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 복지가 실현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농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 쟁점에 주목하라
애덤 피셔(Adam Fisher)
최태규 옮김
[자본주의가 인간뿐 아니라 자연과 모든 생명체에 가하는 모순과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동물의 권리와 복지 문제는 새로운 쟁점이 돼 왔다. 보통 공장식 축산업에 대한 비판이 제기돼 왔지만, 이 글은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제기하며 고민과 논의의 발전을 자극한다. 이글의 필자인 애덤 피셔는 수의사로서 식용동물 복지에 대해 탐구해 왔다.]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15/10/animal-welfare-rights-peta-labor-workers/
2008년에 캘리포니아에서는 송아지고기용 송아지, 산란계, 번식용 암퇘지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더 넓은 공간을 만들어주자는 요구가 국민투표로 통과됐다. ‘계획2’라는 이름의 이 법안은 63퍼센트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이것은 동물권 및 동물 복지 운동가들에게 중요한 승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계획2는 사육 조건의 제한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한계가 있었고, 이 때문에 농장동물 복지의 두 가지 요점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 첫째, 새로운 사육 조건은 동물 복지의 전체적 개선을 가져올 수 없다. 둘째, 계획2의 제일 큰 문제점은 농장동물 복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즉 농장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서 침묵한다는 점이다.
사실 후자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다. 방목하여 기른 축산물만 골라 소비하는 온건한 소비자든 급진적인 동물 복지 운동가든 이 악순환의 고리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문제에는 대체로 관심이 없다.
‘온전히 잘 사는 삶’을 뜻하는 복지는 “하지 말지어다”식의 금지 법령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농장동물 복지는 농장 노동자의 복지와 단단히 맞붙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삶을 개선하고 싶다면 사육 시설뿐만 아니라 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해야 한다.
노동자 복지와 동물 복지
사람들은 우리에게 8시간 노동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선사한 노동자 투쟁의 성공처럼 동물 복지도 곧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러나 고기로 가공될 동물들에게는 8시간 노동 후 돌아갈 집이 없다. 그들은 직장에서 산다.
산업동물[소,닭,돼지처럼 경제적 이윤 창출을 위해 사육되는 동물]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동물은 노동자들이 하듯 단결해 교섭하거나, 파업을 벌이거나, 피케팅할 수 없다. 동물이 복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사람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동물이 원하는 것을 가장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존재가 그들을 돌보는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농장노동자들은 입법자들을 비롯해 축산업과 무관한 98퍼센트 이상의 일반인들보다 동물의 요구를 훨씬 잘 알아듣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하더라도 무지(無知)에 바탕을 둔 입법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다. 돼지 분만사에서 분만틀을 없애라는 요구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만틀을 없애 돼지가 자유로이 다닐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사육 환경의 개선이다.
그러나 돼지의 입장에서 분만틀이 없어지는 것은 더 크고 공격적인 돼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는 개악이다. 울타리 안에서 가장 난폭한 돼지에게 분만틀이 없어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가장 약한 돼지에게는 끔찍한 일일 뿐이다.
섣불리 분만틀 없는 분만사를 만들었다가는 돼지들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될 테고, 농장 노동자 대신 힘센 돼지들이 음식과 물을 장악해버려 온순한 돼지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질 것이다. 공격적인 돼지들이 자원을 차지한 상황에서 약한 돼지들은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만 3~4일에 한 번쯤 음식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유산하는 돼지들이 생길 수 있다. 이렇듯 분만틀 없는 분만사는 불가능하다. 만약 축산업 환경에 잘 훈련된 노동자들이 이 같은 문제 상황에 뛰어든다면 좀 더 현실적인 개선안을 내놓을 것이다.
최근 제정된 대부분의 법률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해방”의 시행 약속에 기반한 것들이다. 바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부터의 해방, 불편함으로부터의 해방, 통증으로부터의 해방,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해방, 두려움과 괴롭힘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물론 이 약속들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위해를 단지 피하기만 하는 데 국한된다. 적극적인 복지를 따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동물 복지운동의 목적은 동물에게 의미 있는 삶을 선물하기보다 고통을 덜어주는 데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지점에서 노동자의 복지가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노동자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돼지들 역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지역에서 수의사로 일하는 동안 동물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사육사를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사육법이 좀 더 복잡해지면서 사육사에게 동정심이나 직업훈련 이상의 무언가가 요구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농장 노동자의 임금 현실화가 동물 복지의 주요한 쟁점으로 올라가게끔 독촉한다.
초보 노동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동물 복지를 요구하면 노동강도는 더욱 세진다. 이제 노동자들은 줄지어 갇힌 닭과 돼지들을 대충 훑어보며 건강 상태나 사료를 잘 먹는지 살피기 이전에, 새로 생긴 법이 강제하는 대로 더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고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 축산업은 기술의 집약이고 좋은 동물 관리자는 육체적․감정적 에너지를 동물을 돌보는 데 쏟아야 한다.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농장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직업이 아니라 박봉의 허드렛일이라면 노동시간은 더 길어질 것이고, 작업 속도를 올리기 위해 동물을 거칠게 다루거나, 사료와 물이 제대로 공급되는지 점검하지 않고 소홀하게 넘어갈 수 있다. 무관심과 방치는 열악한 동물 복지의 가장 흉악한 운전자다. 사실 돼지 스톨(감금틀)과 닭 배터리케이지(철창우리)를 정당화한 주장 중 하나가 최소한 이런 학대는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명백한 동물 학대가 있다면 기반 구조 개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시 말해 그것은 노동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농업 노동자들이 사회가 기대하는 만큼의 이해심과 동정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직장을 걸면서까지 감정적 판단으로 동료나 상사의 학대로부터 동물을 구조하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보호받아야 하고 조직되어야 하며, 보복당할 두려움 없이 학대 행위들을 보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 이 같은 조직화는 계약사육 체계의 가장 열악한 면을 근절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현재 육계(브로일러종)의 90퍼센트가 계약사육되고 있는데 이것은 어마어마한 방치를 유발한다.
계약사육이란 병아리가 각각의 농장주에게 배달돼 그 농장주의 노동으로 길러지는 것을 말한다. 농장주는 축사와 사료급이기(먹이를 공급하는 기계)를 소유하고 물자와 노동을 제공하지만, 닭을 소유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닭의 복지에 투자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육주의 수입은 사료 소모량, 사육 개체수, 닭의 무게 등 눈에 보이는 성과에 좌우되고, 이것은 곧 육계산업의 심한 소득 격차로 이어진다. 미국에서 브로일러종을 사육하는 어떤 농가는 다른 동물을 사육하는 농가보다 더 높은 수익을 올리기도 하지만, 1년을 기준으로 계약농가의 5분의 1은 빈곤선에 한참 못 미치는 1만 8,782달러 이하의 소득을 얻는다.
이렇게 농장주의 수익을 쥐어짜는 것은 결과적으로 동물 복지에 악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농장주는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환기와 온도조절 장치를 포기할 수도 있고, 노동비 절감과 생산시간 증대를 위해 닭장 간의 위생 대책을 건너뛸 수도 있다. (이것은 질병 발생률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조합 결성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독제다. 육계 생산자들이 조직화된다면 수익의 불균등을 해소할 수 있다. 그들을 서로 경쟁하고 싸우게 만드는 계약생산에서 빠져나온다면 최저임금을 요구할 수도 있고, 많은 소비자가 원하고 동물에게도 필요한 기반 시설에 돈을 투자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동물 복지 옹호자들의 의도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고 노동자들은 그림 밖으로 내팽개쳐지는 예를 들어보겠다. 그것은 바로 “방목”해서 기르라는,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요구다.
동물 복지 옹호자들의 첫째 실수는 대문을 열고 동물들을 마음껏 야외에 풀어놓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익하다는 자신만만한 주장이다. 이 말대로 한다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거나 기생충에 감염될 확률이 무척 높아진다. 예컨대 육우 산업에서 혹독한 기후에 소들이 노출되는 것은 흔하게 제기되는 경제 문제이자 복지 문제다.
소들은 지독한 추위에 얼어 죽을 수도 있고 뜨거운 여름에 높은 체온으로 인한 질병에 걸려 죽기도 한다. 양돈과 양계에서 시행되는 실내 사육 시스템은 이런 극한 상황에서 동물들을 보호한다.(미국에서 가장 많은 돼지가 사는 미네소타와 아이오와는 겨울에 심하게 춥다.)
둘째, 옹호자들은 동물들을 야외로 보내면 노동자들도 야외로 함께 나가 악조건과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돼지를 야외로 내보내 기생충도 주워 먹고 태양열에 고통받게 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열사병과 동상의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동물과 노동자의 복지는 하나로 수렴된다.
산업적 이익
미국인들의 상상 속에서 높아진 기대처럼 가족농장이라 해서 좋은 것만 모아 놓은 저장고도 아니고, 기업농장이라 해서 악의 화신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동물 복지만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수의사로서 작은 가족농장들을 방문했었는데, 어떤 곳에서는 돼지를 말뚝에 묶어 기르고 닭은 환기가 안 돼 숨조차 쉬기 힘든 우리에 가둔 상태였다. 반대로 청결한 시설, 잘 먹여서 건강한 동물, 동물의 안위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농장 또한 아주 여러 곳을 실제로 가봤다.
우리가 동물과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산업화된 축산에 주목해야 한다. 규모가 큰 기업의 경우 노동자를 조직화하고 동물을 관찰하는 것 모두가 용이하다. 노동조건과 동물복지를 개선하느라 드는 비용을 조절하는 것도 더 쉽다.
또한 축사, 기계, 도구, 수의사의 관리 등에 들어가는 고정비용을 분산시키는 규모의 경제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이윤의 이름으로 동물을 학대하거나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더 큰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고, 우리는 모두에게 이로운 부분만을 골라내 발전시킬 수 있다. 현대 상업농장의 비용 절감을 거부하는 것은 자본가의 부정행위만큼이나 기술적 전진을 혼란하게 하는 역행적인 반응이다.
동물 복지 옹호자들의 유기농 먹이 지급, 방목 요구에 의해 가장 폐업당하기 쉬운 것은 오히려 생산적인 면에서 효율성이 더 떨어지는 형태인 소규모 가족농이다. 가족농들은 법의 요구(50마리 규모의 돼지우리를 짓는 것보다 3,000마리의 돼지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복지를 갖춘 축사를 짓는 것이 더 빨리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요구)를 만족시킬 사육 시설을 위해 자본금을 확충하기 힘들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수익과 노동자의 숙련을 위해 애쓴다.
종전의 농업시장 효율성을 타개하는 것도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는 평균 2,200만 마리의 젖소가 1,166억 파운드의 우유를 생산했다. 2012년에는 930만 마리의 젖소가 1,677억 파운드의 우유를 생산하게 됐다.
다시 말하자면 1950년대의 기술로 2012년의 생산량을 구현하려면 약 3,000만 마리, 거의 3배의 젖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규모로 산업화된 축산업의 효율성 덕분에 곡식을 먹고, 메탄가스를 내뿜고, 쓰레기를 만드는 소를 2,000만 마리나 적게 키워도 된다.
젖소농장의 대형화는 설비 개선, 현대화된 착유실, 먹이 개선, 폐기물 조절 시스템의 효율화와 같은 기술로 젖소의 수는 줄이고 우유의 생산량은 늘렸다. 누군가는 이런 농장들의 동물 복지에 대해 불만스러워할 수도 있지만, 젖소를 2,000만 마리나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산업화된 농법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동물 복지 옹호자들의 불만 대상인 젖소가 2,000만 마리만큼 적어진 것이다.
동시에 이런 기술에 필요한 비용은 산업을 통합․정리하는 역할도 했다. 젖소농장의 수는 1950년 3백70만개에서 2012년 6만 4000개로 급격히 줄었고, 1982년에 거의 33만개였던 돼지농장이 2012년에 6만 3000개로 줄어들었다.
가족농에 대한 동경이 차고 넘칠 동안 이러한 통합 과정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가족농의 수는] 하락세를 보여왔다. 대규모 시설이 생산하는 폐기물의 높은 집중도는 식수를 오염시키고 도시와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이런 위험들은 규제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동물 복지처럼 질적인 것에 비해 규제의 대상인 폐기물 관리 같은 것들은 양적인 접근으로 시행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개로 나뉜 소규모 작업장을 일일이 감시하는 것보다 천 마리씩 기르는 대규모 젖소농장을 정부가 감독하는 것이 훨씬 쉽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돼지 생산에서 분만틀을 없애고 이동이 자유로운 축사로 개량할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소규모 가족농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돼지 생산 회사인 ‘스미스필드’ 등이다. 아마 이들의 자본력이라면 더 넓고, 횃대까지 있는 훌륭한 케이지로 이루어진 계사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생산 시스템
목가적인 이상향이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가족농은 노동자와 동물에 투자할 자본 문제에서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에 노동력 착취에 강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산업화된 농업 환경은 집단적 노동체계를 만들었고 인간과 동물의 삶을 개선시킬 진보를 이뤘다. 예컨대 기계화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노동에서 노동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동물들의 삶을 개선하려면 아직도 지금의 시스템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자애로운 결과를 향한 산업효용이 필요하다. 농업 노동자들의 공정한 임금과 권리 방어를 위해 함께 싸우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농부들의 목소리와 동물을 돌보는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요구된다.
어떤 경우에서는 사육틀을 금지하고 케이지 크기를 늘리는 조치가 유익할 수 있지만 이것만 강조하는 태도는 노동자들의 중요성을 간과해버리곤 한다. 농장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에 실패한다면 동물 복지의 개선은 무망해진다. 노동자 복지는 동물 복지의 선행조건이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 ‘변혁재장전’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변혁 재장전’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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