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이 글은 그동안 ‘변혁재장전’에서 진행한 여러 세미나에서 토론하고 자극과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며 결코 개인적 성과물이 아니다. 이 세미나에 기여해 왔고,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와 많은 지원을 해준 준비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동지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초고에 대한 조언과 토론을 해 준 이상수, 이승현 동지에게 특히 감사드린다. 신자유주의가 가져 온 변화, 노동운동의 위기와 후퇴, 새로운 투쟁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방향 등을 다룬 꽤 분량이 긴 이 글을 세 차례에 나눠서 연재해 왔는 데 이 글은 그 마지막 세번째이다. 원래 있던 각주는 일단 다 생략했다.]
[2편에서 이어짐]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모순은 2008년 세계경제 위기를 낳았고, 이제 또다시 우리를 공격함으로써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지금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적 공격은 투쟁의 부활을 낳을 것인가?
어떤 것도 결정돼 있지 않고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아무리 심각한 경제 위기도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 경향’만이 아니라 ‘상쇄 경향’ 또한 언급했다. 특히 노동계급이 고통전가를 받아들이고 대안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체제의 자동 붕괴를 낳을 자본주의 위기는 없을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지금 몰락하는 게 아니라 더욱 잔인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 우리는 어떠한 경제적 변화도 자동적으로 투쟁의 부활을 낳기는 어렵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계급투쟁은 단지 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수많은 주관적·우연적 요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지금의 갑갑한 상태를 이유로 비관에 빠질 필요는 없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역사는 계급투쟁이 일직선적으로 발전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즉 “계급 투쟁과 그 조직적 결과물은 ‘도약’적으로 나타나며(홉스봄),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일종의 투쟁의]‘물결’로 드러난다(실버)”는 것이다. 즉, 지금의 교착상태는 새로운 투쟁 물결 등장의 전주곡일지도 모른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이 낳은 불안정성은 노동자들을 위축시키지만 동시에 투쟁의 자양분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고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일반적이 아닌 예외적 시기”였다.
이 예외적 시기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항상 불안정성과 노동조건에 대한 가혹한 공격을 수반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19세기와 20세기를 수놓은 주요한 노동자 투쟁 물결의 배경이었다.
노동자들은 안정적 조건 덕분에 노조를 만든 게 아니라 불안정하고 열악한 조건에 분노해서 투쟁에 나섰고, 안정성과 조건 개선은 투쟁이 낳은 성과였다. 따라서 서비스산업, 공공부문, 미디어, IT 등 신자유주의가 극단적 불안정성과 비인간적 환경을 낳는 곳에서 새로운 폭발이 준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러한 도약을 앞당기기 위해서든, 초기에 그 가능성이 차단당하며 다시 가라앉는 패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든 준비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의 실패와 시행착오에서 교훈을 배우는 것을 포함한다.
지난 수십 년은 바로 그 학습 과정의 일부였다. 크고 작은 싸움들 속에서 다가올 도약에 필요한 경험과 교훈들이 축적돼 왔다. 거의 한 세대를 거치면서 무엇이 더 효과적인 방안인지 다양한 실험들을 해 온 것이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들이 그로부터 역사적 경험과 지식과 힘과 이상주의를 얻어내는 그러한 ‘패배’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우리는 명백히 그러한 패배 위에 서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하나라도 없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실패에서 제대로 된 교훈을 배우려면 평가가 정확해야 한다. 한국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 공세를 막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노동계급을 해체시키고, 그 힘을 빼앗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노동계급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내부 구성이 변화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의 성공 속에 노동계급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노동계급화는 더 발전했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주목해 왔듯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는 계급이다. 자본주의 생산의 조직화와 발전은 노동계급을 더욱 늘리고, 교육시키고, 집중·조직화하는 경향이 있다. 생산에서 수행하는 구실 때문에 노동계급은 특별한 잠재력도 가지게 된다.
사회학자인 비버리 실버는 이처럼 노동계급이 생산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비롯하는 잠재력을 “구조적 힘”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다시, 노동시장에서 노동력 공급을 좌우할 능력(“시장교섭력”), 작업장에서 생산을 좌우할 능력(“작업장 교섭력)으로 구분한다.
나아가 적기생산방식과 하청체계 등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가 이런 ‘구조적 힘’을 오히려 더 강하게 한 측면도 지적한다. 재고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비교적 소규모 하청부품업체 노동자들의 파업이 원청업체의 전국적 생산망 자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잠재력’이라는 것이다. 이 잠재력은 노동자들이 잘 조직돼 있을뿐 아니라 투지와 자신감이 높고, 서로에 대한 신뢰 속에서 단결할 때 현실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잠재력이 그칠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지는 높지 않았고 단결해서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도 약했다. 그러다보니 투쟁보다 타협하길 원하는 일부 노조 상층 간부들의 입장이 더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좌파적 노조 지도부라 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힘이 부족한 상황에서 별로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 더 좌파적 지도부를 선출해서 그들이 투쟁을 호소하게 하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왜 제대로 발휘되지 못해 왔는지 규명하고, 이를 극복할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살펴봤듯이 이것은 ‘전략의 부재’ 때문이기 보다는, 노동조합의 한계와 틀 안에서 투쟁해 온 전략의 결과로 봐야 한다.
엥겔스는 이미 1871년에 영국 노동조합을 관찰하면서 “크고 강하며 부유한 모든 노동조합 사이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운동을 발전시키는 수단이기 보다는 더욱 더 일반적인 운동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썼다.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을 가져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노동조합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서, 그 반대의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조합 운동이 실패하기 쉬운 이유를 좀 더 일반적으로 지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결과와 싸우고 있는 것이지 그 결과의 원인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하향운동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지 그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완화제를 쓰고 있는 것이지 질병을 치료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등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은 현존 제도가 빚어낸 결과를 반대하는 유격전에만 자신을 국한하고 이와 동시에 현존 제도가 변화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 계급의 종국적 해방을 위한, 말하자면 임금 제도의 궁극적 철폐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다.
이처럼 ‘결과에 맞서는 유격전에 스스로를 국한하는’ 전략이 기층 노동자들을 수동화시키며,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각 부문의 고충처리를 위한 협상 전문가들로 만들고, 진보정당이나 민주당의 의회 내 활동에 의존하게 만들어 왔다. 근래에는 법적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흐름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런 전략이 낳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제시돼 온 많은 대안들 또한 기본적으로 그 전략의 틀 안에서 제기돼 왔다. 그 틀 안에서 조직형식을 바꾸거나, 새로운 기구와 제도·규칙을 도입하는 수준에 그치면서, 일부 개선을 낳긴 했지만 같은 한계에 부딪혀 왔다.
좌파 지도부 세우기, 좌파 지도부를 통해 투쟁 호소하기, 지역중심적 산별노조론, 직선제 도입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이같은 관점과 틀을 넘어서는 방향이다. 네 가지 정도의 기본적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아래로부터 투쟁과 민주주의의 중요성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한 노동대중의 잠재력을 신뢰하고, 억눌려 있는 그 잠재력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자신감을 고무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체계적으로 노동대중의 자존감과 기를 꺾는 체제이고 그것이야말로 지배 유지의 비결이다.
우리는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가진 뛰어난 소수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그들을 뒷받침하고 따르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주입받는다. 보통 사람들은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속에서 항상 기가 죽어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잠재력을 불신하고,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노동조합과 진보단체들마저 그것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도 세상을 개혁하고 우리의 삶을 개선해 줄 소수의 뛰어난 지도자들과 그들을 뒷받침해야하는 다수 대중의 분업이 나타나곤 한다. 노사협상이나 의회 활동을 전문으로 해야 할 사람들과 나머지, 명민한 이론가와 묵묵히 그것을 실행하는 활동가들로도 구분된다.
하지만 사회의 진보와 변화는 오로지 노동대중 스스로의 집단적이고 활기있는 행동으로만 이뤄질 수 있다. 노동대중은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지려는 아래로부터 투쟁 속에서 자신감을 발전시키고, 더 튼튼하게 조직화되고,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상상력을 꽃피울 수 있다. 스스로 잠재력을 해방시키며, 한낱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공으로 일어설 수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활동과 조직에 관심을 갖고 참가하도록 하는 방법, 논리, 기술, 아이디어 등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레닌도 “오직 투쟁만이 피착취 계급에게 자신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밝혀주고, 그들의 시야를 넓혀주며, 능력을 향상시키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의지를 단련시킨다”고 말했다.
이것은 조합원과 지지자들을 단지 집회나 파업에 참가해서 머리 수를 늘려주는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여러 노조를 묶은 연합 집회를 하고 교통비·참가비를 지급해서 집회 참가자 수를 늘리거나, 파업 참가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서 파업 참가율을 높일 수는 있다. 임단협 시기와 일정을 조정해서 ‘총파업’ 참가자 수를 늘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의식적이고 힘있는 운동을 건설하는 길을 대체할 수는 없다.
여기에 필수적인 것은 투명한 정보의 공개와 자유로운 토론, 제한없는 민주주의이다. 노동조합에서 이것은 “주요한 의사결정에 대한 조합원들의 직접적 참여와 통제”로 나타나며 “지도부에 대한 직접 선출과 소환, 주요 의제에 대한 정보 공유 및 광범위한 의견 수렴과 토론, 최종 결정에서 전체 투표의 실행을 포함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노조 운동의 전성기에 나타났던 모습이기도 하다.
1987년 직후 노동조합 … 임원과 대의원의 선출은 대중의 높은 관심과 열기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 선출된 대표는 정해진 임기 동안 무제한적인 권한을 행사하지도 못했고, 교섭 결과는 항상 조합원 총회에서 승인받아야 했다. 지도부는 제한적인 권한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요구에 반하는 협상을 진행한 경우 불신임을 당하는 등 항상적인 소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는 단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좋았던 옛 시절이 아니다. 2007년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터져나오며 노동운동에 신선한 충격을 가하는 데서도 이런 요소가 중요했다. 당시 홈에버 상암점 점거파업은 원래 예정돼 있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투쟁에 나선 조합원들은 분회토론 속에서 기존의 머뭇거리던 태도를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다음날인가 지도부는 나가자고 그랬어요. 시흥인가 본사로 가자고. 우리는 결사적으로 여기 있겠다, 그랬지. … 들어온 이상 절대 제 발로는 못 나간다. 저희가 워낙 강력하게 나가니까 결국 거기서 눌러앉은 거지.”
처음부터 능동적이고 자신감있던 노동자들이 민주주의를 뒷받침했다기보다, 투쟁에 동참하고 민주적 토론 기회가 주어지면서 기존의 수동적 태도가 변화했던 것이다. 억눌려 온 분노만이 아니라 잠재력도 터져나온 것이다.
근래에도 미국에서 기존의 ‘관료적 실리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개방적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공개적 장소에서 노사협상을 벌이고, 누구든 협상 내용을 보고 듣고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래로부터 투쟁을 고무하고 건설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매우 까다롭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2) 단결과 연대를 우선하며 소통과 토론하기
노동조합적 틀 안에서 움직여 온 노동운동은 부문주의에 빠져들어 왔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가 낳는 기업·업종별 분할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산별노조라는 조직형식을 도입한다고 이것이 극복되지는 않았다.
특정 부문 노동자들의 눈 앞의 이익만 보게 만드는 부문주의는 노동운동의 분열과 파편화를 낳았다. ‘당장의 우리 작업장 문제도 아닌 데 왜 우리가 총대를 메고 나서야 하는가’라는 논리가 단결과 연대를 약화시켰다. ‘정규직의 고용안정을 위해 어느 정도의 비정규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발전해 갔다. ‘국내 공장의 고용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해외공장의 인원정리와 폐쇄를 요구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지배자들은, 각각의 단기적 이해를 우선시하는 저항세력 중에서 일부는 무마시키고, 일부는 고립시켜 타격했다. 일단은 피했다고 생각한 공격의 칼날은 나중에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결국 특정 부문 노동자들의 이익마저 계속 지킬 수 없게 됐다.
조합원 여러분! 우리는 작년에 있었던 쌍용차투쟁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 그렇게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 고용보장을 지켜내지는 못하고 해고된 동지들이 ‘쌍용차 정리해고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복직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고용보장을 지켜내지 못했습니까?
처음 비정규직이 해고되어 잘려 나갈 때 정규직은 침묵하고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비정규직을 해고할 때 나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비정규직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최저임금을 삭감하려 할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최저임금 노동자가 아니었으니까. 결국 그들이 나에게 퇴직희망서를 보내왔을 때 아무도 항의해줄 이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시작했을 때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각 부문의 단기적 이익만 우선하는 태도는 정치단체와 정파들에도 똑같이, 심지어 더 심하게 나타났다. 노동운동에서 영향력이 큰 다수 정파에서는 이것이 패권주의로 나타났다. 소수정파를 무시하고 자기 정파의 의제 등을 설득도 없이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한 것이다.
반면 소수 정파는 다수 정파가 건설하는 투쟁에 대해 차이점과 비판만을 앞세우며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종파주의로 대응했다. 둘 다 전체 운동의 장기적 이익을 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잘못된 태도를 더욱 강화하며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당연히 이런 편협한 태도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럴수록 서로간의 대화는 사라졌고 소통은 단절됐다. 불신과 오해는 풀리지 않고 계속 쌓여갔고, 이제 상대방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은 서로를 혐오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지배자들의 이간질과 비열한 공작이 먹혀들기에 딱 좋은 조건이 됐다.
같은 노동운동 안의 경쟁 정파를 지배자들보다 더 증오하고 공격하는 태도, 지배자들의 탄압을 모른 척하거나 심지어 힘을 실어서라도 경쟁 정파를 약화시키겠다는 태도까지 나타났다. 이제는 지배계급의 공격이 집중된 특정 정파를 아예 운동 안에서 ‘왕따’시키고 배제하려는 시도까지 등장하고 있다.
2012년 대선을 전후해서 지금까지 이어진 통합진보당 사태와 종북몰이, 내란음모 조작 사건과 진보당 해산의 배경에는 바로 이런 것들이 있었다. 비슷한 분열과 갈등은 지금 노동운동의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고 곪아가고 있다. 이것을 경험하거나 목격하는 사람들은 운동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잃고 멀어져갔지만, 대다수 정파들은 이에 도전하기보다 타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동계급의 잠재력은 그들이 단결하고 연대할 때만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분열과 파편화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은 “연합적 힘”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단결과 연대 속에서 자신감과 서로 간의 신뢰가 높아질 때 잠재력의 발휘도 극대화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연합적 힘’은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파업 등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을 봉쇄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지배계급의 대비와 노하우가 꽤나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파업에 나서기 힘들도록 법과 제도적 장벽을 쌓아왔다.
파업이 시작되면 그 파괴력이 최소화되도록 온갖 장치를 마련해 왔다. 또 파업에 대비해 물량을 비축하거나, 대체 생산을 통해 시간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 지배계급은 오랜 경험 속에서 배우며 이런 수단들을 발전시켜 왔다.
‘연합적 힘’과 연결되지 않는 ‘구조적 힘’은 매우 제한적인 효과만을 내거나, 심지어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대공장 정규직 노조의 파업은, 같은 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가 없는 경우 생산에 별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파업으로 임금 인상의 경제적 효과를 얻는 경우에도,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는 이간질 속에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정치적 역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 노동운동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특정 부문이 아닌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다. 그것도 눈 앞의 이익이 아니라 진정한 장기적 이익을 봐야 한다. 레닌이 ‘자생성’과 ‘의식성’을 대립시키면서까지 강조했던 것도 그것이다.
단일 공장의 노동자들이나 단일 산업 부문의 노동자들이 그들의 고용주에 대항해서 투쟁을 벌인다면, 이것은 계급투쟁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계급투쟁의 불안전한 맹아일 뿐이다. 전국의 전체 노동계급의 모든 주요 대표자들 자신이 단일한 노동계급임을 자각하고, 개별 고용주들이 아니라 자본가계급 전체와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를 겨냥해서 투쟁에 착수할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 투쟁은 계급투쟁이 된다.
교섭의 편리만 보고 노동조건과 형태 등에 따라서 조직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넓은 범위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은 이를 위한 좋은 시도일 수 있다. 미국의 일부 급진적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제기하는 “포괄적 조직화”가 그런 예이다.
“이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직업, 고용주, 고용 상태 등과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를 포함시키라는 뜻이다. … (병원 노동자가 아니라) 간호사만을 위한 별개의 조직을 세우는 것에 반대하는 것, (학교 노동자가 아니라) 교사만을 위한 조직을 세우는 것 등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전교조와 학교비정규직노조와 교육공무직노조 등이 굳이 따로 있어야 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조합원 우선 고용과 정규직화’, ‘조합원 자녀 우선 채용’ 등 연대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요구들도 재고돼야 한다. 부문과 업종을 넘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연대를 가능케 할, 나아가 더 넓은 사회적 지지와 연대를 불러 올 요구들이 앞세워져야 한다. 노동자 투쟁은 지역사회나 전사회적인 강력한 지지와 연대로 뒷받침될 때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국제연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제적 생산망이 구축된 자동차 산업을 보면, 자본은 서로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을 이간질해 경쟁시킨다. 좀 더 효율적인(따라서 노동자들에게는 열악한) 생산방법을 수용하는 나라로 생산물량을 이전하겠다고 협박하며 ‘바닥을 향한 경쟁’을 강요한다. 한 나라의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다른 나라의 공장에서 대체생산을 하며, 라인과 물량의 이전을 압박하는 식이다.
부문적 관점에서는 이런 압박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다. 오히려 다른 나라의 공장 노동자들을 고용의 안전판이나 경쟁상대로 여겨 ‘해외공장 우선 폐쇄’ 등을 요구하며 술수에 말려들기만 할 뿐이다.
반면, 독일과 폴란드의 폴크스바겐 3개 공장 노조의 대응은 시사적이었다. 이들은 2003년부터 국제적 연대를 추구했고 “한 노조가 파업을 할 경우 자신의 공장에서 대체생산을 하지 않고, 3개 공장 간 물량이전이 고용불안을 부를 때는 모든 공장이 회사계획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런 대응만이 자본의 공격을 피할 길을 열어 준다.
신자유주의와 이윤 논리에 의해서 빼앗기고 버림받은 모든 사람들의 강력한 단결과 폭넓은 연대가 곳곳에서 건설돼야 한다. 노동자들과 억압·차별받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와 신뢰, 저항의 문화와 인프라가 구축돼 나가야 한다.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부자 증세와 복지 확대, 노동구조 개악 반대,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 반대, 핵발전 폐기 등 부문을 넘어선 공동의 요구들을 세워나가는 것이 이런 연대 건설을 위해서도 효과적일 것이다. 이런 요구들을 중심으로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의 모든 단체와 정파들을 포괄하고 함께 투쟁할 수 있는 다양한 공동전선이 만들어져야 한다. 선거와 의회정치에 대한 공동대응기구도 포함해서 말이다.
사상의 변화를 전제조건으로 삼아서 특정 세력을 배제하지 말아야 하고, 특정 정파의 주도권과 견해를 강요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들은 갈등과 불신만을 낳을 것이다. 공동의 요구를 중심으로. 공동의 적에 맞서며 연대 투쟁하는 속에서만 가장 효과적으로 서로간의 불신이 해결되고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 그 속에서 서로의 차이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이뤄져야 한다. 무엇이 옳은 노선인지는 이 속에서 입증되고 설득될 수 있을 뿐이다.
3) 노동계급 중심성의 재해석과 주체의 확장
많은 급진좌파들은 옳게도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의 중심적 구실을 옹호해 왔다. 문제는 이것이 갈수록 협소하게 해석되고 적용돼 왔다는 데 있다. 즉 노동계급 중에서도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부분을 배타적으로 강조하고, 이처럼 ‘조직된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힘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이런 입장은 노동계급과 함께 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하기 마련인 피억압 민중, 미조직 청년, 실업자 등과 노동계급을 불필요하게 구분하려하곤 한다. 가장 협소하게는 개별 노동조합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둘러싼 투쟁에 매몰되는 경향마저 있다.
물론 정치적 쟁점과 투쟁도 중요하며,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투쟁에 연대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존재해 왔다. 그런데 그런 좌파들도 대개 ‘조직된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고유한 힘을 발휘하고 싸우는 것이 중심이고 중요하다’는 전제 자체는 공유해 왔다.
이것은 결국 조직된 노동자들의 작업장 투쟁이 아닌 것은 한계가 있거나 부차적이라는 인식으로 연결되기 쉽다. 예컨대 IST의 크리스 하먼은 “사회운동은 노동계급에 기초를 둔 운동이 아니다. … 바로 그 때문에 사회운동들은 급속히 떠올랐다가 급속히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운동이 잠잠해진 뒤에 남는 것은 스스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너무나 약해진, 뼈대만 남은 조직들”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생산과정에 견고히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들, 즉 대학생, 중고등학생, 비정규직 청년, 개인적으로 운동에 참가한 계급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노동자, 하위 전문직 … [이러한] 이질적인 사회집단들의 운동을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주체”로 여기는 것은 오류다. 그들은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런 운동의 기반이 생산에 뿌리내린 집단적 조직에 집중돼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운동은 지배계급 권력의 핵심인 생산 통제에 도전할 수 없다.
그래서 데이비드 하비는 “마르크스주의적·사회주의적 좌파의 고전적 견해에 의하면 … 초점은 확대재생산으로 이해되는 자본축적의 장 내에서 계급관계와 계급투쟁이었다. 다른 모든 형태의 투쟁들은 보조적이거나 부차적이며, 심지어 주변적이거나 무관한 것으로 치부되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는 다르게 발전할 요소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더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라는 주장에 도전했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제도화된 노사관계 속에서 보수적 관성에 발목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자는 “만약 독일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난다면, 투쟁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갈 사람들은 가장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아니라 가장 조직력이 떨어지거나 완전히 미조직된 노동자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피억압 민족도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라고 봤다. 그러면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없이도, 온갖 편견을 가진 프티부르주아지의 혁명적 분출 없이도, 정치의식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와 반(半)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지주ㆍ교회ㆍ왕정의 억압과 민족 억압 등에 저항하는 운동 없이도 사회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 혁명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역사적 경험도 ‘조직된 노동자들의 작업장 투쟁이 우선’이라는 관념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하비는 그 점을 지적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많은 혁명운동들은 협소하게 공장에 기초하기보다 광범위한 도시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발생했다.(1848년 유럽전역, 1871년 파리꼬뮌, 1917년 레닌그라드, 1919년 시애틀 총파업, 1927년 상하이 꼬뮌, 1968년 빠리, 멕시코시티와 방콕 그리고 1969년 아르헨티나의 뚜꾸만 폭동, 89년 프라하 그리고 2001~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그 예는 아주 많다). 공장에서 주요한 운동이 나타났을 때도(1930년대 미시간주 플린트시 파업 혹은 1920년대 이탈리아 또리노 노동자평의회) 이웃의 조직된 지원이, 정치적 행동에서 보통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에서 대처 정부를 물러나게 만든 1990년 인두세 반대 투쟁도, 이 나라에서 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투쟁이었던 2008년 촛불항쟁도 조직된 노동자들의 작업장 투쟁은 아니었다. 2004년 볼리비아 물 사유화 반대 투쟁의 주역도 “전통적 노동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노동세계였다. 즉, 실업자, 자영업자, 청년, 여성”이었다.
물론 2차 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계급투쟁의 ‘상승기’나, 이 나라에서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전성기에 조직 노동자들의 파업과 작업장 투쟁이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언 앨린슨은 이런 특정 시기의 경험이 편향된 인식을 낳았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어쩌면 우리는 전후 시기 벌어진 파업이 가진 이 같은 중요성 때문에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하는데 있어 다른 형태의 투쟁 형식들도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혹은 우리가 전후 호황기 이전에 마르크스와 여러 사회주의자들이 견지한 계급투쟁의 폭넓은 개념을 잊어버렸을 수 있다. 정치적 내용에 앞서 특정 형태의 투쟁을 더욱 중요하게 취급하다보면 경제주의로 빠져들 수 있다. … 계급의식은 작업장에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공공 주택의 감소와 주택 사유화 현상, 일반적인 생활 영역의 상품화 등과 같은, 더 넓은 시야에서의 사회 변화 또한 계급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단지 작업장의 생산과정에서만이 아니라, 그 밖에서도 온갖 부당한 일을 겪기 때문이다. 노동대중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불만에는 지주, 건물주, 상인자본가, 서비스와 유통자본, 금융자본이 저지르는 지대·임대료·이자·수수료 등의 부당한 갈취가 있다. 노동자들이 힘겹게 임금과 소득 증대를 얻어낸 경우에도, 생활과 소비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런 과정 속에 그것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쉽다.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주민 대다수는 노동을 과도하게 착취당하는 것도 모자라 빈약한 자산마저 약탈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공장 노동’만이 아니라 “점점 도시화하는 일상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에 꼭 필요한 노동”들을 포괄해서 노동계급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노동자들은 우리 삶의 곳곳에서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각종 교통, 통신, 유통, 금융, 사적·공적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미조직·불안정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자본축적 과정에서 자산과 공동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넓혀야 한다. 하비는 이렇게 주장한다.
빼앗기고 탈취당한 이들에는 크게 두 집단이 존재한다. 먼저 자본 혹은 자본주의 국가가 통제하는 노동과정에서 그들의 창조적인 능력의 과실을 빼앗긴 이들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글자 그대로) 자본축적의 공간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자산, 삶의 수단에 대한 접근, 그리고 역사․문화․공동체의 형태들을 빼앗긴 이들이 있다.
용산 개발 속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철거민, 밀양송전탑 건설 과정에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원주민, 강정해군기지 건설 속에 환경과 공동체가 파괴당한 주민 등이 대표적이다.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을 잃고 진실을 위해 투쟁하는 유가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본축적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며, 무엇보다 두려움을 떨치고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단결하고 투쟁한 위대한 주역들이다. 이들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다.
필요한 것은 ‘조직 노동자들의 작업장 투쟁이 중심이고 거기에 진정한 힘이 있다’는 식으로 우리의 잠재력과 주체를 한정하지 않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임노동 착취에 맞서는 투쟁은 중요하다. 하지만 생산과정 밖에서 부조리와 갈취에 맞서는 것도 중요하다. 조직된 노동자들의 저항도 중요하지만, 미조직된 대중의 분출도 중요하다.
“탈취에 의한 축적에 저항하는 움직임(가령 반긴축 운동의 결성)과 값싸고 효과적인 주택, 교육, 보건, 사회서비스에 대한 요구는 노동시장과 작업장 내 착취에 저항하는 투쟁만큼이나 계급투쟁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더구나 “계급의식은 공장에서만큼이나, 거리, 바, 술집, 식당, 교회, 지역공동체센터, 그리고 노동계급 이웃의 뒷마당 등에서도 만들어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계급투쟁과 그 주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생산과정을 넘어서, 조직 노동자를 넘어서 확장돼야 한다. 이것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 형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억눌리고 빼앗긴 사람들이 힘을 합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어떠한 조직적 틀이라도 의미가 있고 잠재력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다양한 공동체들이 하나로 통일되는 가운데 새로운 관계와 동력이 생기면서 이것이 다시금 기존의 개별 조직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조합일 수도, 공동체 조직일 수도, 아니면 사회운동 조직일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운동이 발전하면서 … 흑인 운동이나 반인종차별적 여성운동, 민권 운동의 대중 투쟁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돼 있는 각각의 부문과 요구, 투쟁과 주체들을 연결하고 결합시키는 것이다.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을, 생산과정 안의 투쟁과 밖의 투쟁을, 조직된 부문의 투쟁과 미조직 부문의 투쟁을, 착취에 맞선 투쟁과 강탈에 맞선 투쟁을, 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과 사회복지를 위한 투쟁을, 노동구조개악에 맞선 투쟁과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을, 의회 안에서의 진보정치 활동과 의회 밖에서의 대중투쟁을 연결하고 결합시키는 것이다.
4) 차별·억압에 맞선 요구와 투쟁의 진정성
오늘날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다. 이들의 투쟁은 소수의 상대적 고임금 정규직 노동조합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력한 상황이다. 이런 인식은 노동운동 활동가들 사이에도 상당히 퍼져 있다. 급진 좌파적 활동가들 사이에도 말이다.
예컨대 ‘국민파’로 분류되는 조건준은 “조직된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도 더 이상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과 권리 향상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했다. ‘현장파’로 분류되는 정윤광도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 근로조건 개선 투쟁은 … 오히려 격차를 더 벌이게 되고 차별을 확대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투쟁을 자제하거나, 더 열악한 노동자들을 위해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노동자연대’는 “노동계급의 절대적 몫을 늘리는 것을 지향하면서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 줄이기를 모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양보론’으로 귀결되기 쉽다”며 비판해 왔다.
또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강조해 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대립시키며 노동운동을 바라봐선 안 된다. … 먼저 조직 노동자들이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한다면, 미조직 노동자들도 노동조합 운동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IST가 발전시켜 온 분석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 왔다. 더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누리는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조건에 책임이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더 착취받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캘리니코스는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보다 더 착취당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전자가 그의 임금에 비해 후자보다 많은 양의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먼의 주장도 같다.
조건이 더 나은 노동자들이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의 희생에서 이득을 보지 못한다는 주장은 흔히 직관에 반하는 듯하다. 이런 주장이 서유럽 노동자와 제3세계 노동자를 대비시키는 것이든지, 아니면 제3세계의 공식 부문 노동자와 비공식 부문의 노동자를 대비시키는 것이든지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직관에 반하는’ 주장이 옳다. 많은 산업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안정되고 경험이 많을수록 생산성도 더 높다. 자본은 이런 노동자에게 더 높은 임금을 양보할 각오가 돼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도 이 노동자들에게서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연대’는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을 적극 지지할 뿐 아니라, 심지어, “최저임금 인상” 같은 미조직 비정규직들의 요구를 앞세우는 것에 대해 부정적 태도까지 보인다.
“자기 조합원들의 노동조건·생활조건보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등 더 열악한 처지를 배려한다면서 … 계급을 초월해 국민적(민중적 또는 ‘대중적popular’) 지지를 받겠다는 것은 포퓰리즘적”이란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경제적 분석으로는 옳을 수 있다. 앞서 거듭 분석했지만 노동자들 간의 격차를 만들어낸 원인과 책임은 명백히 지배자들에게 있다. 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얻은 고임금은 나머지 노동자들의 희생 속에서 얻어진 것도 아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만큼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특히 방패이자 무기로서 노동조합을 이용해 덜 빼앗기고 더 얻을 수 있었다. 반면 대부분의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빼앗기고 덜 얻었다.
이 상태에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분명 전체로서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 책임이 있는 지배자들은 바로 이 커지는 격차를 이용해 노동운동을 이간질했다.
더 열악한 처지인 노동자들의 불만이 지배자들이 아니라 더 나은 조건의 노동자들에게 향하도록 만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객관적 현실에 대한 올바른 경제적 분석에서 곧바로 나온 주장과 전술이 정치적으로는 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이해와 고유한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는 것이 낳는 경제적 성과만을 봐서는 안 된다. 정치적 쟁점이나 비정규직의 투쟁과 요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요구만 앞세운 그런 투쟁에 낳을 정치적 역효과를 같이 봐야 한다.
예컨대 현대·기아차 노동조합이 큰 폭의 임금 인상과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고 임단협 투쟁하는 것은 당연히 정당하다. 하지만, 금속노조의 하청부품업체 노조들의 투쟁이나 탄압받는 비정규직을 외면한 채 그런 투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노동자 단결에 긍정적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의 노동구조개악에 맞선 전국적 투쟁에서 발을 빼면서 개별 임단협으로 그 피해를 줄이려 한다면, 이 개악의 직격탄을 맞을 미조직, 비정규직과 청년들은 현대·기아차의 노동조합을 더욱 불신하고 그 투쟁을 냉소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결국 격차를 만든 책임은 지배자들에게 있지만, 조직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무기인 힘과 조직을 특정 부문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할 때 이간질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조직 노동자들 vs 고통받는 미조직 비정규직들’이라는 프레임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럴 때 투쟁에 나서는 조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정당하고 사회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나머지 노동자들도 부문을 넘어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싸울 수 있고 이길 것이라는 믿음을 얻을 것이다. 트로츠키도 비슷한 점을 지적했다.
노동계급 전체의 옹호자로서, 그리고 대표로서 자각하고 행동하면서 노동조합들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이들을 노동조합 대오에 반드시 참여시켜야 한다. … 가장 임금 수준이 열악한 직종의 노동자들의 이익을 노동조합은 면밀히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협소하고 이기적인 이익은커녕 억압받는 수백만 인민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음을 노동조합들은 인민 모두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즉 노동운동은 가장 밑바닥 사람들의 편에서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정당성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990년대 미국 노동운동에서 ‘청소부에게 정의를’ 운동이 성공했던 비결도 여기에 있었다.
그 운동은 단지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존엄성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사회적 배제와 빈곤의 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었고 “여러 지역운동 조직과 가톨릭 교회 등 다양한 지역사회 단체들과의 연대망 건설”에 성공했다.
데이비드 맥낼리는, 억압과 차별이 갈수록 심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의 저항과 사회구조 변혁에 있어 유일하고 진정성어린 정치는 강제 퇴거당한 사람들, 인종차별과 분리로 인해 억압받는 사람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과의 굳건한 연대에 기반한 정치”라고 강조했다.
이 ‘진정성의 정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청년실업자, 여성, 이주민 등에게 더 절실한 요구와 투쟁을 우선한다는 관점이다. 그것이 조직 노동자들에게 단기적·부문적으로 조금 손해라고 하더라도 장기적·전체적인 계급이익을 위해 연대와 투쟁에 나서야 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경험과 통찰은 돌아 볼 가치가 있다.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지배계급도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의 고숙련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하면서, 그것을 이용해 나머지 노동자들과 이간질하려 했다.
그람시는 “피아트의 숙련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빈곤한 노동자 대중에게 특권 계급으로 보일 것”을 우려했다. 언론은 “한 달에 7,000리라에 달하는 이들의 높은 봉급을 부각시키면서 기술직 종사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맹렬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하지만 피아트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앞세우기보다는,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지지하고 투쟁에 연대하는 것을 우선했다. 그러자 “적어도 공장 내에서는 좀더 등급이 높은 기술직 노동 종사자 때문에 덜 숙련된 노동자들이 손해를 입는다는 식의 착취 의식이나 특권 의식이 소멸했다.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는 전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이것이 토리노에서 공산당이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진정성의 정치’에 입각한 투쟁과 연대이다.
마치며 - 반신자유주의, 반자본주의, 연속적 사회변혁
노동자·민중의 단결과 투쟁을 가로막는 강력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인 ‘경쟁력’의 논리는 다양한 차원에서 관찰된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 ‘자기개발과 노력을 통해 자신의 스펙과 가치를 높여라’...
이 논리는 더 나은 삶과 좋은 일자리를 원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경제 성장과 경쟁력 강화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그러면 경제 성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자신과 삶을 희생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돼 버린다.
노동자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나 회사와 협력하고,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끝없는 경쟁에 나서도록 강요받는다. 노동자·민중들은 국적과 인종, 직종 등에 따라서 끝없이 갈라지게 된다.
2010년 쌍용차 부도 사태 때 노동자의 절반을 해고하고, 남은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삭감과 노동강도 강화를 정당화했던 게 바로 이 논리였다. 그것은 ‘다같이 살기 위한 길’로 포장됐고, 노동자 수십 명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이 ‘바닥을 향한 경쟁’의 논리는 궁극적으로 야만, 인종주의, 전쟁으로 치닫게 될 불씨를 담고 있다.
이 논리를 수용하거나 협조하면서, 부작용이나 개인에게 주어질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접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운동이 발전시켜 온 구호와 정신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윤보다 인간의 삶이 중요하다’,‘우리의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이는 시장과 경쟁의 논리에 대한 즉각적 반발이자, 우리가 이윤 논리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것이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지 않고 반신자유주의에 머문다는 이유로 깍아내린다면 적절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민영화 반대, 기간산업 재국유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정규직화, 부자 증세와 무상복지 등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주요 요구들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요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요구와 투쟁은 이윤추구를 최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정면충돌한다.
따라서 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과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 사이의 ‘다리’가 될 수 있다.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에 담긴 것도 비슷한 문제의식이었다. “대중의 부분적인 ‘최소’ 요구들은 부패한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경향과 매시각 충돌한다. … 이행기 요구들은 더욱더 공공연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부르주아 체제의 기반 자체를 공격하게 될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에만 머물며 ‘더 나은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것도, 반신자유주의는 반자본주의가 아니라며 냉소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공격과 정책들에 맞서는 투쟁들을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 투쟁이 진정으로 기층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 힘과 민주주의 속에서 건설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쉽게 차단당하지 않을 수 있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으로 이어진 마르크스의 문제의식도 같은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투쟁을 어느 한계와 선 안으로 가두고 통제하려는 시도를 반대했다.
반면에 우리의 이익과 과제는 모든 크고 작은 유산 계급들이 지배적 지위에서 배제될 때까지 … 프롤레타리아들 사이의 경쟁이 종식되고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들이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이 영속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 현존 사회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 노동자들의 전투 구호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연속 혁명
이 글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투쟁의 디딤돌이 되길 기대하며 분석을 하고 몇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이런 과제들은 무엇보다 실천을 통해서 그 적절성이 피부로 느껴져야 하고, 토론과 평가 속에서 더 구체화되고 보완돼 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작은 승리들을 쌓아 나가야 하고, 그것이 오랜 정체와 후퇴가 낳은 파편화와 무기력을 떨쳐버릴 힘이 될 것이다. 그것은 크고 작은 패배와 분열이 낳은 트라우마와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다. 그것은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민중들의 가슴 속에 분노뿐 아니라 희망이 자리 잡게 해줄 것이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 http://anotherworld.kr/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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