회에 대한 클리프의 설명이 옳다면, 레닌은 그들로 하여금 지역 위원회에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것을 찬성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갖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안되었던 노선에 반대하도록 해야 했다.” 나는 그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런 식의 독해에 매우 반대한다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1912년 프라하 협의회

 

지난달[이 글은 20122월에 쓰여졌다.] 20121월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WP)의 제6(혹은 프라하) 협의회의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최소한 이것이 협의회의 공식 명칭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그리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많은 이들이 프라하 협의회를 순수하게 볼셰비키만 모인 것으로, 그 전까지 RSDWP 내부의 한 분파였던 볼셰비키를 분리된 당으로 구성하기 위한 명시적인 목적으로 소집된 것으로 여겨 왔다. 이제 우리는 분리된 정치 조직으로서의 볼셰비키의 100주년도 기념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일반적인 통설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볼셰비키는 당이 아니었다고 팜 빈이 주장함으로써 이 통설은 도전받게 되었다. 비록 팜의 비판은 클리프를 겨냥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클리프의 입장은 더 널리 퍼져 있는 통설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클리프의 입장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팜의 주장을 반박하고 통설을 옹호하면서, 폴 르블랑은 지노비예프, 크룹스카야, 트로츠키, 아이작 도이처와 나를(참으로 독특한 조합이다!) 인용한다. 그는 스탈린(프라하 협의회를 새로운 종류의 당을 여는 첫 협의회로 본 1938<당 약사 강의: Short Course of party history>를 쓴 장본인)과 반레닌주의 학계 역사학자 카터 엘우드(Carter Elwood: 영어로 된, 협의회에 대한 가장 자세한 사실적인 연구의 저자)도 인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르블랑은 나를 제대로, 정당하게 인용한다. 나는 내가 <레닌>(2011)을 출간했던 작년 봄까지는 그러한 통설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새로이 이용 가능해진 원자료들에 집중해서 그 협의회와 그 기간 동안 RSDWP의 매우 복잡한 내부 정치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고 내 판단을 수정해야 했다. 이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팜의 편을 든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그들의 분파를 하나의 분리된 당으로 조직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그랬다는 것을 협의회 직후에 강력히 부인했으며, 그 부인은 정당한 것이었다.

 

나는 팜과 내가 서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 결론에 다다랐다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 같고, 그렇기에 이 견고하게 확립되었던 통설에 공개적으로 도전한 공적은 팜에게 있다. 팜은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진 레닌의 몇몇 선언들에 대한 자신의 독해에 기초해 그렇게 했다.

 

팜이 인용한 <레닌>의 구절들은 이 책에 고유한 것이 아니다. 비슷한 정서가 1911~1912 레닌 저작선집에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영어로 읽어도 읽기 어려운데, 망명 조직들과 정치 경향들에 대한, 해독하기도 힘든 기호나 약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카터 엘우드의 1982년 글 당 협의회를 소집하는 기술”(최근에 <The Non-Geometric Lenin>(2011)에서 몇 가지 중요한 수정과 함께 재출간되었으며, 이 글은 레닌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 중요한 학자의 회고 글 모음집이다)을 다시 읽은 결과 프라하 협의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엘우드의 글은 1912RSDWP 정치공학의 놀랄 만큼 복잡한 속사정에 대한 훌륭한 사실적인 소개이지만, 나에게는 그 해석의 틀이 매우 불만족스러웠다. 협의회와 그 맥락에 대해 파악하려고 노력하면서 처음에 나는 그저 엘우드가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가기만 했지만, 곧 새롭게 이용 가능해진 원자료들이 더 독립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협의회 그 자체에 대한 부분적인 속기록(남아 있는 것 전체)1980년대 말에 소련 신문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2008, 협의회 기록뿐만 아니라 19128월에 비엔나에서 트로츠키와 다른 이들에 의해 소집된 대항 협의회에 대해 새롭게 발견된 기록, 그리고 가능한 모든 분파적 관점에서 사건들에 대해 논평하는 250개가 넘는 추가적인 문서들까지 포함하는, 11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 출간되었다(Konferentsii RSDRP 1912 goda [Moscow, 2008]).

 

나는 매우 최근에 와서야 이 풍부한 문서들을 살펴보는 것을 끝냈는데, 엘우드의 레닌에 대해 한 잡지에 기고할 서평 글을 준비하면서였다. 나는 서평에서 내 생각의 변화를 표명할 계획이었지만,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예상치 못한 온라인 논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더 빨리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새로운 원자료들을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과거에 그렇게 주장했던 것이 정당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유감이게도 레닌에 대한 더 세밀한 독해만 했어도 더 나은 이해를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이작 도이처가 틀렸고 팜 빈이 맞다. 그리고 단단히 자리 잡은 역사학적 통설에 대해, 레닌 자료에 대한 편견 없는 독해를 바탕으로 정당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이 시기 동안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적 지형은 상당히 복잡했는데, 두 주요 분파가 자기들끼리도 나뉘어 있었다. 중요한 쟁점들이 분파적 충성심을 가로질러 교차하고 있었으며, 주요 단층선이 외국 망명자들과 러시아에 기반한 활동가들 사이에, 그리고 유대인 분트 같은 전국적조직과 러시아 민족의 지하 조직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음의 논평은 부득이하게 매우 간략화한 것이며 요점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일어난 일은 대략 이랬다: 모든 분파들이 마땅한 대표권을 가지는 전체-당 협의회를 소집하려는 일반적인 목적은 1910~1912년의 기간 동안 사회민주당에 널리 공유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협의회가 지독하게 분열된 당을 단결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지역 사회민주당 조직에 전국적 지도를 제공하기 위한 러시아 자체 내부의 지도부 조직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닌은 그런 필요성을 정말 강력하게 느껴서 1911년 봄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의회를 소집했다.

 

가끔은 볼셰비키가 다수이고 가끔은 그렇지 않은,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진 조직들에서 일하면서 그는 19121월 프라하에서 2주 기간으로 열린, 결과적으로 주로 러시아 출신 젊은 활동가로 구성된 협의회를 진행했다. 볼셰비키가 압도적인 다수였던 그 협의회는 특별히 구체적으로, 이른바 청산주의적인 저술가들의 매우 작은 그룹이 당 밖에있음을 선언했다. 그리고나서 그 협의회는 적절한 절차에 따라 선출된, 중앙 당 기관의 대표성과 도덕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이상의 사실관계 설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논쟁이 되는 것은 우리가 레닌의 의도를 어떻게 독해할 것이며 그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지이다. 레닌과 다른 이들이 이 협의회를 소집하는 절차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당내의 그의 비판자들은(볼셰비키까지 포함하여 모든 분파에 걸쳐 있는 매우 넓은 범위의 인물들의 집단이었다) 그의 의도는 오직 볼셰비키 분파만의 이익을 위해 당 기관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협의회는 그 자체로 볼셰비키 분파의 모임에 불과하며, 거기서 선출된 중앙위원회는 어찌됐든 당 전체에 미치는 권한이 없다고 선언했다. 레프 트로츠키가 특별히 열심히 주창했던 이런 비판이 이후의 통설의 기원이 된 것이다.

 

새로운 문서들에서(비록 기존에 출간된 레닌의 저작에도 분명히 있었지만) 매우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 비판에 대한 볼셰비키의 반응이다. 그들은 이것을 악랄하고 완전히 근거 없는 중상모략이라고 규탄했다. 협의회가 조직되고 있을 때, 협의회 기간 동안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그들은 시종일관 이 협의회가 분파를 막론하고 러시아에 있는 모든 지하 당 조직에 접촉하려는, 그리고 협의회에 그들 각자의 대표를 보내도록 요청하려는 선의의 노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경찰의 탄압과 트로츠키 같은 사람의 방해로 인해 생겨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진정으로 대표성 있는 협의회를 소집하는 데 성공했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볼셰비키들은 볼셰비키가 아닌 전국 조직의 대표들이 없었음은 인정했지만, 이는 협의회 조직자들이 요청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참석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에서 트로츠키가 연 대항 협의회(이른바 ‘8월 협의회’)를 공격할 때, 그들은 러시아 제국 아래 각 민족 부문의 지하 조직들의 참가라는 점에서 자기들의 협의회가 훨씬 더 대표성이 있다고(그리고 이는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나는 볼셰비키의 이러한 대응을 당시에 이루어졌던 여러 개의 의미심장한 논평들로 입증할 것이다. 이 사례들은 이 전체 기간 내내 강력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옹호되었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레닌. 협의회가 조직되는 절차에 대한 동료 볼셰비키들의 비판에 답하며, 그는 분파적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전개했다. 마지막 문장의 격렬한 비판은 트로츠키를 겨냥한 것이다.

 

분파들은 러시아 혁명의 계급들 간의 관계로부터 나온 것이다. 볼셰비키들과 멘셰비키들은 그저 1905~1907년에 객관적 현실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정식화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이런 분파들의 내적 발전만이, 즉 뿌리가 깊고 객관적 현실의 특정한 측면들과 그들의 사상이 조응하기 때문에 강력한분파들의 내적 발전만이 분파들 사이의 진정한 융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 진정한 그리고 완전히 단결된 당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로부터 하나의 실천적인 결론이 도출된다: 오직 이러한 두 강력한분파들의 작업에서의 화해만이, 그리고 오직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적이지 못한 청산주의나 소환주의적 경향을 깨끗이 제거하는 것만이, 진짜 당 정책[다시 말해 전체로서의 당을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두는 정책]을 대표한다. 쉽게도 아니고 순조롭게도 아니고 절대로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모든분파들의 쉽고 순조롭고 즉각적인 합병이라는 수많은 엉터리 약속에 기반을 둔 방식과는 구별되는, 진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단결을 가져오는 그런 정책을 말이다.(“The New Faction of Conciliators, Or the Virtuous,” October 1911, in Lenin, PSS 20:335~6 [번역은 라스 리]; 온라인 영어 버전은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 works/1911/oct/18b.htm.)

 

이것은 당에서 멘셰비키를 없애고 당을 하나의 분파만으로 한정함으로써 마찬가지로 쉽고, 순조로운방식으로 단결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의 선언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레닌의 분석은 또한 그가 멘셰비즘을 청산주의와 거의 동일시했다는 르블랑과 다마토의 주장에도 딱히 힘을 실어 주지 않는다.

 

지노비예프. 지노비예프는 협의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음의 문단은 협의회를 조직하기 위해 세워진 망명자 위원회의 선언으로부터 발췌한 것이다. 이는 협의회를 조직한 의도에 대해 당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하는 기본적 설명을 보여 준다.

 

[러시아] 지역에서, 모든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은, 멘셰비키뿐만 아니라 볼셰비키도, 그리고 브페료드[초좌파 경향] 그룹과 <프라우다>[트로츠키의 망명자 신문]와 연계된 노동자들도, 조화되어서 함께 일하고, 반면 거의 모든 곳에서 당 그룹과 스스로를 분리하고 우리 당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청산주의자들-합법주의자들(legalists)과 맞서서 함께 싸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은 협소한 분파적 기질에 대한 고려나 작은 망명자 서클들 사이의 경쟁에서 오는 고려 때문에 당 전체의 사업[협의회를 소집하는]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로 이 협의회[의 소집]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우리의 망명자 반대자들이 그러는 방식으로] 분열을 조장하려 하지 않는다.(Konferentsii RSDRP 1912, p. 126)

 

지노비예프의 선언은 망명자 분파 그룹들과 러시아 사회민주당 활동가들 사이에 존재했던 분파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지노비예프는 볼셰비키 반대파인 브페료드 그룹의 망명가들에게는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협의회에는 브페료드를 지지하는 러시아 노동자들을 포함시키고 싶어 했다. 실제로, 심지어 망명자 브페료드 그룹도 조직위원단에 참여하도록 요청받았지만(레닌과 지노비예프는 반대했지만, 사실이다), 그들이 거절한 것이었다.

 

오르조니키제(Sergo Ordzhonikidze). 이후에 스탈린의 중공업 담당 위원으로 유명해진 오르조니키제는 협의회 당시에 젊은 볼셰비키 활동가였다.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당 조직들과 접촉하고, 대표들을 획득하는(대표를 보낸다는 것은, 볼셰비키가 시작한 당 전체의 협의회를 조직하는 절차에 대한 그 지역의 지지를 의미했다) 등 협의회 조직에서 그가 한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없었다.

 

1911년 말에 그는 자신의 러시아 조직위원회(ROK)가 고의적으로 볼셰비키 편향의 협의회를 만들었으며, 그러기 위해 심지어 가짜 조직까지 만들었다는 취지의 비판(아래에 ZOKTK로 지칭된 그룹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게 누구인지 나에게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지는 말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구체적인 비판들에 대해 반박하고 나서, 오르조니키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ROK는 현재[1911년 가을]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ROK는 지역 조직들을 재건하기 위해 활동적인 사업을 수행했다. 잘 알려진 동지들 개인들뿐만 아니라 아직 명단에 오르지 않은 [소수]민족 당들(national parties)과 코카시언 지역 위원회(the Caucasian Regional Committee)와 다른 조직들을 접촉했다.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악질적인 분파인 ZOKTK가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처럼 한 분파의 협의회가 아니라 당 전체의 협의회의 소집을 향해 일해 왔고 일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반대하는 이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ROK는 당 전체의 협의회 소집을 해낼 것이다.(Konferentsii RSDRP 1912, p. 344)

 

스탈린과 프라우다. 프라하 협의회의 한 가지 결과는 러시아 자체 내에 합법적인 사회민주당 일간지를 창간한 것이었다. 지노비예프가 자신이 쓴 당의 역사에서 지적하듯이, <프라우다>는 볼셰비키들과 플레하노프의 당 멘셰비키들의 합작품으로 구상되었다. 스탈린은 19124<프라우다> 창간호의 사설을 썼고, 다음과 같이 간곡히 권유했다.

 

우리는 사회민주당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견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생명력 있고 강력한 운동은 이견 없이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의견 일치는 무덤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후에 발생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약간 무서운 농담이다! (라스 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견이 일치되는 지점보다 불일치되는 지점이 더 많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선진 노동자들은 자기들 내부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분파와 상관없이 그들 모두가 똑같이 착취당하고 있고, 분파와 상관없이 그들 모두가 똑같이 무권리 상태임을 절대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프라우다는 선차적으로 그리고 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서의 단결을,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단결을 요청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적에게 비타협적이어야 하는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는 양보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적들에 대한 전쟁, 운동 내의 평화와 조화로운 작업. 이것이 <프라우다>의 매일매일의 활동 지침이다.

 

스탈린의 글에 대한 공식 영어 번역은 fraktsii분파가 아니라 그룹으로 잘못 번역한다. 그래서 스탈린의 사설은 석 달 전에 있었던 프라하 협의회가 이미 분파 없는 당을 만들었다는, 아니 오직 하나의 분파로만 이루어진 당을 만들었다는 공식 스탈린주의 노선과 양립가능해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위의 서술들과 방대한 양의 다른 문서들은 프라하 협의회에서 레닌은 볼셰비키 분파가 당 자체가 될 것을 선언했다(도이처처럼) 말하는 게 얼마나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인지 보여준다. 진실은,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그 정반대의 내용을 활력과 끈기를 갖고 목청껏 선언했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들은 자신들이 분파를 막론한 당 전체의 협의회를 조직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거나, 그게 아니면 그들의 당내 적들이 주장한 것처럼 완전한 거짓말쟁이들이거나 이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어쩌면, 볼셰비키들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제 결과가 한 분파만의 협의회였고 한 분파만의 당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비합법 지하 활동의 존재를 옹호하고, 지하 활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한 청산주의자들을 강력하게 거부했던 당 멘셰비키들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르블랑은 협의회에서의 그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이 멘셰비키들의 수가 적었다는 이유로 이를 중요하지 않은 사실로서 무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압도적 다수인 RSDRP 협의회와, 어떤 종류의 멘셰비키든 환영받지 못할 볼셰비키 협의회 사이에는 분명히 원칙적인 차이가 있다.

 

협의회에는 의결권이 있는 14명의 대표들이 있었고 그 중 2명이 멘셰비키였다. 10%에 약간 못 미치는 수치이다. 두 대표들 중 한 명은 명백히 다른 멘셰비키들에게 손을 내밀려는 제스처로서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 이 멘셰비키들은 절차에 온전히 참여했고, 심지어 둘 중 한 명이 전반적인 정치적 상황에 대한 마르토프의 해석을 지지했던 논쟁까지 있었다.

 

물론, 볼셰비키가 확고한 다수인 어떤 당대회나 협의회에서도 그랬겠지만, 그의 제안은 부결되었다. 그래서 질문이 제기된다: 만약 당신의 분파가 곧 당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왜 적대 분파의 구성원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겠는가?

 

협의회는 특정한, 소위 “청산주의자” 출판물들의 기고자들이 이제부터 “당 외부"에 있다고 선언했다. (다마토는 협의회가 “공식적으로 청산주의자들과 그 옹호자들을 추방했다”고 서술한다. 이는 맞지 않다: 관련된 협의회 결의안에서 보이듯이, 협의회는 청산주의자들 전체나, 마르토프 같은 (청산주의의) “옹호자들”을 공식적으로 추방한 적은 없다.) 레닌은 다른 일부 멘셰비키 그룹들, 특히 마르토프의 그룹이 이러한 배제를 거부할 것을 전적으로 예상했고 그러길 바랬다.

 

망명자의 정치적 관점에서,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에 따르면 우리는 마르토프 그룹이 크게 보이는 망명자들 쪽의 렌즈를 통해 당을 볼 것이 아니라, 마르토프와 브페료드와 다른 그룹들은 굉장히 작고 영향력 없게 보이는 반면 당 멘셰비키들과 분파에 속하지 않은 사회민주당 노동자들이 실제로 아주 크게 보이는 러시아 쪽의 렌즈를 통해 당을 보아야 했다.

 

볼셰비키들은 볼셰비키가 아닌 라트비아인, 폴란드인, 유대인 등 [소수]민족 당(“national” parties)들도 초대했고 최소한 라트비아인들과 폴란드인들은 받는 것이 부적합했다고 진심으로 후회했다는 사실도 언급되어야 한다. 큰 틀에서, 프라하에서 볼셰비키가 다수였던 것은 볼셰비키들의 공공연한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망명자 그룹들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확보되었다.

 

이제 프라하 협의회의 역사적 기록에 대해, 즉 역사적 기억 속 이 협의회의 이미지에 대해 한 마디 하고 갈 필요가 있다. 내가 입증했듯이, 1911~1912년에 레닌과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프라하 협의회가 볼셰비키만으로 이루어지도록 의도되었다는 비판을 악랄한 중상모략으로 거부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 비판은 그렇게 중상모략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첫 번째로 (많은 부분 멘셰비키들이 먼저 나서서) 분파들의 조직적 분리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이념적으로 동질적인 당이라는 생각이 1914년의 배신 이후에 그리고 코민테른의 형성 이후에 더 좋아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되돌아볼 때, 1912년을 멘셰비즘과의 최종적인 결별로 기념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이 경향은 스탈린이 쓴 <약사>(1938)프라하 당 협의회, 1912. 볼셰비키들이 독립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되다라는 제목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스탈린의 교과서는 더 나아가 사건의 이런 해석으로부터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당은 기회주의적 요소들을 가진 당원들을 제거함으로써 스스로를 강화한다. 이것이 볼셰비키 당의 격언들 중 하나였고, 볼셰비키 당은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당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종류의 당이었다.” 내 생각에 이렇게 프라하에서 창당된 새로운 종류의 당이라는 스탈린주의적인 이미지가 계속 전해 내려온 것이 오늘날의 표준적인 이야기의 핵심 원천이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나 크룹스카야와 같은, 그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이루어진 회고 논평은 어떨까? 트로츠키는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었고 오직 사건들에 대한 평가만 바꾸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1912년에 레닌이 자기 분파의 이름으로 당을 찬탈한 것에 대해 맹렬하게 공격했지만 나중에는 이 찬탈이 정당했다고 느낀 것이다.

 

지노비예프의 이후 논평을 읽으면 협의회 당시의 문서에 반영된, 1912년의 그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어긋나는 몇몇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당 전체의협의회를 조직하려는 노력을 강조하지 않고 멘셰비즘을 단순하게 청산주의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나는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감안할 때 이것이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나중에 한 설명은, 심지어 그 자신의 초기 관점에 대한 설명으로서도 완전히 만족스럽다고 보기 어렵다.

 

지노비예프는 프라하 협의회에 대해 두 번 썼다: 20년대 초기에 저술된 그의 당사에서 일반적인 용어로, 그리고 1932년에 적어두었지만 1980년대에야 출판된 회고록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협의회에 대해 지노비예프가 특징짓는 상은, 내가 생각하기에 양가적이다. 한편으로 그는 분명 뒤늦게나마 볼셰비키가 분리된 당이 되었던 시기로 협의회를 묘사하고,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통설을 지지한다. 다른 한편, 그 스스로가 참여했던 사건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꼼꼼함이 일관된 서사를 방해한다. 이러한 양가성의 좋은 사례는 1932년 그의 회고록에서 보인다.

 

레닌(그리고 볼셰비키들)은 기회주의자들과의 완전한 절연과 분리된 볼셰비키 당의 창당이라는 생각에 곧바로 도달한 것이 아니라, 1911~1912년이 되어서야 도달했고, 심지어 그 때조차도 V. I.(한 정당 내에) 당 멘셰비키들,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폴란드인들, -라트비안들과 기타 세력들과의 연합을 계속 구성하고 싶어 했다[앞선 문단에서 지노비예프는 그러한 볼셰비키가 아닌 그룹들이 그의 분리된 볼셰비키 정당의 당원으로 초대받았고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전혀 외교적 술수가 아니었다.”고 썼다.](Izvestiia TsK KPSS, 1989, No. 5, pp. 194-5).

 

다시 말해서 레닌은 볼셰비키만으로 이루어진 당이라는 생각을 1911~1912년이 되어서야 떠올렸고 심지어 그때조차도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크룹스카야의 회고록은 오늘날의 통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르블랑은 그녀의 회고록에서 인용한다. “프라하 협의회의 결과는 러시아에서의 사업과 실제 활동에서의 진짜 지도력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당의 노선이 명확히 정의된 것이었다. 중앙위원회에서 단결이 성취되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어려운 시기에 사업을 이어나가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서술은 그의 주장을 전혀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 크룹스카야는 당, RSDWP가 프라하에서 일정 수준의 주요한 정치적 단결을 성취했고 이것이 러시아에서의 당 활동을 도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 결과는 협의회 조직자들이 언제나 목표로 했던 바였고 (크룹스카야도 그렇게 주장하듯이) 그것이 실제로 성취된 것이다.

 

협의회의 중요성에 대한 크룹스카야의 실제 평가는 다음과 같다:

 

프라하 협의회는 우리가 1908년 이래로 소집에 성공한, 당원 노동자들과 함께한 첫 협의회였고 여기서 우리는 러시아에서의 사업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효율적으로 논의할 수 있었고 이 사업에 대한 명확한 노선을 틀 지을 수 있었다. 당시의 쟁점들과 당의 임무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프라하 협의회의 결과는 러시아에서의 사업과 실제 활동에서의 진짜 지도력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당의 노선이 명확히 정의된 것이었다. 거기에 이 협의회의 엄청난 중요성이 있다.

(http://www.marxists.org/archive/krups kaya/works/rol/rol16.htm)

 

볼셰비키만으로 이루어진 당의 창당보다는 다소 소박한 엄청난 중요성이다!

 

협의회 참가자가 쓴, 영어로 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유용한 회고록은 피아트니츠키(Osip Piatnitsky)<한 볼셰비키의 기억>이다. 이 책은 정말로, 협의회의 복잡한 배경과 실제 경과에 대해 영어로 된 가장 좋은 소개이다. 피아트니츠키는 이 책을 1920년대 중반, 스탈린주의 정설이 자리잡기 전에 출간했기 때문에 그는 볼셰비키와 볼셰비키가 아닌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다양한 경향들의 청산주의 블록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묘사한다.

 

협의회의 시작 시기에, 오르조니키제의 조직위원단은 당내 모든 조류와 조직들이(플레하노프, 고리키, 브페료드 그룹,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사회민주당과 다른 청산주의자 흐름들이 초대를 받았다) 협의회에서 대표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했다. 그래서 대표들이 중앙 당 기구를 선출할 권리를 갖고 전러시아 당 협의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피아트니츠키는 쓰고 있다.

 

결론: 참가자들의 회고록은 비판적으로 독해될 필요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은 팜이 취한 관점을 확증해 주며 새롭게 출간된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폴 다마토는 이 쟁점 전체가 우리가 잉크를 낭비할 이유가 없는 문제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1917년의 궁극적인 결과가 두 개의 분리된 당의 존재였기 때문에, 이 결과가 도출된 과정에 대한 정확성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분열한 정확한 날짜에 대한 논쟁이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이 중요한 발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 줄 수 있는가?”).

 

나는 정확한 날짜의 정확성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핵심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아이작 도이처가 프라하 협의회에서 레닌은 볼셰비키 분파가 당이라고 선언했다고 서술한다면, 그리고 폴 르블랑이, 비판하는 사람이 가져온 새로운 증거를 검증해 보지도 않고 도이처의 권위를 빌려 그 사람을 침묵시킨다면, 심지어 도이처조차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진짜 논쟁을 위한 길을 닦는다.

 

프라하 협의회에 대한 통설은 보다 큰 볼셰비키 역사 해석의 일부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스탈린의 <약사>1912년 협의회를,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 기초한 새로운 종류의 당을 만드는 과정의 정점으로 만든다. 이는 볼셰비키 역사에 대한 특정한 해석으로서, 내가 보기에는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스탈린은 자기 버전의 사건들로부터 다양한 교훈들, 예를 들어 당에서 기회주의를 계속적으로 제거해야 할 필요성 등을 이끌어낸다.

 

그러면 조직적 윤리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만약 레닌의 진짜 목적이 볼셰비키를 분리된 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의 공개적인 부인을 매우 냉소적인 방식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다마토는 이렇게 논평한다:

 

분열을 성취하기 위해, “볼셰비키의협의회는 스스로를 볼셰비키의당으로 선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RSDLP라고 선언한 곳에서 청산주의자들과 그 옹호자들(마르토프와 기타 주요 멘셰비키 지도자들을 포함하는)을 정식으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처리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더 유리했다. 그리고 프라하 협의회는 바로 이렇게 한 것이다. 레닌이 국제 사무국의 인가와 함께 얻을 수 있는 공식적인 승인과 예산을 원했기 때문에 이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었다.

 

레닌의 이중성(미안하지만, “전술적으로 유리한 교묘한 처리”)에 대한 다마토의 묘사는 당시 레닌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했던 이들이 묘사했던 바와 본질적으로 똑같다. 다마토는 레닌의 행동을 비난하기보다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다를 뿐이다. 결국 레닌이 유럽인들을 속이고 당 예산을 얻어내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는가!(참고로, 만약 레닌의 목표가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면, 그는 꽤 심하게 실패한 것이다: <The Non-Geometric Lenin>에 실린 엘우드의 유익한 글 레닌과 19147월 브뤼셀의 통합협의회를 참고하라.)

 

나는 그 어떤 좌파 조직의 회원도 아니므로 이런 식의 무심한 냉소주의가 지배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평할 수가 없다. 나는 다마토가 오늘날의 쟁점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견지할지 매우 의심스럽다. 하지만 역사가로서, 나는 레닌이 이런 식의 옹호에 대해 매우 불쾌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 레닌이라는 사람은 영리한 사람이었어. 진짜 의도한 것과 정반대로 말함으로써 분파적 이익과 재정적 이익을 챙겼지! 좌파의 다마토와 우파의 엘우드와 달리, 나는 레닌이 그 사건 동안 진심으로 말하고 말한 대로 생각하며 정직하게 행동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설명해 보자. 만약 통설이 맞다면, 그리고 정말 레닌이 볼셰비키 분파를 전체로서의 당과 동등한 위상으로 만들기 위해 프라하 협의회를 이용할 의식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그는 당대에 그의 정적들과 카터 엘우드같은 박식한 반레닌주의 역사가들로부터 받는 그런 혹독한 비난을 정말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된다. 그가 그런 비밀스러운 의도를 조금이라도 가졌다는 것은 협의회를 소집하는 절차 자체가 심각하게 부정직했고 특정 단체에 가능한 한 많은 해를 끼치려는 불충한 방식으로 계산된 것임을 의미한다.

 

새 중앙위원회가 당 전체의 기관에 미치는 도덕적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은 당시에 트로츠키로부터 비난받았던, 바로 그 놀랄 만큼의 뻔뻔스러움이 되었을 것이다. 볼셰비키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정치적 분파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조종하는 지도자가 추종자들(지도자의 비밀스러운 목표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시행하기 위해 애쓰는)과 잘 속는 바보들(지도자가 겉으로 말하는 의도를 실제로 믿고 그것이 당 전체에 도움이 된다고 순진하게 믿는)로 둘러싸인 종교집단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레닌이 그런 비밀스러운 의도를 가졌다고 믿을 만한 실질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결론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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