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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레닌주의 논쟁 - 신화를 벗겨내고 남은 유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11. 17.

찰리 포스트(Charlie Post)

번역자: 김민재


 

[찰리 포스트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이며 미국의 사회주의 조직인 연대’(Solidarity) 소속의 활동가이다. 레닌주의란 무엇이고 오늘날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토론에 기여하는 글이다. 이 글의 출처는 http://rs21.org.uk/2015/03/08/leninism-2/ 이다.] 




두 가지 사태 발전이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에 대해 재개된 논쟁에 불을 붙였다. 한편으로는, “신좌파 정당들의 출현과 혁명적 좌파의 계속된 위기(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이하 SWP]의 최근 분열에서도 드러난)가 있었다. 이는 혁명가들로 하여금 혁명적 노동계급운동이 어떻게 건설되고 조직되어야 하는지와 관련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교의의 상당 부분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학문적 흐름, 특히 라스 리(Lars Lih)의 작업들이 1914년 이전 사회민주주의에서 러시아 볼셰비즘의 위상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이해에 진지한 도전장을 던졌다. 21세기 혁명적 정치에 대한 레닌주의의 계속되는 유효성의 성패가 이 논쟁에 달려 있다.

 

하지만 여기서 레닌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합의된 바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구별되지만 서로 관련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첫 번째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에 대한 독특한 이론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1903)에서, 혹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1912년에 분열되던 시기에 새로운 종류의 당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이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 조직은 유럽 사회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의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 대한 거부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먼저 원래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전체로서노동계급을 대변하려고 시도하다가, 혁명가들을 기회주의자들’(레닌이 개량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 용어)과 섞으면서 모두를 포괄했다. 레닌은 혁명적 강령을 중심으로 단결된 동질적인, “후진적인노동자들과 그들의 개량주의 지도자들로부터 분리돼 조직된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위의 당을 건설할 필요성을 이해했다.


두 번째로, 그런 사회민주주의는 조직상 너무 탈중심화돼 있어서 개량주의자들이 당의 결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거기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볼셰비키들은 하나의 권위있는 중앙 지도부가 모든 당 조직들의 입장과 활동을 결정하는 민주집중제를 개척했다.

 

주로 맑스-레닌주의로 체계화되는, “레닌주의의 두 번째 의미는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맑스주의 이론에서 한 구분되는 실체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쓰든 반스탈린주의 혁명가들이 쓰든, “레닌주의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로, 노동운동에서의 기회주의와 개혁주의,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인 제국주의/독점자본주의에 대한 뚜렷하고 정확한 설명이다. 이런 이론적 혁신은 한데 묶여 1917년 이래 혁명적 실천의 기반으로 제시된다.

 

불행히도, 레닌주의에 대한 최근 논쟁의 많은 부분은 맑스주의 이론과 사회주의적 실천을 혼동하는 특징을 보인다. 맑스주의 이론은 다른 모든 과학 이론들처럼 세계에 대해 비교적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설명을 제공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론은 추상에서 구체로움직인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차이로부터,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를 거쳐, 자본주의 노동과정에서 잉여가치의 생산을 넘어, 자본의 집적과 집중 그리고 산업예비군의 재생산으로, 나아가 자본주의적 경쟁과 마침내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불가피성으로 말이다.


쉽게 말해서, 맑스주의 이론은 역사유물론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에 뿌리를 두고 사회 현상에 대해 비교적 추상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혁명적 조직에 대한 이론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생산관계가 어떻게 노동계급 의식의 동역학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설명에 기반을 둘 것이다. 모든 맑스주의 이론은 개념적으로 통일성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실제 역사를 설명해내야 한다. 에르네스트 만델이 말했듯이: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물질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향들은 경향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들은 과학적인 오류의 부산물이다. ‘발전 법칙이 더 이상 구체적 역사의 실제 과정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이런 발전 경향들을 발견하는 것은 더 이상 이 과정의 혁명적 변혁을 위한 도구가 아니게 된다.

 

대조적으로, 사회주의적 실천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사회주의 투사들의 실제 활동을 가리킨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위한 맑스주의 좌파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는 불일치가 종종 있어 왔다. 다른 말로 하면, 이론과 정치적 실천 사이에 일대일 대응은 없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에게, 이론과 실천의 균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회민주주의이다. 독일을 포함하여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1950년대 초반까지 표면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충성을 유지했지만 그들의 실천은 이미 1차 대전 10년 전에 그들의 이론으로부터 벗어났다.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갖가지 이론들과 정치적 전략들 사이에도 비슷한 불일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 이른바 수요의 부족을 강조하는 과소소비이론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사회민주주의적이거나 케인스주의적인 수요 관리정책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개량주의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과소소비설의 가장 수준 높은 옹호자들 중 하나는 1914년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혁명적 진영의 지도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주장은 특히 1914년 이전 레닌과 볼셰비키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레닌과 그의 동료들은 실천적으로는 혁명적 조직과 전략의 혁신가였지만, 그들의 이론은 칼 카우츠키로 가장 잘 대표되는, 사회민주주의의 정통 맑스주의경향 주류 내부에 머물렀다. 21세기 혁명가들이 해야 할 일은 이 괴리를 인식하고, 역사적 발전의 관점에서 레닌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혁명적 실천에서 그들이 이룬 약진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레닌의 당 개념이라는 신화

 

그렇지 않다는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1914년 이전에 레닌이나 볼셰비키 당의 다른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조직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적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볼셰비키의 조직상의 실천은 전쟁 이전의 나머지 사회민주주의 조직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상의 혁신은 볼셰비즘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론화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라스 리의 <레닌 재발견: Lenin Rediscovered>은 레닌이 이미 1903년 정도에 사회주의 조직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과 결별했다는, “레닌주의좌파든 반레닌주의 우파든 모두 공유하는 생각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제시한다. 그는 레닌이 (스스로 말했듯이) 전쟁 이전의 지배적인 사회주의 조직 모델인 독일 사회민주당(SPD)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레닌은 그저, 사회주의 정치와 조직 모두의 문제에서, 전쟁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에 대한 꽤 충실한 지지자였다. 카우츠키의 저작들, 특히 1891SPD의 에르푸르트 강령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거쳐, 리는 레닌이 러시아의 에르푸르트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카우츠키와 레닌 모두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의 특별함, 즉 사회주의가 [소수 지식인들의] 청사진의 산물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강력한 단언을 할 드레이퍼(Hal Draper)<사회주의의 두 가지 정신: Two Souls of Socialism>에서와 같이 이해했다.


그보다 일찍, 맑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 이론가들(그리고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전통 속에 있는 많은 맑스주의 이후의 이론가들)은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이 하는 투쟁을 협소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집단주의적이고 계획된 사회 질서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지식인들이라는 계몽된 엘리트가 후진적인 대중에게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었다.


반면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카우츠키는 맑스주의가 노동자들 스스로 하는 매일 매일의 자기조직화와 자기 활동에 사회주의를 뿌리내리게 했음을 명확히 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사회주의 지식인계층과 가장 활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인노동자 활동가들이 함께함을 통해서 건설될 것이었다.

 

레닌이 에르푸르트적 맑스주의자로 남아 있었다는 리의 논지는 1912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에서 논쟁의 의미에 대해 재개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혁명적 좌파에 속한 많은 이들에게, RSDLP의 볼셰비키 분파가 다수파로서 권리를 행사하기로 한 결정은 실질적인 분리와 새롭고, 전적으로 혁명적인 당의 탄생이었다.


분명히, RSDLP1912년 이후에는 모든 실질적인 목적들을 위해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소수파인 대부분의 멘셰비키는 다수파의 지도력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레닌과 지지자들은 그들이 그저 당대회 민주주의”(RSDLP 프라하 당대회의 민주적인 결정을 시행하는)를 방어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소수파는 생각이 다를 때 공개적으로 다수파에 반기를 드는 것까지 포함해서 자유롭게 당원 자격을 유지하고 계속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실천적으로는 RSDLP를 분리시켰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다수파로서의 권리 행사를 분리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당 이론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심지어 실천적으로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19172월과 3월에 서로 계속 만나서 함께 행동하고자 했으며, 분열은 RSDLP의 기층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1921년 이전에 볼셰비키의 조직상의 실천이 1923년 이후에 레닌주의의 이름으로 공산당들에게 부과되었던 실천과 전혀 다르다는 상당한 양의 역사적 증거가 있다. 마르셀 리브만(Marcel Liebman)<레닌주의 연구: Leninism Under Lenin>, 1923년 이후의 레닌주의자들이 의도한 의미로 정치적으로 동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볼셰비키 분파와 RSDLP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론과 전략, 특히 다가오는 러시아 혁명에서 자본가들, 노동자들 그리고 농민들의 역할에 대해 활기찬 토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경향과 분파는 언제든 결성될 수 있었으며(그저 당대회 사전토론의 한정된 기간 동안이 아니라) 자신들의 견해차를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있었다.


레닌은 첫 러시아 혁명이 퇴각하고 있었던 19064월에 쓴 과거 볼셰비키그룹에 속했던 통합 당대회 대표단이 당에게 보내는 호소에서 공개적 토론의 필요성을 상당히 명확히 했다. RSDLP가 다시 단결한 것과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분파가 해산한 것을 극찬하면서도, 레닌은 농민의 투쟁에 대한 태도, 짜르 하에서의 두마(의회)에 대한 참여에 대해 계속 존재하는 당내의 견해차, 짜르 체제에 대한 무장 반란을 준비하기 위한 지속적인 지하 조직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우리는 모두 민주집중주의 원칙에 대해, 모든 소수파와 충실한 반대파의 권리 보장에 대해, 모든 당 조직의 자율성에 대해, 모든 당직자가 선출되어야 하고 당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소환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조직의 원칙들이 실천적으로 준수되는 것이, 이 원칙들의 진정성있고 일관된 적용이 분열을 방지하기 위한 보증이라고, 당내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당대회의 결정에 대한 모두의 복종과 함께 엄격한 조직적 단결과 완전히 일치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보증이라고 간주합니다.

 

리가 주장했듯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모두를 포함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921년 이전에 언제나 민주적 집중주의의 민주적 측면을 강조했다. 쉽게 말해서, 볼셰비키 평당원들은 20세기 초반 짜르 독재라는 조건 하에서도, 한 세기 후 자본주의 하 합법적 조건에서 레닌주의를 내건 조직들의 회원들 대부분보다도 더 당 노선에 대해 (공개적으로도) 반대할 민주적 권리를 더 많이 누렸고,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해 더 큰 민주적 통제권을 가졌다.

 

오늘날 레닌주의의 외피를 쓴 조직적 형태는 1924년 레닌의 죽음 이후에 발명된 것이다. 192310월 독일 혁명의 패배 직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도력은 이 역사적 후퇴의 뿌리에 대한 모든 정치적 토론을 축소시켰다. 그 대신에 지노비에프 지도력 하의 코민테른은 독일공산당(KPD)에서의 조직적 규율과 이데올로기적 동질성 부족이 패배의 원인이라며, 새롭게 설립된 공산당들을 볼셰비키화하려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혁명적 좌파가 레닌주의민주적 집중주의라고 여기는 것 극히 제한된 기간을 제외하고는 조직된 소수파(지도력을 얻기 위한 분파든 이데올로기적 경향이든)를 금지하는 것, 혁명적 운동 내부의 견해차가 다른 계급의 힘의 영향을 반영한다는 생각, 전술을 지시할 능력을 비롯하여 상위 기구의 의심할 수 없는 권위에 대한 조직 평회원들의 복종, 그리고 지도부의 선정을 포함하여 각국 조직의 정치적 지향을 결정할 수 있는 국제적 중앙 지도부의 궁극적 권위 의 기원은 1923년 이후에 전개된 볼셰비키화캠페인에서 찾을 수 있다.

 

맑스-레닌주의

 

레닌이 독창적이고 유용한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상당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은 레닌이 세 가지 핵심 이슈 개량주의(“기회주의”)의 뿌리,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전략, 그리고 제국주의-독점 자본주의 이론 에 대해 엄청난 이론적 약진을 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이 세 가지 이론들 중에 독창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리가 일관되게 주장했듯이, 레닌은 평생 동안 이론적으로 일관된 카우츠키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리만 이런 평가를 하는 것도 아니다. 트로츠키는 1938년 카우츠키에 대한 부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재의 코민테른 역사학이 마치 레닌이 거의 청년 시절부터 카우츠키를 기회주의자로 간주했고 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던 것처럼 보여주려고 시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거짓입니다. 거의 세계대전 시점까지, 레닌은 카우츠키를 맑스와 엥겔스의 대의의 진정한 계승자로 여겼습니다.

 

개량주의와 노동계급 의식의 동역학에 대한 설명은 혁명적 조직의 그 어떤 이론에게든 필수적 요소이다. 개량주의의 뿌리에 대한 레닌의 설명, 즉 독점체들과 제국주의가 자본가 계급으로 하여금 노동 귀족을 더 높은 임금과 더 안정된 고용으로 매수한다는 생각은 카우츠키의 초기 저작에 많은 부분 빚진 것이다.


1902년에 처음 출판된 그의 고전적 저작 <사회 혁명: The Social Revolution>에서, 카우츠키는 세계시장과 식민 제국에서의 영국 자본의 지배가 그곳의 비맑스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사회주의의 지배를 설명해 준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산업자본이 처음으로 지배력을 획득한 곳으로서, 자본주의의 고전적 토양이었다. 영국 자본주의는 단지 자국만이 아니라 타국에서도 지배계급으로서 경제적 지배자의 권력에 들어섰다. …  영국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에 대한 폭력적 억압을 포기하고 평화적인 수완에 훨씬 더 많이 의존했으며, 잠시 동안은 강력하게 조직된 층에게 정치적 특권을 부여했고, 너무나 자주 성공적이었던 우호적 접근을 통해 그 지도자들을 매수하고 부패시키고자 하였다.

 

내가 다른 지면에서 매우 자세하게 주장했듯이 노동귀족 이론과 그 모든 변종들은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없고 경험적으로 근거가 없다. 노동운동에서 개량주의에 대한 훨씬 더 좋은 설명은 1905~1906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 씌여진 룩셈부르크의 <대중 파업>에서 찾을 수 있다.


룩셈부르크와 그녀의 분석을 발전시킨 동시대 맑스주의자들에게, 개량주의의 사회적 토대는 제국주의자들과 독점 초과이윤에 의해 매수되었다고 하는 한 줌의 고임금 노동자들이 아니라 간헐적일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 투쟁의 성격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에서의 전업 관료집단의 출현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이론이 특별히 독창적이거나 정확했던 것도 아니다. 1917년 이전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러시아 혁명의 목표는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였다. 봉건 절대주의 러시아에서 의제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었다


취약한 러시아 자본가계급이 이 혁명을 이끌 것이라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레닌은 오직 스스로의 조직에 의존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급진적 민주주의 혁명만이 비사회주의적인 과업 짜르 체제를 타도하며 민주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제헌의회를 조직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8시간 노동일을 확립하는 을 실행할 일시적 혁명정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과업을 성취한 후에, 혁명정부는 민주적 자본가 정권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이었다.

 

카우츠키의 <러시아 혁명의 동력과 전망>(1906)은 볼셰비키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던 분석과 전략을 개괄했다. 그러나 이 관점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 1917,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혁명은 스스로를 짜르 체제의 분쇄, 토지 개혁의 시행, 8시간 노동일, 혹은 자본주의적 민주공화국의 설립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대신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자본주의 임시 정부를 전복하고 평의회(소비에트)에 근간을 둔 노동자 국가를 세웠으며 자본주의 사유재산권을 뿌리부터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러시아 혁명의 결과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이론과 전략이 아니라 한때 멘셰비키였던 반대자인 트로츠키의 이론과 전략을 확인시켜 주었다.


트로츠키는 이미 1906년부터 노동자계급이 농민층의 도움을 받아 짜르 체제를 전복할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부르주아-민주주의과업에 국한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했었다. 여기서도, 1917년에 볼셰비키의 실천은 레닌과 카우츠키의 전략적 전망과 단절한 것이 사실이지만, 레닌이나 그 어떤 볼셰비키 지도자도 민주적 독재이론을 명시적으로 폐기한 적은 없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조차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카우츠키의 1912년 이후 주장이던, 하나의 지배적인 제국주의 권력이 제국주의 사이의 군사적 갈등을 과거의 일로 만들 수 있다는 초제국주의론을 레닌은 명백히 거부했다. 그러나 레닌은 독점체들, 금융자본과 세계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1902년 카우츠키의 주장을 분명 반복한다.


레닌의 <제국주의>20세기나 21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정확한 분석도 제공하지 않는다. ‘국제사회주의전통의 창립자들 중 한 명인 마이클 키드론은 1970년에 그의 글 제국주의 - 하나만 제외하고 가장 높은 단계에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금융자본으로의 보편적 융합, 식민지와 세력권으로 세계 분할, 그리고 북반구에서 남반구로의 자본 수출을 특징으로 한다는 레닌의 주장을 반박하며 이것을 지적했다. 키드론은 독점자본이라는 개념은 유지하고자 했지만, 이 개념도 1970년대 후반부터 엄청난 이론적, 실증적 비판에 부딪혔다.

 

분명히, 오늘날의 맑스주의자들이 레닌에 대한 조심스럽고 비판적인 독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많다. 러시아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투쟁에 대한 그의 결합적 분석, 개량주의 정치에 대한 일관된 거부와 국제주의는 모두 오늘날의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하지만 독창적이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두 개의 이론적 작업이다. 첫 번째는 <국가와 혁명>과 그 자매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이다. 레닌은 1909년 카우츠키의 저작 <권력으로 가는 길: The Road to Power>에서 노동계급이 어떻게 정치권력을 장악할지에 대한 카우츠키의 애매함을 지적한다. 카우츠키의 정식화는 사회주의 정당이 의회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고 사회주의로 이행을 시작할 가능성을 남겨둔다.


레닌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가 움켜쥐어야 한다는 맑스의 선언을 긍정하며, 이 시나리오를 명확하게 거부했다. 오로지 노동계급의 대안적인 정치권력의 자기조직화, 즉 노동자평의회와 현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분쇄를 통해서만 노동계급은 권력을 잡고,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

 

노동운동에서의 개량주의가 고전 맑스주의 전통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질기고 오래 가는 서구의 혁명가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 유치한 혼란>이다. 1918~1920년 서유럽에서 혁명운동의 실패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던 레닌은 특권을 부여받은 노동귀족이 노동운동에서의 기회주의의 주요 근원이라는 생각을 넘어서기 위한 최초의 망설이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자본주의 지배 하에서 노동계급 투쟁의 불균등한 성격이 무조건적으로 개량주의 정치에 충성하는 노동조합과 의회 관료들의 계층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레닌은 오직 작업장, 지역사회, 심지어 선거구에서 모든 노동계급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노동계급의 성장하는 부위가 개량주의 정치의 한계를 실천에서 경험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


쉽게 말해서, 오직 노동계급 스스로의 자기조직화와 자기 활동을 통해서만 혁명적 정치가 노동계급을 전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혁명가들이 그런 투쟁을 충분히 근본적이거나 혁명적이지 않다고 여겨서 거기서 발을 빼면, 그들은 실질적으로 기존의 개량주의 세력에게 노동계급에 대한 지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분명히, 21세기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와 이론적으로 단절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힘과 의식의 자동적 성장에 대한, 자본주의의 기계적인 붕괴에 대한, 교육과 선거 관련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불가피한 이행을 용이하게 하는 것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을 축소하는 카우츠키의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경험한 우리는 목적론을 명확히 거부하고 노동계급의 스스로의 조직화와 활동을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중심에 놓는 맑스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이, 1914년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혁명적 진영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실천적으로는 이런 맑스주의와 단절했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레닌주의에서 무엇이 남았는가?

 

레닌주의에서 가장 변치 않는 유산은 레닌과 볼셰비키의 고유한 실천에 대한 연구와 이론화에서 찾아야 한다. 전체로서의 국제적인 사회민주주의가 그랬듯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도 선진자본주의 세계를 휩쓸었던 세 번의 큰 파업 물결의 산물이다(1890년대, 1905~1907, 1912~1914).


이런 파업 물결들은 이 시기의 큰 이론적-정치적 논쟁(“수정주의” 1899~1901; “대중 파업” 1906~1910: 그리고 전쟁과 혁명 1912~1914)들의 틀을 형성했고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구분되는 진영의 사회적 기반을 창조했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모든 노동계급 투쟁이 그렇듯이 이 투쟁들의 불연속성은 1914년 이전 사회민주주의를 특징지을 만큼 결집된 두 개의 구별된 사회적 계층을 만들어냈다. 한편으로는 1914년 이전 대중투쟁은 수백수천 명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작업장 리더들을 키워냈다.


주로 고임금 숙련 금속 노동자인 이들은 노동강도 강화, 탈숙련화, 그리고 임금을 둘러싼 수많은 전투와 민주적 사회적 권리를 위한 정치 투쟁을, 종종 그들의 노동조합이나 당 지도자들의 희망사항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이끌었다. 이러한 전투적 소수파’, 실제 선진적 노동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혁명적 좌익인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 그람시, 그리고 1914년 이전의 카우츠키의 지지자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회제도의 안정화, 노동계급 남성들 사이에서의 투표권의 확산과 노동조합 합법화는 당, 의회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전업 관료들의 계층을 만들었다. 노동계급의 덜 적극적인 부문(사회민주당에 투표하는 유권자들과 당원, 노동조합원들이라는 대중)의 지지를 받아, 이 관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다. 의회에서의 개혁과 제도화된 단체교섭을 통해 계급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전념하며, 이 관료들은 전쟁 이전 사회주의 운동의 개량주의 정치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유럽의 나머지와는 다른 길을 갔다. 쉽게 말해서 러시아 상황에서 SPD같은 당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짜르의 절대주의는 의회 제도와 합법적 노동조합의 정착을 방해했고 그럼으로써 서구에서 개량주의의 사회적 기반이었던 당과 노동조합 전업 관료층의 형성을 제한했다.


그 결과 볼셰비키는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세력과 노동계급 개량주의 세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그리고 그들에 정치적으로 대항할 능력을 갖고, 혁명적 노동자 리더들의 당을 건설했다. 특히 멘셰비키처럼 개량주의에 보다 동조했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소규모 산업(예를 들어 인쇄업)에서의 숙련 노동자들의 지지를 누렸다. 그러나 러시아에 의회 제도와 합법적 노동조합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운동에서 지배력을 구축하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은 개량주의 노동조합 및 당의 관료들과, 전투적인 일반 노동자들 사이의 불안한 연합을 끝장냈다. -노동조합 관료들이 수동적인 노동자 다수의 지지 속에 그들의 일국적 자본가 국가의 방어로 결집한 반면,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들은 전쟁 중에도 계급투쟁을 계속하고자 했고 다가올 혁명적 고양에 대비했다.


사회주의 운동 속의 반전 진영이 처음에는 작고 고립돼 있었지만 물가인상, 탈숙련화, 노동강도 강화와 식량 부족을 둘러싸고 발생한 전쟁 중의 투쟁은 그들에게 힘을 주었고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전투적 소수파가 독립적으로 조직돼 있었고 개량주의 세력이 사회적으로 약했던 러시아에서만 전쟁은 성공적인 혁명으로 이어졌다. 1917년 볼셰비키가 이끈 혁명의 승리는 관료적 개량주의 세력과 독립적으로 노동계급의 혁명적 소수를 조직하려는 새롭고 혁명적인 당, 공산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만들어냈다.

 

쉽게 말해서, 레닌주의는 1923년 이후 희화화된 민주집중제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레닌주의의 변치 않는 유산은 단순히 선거에서가 아니라 의회 외부의, 대중의 사회적 투쟁에서 관료적 개량주의 세력의 정치적 대안을 기획하고자 하는 반자본주의 조직가들과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조직을 건설하려는 목표에 있다.


오늘날 그러한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대중적 혁명정당의 인적 자원상당한 규모의, 관료적 개량주의 세력과 독립적으로 행동할 의지와 역량이 있는 작업장과 지역사회 활동가들의 층 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세계에 걸쳐 거의 40년간 이어진 패배가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약화시켰다는 것은 부분적인 원인일 뿐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에서 전투적 소수파”(선진적 노동자들)를 사회적·정치적으로 와해시킨 스탈린주의의 영향, 특히 인민전선의 유산이다.


그 결과 21세기 초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혁명적인 맑스주의 정치와 이론으로 핵심 간부가 될 투사들을 조직하고 교육해야 하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공통적인 실천을 발전시켜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투사들의 독립적인 이행적 조직을 건설함으로써 아직은 혁명가들이 아닌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재조직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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