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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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만든 사람’. 이것은 세상을 등진 소식과 칭송이 언론을 도배한 전직 대통령보다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님의 삶에 더 어울리는 표현이다. 증언 등을 통해 백남기 님의 오랜 진실된 삶이 드러나면서, 이처럼 이름없이 헌신해 온 분들이 곳곳에서 싸워 만들어 온 민주주의가 왜 이 지경이 됐는가 한탄이 커지게 된다.
1차 총궐기에서도 바로 이런 분노와 위기감이 13만 명이나 모이게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같고도 다른 13만 개의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들은 차벽이라는 ‘불법’과 물대포라는 ‘폭력’에 가로 막혔다.
백남기 님은 누구보다 분노했고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용기있게 맨 앞에서 저항하다가, 정권과 경찰이 휘두른 잔인한 ‘불법과 폭력’의 처참한 희생자가 되고 마셨다. 역학계산에 따르면 그날 물대포의 위력은 27톤 덤프트럭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과 맞먹었다고 한다.
그 가공한 파괴력이 내려쳐진 것은 바로 ‘쌀값 보장’을 요구한 70대 노인의 머리 위였다. 이것이 만약 의도치 않은 실수였더라도, 가해자는 당연히 참을 수 없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나타내야 마땅하다. 하지만, 손톱만큼의 관심, 사과, 걱정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실수가 아니었고, 이런 결과를 예상한 명백히 의도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백남기 님과 뜻을 같이 한 사람들에 대한 막말과 보복만 비처럼 쏟아지고 있다. ‘체제 전복과 헌정 파괴 세력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 것이니 소요죄로 처벌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총을 쏴서 사람이 죽어도 정당한 공권력 행사로 본다’, ‘백남기 씨는 물대포가 아니라 한 시위대가 죽인 것이고, 그의 몸놀림은 북한 격술 고단자로 보였다’ …
절정의 막말은 집회 참가자를 ‘이슬람국가(IS)'와 비유한 박근혜의 입에서 나왔다. 박근혜는 살벌하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통해 탄압의 방향을 분명히 가리켰다. “민노총 위원장이 시위 현장에 나타나서 폭력집회를 주도했고,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을 기도한 통진당의 부활을 주장하고 이석기 전 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까지 등장했다.”
새누리당 대변인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 … 기존의 질서를 무시한다는 점 … 미리 기획하고 불법을 실행했다는 면” 등을 집회 참가자와 IS의 “공통점”이라고 부연했다. 물론 “IS는 총을 사용하고 불법시위대는 쇠파이프를 사용한다는 정도의 차이점”은 인정(?)했다.
살인진압의 범죄자들이, ‘폭력 시위대로부터 사회질서를 지키는 수호자’인 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역사상 초유의 민주노총과 산하단체 압수수색을 강행했다. 이어서 ‘민주노총 가맹조직의 간부와 통합진보당 간부 출신 등이 북한에 포섭돼서 지령을 받고 지하조직 결성과 총궐기 성사를 추진했다’는 조작 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제 심지어 ‘민주노총을 법외노조화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진보당 다음은 민주노총’이라던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위험은 한상균 위원장을 체포하기 위해서 조만간 조계사를 침탈할 가능성이다. 한상균 위원장은 최초의 직선제 덕분에 배출된 투쟁적 좌파 지도자이다.
비록 지도자가 바뀐다고 민주노총의 난점과 위기가 바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나 왔지만, 한상균 위원장이 없었다면 박근혜의 공격이 훨씬 더 수월했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래서 지금 이 정부의 칼날은 눈엣가시인 한상균 위원장을 정면 겨냥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 전개는 1차 민중총궐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그 이후의 탄압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1차 총궐기 때 경찰이 역대급 물량을 쏟아 부으며 시위대를 공격한 것이 그 명백한 증거다. 11월 14일 하루 동안 사용한 물대포 살수량이 작년 한해 총살수량의 24배에 달할 정도였다.
즉 이 정권은 1차 총궐기 참가자들에게 엄청난 폭력을 가해서 반발과 충돌을 유도한 다음, 그것을 빌미삼아 탄압과 민주주의 파괴를 정당화하려는 시나리오를 짜놓았던 것이다. 백남기 님에게 닥친 불행은 예기치 않은 변수였겠지만, 개의치 않고 원래 기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테러방지법, 복면금지법, 집회·시위 불허 등을 쏟아내고 있다.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지배계급 내 박근혜 분파의 민주주의 파괴 의지는 너무나 노골적이다. 박근혜의 싱크탱크로 급부상한 자유경제원 원장 현진권은 “과잉 민주화가 쌓이면 '천민 민주주의'가 된다. … 나라의 발전을 좀먹는 민주주의”라고 했다. <조선일보> 고문 김대중은 “민주사회는 체제 이질(異質) 요소가 인구의 5%가 넘으면 가차없이 차단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것이 곧 법치”라고 했다.
그런데 지배계급은 조급함뿐 아니라 두려움이 커질 때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러워하는 법이다. 경제적·지정학적 위기와 불안정이 조급함의 배경이라면, 두려움은 기층 민중의 단결과 투쟁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다.
즉 ‘2008년 이후 최대규모’라는 1차 민중총궐기의 성공이 그 배경인 것이다. 1차 총궐기는 오랜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노동·농민·빈민 대중조직과 주요 사회운동단체들의 결집을 성공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외연 확장의 가능성까지 보여 줬다. 이것이 계속 확대·발전한다면 박근혜 정부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의 탄압은 크게 두 가지를 노릴 것이다. 먼저 기층 민중운동 단체들이 고립을 넘어서 더 넓은 외연 확장을 이루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다. 더불어 기층 민중운동 단체들 사이에 다시 틈을 벌려서 분열을 일으키고 단결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래서 집요하게 ‘불법·폭력·종북’을 부각하며 시민사회 진영과 중간층이 민중진영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민주노총과 진보당을 연결시켜 공격하는 반면, 통합정의당 출범식에 새누리당 총장 황진하가 직접 참석해 축하한 것이다. 새누리당 전대표 유승민도 말했듯 “정의당 같은 진보세력의 방법론과 가치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하지만 종북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철저하게 배격해야한다”는 기조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노동·농민·빈민 대중조직과 사회운동단체들의 결집이 단단히 유지되고 기층과 지역으로 더 깊숙이 뻗어나가는 것이다. 종북몰이에 대해서도 단결된 목소리로 당당히 맞서고 방어해야 한다. ‘진보당 해산 반대나 이석기 석방 구호는 별로 나오지도 않았고 공식 요구도 아니었다’는 식의 회피적 대응은 옳지도, 적절치도 않다.
물론, 이것은 결코 배타성과 폐쇄성을 강화하는 방식이 돼서는 안 된다. 민중운동 진영을 시민사회 진영, 중간층과 분리·고립시키려는 노림수를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백남기 님에 대한 만행과 물대포에 분노한 시민·종교·문화계까지 참가해 더 폭넓은 대책위가 만들어진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12월 5일의 2차 투쟁은 이런 움직임과 목소리가 적극 반영돼야 한다. 또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노동개악만이 아니라 세월호의 진실, 국정화 반대를 위한 요구가 결합돼야 한다. 저들이 이 모든 것을 연결해서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런 방향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한다는 틀 속에서 ‘2차 총궐기의 기조로 평화집회를 내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 민중총궐기인가 시민대행진인가’가 고민돼야 한다.
이 상황에서 자유주의 야당은 이 정부의 반동을 막는 데 도움이 되기보단 짐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최근에 숨을 거둔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궤적이 보여주듯,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군부독재 하에서도 야당은 ‘사쿠라’ 소리를 듣기 일쑤였는데, 그나마 가장 비타협적이던 김대중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반면 김영삼은 훨씬 온건한 편이었고, 몇 차례나 군부와 타협을 거듭하다가 87년 이후에는 마침내 3당 합당까지 했다. 타협할 때마다 김영삼의 명분은 ‘반공’이었다. 75년에 박정희와 영수회담하고 유신에 타협할 때도 ‘베트남 패망과 공산주의의 위험’이 이유였다.
자유주의 야당과 그 지도자들이 능한 것은 기층 민중이 투쟁으로 일어설 때 거기에 올라타서 권력을 나눠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YH 투쟁도, 부마항쟁도, 군부독재 종식도, 전·노 구속도 다 김영삼의 공’이라는 식의 보도들은 망자에 대한 예의를 넘어선 역사 왜곡이다.
이런 해석에는 진정으로 역사를 만들어 온 어린 여성 노동자들, 평범한 학생들, 기층 민중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런 식이면 몇 십년 후에는 ‘문재인이 세월호 투쟁을 이끌고, 안철수가 국정화 반대 운동을 건설했다’고 기록될까 걱정된다.
며칠 전 백남기 쾌유 기원 서명전을 같이하고 뒤풀이에서 한 전농 선배 활동가의 말은 인상적이었다. ‘87년 초까지도 소수의 학생 활동가들은 집회는 해보지도 못하고 체포·연행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4·5·6월이 지나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모두 몰려나와 함께했고, 연행되지도 않게 됐다. 5일 밤새 시위하고 너무 피곤해 집에 가는 데 아직도 끄덕없이 노래하고 깃발 흔드는 그 학생들을 보면서 저들이 역사를 바꾼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런 변화가 가능할 것이고,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온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 온 백남기 님의 사돈은 이렇게 말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농성하는 사람들을 봤다. 기도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전혀 모르던 사람들도 자기 일처럼 와주시는 사람이 많은데, 네덜란드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라서 매우 놀랐다. 너무 감동적인 일이다.”
총궐기에 대한 평가나 나가자는 방향도 다를 수는 있지만, 지금은 함께 비를 맞고 손을 잡아야 한다. 이런 공동 투쟁 속에서만 신뢰가 쌓이고 힘을 키울 수 있다. 그 점에서 ‘민주노총이 노동진보 선거연합 정당을 만들어서 내년 총선에 대응하겠다’는 소식도 반갑다.
드라마 <송곳>에서 “지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혼자가 되는 게 두려운 것”이라는 대사에서 울컥했다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이게 잘 안된 지난 몇 년의 경험 때문 아닌가. 한상균 위원장 등 탄압받는 사람들을 지켜내고 분노한 민중의 2차, 3차 결집을 성공시키자.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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